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72년 김종직 선생 유두류록의 지장사터(180901~02)
▣ 일 시 : 2018년 09월 01일(토)~02(일)
▣ 코 스 : 적조암 - 노장동 - 지장사터 - 환희대 - 선열암터 - 독녀암(노장대) - 신열암 - 의논대 - 고열암 - 향로봉삼거리 - 벽송사능선 - 장구목 - 어름터 - 광점동
▣ 인 원 : 2명(조박사님)
▣ 날 씨 : 구름, 안개비
나는 폐암자에 대한 識見도 없거니와 불교에 대해 門外漢이다. 다만 선인들의 유람록에 나오는 암자터를 찾아 여러 차례 답사를 하였다. 10여 년 전 영신암 터에 대한 논란이 있을 때, 1472년 김종직 선생의 유두류기행시 '영신암'에서 '방장의 노선사가 석문을 열어주네.[老禪方丈石門開]'라는 시구를 근거로 '영신암과 영신대는 하나다.'라는 의견을 낸 일이 있다. 그 후 1610년 감수재 박여량 선생의 두류산일록과 1611년 어우당 유몽인 선생의 두류산록에 나오는 상류암과 두류암을 찾아 지리동부를 몇 년간 배회하면서 선인들의 유람록에 나오는 암자터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되었다.
1. 1472년 김종직선생의 유두류록
○ 8월 14일 무인일 덕봉사(德峯寺)의 승려 해공(解空)이 와서 그에게 길을 안내하게 하였고, 또 한백원(韓百源)이 따라가기를 요청하였다. 마침내 그들과 함께 출발하여 엄천(嚴川)을 지나 화암(花巖)에서 쉬고 있는데, 승려 법종(法宗)이 뒤따라왔다. 그에게 지나온 곳을 물어보니 험준함과 꼬불꼬불한 형세를 매우 자세하게 알고 있었다. 또한 길을 인도하게 하여 지장사 갈림길에 이르러[亦令導行。至地藏寺路岐] 말에서 내려 짚신을 신고 지팡이를 짚고 오르는데, 숲과 구렁이 깊고 그윽하여 벌써 경치가 뛰어남을 깨닫게 되었다. 여기서 1리쯤에 바위가 있는데, 환희대(歡喜臺)라고 하였다..
十四日戊寅. 德峯寺僧解空來. 使爲鄕導. 韓百源請從. 遂歷嚴川. 憩于花巖. 僧法宗尾至. 問其所歷. 阻折頗詳. 亦令導行, 至地藏寺路岐. 舍馬著芒鞋. 策杖而登. 林壑幽窅. 已覺勝絶. 一里許有巖. 曰歡喜臺.
[원본]亦令導行至地藏寺。路岐。 : 그래서 그에게도 길을 인도하게 하고 지장사(地藏寺)에 이르니 갈림길이 나왔다.[수정]亦令導行。至地藏寺路岐。 : 또한 길을 인도하게 하여 지장사 갈림길에 이르러...
