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대표 석각 명문 탁본전시회
▣ 일 시 : 2024년 11월 02일(토)~03일(일)
▣ 장 소 : 지리산국립공원 화개탐방안내소 2층 전시실
▣ 인 원 : 일정 민선생님, 청운 조용헌 교수님, 조봉근님, 정혜종님, 김산님
▣ 날 씨 : 맑음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2018년 3월 25일 공단 경남사무소(소장 신용석)와 합동으로 불일폭포 일원을 조사하였다. 당시 공단에서도 완폭대 석각을 찾고 있었고, 선인들의 유람록을 읽은 몇몇 사람들도 초미의 관심이었다. 4월 15일 하동분소 조봉근 주무관에게 완폭대 카톡사진이 날라왔다. 4월 17일에는 불일평전 아래 오암(㹳巖, 원숭이 바위)의 홍연(洪淵)과 이언경(李彦憬) 탁본 사진에 이어, 5월 1일에는 완폭대 탁본 사진을 받았다. 그해 7월과 8월에는 선인들의 지리산 유람록을 집대성하신 경상대학교 한문학과 최석기 교수님, 지리산 한국화의 대가 이호신 화백님과 함께 공단과 합동으로 2박 3일간 두 차례 김종직의 유두류록길을 답사하였다.
그로부터 6년이 흐른 뒤, 지난 10월 25일 '지리산 대표 석각 탁본 전시회'가 열렸다. 이 세상에 혼자서 이룰 수 있는 일은 없다. 그동안 수고하신 분들께 감사의 마음을 담아 탁본 전시회 도록을 블로그에 옮겼다. 참고로 용호구곡의 제1곡 송력동(松瀝洞)과 제2곡 옥룡추(玉龍湫)는 도록에 없어, 필자가 조사한 내용을 부기(附記)하였다. 공단 차원에서 지리산 인문학을 최초로 도입하신 신용석 소장님과 천왕봉 의병 석각을 발굴하시고, '지리산 대표 석각명문 전시회'를 총괄하신 김종식 소장님께 거듭 송공(頌功)의 말씀을 드린다. 끝.
바위글씨로 찾아가는 지리산 핫플레이스
이 세상에 변하지 않는 건, 모든 것은 변한다는 사실 뿐이다. 시간이 갈수록 또렷해지는 명제다. 모든 것이 변하기는 해도 그 변화의 속도는 제각각이다. 어떤 것은 빨리 변하고 어떤 것은 느리다. 지구 상의 물질 중에서 변화가 느린 것을 뽑으라면 단연코 바위나 돌일 것이다. 그래서 한반도에 살았던 인류도 바위·돌 유적을 많이 남겼다. 경기도 연천에서는 주먹 돌도끼라는 구석기시대 유물이 출토되었다. 울산시 태화강 상류 절벽 바위에서는 신석기시대 사람과 동물 그림이 발견되었다. 반구대 암각화라고 불리는 이것은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고래사냥 그림이다. 또한 청동기시대 고인돌 중 절반이 넘는 4만기가 한반도에 분포한다는 사실은 우리를 놀라게 한다.
우리 민족은 기록의 민족이다. 프랑스 파리에 보관 중인 직지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 인쇄물이다. 472년간의 기록인 조선왕조실록, 임진왜란 2,539일간의 기록 이순신 난중일기는 선조들의 위대한 기록유산이다. 지리산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명산이다. 내륙에서 가장 높고 넓다. 오랜 기간 수많은 생명체의 터전이고 우리 삶의 무대였다. 각자의 뜻을 가지고 지리산에 들어오고 나갔다. 승려와 무속인은 종교에 귀의하기 위해, 선비는 학문을 연마하기 위해, 민중들은 먹고살기 위해서. 그리고 그들은 지리산 구석구석 바위와 돌에 기록을 남겼다.
지리산에 바위글씨가 많이 발견된 곳은 산 중심부 천왕봉, 남쪽 쌍계사와 신흥동, 서쪽 구룡폭포 일대, 북쪽 용유담 주변이다. 그 밖에 법계사·촛대봉·대원사·백운동 계곡 등에서 보여진다. 이런 곳은 조선시대 선비와 승려들이 즐겨 찾던 명소였고, 오늘날에는 탐방객이 몰리는 핫플레이스가 되었다. 바위글씨는 산 정상부 능선과 깊은 계곡은 물론 도로·탐방로·상점 앞에서도 찾을 수 있다. 지리산 바위글씨는 첫째, 해당 지역의 명칭을 새긴 것과 둘째, 유람 온 자신의 이름을 새긴 것이 대부분이다. 전자는 당시 지역 이름을 바위에 남김으로써 향토사적 사료로서의 가치가 크며 랜드마크 역할도 하였다. 자기 이름을 새긴 후자는 지리산을 유람한 것을 기념하여 썩지 않는 돌에 이름을 새겨 후대에 전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는 당시의 유람문화를 연구 하는데 도움이 된다. 그러나, 1558년 쌍계사와 불일암을 찾은 남명 조식은 길가 바위에 새겨진 글씨를 보고 유람록에서‘이는 나는 새의 그림자만도 못해 까마득히 잊혀질 것이니, 후세 사람들이 날아가 버린 새가 무슨 새인 줄 어찌 알겠는가?’라고 강력히 비판하였다.
2024년 8월 13일. 지리산 정상 천왕봉 절벽 바위에 392자의 글씨가 발견되었다는 국내 언론의 대대적인 보도가 있었다. 이것은 100년 전 일제강점기 독립을 염원하는 독립운동가의 글이었다. 글자 수, 내용 면에서 앞의 단순 지명, 이름을 새긴 글씨와는 차원이 다른 것이다. 대하소설이나 대서사시와 같은 메시지 이야기가 있는 글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야기 바위글씨는 우리나라에서 찾아보기 어렵다. 지리산은 독특한 공간이다.
