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논산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김선덕 회장으로부터 1895년 양호소모사 문석봉(文錫鳳,1851∼1896)으로부터 항일 동학투사 16명이 학살된 김세마 집터 위치를 알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지난 3월 1일 김세마 집터를 확인하고자 탐방에 나섰다. 당일 계룡역에 도착하자, 김선덕 회장과 김대훈 선생이 기다리고 있었다.
김선덕 회장과 김대훈 선생, 그리고 필자는 김세마 집터가 있는 곳으로 향하였다. 먼저 식당에서 점심 식사를 하였다. 이어서 충남 금산군 진산면 행정2리 노인회관 앞에 세워져 있는 '동학 최후의 항쟁지'라고 쓴 표지석을 탐방하였다. 표지석의 내용은 아래와 같았다.
동학 최후의 항쟁지
1894년 3월 12일 금산 제원 봉기로 시작된 동학농민혁명은 1895년 1월 27일 이곳 진산 염정동에서 민보군에 의해 21명이 참살되고 450여 명이 생포되며 막이 내린다. (이하 생략) - 2023년 11월 금산문화원"
위의 표지석에 나오듯이, 1895년 1월 27일(양력 2월 21일) 민보군 지휘관 문석봉(文錫鳳,1851∼1896)이 병정 20명과 장관(將官) 23명 총43명을 거느리고 가서 염정동(廉貞洞) 마을 가운데에 있는 김세마(金洗馬)의 집 방 안에서 동학농민군 지도자 16명을 참수(斬首)하였다. 다음날인 1895년 1월 28일(양력 2월 22일) 문석봉은 계속해서 동학농민군 지도자 5명을 참수하였다. 총 21명을 참수하였다.
1894년과 1895년 당시 염정동(廉貞洞)은 전라도 진산군(珍山郡)에 속하였고, 현재 충남 금산군 진산면 행정리와 충남 논산시 벌곡면 도산리에 걸쳐 있다.
이어서 동학농민군 지도자 16명이 참수된 김세마(金洗馬)의 집터 위치 탐방에 나섰다. 김세마의 집터 위치는 충남 논산시 벌곡면 도산2리에 있었다. 도산2리는 지극히 평화로운 모습이었고, 아름다운 곳이었다. 도산2리 뒤쪽에 대둔산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김선덕 회장이 현장에서 김세마의 집터 위치를 알려주었다. 도산2리(벌곡면 수락계곡길)에 있는 한 치킨 집 뒤쪽에 김세마의 집터가 있었다.

김선덕 회장은 필자에게 "2022년 3월 도산2리에 있는 도산교 다리 근처에서 도산 2리에 살고 계신 박종국 어르신이 '김세마의 집은 저 집이다'라고 알려주었다"고 말씀해 주었다. 그래서 김선덕 회장이 김세마의 집터 위치를 그때 알게 되었다고 한다. 현재 박종국(朴鍾國, 1931년생, 95세)어르신은 도산2리에 거주하고 있으며, 아들 박수일은 아버지가 평생을 이곳에서 살아오셨다고 말씀해 주었다.
김세마 집터에 대해서는 일찍이 표영삼은 염정동 김세마(金洗馬)의 집이 도산동(道山洞) 마을 남쪽을 흐르는 실개천을 건너 수락으로 넘어가는 길 초엽 우측 한 가운데 있다(「금산지역 동학혁명운동」, <교사교리연구>제1호, 1999, 10)고 기술하였다.
이병규는 원광대 사학과 박사학위논문(「금산·진산지역의 동학농민혁명 연구」, 2003)에서 염정동 김세마의 집은 '벌곡면 도산리'에 남아있다(193쪽)고 밝혔다.
진산 출신인 한상수 대전대 명예교수는 김세마의 집을 '벌곡 도산'으로 기술하고 있다.(<금산의 동학이야기>, 금산문화원, 2022, 246∼247쪽)
지난 3월 7일 필자와의 통화에서 한상수 교수(1938년생, 88세, 현재 대전시에 거주)는 "20년 전 도산리에 사는 김씨 성을 가진 분이 '저 집이 김세마 집이다. 이 집이 부자집이었다'라고 나에게 알려주었다. 그래서 저녁 무렵에 한번 갔었다. 김세마 집은 벌곡면 도산리에 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구한말에 지은 집들이 있었다. 진산사람들은 도산의 김세마 집을 많이 알고 있었다"라고 말씀해 주었다.