☞ 덕봉사(德峯寺) 출처 http://blog.daum.net/12977705/8725453
① 덕봉사(德峯寺) 在天王蜂岾下 ○ 前無[함양군지, 천령지] (함양 병곡면 덕봉사지) 대봉산의 옛 지명 천왕점(天王岾) 혹은 천왕점산(天王岾山)
②다른 한 곳의 덕봉사지는 함양 마천 마애여래입상이 있는 마천초등학교 뒷편 현 고담사 일원(마천면 덕전리 소재) 출처 문화재청발간 한국의 사지.☞ 묘정암(妙貞庵) : 선열암에서 지장사와 묘정암으로 가는 길이 있다고 함. 法宗(묘정암 스님)
2. 옥계 노진의 야숙지장암(夜宿地藏庵)
夜宿地藏庵
노진(盧禛)[1518~1578]
山中無俗物 : 산중이라 세속의 잡된 일 없어
煮茗聊自飮 : 차 끓여 심심찮게 따라 마시며
坐愛佛燈明 : 앉아서 환한 불등 고이 보다가
深宵始成寢 : 깊은 밤 가까스로 잠이 들었지
還有石泉響 : 헌데 또 바위틈의 샘물 소리가
冷然驚曉枕 : 돌연 새벽 단꿈을 놀래 깨우네
<玉溪集>
노진(盧禛)[1518~1578] 조선 중기 남원에서 활동한 문신. 옥계(玉溪) 노진(盧禛)[1518~1578]은 조선 중기 명종과 선조 연간의 문신으로, 30여 년 동안 청현(淸顯)의 관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지례현감과 전주부윤 등 외직에 나가서는 백성에게 선정을 베풀어 청백리로 뽑히기도 하였다. 노진은 1518년(중종 13) 함양군 북덕곡 개평촌에서 태어났으나 처가가 있는 남원에 와서 살았다. 1578년 향년 61세를 일기로 생을 마쳤다.
3. 지장사터 추정지에 대하여
작년 지리동부대학 점필재학과 졸업산행(170810~13)에서 추정 지장사터를 확인하였고, 지난 7월 20일 지리산국립공원 역사문화조사단&地實硏 연합 2차 답사에서 지장사터와 샘터를 확인하였는데, 8월17일 지리산국립공원 역사문화조사단에서 3차 자체 조사를 하고 사진을 보내왔다. 이곳은 돌배나무에서 직선거리로 178m에 위치해 있다. 1472년 김종직선생의 유두류록에 '지장사 갈림길에 이르러 말에서 내려 짚신을 신고 올라갔는데 환희대까지의 거리가 1리이다.'라는 기록과 김종직 선생보다 87년 뒤에 태어난 노진의 '夜宿地藏庵' 시외에는 천령지나 함양군지에 전혀 기록이 남아있지 않다. 옥계 노진은 함양에서 태어나 외직의 수령 벼슬을 하다가 남원에서 활동한 인물이다. 노진의 지장암시와 점필재의 유두류록에서 '환희대 아래 1리 쯤에 있는 지장사 갈림길'이 그 단서이다.
4. 추정 지장사터 4차 답사
이번에 지장사터를 답사하게 된 이유는 지난 7월 20일은 일정이 너무 빡빡해서 시간에 쫓겼고 샘터와 주춧돌을 확인하고도 사진조차 찍지 못했기 때문이다. 다시 답사를 한들 고고학이나 박물관학을 전공한 것도 아니고, 폐암자 터에 대해 靑盲과니인 내가 무엇을 알 수 있으랴만, 다만 궁금증이라도 해소할 수 있을 거라는 기대에 기상청의 일기예보를 무시하고 길을 나섰다. 적조암에서 출발하여 돌배나무 아래에 배낭을 내려 놓고, 계곡을 건너 석축이 있는 전답 터를 지나면 축대가 남아 있는 샘터가 있고 바로 위 지장사 추정터가 나온다. 육안으로 들어오는 주춧돌 여덟 개를 확인하고 앞으로 이곳에 다시 올 일이 없기를 바라면서 지장사터를 조용히 빠져나왔다.
김종직 선생의 유두류록에 나오는 지장암 또한 영신암이나 양류암(상류암, 두류암)처럼 두 곳이 아니다. 김종직 선생이 말을 타고 한쟁이 골로 들어 상대능선을 넘지도 않았다 왜냐하면 지장사에 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리산 인문학을 복원하는데 성급한 성과를 내기 위한 이벤트성 발표보다는 백 번을 답사하고 검증한 후에 신중하게 포털싸이트에 자료를 올려야 한다. 아홉의 성과가 있다고 해도 한 번의 오류가 있으면 온라인의 파급성으로 인해 바로잡는데 오랜 시간이 걸리기 때문이다.