지리산국립공원의 역사자원으로서 바위글씨는 지리산 일원에 널리 분포하고 있다. 아마도 통일신라시대인 813년 이후부터 1967년 국립공원 지정 이전까지 새겨진 것으로 추정된다. 많은 조선시대 선비들은 바위글씨를 보고 감흥을 유람록에 기록하였고, 또 일부는 석공을 시켜 자신의 이름을 바위에 새기기도 하였다. 지난날의 글씨지만 현재 지리산의 이야기가 되어 탁본 전시회가 열게 되었다. 바위에 글씨를 새긴 사람들의 마음속으로 떠나는 과거로의 시간여행은 어떤가? 더 나아가 바위글씨가 있는 현장을 직접 찾아가서 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김 종 식 소장
지리산국립공원경남사무소
■ 지리산국립공원 화개탐방안내소 2층 기획전시실
■ 쌍계석문(雙磎石門)
표구명 | 쌍계(雙磎) |
위 치 | 경남 하동군 쌍계사 입구 |
암각면 | 가로 118.6㎝, 세로 188㎝ |
글자크기 | 가로 102.4㎝, 세로 83㎝, 획굵기 6㎝ |
만든이 | 지리산국립공원경남사무소 |
표구명 | 석문(石門) |
위 치 | 경남 하동군 쌍계사 입구 |
암각면 | 가로 98.2㎝, 세로 156㎝ |
글자크기 | 가로 73㎝, 세로 81㎝, 획굵기 4.5㎝ |
만든이 | 지리산국립공원경남사무소 |
쌍계석문(雙磎石門)
하동 십리벚꽃길 도로에서 다리를 건너 왼쪽으로 올라가면 상가 가운데 양쪽바위에 각각 새겨져 있다. 이 쌍계석문은 쌍계사의 일주문처럼 사찰의 영역 시작점에 위치한다. 쌍계사 진감선사탑비와 함께 통일신라시대 고운 최치원 선생의 필획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고려말 미수(眉叟) 이인로(李仁老, 1152~1220)는 지리산의 청학동을 찾아왔다가 시를 남겼는데, “이끼 낀 바위에는 네 글자가 희미하네 묻노니 신선이 사는 곳 그 어디인가, 꽃잎 떠오는 개울에서 길을 잃고 헤매네”라고 하였다. 여기 이끼 낀 바위에 네 글자는 쌍계석문을 본 것으로 추정된다.
1611년 유몽인의 「유두류산록」에는 “쌍계석문에 이르렀다. 최고운의 필적이 바위에 새겨져 있었는데, 글자의 획이 마모되지 않았다. 그 글씨를 보건대, 가늘면서도 굳세어 세상의 굵고 부드러운 서체와는 사뭇 다르니, 참으로 기이한 필제다. 김탁영은 이 글씨를 어린아이가 글자를 익히는 수준이라고 평하였다.”라고 기록하였다.
• 1558년 남명 조식의 「유두류록」에는 “4월 16일 김홍지와 이강이가 먼저 석문에 도착하였다. 이 곳이 바로 쌍계사 동문이다. 검푸른 빛깔의 바위가 양쪽으로 마주보고 서서 한 길 남짖 열려 있는데, 그 옛날 학사 최치원이 오른쪽에는 雙磎(쌍계)왼쪽에는 石門(석문)이라는 네 글자를 손수 써 놓았다. 글자의 획을 사슴 정강이만큼 크고 깊게 새겨놓았다. 지금까지 천 년의 세월이 흘렀는데, 앞으로 몇 천 년이나 더 남아 있을지 모르겠다.”라고 기록하였다.
■ 환학대(喚鶴臺)
표구명 | 환학대(喚鶴臺) |
위 치 | 경남 하동군 쌍계사~불일평전 구간 |
암각면 | 가로 70.4㎝, 세로 31㎝ |
글자크기 | 가로 19.5㎝, 세로 20.5㎝, 획굵기 1㎝ |
만든이 | 지리산국립공원경남사무소 |
환학대(喚鶴臺)
쌍계사에서 불일폭포를 올라가는 탐방로 약 0.7㎞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환학은 ‘학을 부른다’라는 뜻으로 고운 최치원 선생이 청학을 불러 타고 다녔다는 설화가 전해지는 바위이다.
1744년 황도익의 「두류산유행록」에는 “환학대가 있었는데, 높이가 겨우 2~3길 남짓 되었다. 마침내 환학대에 올라 이리저리 둘러보는데, 어떤 사람이 대숲에서 소리 높여 학을 부르자, 승려가 장난삼아 ‘두 마리의 학이 오늘 천상에 조회를 가서 아직 돌아오지 않았습니다.’라고 답하였다. 누가 학을 불러 유람하는 이들이 그 소리를 듣고 누대의 이름을 실감하도록 하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또한 기이하다고 할 만하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 완폭대(翫瀑䑓)
표구명 | 완폭대(玩瀑䑓) |
위 치 | 경남 하동군 화개면 불일폭포 완폭대 |
암각면 | 가로 66.5㎝, 세로 39.5㎝ |
글자크기 | 가로 16㎝, 세로 19.5㎝, 획굵기 1.7㎝ |
만든이 | 지리산국립공원경남사무소 |
완폭대(翫瀑䑓)
불일암에서 불일폭포로 내려 가는 탐방로 왼쪽편 바위에 새겨져 있다. 완폭대란 불일폭포를 완상하며 노니는 바위라는 뜻이다. 1611년 유몽인이 쓴 「유두류산록」에 처음 등장하며, 1618년 조위한의 「유두류산록」에는 “절 앞에 10여 명이 앉을 만 한 대가 있었다. 바위에 ‘완폭대’ 세 글자가 새겨져 있었으니, 또한 고운이 직접 쓴 것이다. 다섯 사람이 대 위에 둘러앉아 술잔을 씻어 술을 따랐다. …중략… 함께 시를 읊조리고 감상하느라 해가 지는 줄도 몰랐다.”
이 바위글씨는 2018년 4월에 국립공원공단 조봉근 직원이 순찰 중에 발견하였다. 이 바위글씨의 발견은 고운 최치원 선생의 설화로만 전해 내려오던 완폭대의 실체가 확인 되었다는데 의미가 있다. 2019년 11월에 경상남도기념물로 지정되었다.
■ 세이암(洗耳嵒)
표구명 | 세이암(洗耳嵒) |
위 치 | 경남 하동군 화개면 왕성초등학교 앞 |
암각면 | 가로 41.6㎝, 세로 115.8㎝ |
글자크기 | 가로 32.5㎝, 세로 35㎝, 획굵기 4㎝ |
만든이 | 지리산국립공원경남사무소 |
하동 쌍계사에서 의신마을로 올라가는 길에 왕성초등학교가 있다. 옛 신흥사 터이다. 이 학교 앞 계곡에 세이암 각석이 새겨져 있다. 신라말 고운 최치원이 이 곳에서 귀를 씻고 신선이 되어 지리산으로 입산했다는 설화가 전해지고 있다.
