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六友堂記/마애석각 57

제석당터 석각 제석암&감로천외(180804)

제석당터 석각 제석암&감로천외(180804) 帝釋堂朴魯翊建屋壬戌七月日(1922년 7월) ♣ 개벽 제 34호 지리산보(1923년 4월 1일) 현재 咸陽郡守 閔麟鎬씨는 空殼의 名勝古蹟이나마 보존하랴고 保勝會를 조직하고 智異山을 세계에 소개하기 위하야 智異山誌를 葺輯 중이오, 同郡有志 姜渭秀씨는 遊山하는 人의 편리를 圖키 위하야 山上에 望海亭을 건축하고 朴魯翊 及 靈源寺僧 一同은 帝釋堂을 건축하얏스며 李璡雨 及 碧松寺僧 一同은 馬岩堂을 건축하야(兩處는 皆 中峯) 本年 陽春佳節에 開山式을 行하랴 한다. 此가 本山의 幸이라 할지. 帝釋岩(제석암) 甘露泉(사진 이상운) 甘露泉

불일폭포 翫瀑䑓(완폭대)의 立石及刻字(180417)

불일폭포 翫瀑䑓(완폭대)의 立石及刻字(180417) 지난 3월 25일 불일폭포 일원을 함께 답사한 팀장인 님이 翫瀑䑓 刻字 사진을 보내왔다. 내가 읽어본 유산기 자료에는 1611년 유몽인의 [유두류산록]에 처음 보이고, 1807년 남주헌의 [지리산행기]를 끝으로 보이지 않는다.(표참조) 나는 유산기에 나오는 대로 완폭대의 위치를 추정했을 뿐인데, 바로 그 자리에서 완폭대의 각자를 발견함으로써 완폭대 위치에 대해 명확하게 정립이 된 것이다. 翫瀑䑓 刻字가 선인들의 일부 유산기에서 고운 최치원의 필적이라고 언급하였으나, 성급하게 결론을 짓기는 어렵다. 1558년 남명선생이 불일폭포를 세 번째 유람하고 남긴 [유두류록]에서 완폭대를 '寺門外松樹下(절문 밖 소나무 아래)'라고 기술한 것으로 미루어, 남명선생이 ..

불일암 냉연대 아래 오암의 석각과 탁본(180417)

불일암 냉연대 아래 오암의 석각(180417) * 1558년 남명 조식의 유두류록 ○ 4월 19일 이날 아침 김경이 병 때문에 함께 가는 것을 사양하고 기생 귀천(貴千)을 데리고 급하게 떠났다. 김군은 이때 나이가 일흔 일곱이었지만 나는 듯하여 처음에는 천왕봉까지 오르려 하였으니 사람됨이 마치 이원(利園)에서 노닐다 온 사람처럼 대범했다. 호남에서 온 네 사람과 백유량, 이씨 두 유생이 동행하였다. 북쪽으로 오암을 오르는데, 나무를 잡고 잔도를 오르면서 나아가는데 원우석은 허리에 찬 북을 치고, 천수는 긴 피리를 불고, 두 기생이 따르면서 선두를 이루었다. 제군들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여, 물고기를 꼬챙이에 꿴듯이 앞으로 나아가면서 중간 대열을 이루었다. 是朝. 金君涇辭以疾. 挾妓貴千徑去. 金君時年七十七..

쌍계석문 後面에 刻字된 이름들

쌍계석문 後面에 刻字된 이름들 # 1. 雙磎石門의 刻字 쌍계석문의 각서가 고운 최치원 선생의 친필이라고 전한다. # 2. 雙磎石門 北面 刻書 한말 권문세족이며 을사오적 이완용의 3부자 이호준, 이윤용, 이완용을 비롯하여 하동군수 권재윤, 친일파 김기태, 서양화가 김창섭, 형평사(전국백정협회) 하동분회를 이끌었던 백정 조동혁, 경상좌병사 李基赫의 무장으로 忠壯將을 지낸 權在豊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계층과 직업을 망라한 만무방들이 이름을 새겼고, 기가 막힌 것은 최근에 새긴 것도 있다는 사실이다. 아무튼 친일파의 명단이 쌍계사 석문에 남아있는 것을 보면 아마 전국 방방곡곡 명승지마다 그들의 더러운 이름을 남겼을 것이다. * 만무방 : 염치가 없이 막된 사람 ★ 石刻의 시점(1883~4년) : 1882년~18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