♣ 六友堂記 1195

淸伊堂(청이당) 관련 선인들의 유람록(181006)

淸伊堂(청이당) 관련 선인들의 유람록(181006) 청이당에 대한 유람록의 기록은 1472년 김종직 선생의 유두류록과 1611년 유몽인 선생의 두류산록에 청이당(淸伊堂)과 청이당(淸夷堂)으로, 1871년 배찬 선생의 유두류록에는 천녀당(天女堂)으로 각각 기록하고 있으나 같은 곳을 지칭한 것으로 추정된다. 1472년 김종직 선생이 쉬어간 계석은 청이당터 석축 앞 약 20m 지점에 위치해 있고, 1711년 배찬 선생은 이곳에서 '계곡 옆의 바위 위(澗邊石上)에 빙 둘러 앉아서 밥을 먹었다' 라고 한 장소는 같은 곳으로 추정된다. 현재 지리 마니아들이 알고 있는 청이당터(숙밭재 아래 평평한 터)와 유람록의 청이당터는 거리(약100m)가 있다. ​ ​ 1) 1472년 김종직 선생의 유두류록 [원문] 抵淸伊堂。以..

香積臺(향적대) 관련 유람록과 기행시(180915)

香積臺(향적대) 관련 유람록과 기행시(180915) 1. 1472년 김종직 선생의 유두류록과 기행시 ○ 16일, 경진일. 비바람이 아직 거세므로, 먼저 향적사(香積寺)에 종자들을 보내어 밥을 준비해 놓고 지름길을 헤치고 와서 맞이하도록 하였다. 정오가 지나서는 비가 약간 그쳤는데 돌다리가 몹시 미끄러우므로, 사람을 시켜 붙들게 하여 내려왔다. 몇 리쯤 가니 철쇄로(鐵鎖路)가 있었는데 매우 위험하므로, 석혈(石穴)을 뚫고 나와 힘껏 걸어 향적사에 이르렀다. 향적사에는 승려가 남아 있지 않은 기간이 벌써 2년이나 되었지만 계곡 물은 아직도 쪼개진 나무에 의지하여 졸졸 흘러서 물통으로 떨어졌다. 창문의 자물쇠와 향반(香槃)의 기름이 이전처럼 남아 있었으므로, 깨끗이 청소하도록 하고 분향(焚香)하게 한 다음 들..

雙磎石門(쌍계석문) 관련 유람록과 기행시

雙磎石門(쌍계석문) 관련 유람록과 기행시 1. 1463년 8월 청파 이륙 선생의 유지리산록  쌍계사(雙磎寺)는 신라의 문사 고운(孤雲) 최치원이 글을 읽던 곳이다. 뜰에 백 아름 정도 되는 늙은 회화나무가 있는데 그 뿌리가 북쪽으로 작은 시내에 뻗어 넘어간지라 다리처럼 반석에다 묶어 놓고 절의 승려들이 다리로 삼아 왕래한다. 세속에서 전하기를, “고운이 손수 심은 것이다.”라고 한다. 골짜기 입구에 바위 두 개가 문처럼 서 있는데 ‘쌍계석문(雙磎石門)’ 네 글자를 크게 써놓았고 절 앞에도 오래된 비가 있는데 모두 최치원이 쓴 것이고 비문도 그가 직접 지은 것이다. 이 절은 섬진강과 가까워 이곳 승려들은 절 서쪽에 있는 최공(崔公)의 서루(書樓)에서 섬진강물을 속속들이 바라볼 수 있고 아직 그 집터가 남아..

1472년 김종직 선생 유두류록의 지장사터(180901~02)

1472년 김종직 선생 유두류록의 지장사터(180901~02) ▣ 일 시 : 2018년 09월 01일(토)~02(일) ▣ 코 스 : 적조암 - 노장동 - 지장사터 - 환희대 - 선열암터 - 독녀암(노장대) - 신열암 - 의논대 - 고열암 - 향로봉삼거리 - 벽송사능선 - 장구목 - 어름터 - 광점동 ▣ 인 원 : 2명(조박사님) ▣ 날 씨 : 구름, 안개비 나는 폐암자에 대한 識見도 없거니와 불교에 대해 門外漢이다. 다만 선인들의 유람록에 나오는 암자터를 찾아 여러 차례 답사를 하였다. 10여 년 전 영신암 터에 대한 논란이 있을 때, 1472년 김종직 선생의 유두류기행시 '영신암'에서 '방장의 노선사가 석문을 열어주네.[老禪方丈石門開]'라는 시구를 근거로 '영신암과 영신대는 하나다.'라는 의견을 낸 일..

선인들의 유람록에 나오는 지장사와 지장암(180817)

선인들의 유람록에 나오는 지장사와 지장암(180817) 1472년 점필재 김종직 선생의 유두류록에 노장동의 지장사와 1558년 남명 조식 선생의 유두류록에 불일평전의 지장암이 나오는데, 이름은 같지만 각각 다른 곳에 위치해 있는 암자이다. 암자터를 찾는데 덮어놓고 '와편이 반드시 나와야 암자터다.'라는 전제는 옳지 않다고 본다. 1463년 선생의 유지리산록에 '산꼭대기에 있는 향적사 등 몇 개의 절은 모두 목판으로 지붕을 덮었는데, 오직 영신사만 기와로 지붕을 덮었다.'라는 기록으로 미루어 와편과 폐암자를 연결시키는 것은 당시 승려의 사회적인 지위나 신분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생각이다. 불일암에 대한 선인들의 유람록을 보더라도 기와지붕이 아닌 너와집(판자나 굴참나무 껍질)이거나 갈대(茅)나 산죽으로 지붕..

玄石 이호신 화백님의 점필재길 이야기II(180805~06)

이호신 화백님의 점필재길 이야기II(180805~06) 2017년 2월 25일 촛불 시위로 나라가 어수선하던 시절, 무작정 집을 나서서 차를 세운 곳이 남사 마을이다. 매화가 아직 피지 않았으나 혹시 하는 기대에 남사마을을 찾았는데 이호신 화백님이 어떤 손님을 안내하고 계셨다. 화백님이 말씀을 하시는 중간에 끼어들어 '저도 화백님의 해설을 듣고 싶습니다.'라고 하고 불고염치(不顧廉恥) 따라붙었다. 사양정사의 정씨매, 전주최씨 고가의 최씨매, 원정구려의 원정매는 보았지만, 문이 잠긴 성주이씨 고가의 이씨매를 처음 감상하였고, 이사재의 박씨매를 둘러본 후, 이화백님에게 '지금은 꽃자리(時芳齋)'에서 茶를 얻어 마시다가 이 화백님의 지리산 산수화를 접하고 다짜고짜 1472년 점필재 길을 화폭으로 복원하자는 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