1724년 정식의 「두류록」에는 “신흥암에 들어갔는데, 두 시내가 합류하는 지점에 있었다. 기이한 바위와 둥근 돌이 좌우에 평평하게 널려 있었다. .... 그 가운데는 움푹하게 들어가 저절로 항아리처럼 된 것이 있는데 또한 기이한 볼거리였다. 그 바위 위에 새겨진 ‘세이암’이라는 세 글자와 동구 밖 바위 면에 새겨진 ‘삼신동’이라는 글자는 모두 고운 최치원의 글씨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 삼신동(三神洞)
표구명 | 삼신동(三神洞) |
위 치 | 경남 하동군 화개면 신흥삼거리 |
암각면 | 가로 184㎝, 세로 62.8㎝ |
글자크기 | 가로 42㎝, 세로 36㎝, 획굵기 5.5㎝ |
만든이 | 지리산국립공원경남사무소 |
삼신동(三神洞)
경남 하동군 화개면 신흥삼거리에서 칠불사로 올라가는 도로 왼편 바위에 새겨져 있다. 1611년 유몽인의 「유두류산록」의 기록에는 “동네 이름이 ‘삼신동’인데 , 이는 이 고을에 영신사, 의신사, 신흥사 세 사찰이 있기 때문이다.” 라고 하였다. 1720년 신명구의 「유두류속록」에는 “10여 리를 가서 삼신동으로 들어갔다. 암벽에 ‘삼신동’이란 세 글자가 새겨져 있었는데, 고운의 필적이었다. 홍류교·능파각의 옛터가 남아 있었는데 경치가 매우 빼어났다.”라는 기록이 있다.
■ 을묘추 이언경 홍연(乙卯秋 李彦憬 洪淵)
표구명 | 을묘추 이언경, 홍연(乙卯秋 李彦憬 洪淵) |
위 치 | 경남 하동군 쌍계사~불일평전 구간 |
암각면 | 가로 41.6㎝, 세로 58.5㎝ |
글자크기 | 가로 11.5㎝, 세로 22㎝, 획굵기 1.5㎝ |
만든이 | 지리산국립공원경남사무소 |
을묘추 이언경 홍연(乙卯秋 李彦憬 洪淵)
경남 하동군 쌍계사에서 불일폭포를 올라가는 탐방로 약 1㎞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을묘년(1555년, 명종10년) 가을에 이언경과 홍연이 이곳을 다녀갔다는 뜻이다. 1558년 남명 조식의 유두류록에 이 글자를 보고, “ 아마도 썩지 않는 돌에 이름을 새겨 억만년토록 전하려 한 것이라. 대장부의 이름은 마치 푸른 하늘의 밝은 해와 같아서, 사관이 책에 기록해두고 넓은 땅 위에 사는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려야 한다. 그런데 사람들은 구차하게도 원숭이와 너구리가 사는 숲속 덤불의 돌에 이름을 새겨 영원히 썩지 않기를 바란다. 이는 나는 새의 그림자만도 못해 까막득히 잊혀질 것이니, 후세 사람들이 날아가버린 새가 과연 무슨 새인 줄 어찌 알겠는가?”라고 강력 비판하였다.
■ 김정(金釘), 이상일(李尙逸), 이진필(李震馝), 오두인(吳斗寅), 김집(金緝), 신묘중동(辛卯仲冬)
표구명 | 오두인 각석 |
위 치 | 경남 하동군 화개면 대성리 수곡골 |
암각면 | 가로 88.4㎝, 세로 49.6㎝ |
글자크기 | 가로 14㎝, 세로 11㎝, 획굵기 1㎝ |
만든이 | 지리산국립공원경남사무소 |
김정(金釘), 이상일(李尙逸), 이진필(李震馝), 오두인(吳斗寅), 김집(金緝), 신묘중동(辛卯仲冬)
김정, 이상일, 이진필 오두인, 김집 辛卯(1651)년 한 겨울
경남 하동군 화개면 의신마을에서 세석대피소로 가는 탐방로 1.5㎞지점에 대성 마을이라는 작은 산촌마을이 있다. 여기에서 계곡을 건너 건너편 골짜기로 약 600여미터 정도 올라가면 큰 바위 아래 샘터가 있고, 샘터 바로 위에 이 각석이 새겨져 있다. 2019년 11월 8일 하동분소 조봉근 계장이 발견하였다.
1651년 오두인의 「두류산기」에는 “저녁 무렵에 작별하고 다시 10리를 가서 작은 암자에 이르렀는데 은정대(隱井臺)라고 하였다. 이 암자는 산 정상에 있어 속세와 일찌감치 떨어져 있는 곳이었다. 학승 담희가 그곳에 거처하고 있었는데, 그를 따라 공부하는 자가 10여 명이라고 하였다. 암자 뒤쪽에 바위가 있는데, 바위 아래에 샘이 솟았다. 이른바 은정이라는 것이 바로 이 샘터이다. 마침내 그 바위에 함께 유람 온 이들의 성명을 김정, 이상일, 이진필, 오두인, 김집의 순으로 적었다. 첫 번째가 찰방 김정, 그 다음이 진주 목사 이상일, 그 다음이 하동 태수 이진필, 내가 네 번째였는데 나이순으로 정한 것이다. 그대로 바위에 새기게 하여 훗날의 표지로 삼았다. 이날은 은정대에서 묵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 고려낙운거사 이청련서 (高麗樂雲居士 李靑蓮書)
표구명 | 고려낙운거사이청련서(高麗樂雲居士李靑蓮 書) |
위 치 | 경남 산청군 시천면 세석평전 촛대봉 |
암각면 | 가로 42.4㎝, 세로 114.4㎝ |
글자크기 | 가로 17㎝, 세로 19㎝, 획굵기 2㎝ |
만든이 | 지리산국립공원경남사무소 |
고려낙운거사 이청련서 (高麗樂雲居士 李靑蓮書)
세석평전 동쪽 촛대봉 정상에서 도장골 방면에 천왕봉을 바라보는 바위에 새겨져 있다. 마모가 심하여 글자를 알아보기가 어렵다. 벽소령 선비샘 아래 1462년에 새긴 천우동(天羽洞) 바위글씨에 이청련이라는 이름이 있어 동일 인물로 추정하고 있다. 이 바위글씨도 비슷한 시기에 새겼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1851년 하달홍의 「두류기」에는“옷과 갓을 벗고 몸을 구부리고 20리를 가서 중봉(현 촛대봉)의 꼭대기에 이르렀다. 바위에 ‘고려낙운거사이청련서’10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필력이 고풍스러우면서도 강건하였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 봉산정계(封山定界)
표구명 | 봉산정계(封山定界) |
위 치 | 경남 함양군 벽소령대피소 인근 |
암각면 | 가로 59.4㎝, 세로 : 41.6㎝ |
글자크기 | 가로 19.5㎝, 세로 19㎝, 획굵기 1.5㎝ |
만든이 | 지리산국립공원경남사무소 |
봉산정계(封山定界)
조선 시대 『경국대전』의 「봉산금송(封山禁松)」조를 보면 송림 벌목을 매우 엄하게 다스렸다. 금송이란 국가가 필요한 목재를 확보하기 위해 소나무가 자라는 곳을 선정해 보호하고 벌목을 금한다는 의미이다. 이와 비슷한 용어로 금산과 봉산이 있다. 둘 다 산림을 보호하기 위한 목적으로 벌목을 금지한 제도이다. 금산이란 땔감 채취·모경·화전·토석 채취 등을 금하는 것이었다. 봉산이란 어떠한 목적에 의해 나무의 벌채를 금지한 산을 의미하는데, 조선시대에 이러한 봉산제도를 운영했다.
