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六友堂記/마애석각 57

내원골 횡하대(橫河䑓) 건너편 석각

내원골 횡하대(橫河䑓) 건너편 석각   橫河䑓(횡하대)                        淸河 權相舜(1876~1931)  臺出天高体 : 대는 하늘 높이 형상을 드러내고沄如垂漢流 : 세찬 물길은 은하수를 드리운듯 흐르네 . 意味這中得 : 청하(淸河)의 의미를 이 안에서 얻었으니我愛此一區 : 나는 이 곳(한 구역)을 좋아한다네. 注 『청하일감(淸河日鑑)』 원문에는 1구 臺는 坮,  4구 '愛'는 '怜(사랑할련 : 憐)'으로 되어있다. 안동권씨 서령공파 세보에 生丙子(1876년)  卒辛未(1931年)으로  '산청석각명문총람(1권 489쪽)'의 생년 1865년을 1876년으로 수정했다.      PS :  남이 해놓은 것은 쉬워도 내가 알기는 어렵다.

雙磎石門(쌍계석문) 석각 탁본(240612)

雙磎石門(쌍계석문) 석문 탁본(240612)    ■ 雙磎石門(쌍계석문) 관련 유람록과 기행시 1. 1463년 8월 청파 이륙 선생의 유지리산록   쌍계사(雙磎寺)는 신라의 문사 고운(孤雲) 최치원이 글을 읽던 곳이다. 뜰에 백 아름 정도 되는 늙은 회화나무가 있는데 그 뿌리가 북쪽으로 작은 시내에 뻗어 넘어간지라 다리처럼 반석에다 묶어 놓고 절의 승려들이 다리로 삼아 왕래한다. 세속에서 전하기를, “고운이 손수 심은 것이다.”라고 한다. 골짜기 입구에 바위 두 개가 문처럼 서 있는데 ‘쌍계석문(雙磎石門)’ 네 글자를 크게 써놓았고 절 앞에도 오래된 비가 있는데 모두 최치원이 쓴 것이고 비문도 그가 직접 지은 것이다. 이 절은 섬진강과 가까워 이곳 승려들은 절 서쪽에 있는 최공(崔公)의 서루(書樓)에서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나오는 불신당 관련 기록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나오는 불신당 관련 기록 鄭國儉 爲知府 一日行春屬邑 過源川洞 左右壁上 有松林寺僧正思大書一絶曰: 古佛巖前水 : 고불(古佛) 바위 앞을 흐르는 물이 哀鳴復嗚咽 : 슬피 울고 다시 오열한다. 應恨到人間 : 아마도 인간세계에 내려와 永與雲山別 : 영영 운산(雲山)과 헤어지게 된 것을 슬퍼하는가. 翼日與老儒梁積中連鑣尋訪 結爲山水友 後每論人物 必稱正思爲僧中龍 정국검(鄭國儉) 지부사(知府事)가 되어 하루는 속읍(屬邑)에서 행춘(行春 태수(太守)가 봄에 속읍에 다니며 농상(農桑)을 권장하는 일)할 때, 원천동(源川洞)을 지나게 되었는데 송림(松林)이 있는 좌우 벽 위에 중 (좌우의 벽 위에 송림사 중) 정사(正思)가 한 절구를 크게 써놓기를, [左右壁上有松林 寺僧正思大書一絶曰→左右壁..

용호구곡 불신당 용호품제 석각

용호구곡 불신당 용호품제 석각 龍湖品題 己巳春 松寮 與諸同志 游湖上 選次九曲地名 刻平石 年八斗孫 待行 三月望日 용호구곡에 대해 하나하나 이름을 붙였다. 기사년 봄 영송(嶺松)의 동료들이 여러 동지들과 용호구곡을 유람하고 구곡의 지명을 선별해 차례대로 정하고서 평평한 돌에 새겼다. 나이 여덟 살 된 손자 斗秀가 나를 모시고 왔다. 삼월 보름. ※ 寮과 同志가 글자의 판독이 확실하지 않다.

김사문의 「용호구곡 경승안내」에 나오는 불신당(佛神堂)

김사문의 「용호구곡 경승안내」 에 나오는 불신당(佛神堂) ■ 1940년 난사 김사문의 「용호구곡 경승안내」 불신당(佛神堂) 이암(鯉岩, 잉어바위)를 등지고(背) 산의 북쪽 기슭(北麓)을 우러르매(仰) 암벽(岩壁)의 돌 처마(石簷)가 높이(高)는 가히(可) 한길(一丈), 넓이(廣)는 가히(可) 10인(十人)이 앉을 수 있는 자연이 만든(天作) 감실(龕)에 한 구(一軀)의 석상(石像)을 안치하였나니(安) 이것이(此) 이른바(所謂) 불신당(佛神堂)이다. 먼 옛날 (古代) 송림사(松林寺)의 유물(遺物)인대, 등림객들이(登臨客) 향을 피우고 기도하는 사람들(香禱한 者)이 많더니, 뜻하지 않게(不意) 지난 갑술(1934)년 여름(甲戌夏)에 운악암의 중(雲岳菴僧)이 몰래 지고간바(竊負) 되여 호경리 사람들이(湖景人士..

