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六友堂記/마애석각 58

세이암 마애 석각 경상도 관찰사 조시영 외

세이암 마애 석각 경상도 관찰사 조시영 외 觀察使 曺始永 知郡 林鍾炫 泗川郡守 宋徽老 主事 曺主永 曺宇永 蔡鴻儀 總巡 黃義浩 主薄 田完植 己亥五月 日 조시영[曺始永, 1843년(헌종 9)~1912년]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치극(稚克). 호는 후계(後溪). 동지중추부사 조위(曺偉)의 12세손으로, 아버지는 참봉 조진만(曺鎭萬)이며, 어머니는 진주강씨(晉州姜氏)로 강처중(姜處重)의 딸이다. 큰아버지 조진구(曺鎭九)에게 입양되었으며, 할아버지 조예규(曺禮奎)에게 수학하였다. 1873년(고종 10) 진사시에 합격하여 성균관 유생이 되었고, 1882년 정시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의 수찬·교리·응교, 사간원헌납, 사헌부지평·장령·집의, 성균관사성, 장악원정, 동학교수(東學敎授), 병조정랑, 통례원(通禮院)의 좌..

만수천 영대(靈臺)의 도탄변선생유대 석각

만수천 영대(靈臺)의 桃灘邊先生遺䑓 석각(200107) 산내에서 뱀사골 방향으로 도로를 따라가다 보면 영대(靈臺 : 산신령 바위) 앞 만수천 계곡가의 외진 곳에 도탄 변사정 선생 관련 석각이 있다. 桃灘邊先生遺䑓(도탄변사정선생유대)의 석각은 도탄 변사정의 제자들이 새긴 것으로 추정되는데, 지리산 둘레길 안내판에 쓰여있는 영대(靈臺)와 1611년 어우당 유몽인의 유두류산록에 나오는 영대촌(嬴代村)과 한자가 일치하지 않아 영인본을 찾아보니 영대촌(嬴代村)이라... 선생께서 영대촌의 유래를 잘 모르고 오기를 했을 것으로 이해하면 어떨는지(신강님). 아무튼 석각의 내용(도탄 변선생이 남긴 대)으로 미루어 도로가 나기 전에는 도탄 변사정 선생이 남긴 영대(靈臺)의 석각이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였다.(운성지..

선과 임병기 선생님이 보내온 카톡 석각 사진 無學○

선과 임병기 선생님이 보내온 카톡 석각 사진 無學○ 온 나라가 코로나 19로 인해 암울한 시국에도 옛님의 숨결과 그 정취를 찾아 발걸음을 멈추지 않으시고, 오후에 내게 마애 無學○ 석각 사진 두 장을 보내왔다. 쑥밭재 아래 무명 암자와 사리암터의 승탑에 대한 질문으로 인연이 되어 가끔 카톡으로 정보를 주고받는 분으로, 승탑과 석재(石材) 불구(佛具) 연구가로 4500여 개의 관련 자료를 축척한 학계와 재야를 통틀어 최고의 권위자이다. ○字는 서예대자전과 고금이체자전(日, 雄山出版刊, 1980)에는 나오지 않고, 강희자전(中)과 한한대사전(韓, 단국대학교동양학연구소刊 16권)에 나오는데, 台+土에서 厶의 필획을 일부 생략(?)한 것으로 본다. 무학대사는 합천 삼가현 출신으로 합천군 대병면 마애 석각 뒤에는..

대원사 옛길 심원대의 독립운동가 김황(金榥) 성명 석각

대원사 옛길 심원대의 독립운동가 김황(金榥) 성명 석각 대원사 앞 이당(易堂) 박응종(朴膺鍾, 1893~1919) 선생의 석각을 찾은 후, 남사마을 니사재(尼泗齋)의 주인 월헌(月軒) 박우근(朴雨根) 선생 댁에서 박응종(朴膺鍾) 선생의 문집 이당고(易堂稿, 목활자본)를 접하게 되는데, 이당고(易堂稿)에서 중재(重齋) 김황(金榥, 1896~1978) 선생의 이름을 처음 본듯하다. 이번 산행에서 산영(山影) 조규완 교수님의 안내로 박여량 길(청이당-상류암 터-초령)을 답사한 후에, 대원사 앞 옛길 심원대(尋源䑓)에서 김황(金榥) 선생의 성명 석각을 만났다. 석각을 안내한 산영(山影)님은 남명 선생의 13대 후손이고, 칠성님은 니사재(尼泗齋) 밀양 박씨 송월당의 후손이며, 심원대(尋源䑓)의 성명 석각 김황(金..