지리산국립공원 벽소령 대피소에서 세석대피소 방향 약 50m 가량 떨어진 자연석에 새겨진 봉산정계 석각은 과거 이 지역이 봉산으로 지정되었음을 보여준다. 조선시대에도 지금과 같이 나라에서 출입금지 구역을 지정하여 정책적으로 산림자원을 보호하였다. 봉산정계 석각은 국립공원 안에서 기록에 없는 새로운 금표의 출현이라는 점과 산림 관련 금표로 추정된다는 점에서 그 가치가 높다.
■ 천우동 경태임오춘 이청련서(天羽洞 景泰壬午春 李靑蓮書)
표구명 | 하동 천우동 이청련 각석 |
위 치 | 경남 하동군 화개면 벽소령 선비샘 일원 |
암각면 | 가로 55㎝, 세로 55㎝ |
글자크기 | 가로 12㎝, 세로 11㎝, 획굵기 1㎝ |
만든이 | 지리산국립공원경남사무소 |
천우동 경태임오춘 이청련서(天羽洞 景泰壬午春 李靑蓮書)
벽소령 선비샘에서 하동 방향으로 약 1㎞ 아래 위치한 움막터 옆 샘터 바위에 천우동 경태임오춘 이청련서 석각이 세로로 새겨져 있다. 이 위치에 천우동이라는 마을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경태는 명나라 대종의 연호이다. 임오년은 대종의 재위하였을 때가 아니고, 영종이 복위한 천순 6년으로 1462년(세조 8년)이다. 세석평전 동쪽에 위치한 촛대봉 일원에 새겨진 고려낙운거사 이청련서(高麗樂雲居士 李靑蓮書) 각석에 있는 이청련과 같은 인물로 추정된다.
※ 갱정유도(更定儒道)의 부응경(符應經)에 나오는 천우동(天羽洞)
부응경(符應經)은 갱정유도(更定儒道, 일명 一心敎) 제1대 교조 강대성(姜大成, 1890~1954)의 어록이다. 1930년 송목(松木)에 결항이사(結項而死)한 부인과 아들 삼인(三人)이 생사교역(生死交易)을 한 뒤, 천어문답(天語問答)한 도덕경전과 시가문을 교조가 직접, 또는 제자들이 필사해 놓은 것이다. 부응경(符應經)은 천부경에 응답한다는 의미인 듯하다.
부응경(符應經)에 1931년 12월 '강대성 교조가 아들 용학과 함께 덕평마을의 천우동(天羽洞) 경태임오춘(景泰壬午春) 이청련서(李靑蓮書) 석각을 보고, 崔처사의 집에서 하룻밤 묵어갔다.'는 내용이 있다.
■ 윤광안(尹光顔), 이낙수(李洛秀), 남주헌(南周獻), 정유순(鄭有淳), 숭정삼 정묘 모춘(崇禎三丁卯暮春)
표구명 | 윤광안 등 4명 인명 각석 |
위 치 | 지리산 천왕봉 일원 |
암각면 | 가로 148㎝, 세로 94.4㎝ |
글자크기 | 가로 28.6㎝, 세로 31.5㎝, 획굵기 2㎝ |
만든이 | 지리산국립공원경남사무소 |
윤광안(尹光顔), 이낙수(李洛秀), 남주헌(南周獻), 정유순(鄭有淳), 숭정삼 정묘 모춘(崇禎三丁卯暮春) : 윤광안, 이낙수, 남주헌, 정유순이 1807년 3월 29일(음력) 봄에 오르다.
천왕봉 헬기장에서 정상석으로 가는 길 정면에 비교적 완만한 바위에 새겨져 있어 탐방객이 올라 갈 때 많이 지나가는 곳 중 하나이다. 남주헌의 지리산행기에 의하면“큰 바위 한 면에 ‘관찰사 윤광안, 진양백 이낙수, 방장수 남주헌, 회계위 정유순’이라고 새기고, 또 ‘순정삼정묘모춘(崇禎三丁卯暮春)’ 7자를 새겼는데, 모두 나의 글씨이다. 석벽에 선배들의 성명이 새겨진 것을 종종 보았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다음날 3월 30에 천왕봉에 오른 하익범은 함양 아전 임시혁·임상언과 석수가 관찰사 일행의 이름을 바위에 새기는 것을 보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 일출봉(日出峰)
표구명 | 일출봉(日出峯) |
위 치 | 경남 산청군 시천면 법계사 앞 |
암각면 | 가로 : 113㎝, 세로 : 43㎝ |
글자크기 | 가로 40㎝, 세로 31㎝, 획굵기 3㎝ |
만든이 | 지리산국립공원경남사무소 |
일출봉(日出峰)
일출봉 석각은 법계사 서쪽을 지나는 등산로와 접해 있는 상당히 넓은 반석 끝에 새겨져 있다. 봉우리처럼 솟아오른 지형이 아닌 평지에 가까운 반석을 일출봉이라고 한 것은 전망이 훤히 틔여있고, 앞에 세존봉이 보이며, 먼 동쪽은 눈에 거슬리는 것 없이 아침 해돋이를 보기에 안성맞춤이라 그리 불리운 것 같다. 일출봉은 고운 최선생이 법계사에서 머물 때 이곳에 나와 해돋이를 즐겼다는 설화가 전해고 있으나, 석각을 누가 새겼는지 연원은 알 수 없다.
