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계석문 後面에 刻字된 이름들
# 1. 雙磎石門의 刻字 쌍계석문의 각서가 고운 최치원 선생의 친필이라고 전한다.
# 2. 雙磎石門 北面 刻書
한말 권문세족이며 을사오적 이완용의 3부자 이호준, 이윤용, 이완용을 비롯하여 하동군수 권재윤, 친일파 김기태, 서양화가 김창섭, 형평사(전국백정협회) 하동분회를 이끌었던 백정 조동혁, 경상좌병사 李基赫의 무장으로 忠壯將을 지낸 權在豊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계층과 직업을 망라한 만무방들이 이름을 새겼고, 기가 막힌 것은 최근에 새긴 것도 있다는 사실이다. 아무튼 친일파의 명단이 쌍계사 석문에 남아있는 것을 보면 아마 전국 방방곡곡 명승지마다 그들의 더러운 이름을 남겼을 것이다.
* 만무방 : 염치가 없이 막된 사람
★ 石刻의 시점(1883~4년) : 1882년~1886년 이완용이 규장각 대교 재직 시, 1886년 6월 이완용의 부 이호준이 경상도 관찰사로 내려왔을 때의 시점임.
南無阿彌陁佛
巡相國李公鎬俊遺惠不㤀(忘)
子叅判 允用
待敎 完用
이호준李鎬俊 [1821(순조 21)∼1901] 조선 말기의 문신. 본관은 우봉(牛峯) 자는 충백(忠伯). 섭(0x9F5F)의 아들로 식(埴)에게 입양되었다. 1864년(고종 1) 경과증광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10월에 홍문관수찬이 되었다. 1885년 5월 예조판서를 거치고 그 해 8월 판돈녕부사·판의금부사·홍문관제학 등을 두루 거쳤으며, 이듬 해 2월에는 다시 예문관제학이 되었다. 그 해 6월에 경상도관찰사로 다시 외직에 나갔다. 전라도에 이어 경상도의 관찰사를 역임하여 당대의 관리 중에서 누구보다 지방 실정에 밝은 관리가 될 수 있었다.
[네이버 지식백과]이호준
[李鎬俊]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이윤용[ 李允用 ]1854(철종 5)∼1938. 조선 말기의 문신·친일반민족행위자. 본관은 우봉(牛峰). 자는 경중(景中). 평양 출신. 이호준(李鎬俊)의 서자이며, 이완용(李完用)의 형이다. 흥선대원군에게 재능을 인정받아 사위가 되었다.
<중략>
또한 국권상실 후에는 조선귀족령에 의거하여 일본정부로부터 남작 작위를 받았으며, 한성은행(漢城銀行)에도 관여하여 1906년 부은행장, 1909년에서 1923년까지 은행장 등을 역임하며 재계에서도 두각을 나타냈다. 1928년 10월 2일부터 1938년 9월 8일 사망할 때까지 조선총독의 자문기구인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을 지냈다. 이윤용의 이상과 같은 활동은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제2조 제7·9·13·19호에 해당하는 친일반민족행위로 규정되어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Ⅳ-13: 친일반민족행위자 결정이유서(pp.731~749)에 관련 행적이 상세하게 채록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이윤용
[李允用]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이완용[ 李完用 ] 1858(철종 9)∼1926. 조선 말기의 문신·친일반민족행위자. 본관은 우봉(牛峰). 자는 경덕(敬德), 호는 일당(一堂). 경기도 광주 출신. 아버지는 이석준(李奭俊)이며, 판중추부사 이호준(李鎬俊)의 양자로 들어갔다. 1882년(고종 19) 증광별시에 병과로 급제, 승지·주서가 되었다.
<중략>
전라북도 익산에 묻혔으며, 정치행적과는 달리 당대의 명필이었다. 이완용의 이상과 같은 활동은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제2조 제3·4·6·7·9·13·19호에 해당하는 친일반민족행위로 규정되어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Ⅳ-13: 친일반민족행위자 결정이유서(pp.533~577)에 관련 행적이 상세하게 채록되었다.[네이버 지식백과]이완용
[李完用]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金琪邰, [일본식 이름: 金澤輝昌 かなざわきしょう(카나자와키쇼우 : 일본 발음은 정확하지 않음.), 1887년 8월 5일 ~ 1941년 7월 5일]일제 강점기의 관료로, 본적은 경상남도 진주군 내동면이다. < 중략> 1937년 9월 경상남도 총후지성회 부회장으로 선임되었으며 총후지성회가 전투기 2기를 헌납하는 데에 적극 협력했다. 1938년 2월 26일과 3월 2일 조선총독부로부터 포상을 받았고 같은 해 3월 24일에는 조선총독부로부터 감수포장을 받았다. 1939년 3월 특별지원병 진주후원회 고문으로 위촉된 뒤부터 지원병 지원 유세에 적극 나섰으며 1939년 11월 조선유도연합회 평의원, 1940년 2월 진양곡물통제조합 조합장으로 각각 선임되었다. 친일파 708인 명단의 중추원 부문,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자 명단의 중추원 부문,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 포함되었다.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2009). 〈김기태〉.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 Ⅳ-2》. 서울. 29~39쪽
* 權在允 : 권율장군의 10대손으로 한말 고종 때 하동부사와 광주군수를 역임함.
* 余珽燁(미상)
* 金昌燮
1924년에 일본 도쿄미술학교(東京美術學校) 서양화과를 졸업한 서양화가 1세대로 서울에서 활동하였다. 도쿄예술대학교(東京藝術大學校) 미술관 소장품인 「자화상(自畵像)」을 제외하고는 현존작이 없다. 조선미술전람회(朝鮮美術展覽會)에 제2회전부터 제6회전까지 계속 출품하여 4등상(제2회)과 3등상(제3회)을 수상하였고, 1930년 제9회 조선미술전람회 출품 이후에는 작품 활동보다 고미술 애호가로 골동품 수집에 정열을 기울였다. 1940년 제19회 조선미술전람회 공예부에 「나전와당문(螺鈿瓦當文)핸드백」을 출품, 전통 공예의 미와 기법을 현대 디자인 제품에 응용하는 새로운 시도를 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Kim Changsup, 金昌燮]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李台善(미상)
* 朴敏彦(각을 한지 오래되지 않음)
廉日錫(미상)
趙東爀
경상남도 하동군에 있었던 형평사 하동분회는 계급을 타파하고 백정(白丁)에 대한 모욕적인 칭호를 폐지하며 교육을 장려하여 백정도 참다운 인간이 되도록 하기 위한 사회 운동 단체를 주도한 인물. 1923년 8월 19일 조동혁(趙東爀), 김상원(金翔源), 이원렬(李元烈) 등의 주동으로 형평사 하동분회를 창립.
고종16년1879년 경상좌병사 李基赫의 무장으로 忠壯將을 지낸 權在豊통도사 이름 바위에도 權在豊의 이름이 있다.
李柱晦(미상)
볼 때는 판독이 되었는데 확인이 필요함.
辛玗錫(미상)
尹宇○(판독불가)
李恩雨 徐相㓇(쌍계사 진입로에 있음)
대한제국의 승정원 일기에 이름이 보이고 일제시대 총독부 관료를 하였고, 사회 각분야에서 활동을 했던 인물이며 친일인명사전에 그 이름이 보인다.
양산 통도사 주변 이름 각자는 연구한 분이 있는데
화개동천의 각자는 기초 조사도 못한 상태랍니다.
(문화원에 알아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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