이상을 통해서 볼 때, 김세마의 집은 '벌곡면 도산리'에 있었다고 정리할 수 있다. 특히 박종국 어르신이 김선덕 회장에게 도산2리(벌곡면 수락계곡길)에 있는 김세마의 집터 위치를 알려준 사실은 매우 중요하다고 하겠다. 이로써 김세마의 집터 위치를 알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김세마(金洗馬)의 집 방 안에서 참수당한 동학농민군 지도자 16명이 어떤 사람들이었는지 살펴보자.
이들은 대둔산 항쟁에서 살아남은 최공우(崔公雨) 예하의 동학농민군 지도자들이었다. 진산(珍山)의 동학접주 최공우는 2차 항일 동학농민봉기에 참여하였는데, 특히 일본군을 몰아내고자 수백 명의 동학농민군을 이끌고 공주전투(1894년 10월∼11월)에 참전하였다. 공주전투에서 패배한 후 최공우는 수백 명의 동학농민군을 거느리고 대둔산 미륵바위(형제바위) 에서 웅거하며 항쟁을 계속하였다.
1894년 11월 중순부터 1895년 1월 24일까지 70여 일 동안 최공우의 동학농민군이 대둔산 미륵바위에서 침략자 일본군과 관군에 맞서 항쟁하였다. 이들은 1895년 1월 24일(양력 2월 18일)에 일본군과 일본군의 지휘를 받은 관군에 의해 25명이 장렬히 전사하였다. 일본군은 실탄 1176발을 사용하였다. 일본군은 대둔산 동학농민군 본부의 집 3채를 소각하고 "천황폐하 만세"를 삼창하였다. 최공우의 대둔산 동학농민군은 불굴의 항일투쟁을 보여주었다.
대둔산 항쟁에서 살아남은 최공우의 동학농민군이 전라도 진산군(珍山郡) 염정동(廉貞洞)에서 1895년 1월 24일 다시 기포(起包)하였다. 최공우의 아들 최사문(崔士文)은 진산면 행정리 염정골에서 살고 있었다. 염정동 주민들은 70여 일 동안 대둔산에서 항쟁하고 있는 동학농민군들에게 식량·된장 등을 보급해 주었다. 최공우는 염정동 일대에서 항일의식이 투철한 동학농민군 1천여 명을 모았다.
이 첩보를 입수한 양호소모사(兩湖召募使) 문석봉은 43명의 민보군 군사를 이끌고 가서 5일 동안(1895.1.24.∼1.28) 염정동 소재 동학농민군 진압 작전을 진행했다. 특히 1895년 1월 27일(양력 2월 21일) 문석봉이 명령하여 동학농민군 지휘부가 머물고 있던 염정동 김세마의 집 방 안에서 동학농민군 지도자 16명을 참수하였다. 이 처형 장면을 문석봉이 아래와 같이 상세히 묘사하였다.
"때는 밤 12시 정각이어서 비록 담이 큰 장사라고 해도 누군들 감히 꼼짝달싹할 수 있었으랴. 비도들(동학농민군 지칭: 필자) 중에서 놀라서 일어난 자들은 하나하나 총이 있는 쪽으로 향하여 서게 하였으며, 머리를 숙이고 들어오게 하여 하나가 들어오면 하나를 베고 둘이 들어오면 둘을 베었다. 방내의 적 16인의 목을 베는 것이 끝나자, 남은 무리들을 모두 포박하였으며 투항한 자들은 모두 400여 명이었다. 모두 옷을 벗기고 빈 방에 가두었다."(문석봉, 「토비략기(討匪略記)」, <의산유고>, 158쪽.)