■ 제석당(帝釋堂) 박노익건옥(朴魯翊建屋) 임술칠월(壬戌七月)
표구명 | 제석당(帝釋堂) |
위 치 | 경남 함양군 장터목대피소 제석단 일원 |
암각면 | 가로 : 77㎝, 세로 : 59.6㎝ |
글자크기 | 가로 35㎝, 세로 43㎝, 획굵기 1㎝ |
만든이 | 지리산국립공원경남사무소 |
제석당(帝釋堂) 박노익건옥(朴魯翊建屋) 임술칠월(壬戌七月)
장터목대피소에서 천왕봉 방향 데크 계단 위에서 좌측으로 약 300m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오래전부터 제를 지내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각석은 천왕봉 방향에 위치 한 바위에 새겨져 있다. 1923년 개벽 제34호 지리산보(1923.04.01.)에 “함양 군수 민인호가 함양명승고적보존회(보승회)를 조직하여 동군 유지 강위수는 등산객들의 편리를 위하여 천왕봉에 망해정을 짓고, 박노익과 영원사승 일동은 제석당을 건축하였으며, 이진우와 벽송사승 일동은 마암당을 건축 하였는데 두 곳이 모두 중봉이다.” 라고 하였다.
※ 박노익(朴魯翊, 1875~?)은 한말과 일제 강점기에 마천면 창원 마을에 살았다. 본관은 밀양, 字는 성순(性舜), 號는 춘파(春坡), 벼슬은 참봉(參奉) 乙亥(1875년)생이다. 박노익(朴魯翊)은 최익현의 면암집 동맹록에 이름이 올라있다. 한일 강제 합병의 시점에 2대 마천면장을 지낸 인물이다. 면장의 임기를 마치고, 1922년 함양군수 민인호가 주관하는 함양고적보존회 사업에 참여하여 영원사 승려들과 제석봉에 제석당 건물을 지었다.
■ 제석암(帝釋巖)
표구명 | 제석암(帝釋巖) |
위 치 | 경남 함양군 장터목대피소 제석단 일원 |
암각면 | 가로 : 118.5㎝, 세로 : 30.4㎝ |
글자크기 | 가로 16㎝, 세로 25.5㎝, 획굵기 1.5㎝ |
만든이 | 지리산국립공원경남사무소 |
제석암(帝釋巖)
제석당 박노익건옥 임술칠월(帝釋堂 朴魯翊建屋 壬戌七月) 각석 바로 아래 새겨져 있다. 마모가 심하여 알아보기기 힘들다. 누가 언제 새겼는지 알 수가 없다.
■ 입덕문(入德門)
표구명 | 입덕문(入德門) |
위 치 | 경남 산청군 시천면 |
암각면 | 가로 183㎝, 세로 67㎝ |
글자크기 | 가로 51㎝, 세로 55㎝, 획굵기 7㎝ |
만든이 | 지리산국립공원경남사무소 |
입덕문(入德門)
경남 산청군 단성면에서 지리산으로 들어가는 시천면 소리당 마을 700m 전 위치하고 있다. 예전에는 이곳이 바위 절벽으로 사람이 겨우 지나 갈수 있을 정도 길만 있었는데 길을 넓히면서 기존에 있던 입덕문 바위글씨는 부서지고 지금의 위치에 다시 새겨 복원해 놓았다. 입덕문은 덕으로 들어가는 문이라는 뜻으로, 옛날 덕천동으로 들어가는 순례자는 덕천벼리를 따라가다 덕산의 입구를 의미하는 이 입덕문을 볼 수 있었다.
■ 남명선생장구지소(南冥先生杖屨之㪽)
표구명 | 남명선생장구지소(南冥先生杖屨之㪽) |
위 치 | 경남 산청군 단성면 백운동 계곡 |
암각면 | 가로 116㎝, 세로 40㎝ |
글자크기 | 가로 9㎝, 세로 11㎝, 획굵기 1㎝ |
만든이 | 지리산국립공원경남사무소 |
남명선생장구지소(南冥先生杖屨之㪽)
경남 산청군 단성면 백운동 계곡 점촌마을에서 계곡을 따라 약 0.7㎞ 올라가면 오른쪽에 위치하고 있다. 이곳은 남명 조식이 3번 정도 찾았다고 한다. 물천 김진호의 「백운동각남명선생유적기」에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마침내 서로 손을 잡고 골짜기로 들어가 ‘남명선생장구지소’ 여덟 자를 진로폭에 새기고 돌아왔다... 벼랑에 글씨를 새긴이는 하헌진(1859~1921) 이고 때는 계사년(1893) 중오절(음력 5월 5일, 단오)이였다.”
■ 통천문(通天門)
표구명 | 통천문(通天門) |
위 치 | 지리산 장터목~천왕봉 구간 |
암각면 | 가로 38㎝, 세로 93.4㎝ |
글자크기 | 가로 26㎝, 세로 30㎝, 획굵기 2㎝ |
만든이 | 지리산국립공원경남사무소 |
통천문(通天門)
하늘로 통하는 문이라는 뜻이다. 장터목에서 천왕봉 정상으로 올라가는 길에 위치하고 있다. 지금은 철 계단이 설치되어 있어, 석굴 안으로 통과해서 올라 갈수 있게 되어있다. 옛길은 통천문 각석 왼편으로 가면 한사람이 몸을 구부리고 갈 수 있는 길이 남아있다. 1472년 김종직의 유두류록 기록에 의하면, “나는 '여러 날 동안 날씨가 계속 흐리다 갑자기 맑게 개니 하늘이 나에게 베풀어주는 것이 많구나, 지금 천왕봉이 지척에 있는데 힘써 오르지 않는다면 평생 답답한 마음을 끝내 말끔히 씻어버릴수 없을 것이다.’라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드디어 새벽밥을 재촉해 먹고 아랫도리를 걷어 붙이고서 지름길로 석문을 통하여 위로 올라갔다.” 누가 언제 새겼는지는 알 수 없다.
표구명 | 지리산 천왕봉 천주(天柱) |
위 치 | 지리산 천왕봉 일원 |
암각면 | 가로 44.5㎝, 세로 90.5㎝ |
글자크기 | 가로 33㎝, 세로 33㎝, 획굵기 6㎝ |
만든이 | 지리산국립공원경남사무소 |
천주(天柱)
하늘을 떠 받치는 기둥이라는 뜻으로 풀이된다. 일월대(日月臺)와 함께 천왕봉을 상징한다. 바위글씨의 위치는 천왕봉 헬기장에서 정상으로 올라가는 쪽 바위 정면에 있어 찾는데 크게 어렵지는 않다. 지리산 유산기록 중에서도 이 각자에 대한 언급은 찾기 어렵다. 일월대가 여러 글에 나오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이렇게 본다면 새긴 시기가 그리 오래되지 않은 것으로 추정한다.
