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六友堂記/마애석각

1618년 양경우의 최치원 필적 완폭대 위각설

도솔산인 2019. 4. 27. 16:56


1618년 양경우의 최치원 필적 완폭대(翫瀑䑓) 위각설

1618년 조위한과 양경우는 거의 같은 시기(4월 14일과 5월 11일)에 불일폭포를 다녀갔는데 완폭대 석각에 대하여 각기 다른 기록을 남겼다. 조위한은 '‘완폭대(翫瀑䑓)’ 세 글자를 새겨놓았으니 역시 고운이 직접 쓴 것이었다.'라고 하였고, 양경우는 '대 위에 완폭대(翫瀑䑓) 석자가 석각되어 있었다. 거처하는 스님이 이것과 석문의 대자 모두 최공의 필적인줄 알았다. 선인과 범인의 필획은 분명히 다르다. 세상에 진위를 구별할 수 있는 감식안이 없으니, 안타깝도다.'라고 하여 사실상 위각이라고 단정하였다. 완폭대(翫瀑䑓) 석각이 최치원 선생의 필적이라고 한 것은 1618년 조위한이 처음이고, 1686년 우담 정시한은 승려가 '고운의 필적이 분명하다.'라고 하였고, 1720년 신명구와 1724년 정식은 고운의 글씨, 1744년 황박은 '고운이 새긴 것'이라고 했지만, 대부분 유람록에서 완폭대(翫瀑䑓)에 대하여 고운의 필적이라고 언급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1. 1618년 조위한의 遊頭流山錄

○ 4월 14일, 절 앞에 십여 명 정도 앉을 만한 누대가 있는데 바위에 ‘완폭대(翫瀑䑓)’ 세 글자를 새겨놓았으니 역시 고운이 직접 쓴 것이었다.

寺前有臺. 可坐十餘人. 巖面刻翫瀑䑓三字. 亦孤雲所自書也.

2. 1618년 양경우의 역진연해군현잉입두류록

○ 5월 11일, 대 위에 완폭대(翫瀑䑓) 석자가 석각되어 있었다. 거처하는 스님이 이것과 석문의 대자 모두 최공의 필적인줄 알았다. 선인과 범인의 필획은 분명히 다르다. 세상에 진위를 능히 구별할 수 있는 감식안이 없으니, 안타깝도다.

臺上有石刻翫瀑䑓三字。居僧認此與石門大字。俱出崔公蹟。仙凡筆畫。迥然不侔。世無一隻眼能辨眞假。惜哉。

양경우(梁慶遇) : 1568(선조 1)미상.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남원(南原). 자는 자점(子漸), 호는 제호(霽湖)점역재(點易齋)요정(蓼汀)태암(泰巖). 증조부는 양자윤(梁自潤)이고, 조부는 집의(執義) 양의(梁艤)이고, 부친은 의병장 양대박(梁大樸)이다.




photo by 조봉근(180415)


photo by 조봉근(180421)


photo by Dosol(180429)


탁본 조봉근 주무관(180501)




3. 완폭대(翫瀑䑓)에서 ''의 字體

완폭대(翫瀑䑓)에서 (*)의 글자는 元나라 시대 이전에는 보이지 않는 자형이다. 명나라 때 서화가 당인(唐寅)이 사용한 자체로 고운 최치원의 필적이 아니라는 반증이다. 1558년 남명선생이 불일폭포를 세 번째 유람하고 남긴 유두류록에서 완폭대를 '寺門外松樹下(절문 밖 소나무 아래)'라고 기술한 것은 당시 완폭대(翫瀑䑓)라는 이름이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1611년 유몽인의 유람록에 완폭대(翫瀑䑓)와 석각의 존재가 처음 등장한다는 점도 그 이유 중 하나이다. 1616년 성여신(1546~1632) 방장산선유일기에 '1565년 가을과 겨울, 1567년 가을에 쌍계사에 들어와 독서를 하고 이듬해 봄에 산을 나갔다.'라는 기록이 있다. 1558년 남명이 불일폭포를 다녀간 이후 유몽인 이전(1611년)에 이곳을 다녀간 사람이 누군가 완폭대를 석각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중국 書法字典(Shufazidian.com)에서 臺의 자형을 찾아보니 晉나라 때부터 元대까지 같은 자형의 용례를 발견하지 못했고, 明대에 이르러 唐寅(1470~1523)의 行書가 유일하다. 최치원 필적을 연구하는 분이 주신 의견이 있어 소개한다. 아울러 좋은 의견을 주신 솔안 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   



* 솔안님이 주신 의견 [솔안 Y 2018.12.11 00:09]

완폭대 석각 관련 글을 찾다가 여기까지 왔습니다. 저도 고운선생을 필적을 연구하고 있기에 완폭대 관련 기사를 찾아 정리해 본 적이 있습니다. 양경우(1568~1629)는 그의 글에서 사실상 위각이라 밝혔습니다.(臺上有石刻翫瀑臺三字。居僧認此與石門大字。俱出崔公蹟。仙凡筆畫。迥然不侔。世無一隻眼能辨眞假。惜哉。: 대 위에 완폭대 석자가 석각되어 있었다. 거처하는 스님이 이것과 석문의 대자 모두 최공의 필적인줄 알았다. 선인과 범인의 필획은 분명히 다르다. 세상에 진위를 능히 구별할 수 있는 감식안이 없으니, 안타깝도다.) 또 여기에 새겨진 臺자는 원나라 이전의 필적에서는 찾기가 어렵습니다. 게다가 瀑자의 삼수변은 그 필법과 자형을 고운선생의 필적인 '진감선사비'에서 찾기가 어렵습니다.



명나라 서화가 唐寅(1470~1523)의 行書


* 당인唐寅(1470 ~ 1523). 明나라 文人. 畵家. 字 子畏/伯虎. 號 六如居士



 

4. 晉대부터 淸대까지 臺 자형의 用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