이렇게 문석봉은 민보군을 지휘하여 동학농민군에게 "머리를 숙이고 들어오게 하여, 동학농민군 하나가 들어오면 하나를 베고, 농민군 둘이 들어오면 둘을 베었다. 방내의 동학농민군 16인의 목을 베는 것을 끝냈다.(低頭入來 一來一斫 二來二斫 斬了房內賊十六箇)"라고 기술하였다.
이어서 동학농민군 400여 명을 투항시켰다. 계속해서 문석봉은 같은 날 부대를 이끌고 대성사로 가서 동학농민군 지도자를 체포하였고, 동학농민군 400여 명을 투항시켰다.
다음날 1월 28일 문석봉은 동학농민군 지도자 5명을 다시 참수하여 진압작전을 종료하였다. 문석봉은 <의산유고>에서 동학농민군을 동비(東匪)로 기록하였다. 문석봉에게 동학농민군은 '동비(東匪:동학도적떼)'·비도(匪徒:도적무리)였고, 동학농민군의 지도자는 '비괴(匪魁:도적괴수)'·'적괴(賊魁:도적괴수)'에 불과했다. 그에게 동학농민군의 지도자는 섬멸의 대상일 뿐이었다. 문석봉은 1893년 12월 진잠 현감을 역임한 전직관료였다. 그는 양반 기득권 유지에 매몰되어 있었다.
문석봉은 1895년 1월 24일 대둔산 미륵바위에서 일본군에 맞서 항쟁하고 있던 최공우의 동학농민군에 대해 비난하며, 오히려 일본군에 의한 동학농민군 학살을 매우 다행이라고 아래와 같이 인식하고 있었다.
"아! 24일 강화병영의 병정과 일본 병사 수백 명이 힘을 합쳐 함께 공격하여 이미 그들의 무리가 끊어지게 하였으니, 매우 다행입니다(伏幸伏幸)."(문석봉, 「순영에 올리는 글」, <의산유고>, 152쪽)
이처럼 충청감사 박제순에게 올린 글을 통해, 문석봉은 일본군의 동학농민군 학살을 옹호하고 있었다.
1895년 8월 20일에 일어난 을미사변 이후, 문석봉은 1895년 9월 18일 유성에서 민비 시해에 맞서 의병을 일으켰다. 문석봉 본인이 유성의병의 의병장이 되어 활약하였다. 그 공로로 대한민국 정부는 1993년 문석봉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매우 잘한 일이었다.

유성의병의 의병장이라는 공적에 가려, 지금까지 문석봉이 2차 동학농민혁명 시기에 그가 자행한 항일 동학투사 학살 사례는 제대로 드러나지 않았다. 문석봉이 자행한 항일 동학투사 학살 사례 연구가 나오기를 기대한다.
염정동 김세마의 집(현재주소: 벌곡면 도산2리)에서 희생된 항일 동학농민군 지도자 16명의 죽음은 대둔산 동학농민군의 항일투쟁을 계승하였다는 점에서 기억해야 한다. 따라서 항일 동학농민군 지도자 16명이 비극적 죽음을 맞이한 김세마 집터는 동학농민혁명사에서 잊어서는 아니 될 역사적 장소라고 단언할 수 있다.
논산시청과 논산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는 김세마 집터가 충남 논산시 벌곡면 도산2리에 있다는 사실을 '표지석'을 세워서 널리 알려주기를 바란다.
*참고자료
문석봉, 「의산유고(義山遺稿」), <동학농민혁명 국역총서>6, 동학농민혁명참여자명예회복심의위원회, 2009.
오지영, <동학사>(초고본), 1924.
다케우치 신타로(武內眞太郞) 특무조장, 「대둔산부근 전투상보」(1895년 양력 2월 18일(음력 1월 24일)), <주한일본공사관기록>6, 71∼73쪽.
고려대 한국사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위원과 우리말로 학문하기 모임 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고려대 한국사연구소 연구교수와 한글학회 연구위원을 역임하였다.
20여 년 현장 답사로 나온 동학농민연구의 역작
지난 13일 공주에서 정선원 박사 출판기념회가 열렸다. 나는 독립운동사 전공 역사학자로서 출판기념회에서 토론자로 참석했고, 정선원 저서 <동학농민혁명 시기 공주전투 연구>를 먼저 읽어 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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