■ 방장문(方丈門)
표구명 | 방장문(方丈門) |
위 치 | 경남 함양군 마천면 쑥밭재 일원 |
암각면 | 가로 33.8㎝, 세로 88㎝ |
글자크기 | 가로 26㎝, 세로 28.5㎝, 획굵기 2.7㎝ |
만든이 | 지리산국립공원경남사무소 |
방장문(方丈門)
2020년 5월 16일 점필재 김종직의 유두류록에 나타난 유람로를 조사하던 중에 발견되었다. 김종직은 1472년 8월 14일 관아를 출발하여 고열암에서 자고 청이당을 지나 영랑대로 올라갔다. 「유두류록」에 구롱 (九隴)을 지났다고 기록이 되어있는데, 이 곳에 아홉모랭이길(九隴)이 있다. 그 길을 찾아 조사를 이어가던 중 여덟모랭이와 쑥밭재 사이에서 하동분소 조봉근 계장이 방장문 각석을 발견하였다. 이 길은 기존의 능선 길보다 경사가 심하지 않아 오래전부터 천왕봉을 유람할 때 이용한 길 중 하나로 추정된다.
방장문에서 丈(장)의 오른쪽 상단에 丶(점주)가 더해진 글자는 이체자이다. 명나라 때 양명학의 창시자 왕수인(1472~1528)의 필체에서 사용되었다. 각석의 상태가 깊고 양호한 것으로 보아 새긴 시기는 1900년대로 추정하고 있으며, 누가 언제 새겼는지는 알 수가 없다.
1472년 김종직의 「유두류록」에는 “아홉 고개(九隴)를 다 지나고 산등성이를 따라 걸어가자 지나는 구름이 갓을 스쳤다. 풀과 나무들은 비가 내리지 않았는데도 젖어 있었다. 그제서야 비로소 하늘과 멀지 않음을 알았다. 몇 리를 못 가서 산줄기가 갈라지는데, 그 산등성이를 따라 남쪽으로 가면 진주 땅이다. 안개가 자욱하여 주위를 조망 할 수 없었다. 청이당에 도착하였는데, 판자로 지은 집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 용유동천(龍游洞天)
표구명 | 용유동천(龍游洞天) |
위 치 | 경남 함양군 마천면 용유담 |
암각면 | 가로 116.4㎝, 세로 41.4㎝ |
글자크기 | 가로 25㎝, 세로 31.8㎝, 획굵기 2㎝ |
만든이 | 지리산국립공원경남사무소 |
용유동천(龍游洞天)
용유담은 경남 함양군 마천면과 휴천면 경계에 위치하고 있다. 구룡정이라는 정자가 있는데 그 앞 계단으로 내려가면 바로 앞 바위에 이 각석이 새겨져 있다. 동천(洞天)은 경치가 뛰어난 곳을 이르러 부른다. 여기 용유담에는 많은 유학자들이 유람을 하러 온 곳 중 하나이다. 계곡 곳곳에 그 이름들이 새겨져 있는 것을 확인 할 수 있다. 용유동천의 각석은 누가 언제 새겼는지는 알 수가 없다.
■ 용유담(龍游潭)
표구명 | 용유담(龍游潭) |
위 치 | 경남 함양군 마천면 용유담 |
암각면 | 가로 68.5㎝, 세로 73㎝ |
글자크기 | 가로 21㎝, 세로 21.5㎝, 획굵기 3㎝ |
만든이 | 지리산국립공원경남사무소 |
용유담(龍游潭)
용유담은 경남 함양군 마천면과 휴천면 경계에 위치하고 있다. 마을로 들어가는 다리를 건너 계곡 왼쪽을 따라 올라 가면 용유담 샘터 앞에 이 글자를 찾을 수 있다.
1611년 유몽인의 「유두류산록」에는 “용유담에 이르렀다. 층층이 봉우리가 겹겹이 둘러 있는데 모두 흙이 적고 바위가 많았다. 무른 삼나무와 붉은 소나무가 울창하게 서있고, 칡넝쿨과 담쟁이 넝쿨이 이러저리 뻗어 있었다. 일(一 )자로 뻗은 거대한 바위가 양쪽 언덕으로 갈라져 큰 협고을 만들고 모여든 강물이 그 안으로 흘러드는데, 세차게 쏟아져 흰 물결이 튀어오른다, 돌이 사나운 물결에 깎여 움푹 패이기도 하고, 불쑥 솟구치기도하고, 우뚝우뚝 솟아 틈이 벌어지기도 하고, 평탄하여 마당처럼 되기도 하였다. 높고 낮고 일어나고 엎드린 것이 수백 보나 펼쳐져 있어 형상이 천만 가지로 다르니, 다 형용할 수 없었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 용유담 방장제일강산(龍游潭 方丈第一江山)
표구명 | 방장제일강산(方丈第一江山) |
위 치 | 경남 함양군 마천면 용유담 |
암각면 | 가로 241.6㎝, 세로 55㎝ |
글자크기 | 가로 26㎝, 세로 38.5㎝, 획굵기 4㎝ |
만든이 | 지리산국립공원경남사무소 |
용유담 방장제일강산(龍游潭 方丈第一江山)
용유담은 경남 함양군 마천면과 휴천면 경계에 위치하고 있다. 서에서 동으로 흐르는 용유담 계곡 북쪽면 하류에서 이 바위글씨를 확인할 수 있다. 계곡 건너편에 용유담 샘터가 있다. 용유담에는 가사어라는 고기가 있었다고 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며 “그 물에 물고기가 있는데 등에 중의 가사 같은 무늬가 있는 까닭으로 이름을 가사어라 한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우리나라 토종 어류인 갈겨니나 황어라고 하는 이도 있지만, 기후변화나 무분별한 포획으로 멸종 된 어종일 가능이 있다.
