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六友堂記/♧작업실 43

自警[스스로 경계하고 조심함]

自警[스스로 경계하고 조심함]                               淸河(청하) 權秉局(권병국) 知人交道難 : 사람을 안다해도 사귀는 일은 어려워相合又離難 : 서로 맞는다면 또한 헤어지기 어렵다네.若非持信者 : 만약 믿음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면推步宲心難 : 천문을 연구했어도 진실된 마음 알기 어렵구나. 출처 : 청하일감(淸河日鑑)   注 추보(推步) : 천체의 운행을 관측하는 것. 천체의 운행을 관측하여 역을 만들던 일. 천상(天象)과 역법(曆法)을 살펴서 계산하는 일인데, 옛사람들이 해와 달의 운행을 마치 사람의 걸음걸이와 같다고 여겨서 지어낸 말이다.(고전번역원)  1. 천문(天文)을 연구하다. 2. 천문을 추산(推算)하다. 宲 : 實의 古字로 감출포, 열매실.   권상순 공은 190..

관포(灌圃)의 독녀심선(獨女尋仙)에 나오는 독녀성

관포(灌圃)의 독녀심선(獨女尋仙)에 나오는 독녀성    2019년 2월 21일~22일 독녀성을 찾기 위한 첫 답사를 하였다. 답사 자료는 달랑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제31권 경상도, 산음현에 "독녀성(獨女城) 현 서쪽 27리 지점에 있다. 석축이며 둘레가 천 7백 30척이고, 시냇물과 샘(?)이 있었으나, 지금은 모두 무너졌다."와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別集 제 17 권 「변어전고(邊圉典故)」의 폐지된 산성에 "독녀성(獨女城) : 현의 남쪽 27리에 있다."라는 기록이다. 두 기록의 방향이 서와 남으로 다르다. 당시 독녀암과 삼열암 일원, 선녀굴 주변의 망바위 석축과 미타봉을 잇는 지점을  조사하였다.    그로부터 몇 년이 흐른 뒤 산음 현감(재임 기간 1502~1508)을 지낸 ..

『고성의 얼(고성문화원, 2021)』에 소개된 묵희墨熙

『고성의 얼(고성문화원, 2021)』에 소개된 묵희墨熙     ■ 묵근자 墨根子 묵희墨熙: 신필神筆이라 불리던 서예가   고성을 빛낸 서예의 인물로서는 단연 구한말의 묵희라는 인물이 있다. 자는 정회正晦, 호는 구절산인九節山人, 경산敬山, 묵근자墨根子로 불렸다. 그의 작품에 대한 평가는 극명하게 대비되는데 한편에서는 신필神筆이라 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글도 그림도 아닌 황칠이란 혹평을 받기도 하나 현재 남아 있는 그의 작품을 대하는 순간, 왜 신필이라 칭하는지 그 연유를 깨닫게 된다.    묵근자墨根子는 누구일까. 1981년에 간행된 『경허법어』에는 경허가 해인사 조실로 있을 때 경상도에서 유명한 묵근자를 찾아가 만난 얘기가 실려있다. 경허가 묵근자가 앉아 있는 방안에 들어가자 묵근자는 경허를 보고도 우두..

만수천(萬水川)의 옛 이름 황류천(黃流川)와 황계(黃溪)

만수천(萬水川)의 옛 이름 황류천(黃流川)와 황계(黃溪)    옛 기록을 상고하여 현재의 지명을 고증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3년 전 어우당 유몽인길을 답사하면서 황계(黃溪)에 대한 의문은 좀처럼 풀리지 않았다. 조경남의 『난중잡록』을 좇아 용추와 파근사 거쳐 정령치를 넘어, 서산대사의 황령암기에 나오는 황령암에 이르기까지 손끝이 보이지 않는 짙은 안개속 걸어왔다. 황계의 유일한 단서는 옛 문헌에 나오는 황류동(黃流洞)과 황령암(黃嶺庵)이다.   조경남의 『난중잡록』에 "황류동(黃流洞)은 지리산의 황령사(黃嶺寺, 황령암)와 향로봉의 사이에 있는데, 수원(水源)은 반야봉(般若峯)에서 나와 삼기수(三岐水: 세 갈래 물줄기)가 묘봉(眇峯)을 두루 돌아서 내려온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뒤 문장은 황류천..

1586년 양대박의 「두류산기행록」에 나오는 두모담(頭毛潭)

1586년 양대박의 「두류산기행록」에 나오는 두모담(頭毛潭)    양대박은 4회에 거쳐 지리산을 유람한다. 1560년(경신) 봄에는 화개동천의 일원인 쌍계사·청학동 및 신흥사·의신사(擬神寺)를, 1565년(을축) 가을에는 운성(雲城, 운봉)을 거쳐 황산(荒山)을 돌아 백장사(百丈寺)에 투숙하고 천왕봉을 유람한다. 1580년(경진) 가을에는 연곡사(燕谷寺) 일원을, 1586년(병술) 가을 9월 2일부터 12일까지 10박 11일 천왕봉을 유람하고 「두류산기행록」을 남긴다.   1586년 양대박의「두류산기행록」 9월 4일 일정(백장사→변사정 구거지→도탄→실상사→두모담→군자사)에서 두모담(頭毛潭)을 지나간다. 「두류산기행록」에 "바위 가운데는 절구처럼 우묵하게 들어간 것도 있고, 가마솥처럼 움푹 팬 것도 있었다..

