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六友堂記/마애석각

선과 임병기 선생님이 보내온 카톡 석각 사진 無學○

도솔산인 2020. 3. 4. 19:17

선과 임병기 선생님이 보내온 카톡 석각 사진 無學○

 

온 나라가 코로나 19로 인해 암울한 시국에도 옛님의 숨결과 그 정취를 찾아 발걸음을 멈추지 않으시고, 오후에 내게 마애 無學○ 석각 사진 두 장을 보내왔다. 쑥밭재 아래 무명 암자와 사리암터의 승탑에 대한 질문으로 인연이 되어 가끔 카톡으로 정보를 주고받는 분으로, 승탑과 석재(石材) 불구() 연구가로 4500여 개의 관련 자료를 축척한 학계와 재야를 통틀어 최고의 권위자이다. ○字는 서예대자전과 고금이체자전(日, 雄山出版刊, 1980)에는 나오지 않고, 강희자전(中)과 한한대사전(韓, 단국대학교동양학연구소刊 16권)에 나오는데, 台+土에서 厶의 필획을 일부 생략(?)한 것으로 본다. 무학대사는 합천 삼가현 출신으로 합천군 대병면 마애 석각 뒤에는 2단으로 쌓은 석축의 암자터가 있는데, 임선생님의 전언에 따르면 무학대사의 출생&성장지(조선시대 대병면이 삼가현)와 관련이 있다고 한다. 같은 이름의 무학대(無學臺)는 금강산과 삼각산, 안동 금학산(金鶴산) 등지에도 있다. 쌍계사 순원 스님의 말씀은 '무학대사유허지가 합천에 있는데 사나사(舍那寺)가 있던 곳이다.'라고 답을 주셨다. 無學○에서 ○가 堂(당)인인지 坮(대)인지 다시 확인이 필요하다. [선과님 자료제공 : 합천군 대병면 대지길 24-1  진입 마을 산길1,500m 진입 포장도로 끝나는 지점에서 주차, 약 10분 미만 왼쪽 발굴된 절터]

 

회암사지 무학대사 승탑(부도) : https://blog.naver.com/yetiskt/220914391096

 

     

무학대(無學坮)
무학당(無學堂)이 아니고 무학대(無學坮)로 보이는데 확인이 필요하다.

 

강희자전
한한대사전(韓, 단국대학교동양학연구소刊)

 

 

대만 이체자사전

 

 

 

 

사나사(舍那寺) 터(?) 사진 선과님

 

무학대사(無學大師, 1327~1405) 법명은 자초(自超), 속성은 박()씨이며 호는 무학(無學) 당호는 계월헌(溪月軒)이다. 경상남도 합천군 (陝川郡: 삼기(三岐)) 삼가면에서 출생하였다. 134418세에 출가하여 소지선사(小止禪師)의 제자로 승려가 되어 구족계를 받고, 혜명국사(慧明國師)에게서 불법을 배웠다. 진주(鎭州) 길상사(吉祥寺묘향산 금강굴(金剛窟) 등에서 수도하다가, 1353(공민왕 2) ()나라 연경(燕京)에 유학하여 그때 원에 와 있던 혜근(惠勤)과 인도승 지공(指空)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았다.

 

1356년 귀국하여 1373년에 왕사(王師)가 된 혜근의 법을 이어받았는데, 1376년 혜근이 회암사(檜巖寺)에서 낙성회(落成會)를 연 때 수좌(首座)로 초청하였으나 사양했다. 고려말 퇴락하는 불교를 비판하였고 이성계를 만나 그가 새로운 왕이 될 것이라 예견하였다. 1392년 이성계의 역성혁명으로 조선이 개국하자 왕사가 되어, 대조계종사(大曹溪宗師선교도총섭(禪敎都摠攝전불심인변지무애부종수교홍리보제도대선사(傳佛心印辯智無碍扶宗樹敎弘利普濟都大禪師묘엄존자(妙嚴尊者)의 호를 받고 회암사에서 지냈다.

 

이듬해 태조를 따라 계룡산과 한양(漢陽)을 오가며 지상(地相)을 보고 도읍을 한양으로 옮기는 데 찬성하였으며 조선 건국 초기 나라가 안정하고 정착하는데 헌신하였다. 유교의 바탕에서 건국된 조선에서 독특하게 불교인으로 주도적인 역할을 맡았으며 기득권에 안주하지 않았던 유일한 인물로 평가된다. 1397(태조 6) 왕명으로 회암사 북쪽에 수탑(壽塔)을 세웠고, 1402(태종 2) 회암사 감주(監主)가 되었다가 그해 태종 이방원의 청을 받아 함주(함흥)에 머물고 있는 태상왕 이성계를 설득하여 한양으로 돌아오게 하였다. 1403년에는 회암사를 삭직하였고 금강산 금장암(金藏庵)에 머물다가 78세에 입적하였다. 저서에 불조종파지도(佛祖宗派之圖), 인공음(印空吟)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무학대사 [無學大師] (두산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