■ 용호구곡의 일곡(一曲) 송력동(松瀝洞)
표구명 | 일곡 송력동(一曲 松瀝洞) |
위 치 | 경남 남원시 |
암각면 | |
글자크기 | |
만든이 | 지리산국립공원경남사무소 |
송력동(松瀝洞)이 용호구곡 중 제1곡(曲)이다. 주변에 송림이 울창하다. 석녀골(송력골) 남쪽 1리에 송림사(松林寺)가 있었다고 전한다. 난사(蘭史) 김사문(金思汶, 1889∼1978)의 「용호구곡경승안내(龍湖九曲景勝案內, 1940)」에 '송림사 폐사지에 무너진 탑(敗塔)이 남아있다.'라고 하였다. 송력동(松瀝洞)의 이름은 송림약천(松林藥泉, 송림약수)에서 유래하였다. 송림약천(松林藥泉)은 여궁석(女宮石)을 가리키는 듯하다. 옥녀봉 아래 여궁석(女宮石)의 강한 음기(陰氣)를 막기 위해 비보 풍수 시설인 돌로 쌓은 축대(築坮)가 있다.
김사문의 「용호구곡경승안내」에 "송림 축대(松林築坮)를 넘어서 수 보를 나아가면 한 길 높이의 바위 이마에서 청류가 구슬처럼 드리우니 이곳이 소위 송림약천(松林藥泉)이. 봄과 여름이 바뀔 때 머리를 감고 몸을 씻는 사람들(화장한 여자와 시원한 건을 쓴 남자)이 길을 다투어 운집하니 송력동(松瀝洞)의 이름이 이로부터 유래했다." '송림약천(松林藥泉)에서 목욕을 하면 아들을 낳고 병이 낫는다.'라는 속설(俗說)이 있다. 김재홍(金在洪, 1867~1939)은 여궁석(女宮石)을 송력동(松瀝洞)으로, 김사문(金思汶, 1889∼1978)은 송림약천(松林藥泉)으로 에둘러 표현하였다. 봄에 내촌마을 사람들이 이곳에서 화전(花煎)놀이를 했다고 한다. 이곳에서 기(氣)를 받기 위해서 밀가루 음식만 먹었다고 하니, 내촌마을 사람들의 치유 공간이었던 셈이다.
■ 이곡 옥룡추(二曲 玉龍湫)
표구명 | 이곡 옥룡추(二曲 玉龍湫) |
위 치 | 경남 남원시 |
암각면 | |
글자크기 | |
만든이 | 지리산국립공원경남사무소 |
김재홍(金在洪)의 용호구곡10영과 김사문(金思汶)의 「용호구곡 경승안내」에는 제2곡을 옥녀봉(玉女峰)으로 기록하고 있다. 석각은 제2곡이 옥룡추(玉龍湫)이다. 옥녀봉 용호정 아래 흰 바위로 둘러싸인 못을 일명 '용소(龍沼)'라고 하며, 옥룡추(玉龍湫), 또는 불영추(佛影湫)라고 한다. 불신당(佛神堂)에 '용호석문(龍湖石門)'과 '방장제일동천(方丈第一洞天)' 각자 사이에는 석불이 있었는데, 이 석불의 그림자가 소에 비친다고 해서 불영추(佛影湫)라고도 한다. 옥룡추(玉龍湫)는 '용이 사는 옥처럼 푸르고 깊은 소(沼)'를 의미한다. 용호구곡 가운데 규모가 가장 크다. 용호구곡의 이름을 짓고 석각을 새긴 이는 영송(嶺松) 김재홍(金在洪, 1867~1939)이고, 석각의 시기는 1929년이다.
■ 龍湖品題(용호품제) : 용호구곡에 대해 하나하나 이름을 붙였다.
龍湖品題
己巳春 松寮 與諸同志 游湖上 選次九曲地名 刻平石 年八斗孫 待行 三月望日
용호구곡에 대해 하나하나 이름을 붙였다.
기사(1929) 년 봄 영송(嶺松)의 동료들(?)이 여러 동지들과 용호구곡을 유람하고 구곡의 지명을 선별해 차례대로 정하고서 평평한 돌에 새겼다. 나이 여덟 살 된 손자 斗秀가 모시고 갔다. 삼월 보름.
※ 寮의 판독이 확실하지 않다. 용호품제 석각은 김재홍의 아들 입헌(立軒) 김종가(金種嘉, 1889~1975)가 새긴 것으로 전한다.
注 김재홍(金在洪,1867~1939) : 조선 말기 유학자. 호는 영송(嶺松)·수오재(遂吾齋)이고, 전라북도 남원(南原) 두동(杜洞)에서 출생하였다. 가은공(稼隱公)의 7세손으로, 조부는 강암공(剛庵公)과 모친 조씨(趙氏) 사이에 태어났다. 처부는 이승갑(李承甲)이다. 7세 때 취학(就學)하여 한 번 보면 오래도록 기억하고 학문을 게을리하지 않아, 조부 강암공이 기뻐하며 반드시 학문에 성취가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 14세에 이미 사서삼경(四書三經)을 마치고, 이후 제자백가(諸子百家)의 서책을 두루 섭렵하였다. 부인은 양녕대군(讓寧大君) 이제(李禔)의 후손 완산이씨(完山李氏)이다. 저술로는 시문집 『수오재선생문집(遂吾齋先生文集)』 목활자본 19권 10책이 있는데, 1951년 아들 김종가(金種嘉 , 1889~1975) 등이 편집 간행하였으며, 권말에 김종가의 발문이 있다.
출처 : 한국학중앙연구원-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
■ 천왕봉 의병 관련 바위글씨 사진
사 진 | 지리산 천왕봉 의병 관련 각석 |
위 치 | 지리산 천왕봉 남쪽 사면 |
암각면 | 가로 410㎝, 세로 190㎝ |
글자크기 | 가로 10㎝, 세로 8㎝, 획굵기 0.5㎝ |
만든이 | 지리산국립공원경남사무소 |
천왕봉 의병 관련 바위글씨
지리산국립공원경남사무소는 2024년 2월부터 8월까지 6개월 동안 천왕봉 바위글씨를 조사 한 결과, 전체 폭 4.2m, 높이 1.9m, 약 392여 글자 확인했다. 판독과 번역을 통하여 1924년 7월 일제강점기 의병으로 활동하던 묵희(墨熙)가 글을 쓰고, 권륜(權倫)이 새겼다는 것을 밝혀냈다. 그 판독 내용은 일제강점기 천왕(天王)을 상징하는 지리산 천왕봉의 위엄을 빌어 광복을 이루고자 하는 염원을 동아시아 역대 왕조의 흥망을 예를 들어 서사적으로 묘사·기록한 것이다.
