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왕봉 「孤竹墨熙撰 花山權倫書」 석각
얼마 전 지리산 국립공원 경남사무소 자원보전과 ○○○님에게 천왕봉 석각 관련 자료를 받았다. 지리산 내원골에 은거했던 권상순(1876~1931) 공의 손자 권맹호(權猛虎, 1941년생) 선생이 지리산국립공원 관리공단에 천왕봉 석각 조사를 의뢰하였다. 지난 4월부터 공단에서 조사를 착수하여, 3d 카메라로 사진 촬영과 탁본을 하고, 선비문화원 최석기 명예 교수님과 한학자 이창호 선생께서 석각 명문(銘文)의 판독과 국역을 마쳤다.
천왕봉 석각 명문은 폭 4.2m 높이 1.9m의 바위에 세로 16자 25줄로 전체가 392자이다. 앞부분(20줄)은 중국 역대 왕조의 흥망을 기술하고, 뒷부분(4줄)은 천왕(天王)을 상징하는 지리산 천왕봉의 위엄을 빌어 오랑캐(日帝)를 물리쳐 밝고 빛나는 세상이 오기를 갈망한다는 내용이다. 마지막 줄은 글을 찬(撰)한 사람과 글쓴이의 이름이다. 세간에는 지리산에 은거했던 권상순 공의 필획으로 알려져 있으나, 명문을 판독한 결과 고죽(孤竹) 묵희(墨熙, 1875~1942)가 찬(撰)하고 화산(花山, 안동) 권륜(權倫)이 쓴(書) 것으로 밝혀졌다. 고죽과 화산(안동)은 두 분의 본관이다.
청하(淸河) 권병국(權秉局)의 『청하일감(淸河日鑑)』에도 묵희가 지은 「청하일감서(淸河日鑑序, 1924)」와 「청하호서(淸河號敍, 1923)」 2편과 7언절구 '답간기(答簡寄)' 한 수가 실려있다. 명원정사(明源精舍) 향사록(享祀錄)에 따르면, '1922년 9월부터 1931년 3월까지 지리산 삼장면 내원골에 명원정사에서 임진왜란 때 조선을 도와준 명나라 신종(神宗) 황제의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명원정사(明源精舍) 계해년(1923년 3월 9일) 향사록(享祀錄) 초헌관에 묵희의 이름이 있다. 권륜의 이름은 13번이나 나온다. 앞으로 추가 조사를 통해 밝혀지겠지만 천왕봉 석각은 내원골 명원정사(明源精舍)에서 명나라 신종 황제의 향사를 지낸 사람들이 새긴 것으로 추정된다.
천왕봉 「孤竹墨熙撰 花山權倫書」석각은 지리산의 역사를 잠시 100년 전으로 돌려놓았다. "오늘날 천지가 크게 닫혔다고 하는데, 다시 열리는 기미는 언제쯤일까? 오랑캐를 크게 통일하여 문명이 밝게 빛나고 넓게 퍼져가는 날을 반드시 다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 울분과 원통함을 금치 못하고서 피를 토하고 울음을 삼키며 이 남악(南嶽:지리산) 천왕봉(天王峯)에 올라 만세 천왕(天王)의 대일통을 기록한다. 아! 슬프다." 광복절 79주년을 앞두고 100년 전 천왕봉에 울려퍼진 민초들의 피를 토하는 절규를 우리 모두 기억해야 할 것이다. 끝.
