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양군 마천면 추성리 소재 芝山䑓(지산대) 석각(180624)
지산대 석각을 찾아간 것은 1580년 변사정이 언급한 자진동(紫眞洞)과 1922년 권도용의 방장산부(方丈山賦)에 보이는 氷峙(빙치)에 대한 의문을 풀기 위함이다. 지산대 석각의 시기는 乙亥년 3월 즉, 83년 전인 1935년 3월로 추정한다. 1922년 권도용의 방장산부(方丈山賦)에 지산대 석각에 대한 기록이 없고, 이전의 어떤 유산기에도 지산대에 대한 기록이 없기 때문이다. 1956년에 발행된 함양 군지에 '지산대는 추성리 쑥밭재(봉전령) 아래에 있으며 鄭允洪이 占有한 곳이다(在芝山䑓蓬田嶺下 鄭允洪所占)'라는 기록이 유일한데, 1956년 당시 鄭允洪이라는 분이 생존해 있었는지는 확인하지 못했다. 다만 石臺에 대한 기록이 '新增石臺'로 기록되어 있어 1956년에 추가한 내용일 수도 있고, 그 이전에 함양군지를 간행하며 新增한 것일 수도 있다. 1956년 당시 생존의 여부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1580년 변사정의 자진동과 1935년 정윤홍의 지산대가 유관하다고 추정하기 때문에 탁본을 하게 되었다. 1922년 권도용의 빙치와 1580년 변사정의 자진동이 확인되면 두류암에 대한 위치는 저절로 드러난다.
1. 邊士貞[1529(중종 24)∼1596(선조 29)] 조선 중기의 의병장
[1580年 4月 初七日]. 早食發行. 過龍遊潭. 至頭流庵. 層崖削出. 壁立萬仞. 百花爭發. 襲香一洞. 竟日坐玩. 不覺其暮遂入禪房. 共宿焉.
초7일에 아침 일찍 밥을 먹고 출발하여 용유담(龍遊潭)을 지나 두류암(頭流庵)에 도착하였다. 층층의 벼랑이 깎아지를 듯 솟아 있고 절벽이 만 길 높이로 우뚝 서 있었다. 온갖 꽃이 다투어 피어나니 꽃향기가 계곡을 온통 뒤덮었다. 하루 종일 앉아서 완상하니 날이 저무는 것도 몰랐다. 마침내 선방(禪房)에 들어가 함께 잤다.
[四月 初八日]. 晨朝促喫. 過紫眞洞. 攀巖飛杖. 登天王峯. 是日也天氣淸朗. 極目無碍. 精神灑落.
4월 초8일 아침 (두류암에서) 일찍 밥을 먹고 자진동(紫眞洞)을 지나 바위를 잡고 지팡이를 날리며 천왕봉(天王峯) 에 올랐다. 이 날은 날씨가 매우 맑고 화창하여 시계가 막힘이 없었고 정신이 씻은 듯 상쾌하였다.
☞ 紫眞洞(자진동) : 어름터 주변으로 추정함.
2. 김영조(金永祚)(1842~1917)의 유두류록
[1867년 8월 26일~29일] 向文殊寺. 境甚幽僻. 暮抵松臺村. 村在頭流山下. 四山簇立. 林壑蔚然. 川聲滾滾. 亦一別景也. 訪朴德元. 因畱宿. 踰一嶺(장구목). 至林下石澗盤上. 各啖梨一枚. 歷大坂(빙치)至頭流菴. 田家數十戶. 皆升茅構木爲居也. 翌日. 使德元齎午飯. 向上峯. 自村後隨嶺(빙치)而直上數里. 從一小逕. 踰嶺入谷. 樹木陰翳. 不見天日. 尋線路行二十里. 至峯下. 有山幕. 右石泉甚淸冽. 皆掬飮憩巖上.