「오늘날 천지가 크게 닫혔다고 하는데, 다시 열리는 기미는 언제쯤일까? 오랑캐를 크게 통일하여 문명이 밝게 빛나고 넓게 퍼져가는 날을 반드시 다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 울분과 원통함을 금치 못하고서 피를 토하고 울음을 삼키며 이 남악(지리산) 천왕봉에 올라 만세 천왕의 대일통을 기록한다. 아! 슬프다. 나라를 잃은 유민 고죽 묵희가 짓고, 화산(안동) 권륜이 쓰다.」
향후 산청군과 업무협업으로 경상남도 지정문화유산 등의 지정 신청을 추진 중이다. 또한 묵희, 권륜 등 관련된 인물들에 관하여 추가적인 관련 연구가 필요하며, 지속적인 연구로 아직 밝혀지지 않은 지리산권 신규 독립유공자 발굴을 기대한다.
■ 횡하대(橫河䑓)
표구명 | 횡하대(橫河䑓) |
위 치 | 경남 산청군 삼장면 안내원 물레방아골 |
암각면 | 가로 139.5㎝, 세로 49.8㎝ |
글자크기 | 가로 32㎝, 세로 32㎝, 획굵기 3㎝ |
만든이 | 지리산국립공원경남사무소 |
횡하대(橫河䑓)
경남 산청군 삼장면 안내원 마을에서 물레방아골로 약 1㎞ 지점에 위치한다. 올라가는 길이 상당히 가파르고 협곡이 좁은 편이지만 횡하대 각석이 있는 곳에 도착하면 조그만한 계곡과 그 위에 상당히 넓은 터가 있다는 것을 확인 할 수 있다. 이곳이 명원정사(明源精舍) 터라고 알려져있다. 이곳은 의병장으로 알려진 권상순(權相舜)이 의병을 양병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명원정사향사록」에는 권병국(權秉局)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권상순과 권병국이 동일 인물인지는 앞으로 조사와 연구가 필요하다. 여기에 권륜(權倫)의 이름도 기록되어 있는데, 천왕봉에 의병 관련 각자를 새긴이도 권륜이다. 횡하대 각석 아래에 계곡이 흐르는데 마치 계곡을 횡으로 가로 지르듯 흐르고 있다. 계곡 건너편 바위에 횡하대 한시가 새겨져 있다. 청하 권병국이 지었으며 문집인 『청하일감(淸河日鑑)』에 기록되어 있다. 횡하대 각석 아래 청하(淸河)도 새겨져 있으며, 그 위 너럭바위에는 세심동(洗心洞) 각석도 있다.
■ 횡하대(橫河䑓) 詩
橫河䑓(횡하대)
청하 권병국(淸河 權秉局)
臺出天高体 : 대는 하늘 높이 형체을 드러내고
沄如垂漢流 : 세찬 물길은 은하수를 드리운듯 흐르네 .
意味這中得 : 청하(淸河)의 의미를 이 안에서 얻었으니
我愛此一區 : 나는 이 곳(한 구역)을 좋아한다네.
注 『청하일감(淸河日鑑)』 원문에는 1구 臺는 坮, 4구 '愛'는 '怜(사랑할련 : 憐)'으로 되어있다.
■ 일월대(日月臺)
표구명 | 지리산 천왕봉 일월대(日月臺) |
위 치 | 지리산 천왕봉 |
암각면 | 가로 107㎝, 세로 297.5㎝ |
글자크기 | 가로 57㎝, 세로 76㎝, 획굵기 6㎝ |
만든이 | 지리산국립공원경남사무소 |
일월대(日月臺)
천왕봉을 상징하는 바위글씨 중 하나이다. 지리산 천왕봉 제일 높은 바위 아래에 새겨져 있는데, 글자 크기로 보아 크게 새길 수 있는 바위에 새긴 것으로 추정된다. 해가 뜨고 지는 것과 달이 뜨고 지는 것을 한 자리에서 볼 수 있는 곳이라고 해서 일월대라고 하였다고 한다. 일월대에 대한 기록은 구당 박장원이 1643년에 쓴 「유두류산기(流頭流山記)」 기록이 제일 오래 되었다
“달빛과 별빛이 서로 비춰 온통 은색의 세상으로 변했다. 피리 부는 악공이 사당 뒤편 일월대에 앉아 보허사 한 곡을 경괘하게 불자, 뼈 속이 서늘해지고 혼이 맑아지면서 두 어깨가 들썩이는 듯 하였다.”- 구당 박장원의「유두류산기」
각자 옆에 정태현서란 석각이 있다. 정태현(1858~1919)은 일두 정여창의 14대 후손이다. 『죽헌집(竹軒集 )』권지칠(卷之七) 부록(附錄)「가장(家狀)」에 1886년에 지리산과 덕유산을 유람한 기록이 있어, 이 시기에 일월대를 새긴 것으로 추정한다.
『竹軒集(죽헌집)』卷之七(권지칠) 附錄(부록)「家狀(가장)」
1886(병술)년 한성부주부 전환국 위원이 되었다. (중략) 다시 두류산과 덕유산을 유람하면서 선조 문헌공께서 유람하신 곳과 지나가신 곳에 대해서 두루 찾아가 감동을 시로 지었다. 두류산 상봉에 이르러 특별히 시를 짓고 바위에 글자를 새긴 것은 '간진천만첩(看盡千萬疊)'이란 선조의 시구에 더욱 감격했기 때문이다.[丙戌 漢城府主簿典圜局委員(중략)再遊頭流德裕 而至於先祖文獻公杖屨所 過之處 莫不周訪感賦 至於頭流上峯 特題詩刻石者 益感看盡千萬疊之句也.]
※ 죽헌(竹軒) 정태현(鄭泰鉉, 1858~1919)
일두(一蠹) 정여창(鄭汝昌)의 14대손으로 하동정씨 문헌공파 세보와 죽헌집 가장에 따르면 ‘1901년 충북관찰사로 부임하여 해를 이어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굶어 죽자 함양 본가에서 수천 석의 곡식을 운반하여 도민들을 구휼하였다.’고 한다.
▣ 참고문헌
- 『선인들의 지리산 유람록』, 돌베개, 2000. 이륙 외 지음, 최석기 외 옮김
- 『용이 머리를 숙인 듯 꼬리를 치켜든 듯: 지리산유람록』, 보고사, 2008. 이륙 외 지음, 최석기 외 옮김
- 『선인들의 지리산 유람록 3~6권』, 보고사, 2009~2013. 박래오 외 지음, 최석기 외 옮김
- 산청석각명문총람, 산청문화원, 2016. 권유현 지음, 발행인 이효근
- 2014년 지리산 지리산국립공원 스토리텔링 개발사업 용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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