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六友堂記/마애석각

대원사 옛길 심원대의 독립운동가 김황(金榥) 성명 석각

도솔산인 2020. 2. 23. 22:00


대원사 옛길 심원대의 독립운동가 김황(金榥) 성명 석각

 

대원사 앞 이당(易堂) 박응종(朴膺鍾, 1893~1919) 선생의 석각을 찾은 후, 남사마을 니사재(尼泗齋)의 주인 월헌(月軒) 박우근(朴雨根) 선생 댁에서 박응종(朴膺鍾) 선생의 문집 이당고(易堂稿, 목활자본)를 접하게 되는데, 이당고(易堂稿)에서 중재(重齋) 김황(金榥, 1896~1978) 선생의 이름을 처음 본듯하다. 이번 산행에서 산영(山影) 조규완 교수님의 안내로 박여량 길(청이당-상류암 터-초령)을 답사한 후에, 대원사 앞 옛길 심원대(尋源䑓)에서 김황(金榥) 선생의 성명 석각을 만났다. 석각을 안내한 산영(山影)님은 남명 선생의 13대 후손이고, 칠성님은 니사재(尼泗齋) 밀양 박씨 송월당의 후손이며, 심원대(尋源䑓)의 성명 석각 김황(金榥, 1896~1978) 선생은 남명(南冥) 선생의 문인이자 외손서인 동강 김우옹(金宇顒, 1540~1603)의 12대손이자, 남사마을 이동 서당에서 공부한 면우 곽종석 선생의 제자이다. 그리고 산영(山影)님과 칠성님은 박여량 길의 상류암터를 답사하는 과정에서 외육촌 간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하니, 사람의 인연이란 맺어졌다가 잊혀지기도 하지만, 필연은 새롭게 다시 만나게 되며 윤회하는 것인지 모른다. 선인들의 향기가 남아있는 옛 정취를 찾아가는 시간 여행에서 발견의 즐거움은 늘 새롭기만 하다.

 

심원대(尋源䑓)

 

우로부터 金榥(김황), 柳寅響(유인향), 吳政植(오정식), 朴贊殷(박찬은), 權虎鉉(권호현), 金昌浩(김창호)

 

 

☞ 김황[金榥, 1896(고종 33)~1978]

 

경상남도 의령 출신. 본관은 의성(義城). 일명 김우림(金佑林), 자는 이회(而晦), 호는 중재(重齋). 명신 김우옹(金宇顒)의 후손 이고, 아버지는 도산서원(陶山書院) 원장을 지낸 김극영(金克永)이며, 어머니는 청송심씨(靑松沈氏)로 심구택(沈龜澤)의 딸이다. 곽종석(郭鍾錫)의 문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909(순종 3) 의령 남씨(宜寧南氏)와 결혼하였고, 1910년 나라가 망하자 아버지를 따라 경상남도 산청의 황매산(黃梅山) 서쪽 만암(晩巖)이라는 깊은 산골로 이사하여 세상을 등지고 독서에만 전념하였다. 당시 한주학파(寒洲學派)의 주리학(主理學)을 대표하던 곽종석의 문하에 들어가 수학하면서 더욱 문명을 떨치게 되었고, 그 학통을 계승하였다.

 

1919년 스승의 명으로 곽윤(郭奫: 곽종석의 조카)과 함께 상경하여 고종의 장례식에 참여하였고, 여기서 김창숙(金昌淑, 1879~1962)과 만나 파리강화회의에 파리장서(巴里長書)를 보내기로 결의하였다. 이후 거창에 내려와서 스승의 명을 받들어 진주·산청·삼가 등지의 유림을 순방하면서 장서의 취지를 설명하고 서명을 받았다. 김창숙이 장서를 가지고 상해로 떠난 뒤, 왜경에 발각되어 1차 유림단사건(儒林團事件)이 일어나자 옥고를 치렀다. 오래지 않아 병보석으로 풀려난 뒤 스승의 상을 당했고, 이때 24세의 젊은 나이로 상례(喪禮)의 중책을 완수하였다. 1926년에는 여러 동문과 더불어 서울에서 면우집(俛宇集)을 간행하였다.