문수사(文殊寺)를 향하니, 장소가 매우 깊숙하고 치우쳐 있었다. 저녁에 송대촌(松臺村)에 이르니, 마을이 두류산 아래 있어, 사방에 산이 빽빽하게 들어서서, 숲과 골짜기가 울창하며, 시내 소리가 세차게 들리니, 또 하나의 색다른 경치였다. 박덕원(朴德元)을 찾아가서 하룻밤 묵었다. 고개 하나를 넘어 숲 아래 있는 돌 시내[어름터]에 이르러, 각자 소반 위의 배 하나씩을 먹었다. 큰 언덕(빙치)을 지나 두류암(頭流菴)에 이르니, 농가 수십 호가 모두 띠풀로 지붕을 얹고, 나무를 얽어서 살고 있었다.
다음날 박덕원을 시켜 점심을 싸게 하고, 상봉(上峰)으로 향했다. 마을 뒤 고개(빙치)를 따라 몇 리를 곧장 올라가서, 작은 길을 따라 고개를 넘어 골짜기로 들어가니, 수목의 그늘에 가려 해가 보이지 않았다. 좁은 길을 찾아 이십 리를 가서 봉우리 아래 이르니, 산막(山幕)이 있었다. 산막 오른쪽에 있는 돌 틈의 샘물이 매우 맑고 시원하여 모두 손으로 떠서 마시고 바위 위에서 쉬었다.
3. 1922년 권도용 방장산부(方丈山賦)에 보이는 氷峙(빙치)
○ 4월 기망(旣望 *16일) (벽송사 출발)
惟禪應之指路 幾俗臘之古稀 得般若之道力 倏登陟而如飛 憩氷峙徐進 得盤陀之石磯 出二派而匯合 成 自然之淸潿 蒼藤古木湲依依 山禽效吟樵歌忘機 遂乃弛擔午䭜脫略交譚 太守請余而錫名 名之曰三乂巖 溪壑荵蒨於耳 郭峯巒糾紛於眼簾 過杜里之廢寺 有兩巖之交粘 問奚名 則曰金剛門 亦禪師之權辭以拈眡
[국역] 승려 응지가 길을 인도하였는데 세속 나이로 거의 고희에 가까웠지만 빠르게 산을 오를 때는 마치 나는 듯하였다. 빙치(氷峙)에서 쉬었다. 천천히 나아가 너럭바위에 이르렀는데 여울이 두 갈래로 흘러오다가 합쳐 저절로 맑은 웅덩이가 되었다. 푸른 등나무 고목은 물가에 푸릇푸릇하고, 산새는 나무꾼의 노래를 흉내 내어 울어 세상일을 잊게 하였다. 마침내 짐을 내리고 점심을 먹으면서 간단히 얘기를 나누었다. 태수가 내게 바위의 이름을 지어 달라고 청하여, 삼예암(三乂巖 *물결이 세 갈래로 둘러싼 바위)이라 이름 붙였다. 골짜기의 물소리 또렷이 귓가에 들리고 산봉우리들 중첩되어 눈앞에 보였다. 두리(杜里)의 폐사(廢寺)를 지나니 양쪽의 바위가 서로 붙어 있는 곳이 있어 무엇이라 부르는지 물었더니 금강문(金剛門)이라 하였다. 이 또한 승려들이 보이는 대로 갖다 붙인 말이다. [출처 지리99, 국역 이재구 선생]
☞ 권도용(1878-1959) : 근세의 유학자이자 언론인‧독립운동가.
乙亥 三月 日우측 하단에 鄭允洪, 三洪, 宇洪 형제로 추정
좌측 하딘에 鄭元甲.明成, 昌成 부자로 추정
☞ 乙亥年 : 1935년, 1875년(고종12년),1815년(순조15년)
우측 상단에 鄭成草, 姜順基, 좌측에 姜善炳
우측 별도 석면에 鄭寅奎, 李鍾七, 朴琪淳, 朴性台, 鄭○鉉, 鄭俊鳳, 許一英, 鄭寬善
鄭允洪, 三洪, 宇洪 형제 등 정씨들이 품개동에 살았는데 손자 代까지 다 돌아가시고 생존해 있는 분이 없음. 생존해 있으면 90~100세 정도라고 함.
1956년 [함양군지]新增石臺 87面
在芝山䑓蓬田嶺下。鄭允洪所占。: 지산대는추성리 쑥밭재(봉전령) 아래 있으며 鄭允洪이占有한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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