진주암에 대한 문헌의 기록

진주암에 대한 문헌의 기록 1. 松亭先生文集卷之一 / 詩 眞住菴 遇除夜[진주암에서 섣달 그믐밤을 만나다.] 四十今宵盡 : 오늘 밤이면 40대가 다가고 明朝五十初 : 내일 아침이면 50이 시작일세. 君親飄泊裏 : 임금과 부모가 정처없이 떠도는 사이 兄弟亂亡餘 : 형제들마저 난리에 죄다 죽었다네 一頌椒花斷 : 한 수 초화송(椒花頌) 불러줄 이 죽고 三盃栢葉虛 : 석 잔 백엽주(栢葉酒) 바칠 이도 없네 干戈猶滿目 : 전쟁의 참상은 아직도 눈에 가득하지만 此夜願俱除 : 이 밤에 모두 사라지기를 바라노라. 注 초화송(椒花頌)) : 신년 축하시. 초송(椒頌)은 정월 초하루가 되면 초주(椒酒)를 가장(家長)에게 올리며 헌수(獻壽)하던 풍속이다. 진(晉)나라 유진(劉臻)의 처(妻) 진씨(陳氏)가 정월 초하룻날 초화송(..

용호서원 목간당에 게판된 용호구곡십영(龍湖九曲十詠) 제영시

용호서원 목간당에 게판된 용호구곡십영(龍湖九曲十詠) 제영시 용호서원(龍湖書院)의 목간당(木澗堂)에 용호구곡십영(龍湖九曲十詠)이 게판(揭板)되어 있다. 용호구곡십영(龍湖九曲十詠)은 한말과 일제 강점기에 남원 지역에서 후학을 양성하고 덕행을 펼쳤던 영송(嶺松) 김재홍(金在洪, 1867~1939)이 지은 것이다. 용호구곡십영을 통해 용호구곡(龍湖九曲)이 언제 누구에 의해서 명명된 것인지 유추할 수 있다. 1수에 "회옹(晦翁) 선생이 무이구곡(泉石)에 은거한 뜻을 알아/천년 뒤에 무이도가(武夷櫂歌)를 차운하여 읊는다."라고 하여 용호구곡의 연원을 밝히고 있다. 용호구곡(龍湖九曲)은 용호서원이 설립된 1927년을 전후하여 원동 향약계(源洞鄕約契)에 소속된 유림들과 영송(嶺松) 김재홍(金在洪)에 의해 설정되었다. ..

갱정유도의 부응경에 나오는 천우동(天羽洞)

갱정유도(更定儒道)의 부응경(符應經)에 나오는 천우동(天羽洞)    부응경(符應經)은 갱정유도(更定儒道, 일명 一心敎) 제1대 교조 강대성(姜大成, 1890~1954)의 어록이다. 갱정유도(更定儒道) 교조 강대성이 39세 때인 1928년에 순창 회문산 금강암에 입산, 처자와 더불어 금식·고행을 하다가 1929년 7월에 득도하였다. 1930년 송목(松木)에 결항이사(結項而死)한 부인과 아들 삼인(三人)이 생사교역(生死交易)을 한 뒤, 천어문답(天語問答)한 도덕경전과 시가문을 교조가 직접, 또는 제자들이 필사해 놓은 것이다. 부응경(符應經)은 천부경에 응답한다는 의미인 듯하다.   얼마전 임○○님이 부응경에서 지리산 관련 내용을 발췌하여 보내주셨다. 벽설령(벽소령), 천황봉(천왕봉), 영신대 등 여러 지명이..

조경남의 『난중잡록』에 나오는 황류동과 향로봉

조경남의 『난중잡록』에 나오는 황류동과 향로봉 조경남의 『난중잡록』에 나오는 향로봉은 반야 중봉, 투구봉, 『남원산하』의 향로봉 중 한 곳으로 좁혀진다. 정유재란 때에 조경남이 피난온 '은신암 옛터'는 향로봉의 북쪽 기슭에 있고, '수백 명이 피난할 수 있는 곳'이다. 투구봉을 향로봉으로 보면 지리산길 지도의 망바위봉이 향로봉의 북쪽 기슭에 해당된다. 그곳의 평지가 피난하기 가장 안전하고 따스하며 적이 오는 것을 살피기도 좋고 도망가기도 좋다.(산영님) 조경남의 『난중잡록』에 "1594년 12월 초5일 임걸년(林傑年)이 향로봉에 주둔했다가 운봉 군사에게 밤에 습격을 당하여 패하여 달아났다." 향로봉 북쪽 기슭 은신암 옛터에 도적 임걸년의 산채가 있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注 참고로 지리산길 지도의 망바위봉..

황령(黃嶺)과 황령암(黃嶺庵)에 대한 문헌의 기록

황령(黃嶺)과 황령암(黃嶺庵)에 대한 문헌의 기록 서산대사의 「황령암기」에 "마한(馬韓)의 왕이 피신하여 달궁에 도성을 쌓을 때, 黃·鄭 두 장군을 시켜 공사를 감독하였으므로, 두 사람의 성을 따서 황령(黃嶺)과 정령(鄭嶺)이라고 하였다."라고 황령과 정령의 유래를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반야봉의 좌우에 황령과 정령이 있다."라는 문구는 오히려 황령의 위치에 혼란을 준다. 황령의 위치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얼마전 칠성님이 '황령은 어디인가?'라는 질문을 던졌다. 그래서 관련 자료를 읽어보고 지리산길 지도에 표기된 황령암 터를 답사하게 되었다. 황령암(黃嶺庵) 관련 기록을 요약하면, 만복대에서 동쪽으로 뻗은 산줄기가 황령의 주능선이다. 황령은 만복대 동릉에 있는 황장군이 달궁을 지키던 고개이다. 황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