난사(蘭史) 김사문(金思汶) 의 용호구곡 경승안내

난사(蘭史) 김사문(金思汶)의 용호구곡 경승안내 용호구곡(龍湖九曲)은 용호서원을 건립한 원동향약계와 사림에 의해 일제 강점기에 설정된 것으로 추정된다. 용호서원 목간당(木澗堂)에 게판되어있는 용호구곡십영(龍湖九曲十詠) 제영시는 영송(嶺松) 김재홍(金在洪, 1867~1939)이 지은 것이다. 용호구곡 석각 시기 또한 용호서원이 건립된 시점(1927년) 이후로 본다. 「용호구곡 경승안내」에 남원 군수 李東漢(1923~25)과 白定基(1926~27)가 군수 재임 시 이곳을 다녀갔을 당시에는 용호구곡의 이름이 없었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1948년부터 약 4년간 호경리에서 호운(湖雲) 서당 훈장을 하였던 난사(蘭史) 김사문(金思汶, 1889∼1978)은 「용호구곡 경승안내(龍湖九曲景勝案內, 1940)」를 남..

쌍계석문 정태현(鄭泰鉉) 인명 석각

쌍계석문 정태현(鄭泰鉉) 인명 석각 ▣ 일 시 : 2023년 04월 09일(일) ▣ 장 소 : 쌍계사 쌍계석문 ▣ 사 진 : 칠성님 얼마전 남해에 계신 송장섭 선생님께 쌍계 석문에 정태현(鄭泰鉉) 인명 석각이 있다는 연락을 받았다. 죽헌(竹軒) 정태현(鄭泰鉉, 1858~1919) 공은 일두(一蠹) 정여창(鄭汝昌, 1450~1504) 선생의 14대손으로, 1885년 천왕봉에 일월대(日月臺) 석각을 새긴 주인공이다. 마침 칠성님이 석각 이야기를 듣고 쌍계석문 석각 사진을 보내왔다. ☞ 지리산 천왕봉 일월대(日月臺) 석각 정태현서 : https://lyg4533.tistory.com/16488797 ▶ 정태현(鄭泰鉉, 1858~1919) 대한제국기 충북관찰사, 가선대부 등을 역임한 관료. 본관은 하동(河東)...

1793년 도원 스님 두류산기에 나오는 구송·몽유·운학

1793년 도원 스님「두류산기」에 나오는 구송·몽유·운학 "구송(九松)·몽유(夢遊)·운학(雲鶴) 등지는, 개암(介菴) 강익(姜翼, 1523~1567)과 매촌(梅村) 정모(鄭某)와 사간원(司諫院) 이모(李某) 등이 노닐던 곳으로 그윽하고 기이한 절경이 아닌 곳이 없다.(두류산기)" 注 구송(九松)은 함양군 마천면 창원리 695번지 창말 마을 구송정(九松亭)을 가리킨다. 지금은 그자리에 개암 강선생 유허비가 있다. 비석 측면에 구송정에 대한 기록이 있다. 몽유정(夢遊亭)은 남원시 산내면 내령마을 운제정(雲堤亭) 아래에서 유배생활을 했던 송파(松坡) 이해창(李海昌)이 지은 정자이다. 운학(雲鶴)은 마천면 군자리에 있던 매촌(梅村) 정복현(鄭復顯) 선생이 지은 운학정(雲鶴亭)을 가리킨다. 매촌(梅村) 정모(鄭某..

은병암과 동신대의 인명 석각 강시영(姜時永)

은병암과 동신대의 인명 석각 강시영(姜時永) 지난해 9월 중순 산영님이 선녀굴골에서 은병암 석각을 발견하였다. 송대마을에서 선녀굴 방향으로 오르다가 집터가 있는 곳 서쪽 바위 벽면에 은병암(隱屛岩)과 강시영(姜時永) 인명 석각이 있다. 신농산삼약초원 강재두 사장에게 부탁하여 진주 강씨 세보에서 찾아보았으나, 강시영이라는 인물을 확인하지 못하였다. 강재두 사장은 세진대의 주인 적은(跡隱) 강지주 (姜趾周 1856∼1939) 선생의 증손자이다. 얼마 전 칠성님이 동신대(同信臺) 석각 사진을 보내왔다. 이곳에도 강시영(姜時永)이라는 이름이 있다. 지난 주말 동신대(同信臺)를 찾았다. 석각의 상태로 보아 후손들이 관리하는 듯하다. 동신대(同信臺)의 위치는 용유담에서 용담입문 석각을 지나 200m 정도 내려와 복..

지리산 국립공원 내 '大'자 석각에 대하여

지리산국립공원 내 '大'자 석각에 대하여 지난 3월 초암능선에서 '大'자 석각을 발견하였다. 석각 아래에 아라비아 숫자가 있다. 6월에는 선녀굴 아래에서, 7월 말에는 선녀굴골 은병암(隱屛岩)에서 '大'자 석각을 찾았다. 8월 6일에는 우수청골 주막터(함양군 마천면 삼정리 525번지)에서 '大'자 석각을 만났다. 여러 곳에 문의하였으나 아직 오리무중이다. 산림청에 '大'자 석각에 대해 문의했지만, 환경부나 국립공원 관리공단에 문의하라는 답(答)을 받았다. 지적도를 확인하니 대학 연습림(국유림)과 사유지의 경계에 있다. 1917년 일제가 제작한 조선의 지형도를 살펴보자. 일제는 지리산의 식생과 생태 연구를 명목으로, 주민들을 통제하기 위해 지리산을 일본에 있는 국립 제국대학의 연습림으로 분할한다. 조선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