삼신동 세이암 석각(180428)

삼신동 세이암 석각(180428) 1489년 濯纓(탁영) 선생의 [두류산기행록]에는 洗耳嵒과 濯纓臺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 4월 25일 영신사를 출발해서 덕평봉에서 내려와 의신사에서 잠시 쉬었다가 신흥사에 이르러 '절 앞에 맑은 못과 널찍한 바위가 있었는데 저녁 내내 놀 만하였다. 이 절은 시냇가에 세워져서 여러 사찰 중에서 가장 빼어나 유람 온 사람이 돌아가기를 잊게 하기에 충분하였다.'라고만 기록하였지 洗耳嵒을 언급하고 있지 않다. 또 한 가지는 어떤 유산기에도 濯纓臺에 대한 기록이 없다는 점이다. 막연하게 김일손선생의 호가 濯纓이라 하여 濯纓이 쓴 글씨라고 추측하는 것은 다소 무리가 있다. 전국의 명산대천에 濯纓臺가 수없이 많은데, 김일손 선생의 글씨라고 할 수 없는 것처럼....한말에 새겨졌을..

대원사 계곡 장항동의 성명 석각(200110)

대원사 계곡 장항동의 성명 석각(200110) 산행을 마치고 돌아와 장항동 석각 인물들을 검색하니 대원교 직전 석각 성명 도사(都事) 강재순(姜在淳)은 한말 지방 관료로 1919년 3월 18일 진주 정촌(井村)에서 3.1운동을 주도했던 인물로 나오고, 유석근(劉錫謹)은 1921년 남천(南川) 이도묵(李道默 ; 1843~1916)의『南川集』을 간행한 기록이 있고, 대원사 앞 바위 석각의 박응종(朴膺鍾,1893~1919)은 字가 경우(景愚) 號는 이당(易堂), 면우(俛宇) 곽종석과 회봉(晦峰) 하겸진先生의 門人으로, '파리장서운동의 전개와 영남지역의 숨은 협력자' 논문(*)에 이름이 나와 있어, 남사 마을 분으로 판단하고, 이사재 주인 월헌(月軒) 박우근(朴雨根) 선생께 연락을 하여, 밀양 박씨 세보에 있는..

촛대봉 의인나주정씨묘의 석각과 정걸방

촛대봉 의인나주정씨묘의 석각과 세석의 이인 정걸방 지리산 촛대봉에 자연석의 면을 다듬고 새긴 의인나주정씨묘(宜人羅州鄭氏之墓)의 석각이 있다. 이묘의 주인이 누구인가는 알 수 없지만, 지리산길 지도에 정걸방(鄭乞方)의 묘라고 표기하고 있다. 어떤 근거에 의해서 정걸방의 묘라고 하였는지는 모르지만, 의인(宜人)은 종 6품이나 정 6품 부인의 품계로 여자의 묘인데도 불구하고 정걸방(鄭乞方)의 묘라고 단정하고 있다. 정걸방(鄭乞方)에 대한 자료를 찾아보니, 한말과 일제시대에 지리산 세석 음양수 근처에 살았던 도인으로, 거지 행색을 한 姓은 鄭氏 이름은 걸방(乞方), 걸방(乞方)은 그 사람의 이름이 아닌 별호인 듯하다. 의인 나주 정씨는 여자이고 정걸방(鄭乞方)은 남자인데... 전혀 근거가 없는 꾸며낸 이야기이다..

1651년 오두인 두류산기의 은정암과 오두인 석각

1651년 오두인 두류산기의 은정대와 오두인 석각 오두인(吳斗寅, 1624~1689)은 본관이 海州, 호는 陽谷, 시호(諡號)는 충정(忠貞)이다. 父는 이조판서를 지낸 오상(吳翔)이고 백부인 오숙(吳䎘)의 양자(養子)로 들어갔다. 1648년 진사시에 1등으로 합격하고 1649년 별시 문과에 장원 급제한 후, 1650년 사헌부 지평(持平)으로 있으면서, 1651년 공무로 경상도 지방의 재상(災傷)을 살피러 내려왔다가, 11월 1일~11월 6일까지 5박 6일 동안 경상우도의 수령들과 선고(先考)와 계부(季父)의 유람길을 좇아 지리산을 유람하였다. 1631년 오두인의 선고(先考:돌아가신 아버지) 오숙(吳䎘)이 화개동천과 불일암을 유람하였고, 1647년 계부(季父:막내숙부) 오핵(吳翮)이 다녀갔다. 이 세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