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六友堂記/마애석각

불일폭포 翫瀑䑓(완폭대)의 立石及刻字(180417)

도솔산인 2018. 4. 18. 11:09

 

불일폭포 翫瀑䑓(완폭대)의 立石及刻字(180417)

 

  지난 325일 불일폭포 일원을 함께 답사한 <지리산국립공원 역사&문화 조사단> 팀장인 <조봉근>님이 翫瀑䑓 刻字 사진을 보내왔다. 내가 읽어본 유산기 자료에는 1611년 유몽인의 [유두류산록]에 처음 보이고, 1807년 남주헌의 [지리산행기]를 끝으로 보이지 않는다.(표참조)  나는 유산기에 나오는 대로 완폭대의 위치를 추정했을 뿐인데, 바로 그 자리에서 완폭대의 각자를 발견함으로써 완폭대 위치에 대해 명확하게 정립이 된 것이다.

 

 翫瀑䑓 刻字가 선인들의 일부 유산기에서 고운 최치원의 필적이라고 언급하였으나, 성급하게 결론을 짓기는 어렵다. 1558년 남명선생이 불일폭포를 세 번째 유람하고 남긴 [유두류록]에서 완폭대를 '寺門外松樹下(절문 밖 소나무 아래)'라고 기술한 것으로 미루어, 남명선생이 다녀간 시점에는 완폭대 각자가 없었는지. 발견하지 못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아무튼 2018417일 오전  <조봉근>씨가 불일암 일대를 조사하던 중, 오랜 세월 동안 묻혀있던 옛 선인들의 유산기에 언급된 완폭대(翫瀑䑓)’ 刻字가 새겨진 立石을 발견하였다. 이것은 지리 인문학에 있어서 중요한 자료이며 각자의 보존과 복원의 가치가 충분히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翫瀑䑓(완폭대)는 1807년 이후에는 선인들의 유산기에서 완전히 사라졌다가 211년 만에 나타난 것이다.

 

 

♣ 남명이 완폭대에서 읊은 시

 

 

靑鶴洞 - 曺植[조식]

 

獨鶴穿雲歸上界[독학천운귀상계] : 은 홀로 구름을 뚫고서 천상계로 올라갔고

一溪流玉走人間[일계류옥주인간] : 골짜기 온가득 옥구슬이 흘러 인간계로 달리네

從知無累飜爲累[종지무루번위누] : 가 없는 것이 도리어 누가 됨을 더욱 알기에

心地山河語不看[심지산하어불간] : 마음의 경지로 산하를 보지 못했다고 말하리라

 

☞ 靑鶴[청학] : 사람의 몸에 새의 부리를 하고 있으며 신선이 타고다님. 태평시절과 태평한 땅에서만 나타난다고 함.

 

 

詠靑鶴洞瀑布[영청학동폭포] - 曺植[조식]

 

勅敵層崖當[칙적층애당] : 견고하게 맞선 층진 낭떠러지를 맞이하니

舂撞鬪未休[용당투미휴] : 쏟아져 부딪히며 싸우길 멈추지 않는구나

却嫌堯抵璧[각혐요저벽] : 도리어 요임금이 구슬 던진 것을 싫어하니

茹吐不曾休[여토부증휴] : 마시고 토하기를 거듭하여 멈추지 못하네

 

 

 

 

 

翫瀑䑓(臺) by <조봉근>님

 

 

 

洪淵(홍연), 李彦憬(이언경) 乙卯(1555년 명종 10년)

 

* 洪淵(생몰년 미상) : 조선 명종 때의 문신. 본관은 남양(南陽). 자는 덕원(德源). 1546년(명종 1)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고, 1551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 李彦憬(생몰년 미상) : 조선 명종 때의 문신. 본관은 연안(). 1544년(중종 39)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여러 관직을 거쳐 1548년(명종 3) 사간원정언이 되었다. <중략> 함경도어사, 여산군수(), 1557년 홍문관직제학, 이어서 예조참의, 동부승지, 호조참의, 좌부승지, 병조참지에 이어 이조참의를 차례로 역임하였고 1563년(명종 18)에는 전주부윤()이 되었음.

 

[네이버 지식백과] 이언경 [李彦憬]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李○(?), 金侃

 

* 김간(金侃) [1653(효종 4)1735(영조 11)].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사행(士行), 호는 죽봉(竹峯). 아버지는 김필신(金弼臣)이며, 어머니는 예안이씨로 통덕랑 이천표(李天標)의 딸. 이유장(李惟樟)의 문인.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선인들의 불일암 유산기에 나오는 완폭대.hw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