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수천 영대(靈臺)의 桃灘邊先生遺䑓 석각(200107)
산내에서 뱀사골 방향으로 도로를 따라가다 보면 영대(靈臺 : 산신령 바위) 앞 만수천 계곡가의 외진 곳에 도탄 변사정 선생 관련 석각이 있다. 桃灘邊先生遺䑓(도탄변사정선생유대)의 석각은 도탄 변사정의 제자들이 새긴 것으로 추정되는데, 지리산 둘레길 안내판에 쓰여있는 영대(靈臺)와 1611년 어우당 유몽인의 유두류산록에 나오는 영대촌(嬴代村)과 한자가 일치하지 않아 영인본을 찾아보니 영대촌(嬴代村)이라... 선생께서 영대촌의 유래를 잘 모르고 오기를 했을 것으로 이해하면 어떨는지(신강님). 아무튼 석각의 내용(도탄 변선생이 남긴 대)으로 미루어 도로가 나기 전에는 도탄 변사정 선생이 남긴 영대(靈臺)의 석각이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였다.(운성지나 산내면지에 관련 기록 없음) 도탄정사가 있었던 곳으로 추정되는 내령 마을 앞에는 실제로 물이 잔잔하게 흐르는 얕은 여울이 있는데 이곳을 도탄(桃灘)이라고 부르는 것 같다. 도탄(桃灘)은 '복숭아 꽃잎이 흐르는 여울물'이라는 뜻으로 이러한 지명은 도연명(陶淵明)의 「도화원기(桃花源記)」에 나오는 무릉도원(武陵桃源)에서 유래했다.(답사일자 : 20.01.07)
☞ 변사정 (邊士貞, 1529~1596) : 조선 중종(中宗)~선조(宣祖) 때의 문신ㆍ의병장. 본관은 장연(長淵). 일재(一齋) 이항(李恒)과 옥계 盧禛(1518~1578)의 문인으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남원에서 의병을 모집하고 많은 전투에서 전공을 세움. 본관은 장연(長淵), 자는 중간(仲幹), 호는 도탄(桃灘). 참판(參判)을 지낸 수정(水亭) 변처후( 邊處厚)의 5세손이며, 생원(生員) 변호(邊灝)의 아들로 1529년(중종 24) 남원에서 출생하였다. 남원의 운봉(雲峰)의 뱀사골 도탄에 桃灘精舍(도탄정사)를 짓고 은거하여 도탄선생이라 칭하였다.
유교 경전 가운데 '시경'과 '맹자'에 "靈臺(영대)"가 나온다. 주문왕이 만든 대인데, 원문에 "經始靈臺 經之營之(영대를 지으려고 헤아리기 시작해서, 그것을 해아려 보고 그것의 위치를 정하니)"라고 나온다. 그 주석에 "'靈'은 별안간 만들어져 마치 신령이 만든 것 같음을 이르는 말이다.[謂之靈者 言其焂然而成 如神靈之所爲也]"라는 구절이 있다. 당시는 유교 사회여서 '영대'靈臺(영대)란 이름은 아무래도 여기에서 이름을 따온게 아닌가 생각이 든다. 영대靈臺(영대)의 이름을 지은 것은 도탄 변사정 선생으로 '도탄 변사정 선생이 靈臺(영대)라는 이름을 남긴 대'로 이해가 된다.
☞ 1611년 어우당 유몽인의 유두류산록
○ 4월 1일 경오일. 동행한 사람들은 각자 대나무 지팡이를 짚고 짚신을 신고 새끼로 동여매고서 남쪽으로 하산하였다. 물가 밭두둑을 따라 굽이굽이 난 길을 가니 큰 냇물이 앞을 가로막았다. 바로 황계(黃溪)의 하류였다. 동네가 넓게 열리고, 돌이 구를 정도로 물이 세차게 흘렀다. 북쪽은 폭포이고 아래쪽은 못인데, 못 위의 폭포수는 노하여 부르짖는 듯 쏟아져 내리며 벼락이 번갈아 치는 듯한 광경이었다. 아! 얼마나 장대한 모습인가. 길을 가다보니 푸른 소나무는 그늘을 드리우고 철쭉은 불타듯이 붉게 피어 있었다. 남여에서 내려 지팡이를 짚고 서서 쉬었다. 골짜기에 두세 집이 있는데 영대촌(嬴代村)이라 하였다. 닭이 울고 개가 짖는 마을로, 깊은 골짜기와 많은 봉우리들 사이에 있었다. 참으로 하나의 무릉도원이었다. 이 마을이 이런 이름을 갖게 된 것은 그럴 만한 이유가 있구나.한 곳에 이르니 높은 언덕에 가파른 협곡이 나타났다. 양쪽 언덕으로 길을 내놓았는데 협곡이 매우 깊었다. 그 협곡 안은 모두 돌이었다. 시냇가에도 큰 돌이 수없이 널려 있었다. 이곳의 이름을 흑담(黑潭)이라 하였다.
[원문]
四月朔日庚午. 同行者各扶竹杖. 着芒鞋結繩綦. 南行下山. 徑水畦邐迤而去. 有大川橫焉. 乃黃溪下流也. 洞府寬敞. 奔流駕石. 而北瀑下潭. 潭上瀑紛崩吼怒. 作霹靂交轟狀. 何其壯也. 行見蒼松落陰也. 躑䕽如燃也. 輒下藍輿. 倚杖而息. 谷中有两三人家. 號嬴代村. 鷄鳴犬吠. 在幽谷亂峯之間. 眞一桃源也. 村之得名. 有以哉. 至一處. 高岡急峽. 拓兩厓而深其中. 其中皆全石. 溪上多太石羅列. 名曰黑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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