5. 獨女城에 대한 고 문헌의 기록
독녀암은 그 이전의 이름이 독녀성이다. 점필재 선생은 성종 때에 동국여지승람을 편찬하는데 주도적으로 참여했고 천문과 지리에 관한 식견 또한 당대 최고의 碩儒였다. 청왕봉에 올라 주변의 산들을 줄줄이 꿴 것만 보아도 선생의 지리에 대한 이해와 지식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우리가 이곳을 언제부터 누가 함양독바위라고 했는지 과연 그 근거가 어디에 있는지 궁금하다. 학술적인 접근은 아니더라도 함양독바위라는 현재의 이름은 상식적인 선에서 이치에 맞지 않는다. 이름도 시대에 따라 달리 부를 수도 있겠지만 지명을 개명하는데는 반드시 그 합당한 연유가 있다.
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제31권 경상도, 산음현
- 독녀성(獨女城)으로 산음현山陰縣) 서쪽 27리 지점에 있다. 석축이며 둘레가 천7백30척이고, 시냇물과 샘이 있었으나 지금은 모두 무너졌다.
나.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別集 제 17 권 변어전고 (邊圉典故)폐지된 산성
- 산음 고산성 : 현의 남쪽 2리에 있다. 독녀성(獨女城) : 현의 남쪽 27리에 있다.
예전 왕등재 성터 관련 하여 문헌자료를 조사를 할 때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독녀성이 산음현 서쪽 27리에 있다는 기록을 보았다. 함양독바위가 독녀암이라면 여기가 독녀성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이게 사실이이라면 삼음현의 경계가 송대 운암쪽까지 넓어지게 된다. 아직은 가설이지만 후에 성곽 둘레길이 등 추가 조사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출처 : 지리산역사문화조사단 정○○님 보고서]
6. 의병장 비호장군 석상룡 선생 후손을 만나다.
조망이 전혀 없는데다가 구름은 하늘에 가득하고 안개비가 내려 향로봉 삼거리에서 벽송사능선으로 내려섰다. 장구목에서 어름터로 내려와 청수정에서 이른 점심을 먹는데 禁草를 다녀오는 세 분을 만났다. 인사를 하니 한말 의병장 飛虎將軍 석상용 선생의 후손 석영일씨로 추성에 살고 있다고 하였다. '석장군 묘소를 지날 때마다 묘소에 참배를 한다.'라고 하고 의병전쟁과 독립운동에 대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석영일씨 아버님께서 추성리에서 이장을 오래 보셨고 구학문에 해박하셔서 선대의 공적을 늦게라도 밝히셨다고 한다. '해주석씨 세보에서 석상용 선생의 관련 자료를 보고 싶다.'라고 부탁하고 후일 만남을 기약하였다. 점심을 먹고 어름터 주변이 자진동이라는 것과 빙치를 가늠해보고, 두류암 관련 문헌에 나오는 와폭과 직폭을 사진에 담고 광점동으로 내려왔다.
♣ 1611년 유몽인 선생 용유담에서 두류암 가는 길(180526~27) : http://blog.daum.net/lyg4533/16487975
적조암
山乭梨木
샘터 둘레 석축I
샘터 둘레 석축II
샘터 둘레 석축III
샘터IIII
주춧돌
구름이 이는 우뚝 솟은 바위에서 톡 톡 톡..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 맑고도 깨끗하구나.
미타봉
독녀암
고열암 터
향로봉
자진동 마을터
추정 氷峙
지산대 각자
☞ 함양군 마천면 추성리 소재 芝山䑓(지산대) 석각(180624) : http://blog.daum.net/lyg4533/16488000
1611년 유몽인의 [두류산록] : 바위 사이로 폭포수가 쏟아지고 있는데 마치 옥으로 만든 발을 수십 길 매달아놓은 것 같았다.
1611년 유몽인의 五律 두류암 詩句 : 飛注作寒舂(떨어지는 물은 차갑게 절구질을 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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