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六友堂記/마애석각

1651년 오두인 두류산기의 은정암과 오두인 석각

도솔산인 2019. 11. 18. 05:44

 

 

1651년 오두인 두류산기의 은정대와 오두인 석각

 

 

오두인(吳斗寅, 1624~1689)은 본관이 海州, 호는 陽谷, 시호(諡號)는 충정(忠貞)이다. 는 이조판서를 지낸 오상(吳翔)이고 백부인 오숙(吳䎘)의 양자(養子)로 들어갔다. 1648년 진사시에 1등으로 합격하고 1649년 별시 문과에 장원 급제한 후, 1650년 사헌부 지평(持平)으로 있으면서, 1651년 공무로 경상도 지방의 재상(災傷)을 살피러 내려왔다가, 111~116일까지 56일 동안 경상우도의 수령들과 선고(先考)와 계부(季父)의 유람길을 좇아 지리산을 유람하였다. 1631년 오두인의 선고(先考:돌아가신 아버지) 오숙(吳䎘)이 화개동천과 불일암을 유람하였고, 1647년 계부(季父:막내숙부) 오핵(吳翮)이 다녀갔다. 이 세 사람은 특이하게 불일암에서 옥소암과 영대암을 거쳐 쌍계사로 내려왔다. 1647년 이곳을 유람한 계부(季父) 오핵(吳翮)은 불출암과 쌍계사 사이 계곡 바위에 장원암이라는 시를 묵서(墨書)로 남겼는데, 5년 후 오두인이 이 묵서를 발견하고 화답 시를 읊었다고 한다.

 

 

장원암(狀元巖)

 

吳翮(오핵 : 16151653)

 

靑鶴峯前路 : 靑鶴峯(*)의 앞길을 따라서 내려오니

澄潭影翠杉 : 맑은 연못에는 비취빛 삼나무 그림자

羽仙探勝處 : 우선(羽仙)이 찾은 경치 좋은 곳이라

仍號狀元巖 : 이에 장원암(狀元巖)이라고 부른다네

 

(*)청학봉은 비로봉(백학봉)을 가리킴. 우선(羽仙) : 오숙(吳䎘,1592~1634)

 

오두인(吳斗寅, 1624~1689)의 유람 일정은 1651111일 진주 관아를 출발하여 옥계사에서 자고, 112일 악양을 거쳐 쌍계사에 도착, 113일 불일암과 불일폭포 일원을 둘러보고 쌍계사 적묵당에서 자고, 114일 아침에 쌍계사를 출발하여 거석교-홍류교(삼신동 각자)-신흥사터-능파각(세이대)-사자곡을 지나 기담(妓潭)에서 쉰 후, 능인사(能仁寺)에서 점심을 먹는다. 저녁 무렵에 능인사(能仁寺)를 출발하여 은정대(隱井臺)에서 하룻밤을 묵는다. 115일 은정대(隱井臺)를 출발하여 수국현(水國峴)넘어서 거림으로 내려가 남대사를 거쳐 신계촌에서 유숙하고, 116일 신계를 출발하여 덕천서원에 들렀다가 진주 관아로 돌아갔다. 이때 오두인과 동유(同遊)한 일행인 진주 소촌 찰방 김정(金釘), 진주 목사 이상일(李尙逸), 하동 태수 이진필(李震馝), 오두인(吳斗寅), 곤양 소모장(召募將) 김집(金緝)의 이름을 은정대(隱井臺) 뒤 은정(隱井)의 바위벽에 새겼다. 이 성명의 석각이 '지리산국립공원 역사문화조사단'에 의해 368년 만에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 1651년 오두인 두류산기의 은정암 관련 발췌

 

1651114<중략> 저녁 무렵에 작별하고 다시 10리를 가서 작은 암자에 이르렀는데 은정대(隱井臺)라고 하였다. 이 암자는 산 정상에 있어 속세와 일찌감치 떨어져 있는 곳이었다. 학승(學僧) 담희(淡熙)가 그곳에 거처하고 있었는데, 그를 따라 공부하는 자가 10여 명이라고 하였다. 암자 뒤쪽에 바위가 있는데, 바위 아래에 샘이 솟았다. 이른바 은정(隱井)이라는 것이 바로 이 샘터이다. 마침내 그 바위에 함께 유람 온 이들의 성명을 김정(金釘), 이상일(李尙逸), 이진필(李震馝), 오두인(吳斗寅), 김집(金緝)의 순으로 적었다. 첫 번째가 찰방 김정(金釘), 그다음이 진주 목사 이상일(李尙逸), 그다음이 하동 태수 이진필(李震馝) , 내가 네 번째였는데 나이순으로 정한 것이다. 그대로 바위에 새기게 하여 훗날의 표지로 삼았다. 이날은 은정대(隱井臺)에서 묵었다.

 

臨夕而別又行十里至一小菴名曰隱井臺也菴在絶頂去塵宸最遠經僧淡熙居焉從而遊者十餘人云菴後有巖巖下出泉所謂隱井必此也遂題同遊姓名於其巖曰金釘 李尙逸 李震馝 吳斗寅 金緝其一督郵其次晉牧其次河東余居第四序以齒也仍命刻之以爲他日識焉是日仍宿于此寺

 

출처 : 선인들의 지리산 유람록(최석기외) 2'용이 머리를 숙인 듯 꼬리를 치켜든 듯' p145~p146

 

1651년 오두인의 頭流山記에 나오는 은정암과 오두인 일행들의 성명 석각이 368년 만에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은정대 순천 이샘 사진

 

우로부터 김정(金釘), 이상일(李尙逸), 이진필(李震馝), 오두인(吳斗寅), 김집(金緝) 辛卯 仲冬

 

 

탁본(2019.11.20)

 

 

 

隱井(은정)

 

 

* 오두인(吳斗寅, 1624~1689)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원징(元徵), 호는 양곡(陽谷). 병마절도사 오정방(吳定邦)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오사겸(吳士謙)이고, 아버지는 이조판서 오상(吳翔)이다. 어머니는 고성이씨(固城李氏), 이효길(李孝吉)의 딸이다. 숙부 오숙(吳䎘)에게 입양되었다. 1648(인조 26) 진사시에 1등으로 합격하고, 이듬해 별시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1650(효종 1) 지평(持平)을 거쳐 1656년 장령(掌令), 1661(현종 2) 헌납(獻納사간이 되었다. 이듬해 정조사의 서장관으로 청나라에 다녀왔고, 1667년 부교리(副校理사간 등을 역임하였다. 1679(숙종 5) 공조참판으로서 사은부사가 되어 청나라에 다녀왔다. 이듬해 호조참판, 1682년 경기도관찰사를 거쳐 다음해 공조판서에 올랐다. 1689년 형조판서로 재직 중에 기사환국으로 서인이 실각하자, 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에 세번이나 임명되고도 나가지 아니하여 삭직당하였다. 이해 사직(司直)을 지내고, 5월에 인현왕후 민씨(仁顯王后閔氏)가 폐위되자 이세화(李世華박태보(朴泰輔)와 함께 이에 반대하는 소를 올려 국문을 받고, 의주로 유배 도중 파주에서 죽었다. 그 해에 복관되었다. 1694년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파주의 풍계사(豊溪祠), 광주(光州)의 의열사(義烈祠), 양성(陽城: 지금의 경기도 안성)의 덕봉서원(德峰書院), 의성(義城)의 충렬사(忠烈祠)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양곡집이 있다. 시호는 충정(忠貞)이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