 

상해에 망명 중이던 김창숙이 이 소식을 듣고 독립운동의 자금을 모집하기 위해 비밀리에 입국하였다. 김황은 김창숙의 은신처로 몰래 연락하면서 면우집(俛宇集)간행소에서 유림조직을 이용하여 모금운동에 적극 앞장섰다. 김창숙이 가지고 간 거액의 자금이 뒤에 나석주(羅錫疇)의 동양척식주식회사투폭(東洋拓殖株式會社投爆) 등 독립운동에 사용되었음이 알려져 2차 유림단사건이 일어나자 9개월의 옥고를 겪었다. 1928년 만암을 떠나 산청군 신등면 내당촌으로 이사하여 강학(講學)을 시작했는데, 50년 동안 1천여 명의 문도(門徒)를 길러냈다. 광복 이전은 물론이고 이후에도 대학의 학생과 교수들이 방학기에 몰려들어 내당서사(內塘書舍)는 한때 전국유림의 중심지로 일컬어졌다.

 

일제강점기 말 창씨령(創氏令)이 내려지자 이를 단호하게 거절하였다. 그는 끝내 보발(保髮: 머리를 기른 채로 보존함)하여 전통유림의 모습을 고수했으며, 자녀들도 식민지 교육기관에는 보내지 않았다. 그는 일제의 압력은 물론이고, 일체의 비리와 무지에 굴하지 않고 끝까지 도학(道學)의 정통을 지키면서 만년에 이르기까지 이를 널리 성심껏 후인들에게 전수하는 데 힘썼다. 또한 이를 현대의 신 지식층에게까지 이어지게 하여 전통사회와 현대사회를 연결시키는 마지막 유종(儒宗)의 구실을 하였다.

 

학문세계와 저서

그는 동서고금의 모든 학문을 두루 섬세하게 섭렵하여 한주학파의 심즉리설(心卽理說)’을 기반으로 하는 도학을 정립하였다. 근서천군전후(謹書天君傳後)·동유심학약도(東儒心學略圖)등에서는 심설(心說)을 중심으로 독특한 성리학계보도(性理學系譜圖)를 만들어 이황(李滉)-김우옹-이진상(李震相)-곽종석으로 이어지는 계보에 자신의 위치를 설정하고 심즉리설의 학통을 지켰다.

 

그는 성리학적 논변에서 심즉리설의 개념을 분석하고 논증함으로써 논리적 치밀성을 바탕으로 중요한 업적을 남겼다. 저서로는 사서삼경 등 역대 경학(經學)에 대한 쇄기(瑣記)·효경장구(孝經章句), 예학(禮學)에 관한 사례수용(四禮受用), 역사에 관한 동사략(東史略)·역년도첩록(歷年圖捷錄)·독립제강(獨立提綱)·환영대조(寰瀛對照)(연표), 시문집인 익붕당총초(益朋堂叢鈔), 그리고 일기(日記)등이 있다.

 

의의와 평가

그는 도학의 가치규범 대신 물리적·실리적 가치가 우위를 차지한 시대에 살면서, 20세기의 우리 사회가 겪은 사상사적 급류 속에서 심()이 공리(功利)에 미혹되어 심의 본체가 지닌 근원성을 확인하지 못하는 데서 오는 의리(義理)의 상실을 경고했다. 또한 도덕적 주체성을 자각시키고 정립하기 위해 이를 실천적으로 추구하여 도학의 정통성을 굳건히 지켰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된다.

 

 

상훈과 추모

197812월 세상을 떠나자 많은 조객이 운집하여 유월장(踰月葬: 죽은 달을 넘겨서 다음 달에 치르는 장사)으로 장사지냈다. 1995년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대한민국독립유공인물록(국가보훈처, 1997)

속유학근백년(금장태·고광직, 여강출판사, 1989)

선비상-김황선생의 인상-(천관우, 한국근대사산책, 정음문화사, 1986)

삼일운동과 유교계(허선도, 3·1운동기념논총, 동아일보사, 1961)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