□ 천왕봉 석각
※ 참고 : ( ) 안에 쓴 글자는 앞글자의 正字. (?)는 앞글자 판독이 애매한 경우
帝典曰 蠻夷猾夏 二(夏)夷之防 明矣尙矣
春秋大一統者 乃以扶陽抑陰 尊王出伯(覇) 崇華夏攘夷狄 顯忠良誅亂賊者 此也 其尊崇炪(黜)攘 不亦凜二(凜)爾乎 盖皇極刱國(?) 王才拱傳 摠若干紀峕(時) 則聖人作興 任天下而爲君師 此包羲神農黃帝 爲三皇之紀 摠先世幾年 少昊顓頊帝嚳堯舜氏 以悳相承 此之五帝之紀 摠幾歲已 夏后受舜禪 商湯續禹服 周武王伐湯業 此三王之紀 摠幾世年 漢祖眦(?)周王之隙 仍起成帝 傳幾世 而曺(?)瞞綴(?)羿莽 暫(?)竊神器 然昭烈仗義 克終 總幾年 晉武値炎興 綿歷幾年 五胡亂華 宋齊梁陳 僅保名位 摠幾年 隋一 幾年 李淵父子 自發爲唐 傳幾世年 趙宋氏康紀 亦幾年焉 諸猲嚙宋 遂遇鐵木兒 蝕之焉 大明享天 傳幾世幾年 然努(?)哈(?)赤(?)蝕之 庶(?)幾絶
嗚乎 天道 非耶 是耶 奈皇昊不振何 或將永曆之連續耶 然四海洪洞 百蠻(?)跳梁 抑何峕(時)以定耶 且无乃六万來年 斯(?)入禽獸耶 曰今天地大閤閉 機栝在何(?) 必復見獯戎狄(?)夷(?)大統 以烘(?)燿瀁(?)溢(?)之日也 然自不勝憤怨 瀝血飮泣 陟此南嶽之天王 以寫(?)万世天王之統 嘻噫 悲夫
崇禎六甲子秋七月壬子朏 罔僕遺民
孤竹墨熙撰 花山權倫書
『서경』 「제전(帝典)」(「순전(舜典)」)에 “만이(蠻夷)1)가 중하(中夏)2)를 어지럽혔다.”라고 하였으니, 중하와 오랑캐가 사방을 경계로 한 것이 분명하고도 오래되었도다. 『춘추』의 대일통(大一統)3)은 곧 양(陽)을 부지하고 음(陰)을 억제하며 왕도(王道)를 존숭하고 패도(覇道)를 내치는 것으로 화하(華夏:중화문명)를 숭상하고 이적(夷狄)을 물리치며 충량(忠良)을 현양(顯揚)하고 난적(亂賊)을 주벌(誅罰)하는 것이 그것이니, 그 중하를 존숭하고 오랑캐를 물리친 것이 또한 늠름하지 않은가.
대개 황극(皇極)4)이 나라를 창업하고 왕도(王道)를 행할 재주를 가진 사람이 받들어 전하였는데, 총 얼마 동안의 기년(紀年)5)이 지난 뒤에는 성인이 태어나 천하를 책임지고서 임금과 스승이 되었으니, 이것이 복희(伏羲)·신농(神農)·황제(黃帝)가 삼황(三皇)6)의 기년이 되며 모두 상고시대의 여러 해이다. 소호씨(少昊氏)·전욱씨(顓頊氏)·제곡씨(帝嚳氏)·당요씨(唐堯氏)·우순씨(虞舜氏)가 덕으로 서로 계승하였으니, 이것이 오제(五帝)의 기년이며 모두 몇 년이다.
하후씨(夏后氏)가 순(舜)임금의 선양(禪讓)을 받았고, 상(商)나라 탕(湯)임금이 우(禹)임금의 하(夏)나라를 계승하였으며, 주무왕(周武王)이 탕임금의 상나라를 정벌하였으니, 이것이 삼왕(三王)7)의 기년이며, 모두 몇 대 몇 년이다.
한고조(漢高祖)가 주나라 천자가 쇠미해진 틈을 엿보고서 일어나 황제가 되어 몇 세대를 전했는데, 조만(曹瞞)8)이 유궁후예(有窮后羿)9)와 왕망(王莽)10)을 이어 잠시 신성한 기물을 훔쳤다. 그러나 촉한(蜀漢) 소열황제(昭烈皇帝)11)가 의기를 떨쳐 잘 끝마쳤으니, 총 몇 년이다.
진무제(晉武帝)12)가 염흥(炎興)을 만나13) 나라를 일으켜 면면이 몇 년을 이어갔다. 오호(五胡)14)가 중화를 어지럽혀 송(宋)나라·제(齊)나라·양(梁)나라·진(陳)나라가 겨우 명맥과 지위를 보전하여 총 몇 년을 내려왔다. 隋나라가 통일하여 몇 년을 지배하였으며, 이연(李淵) 부자가 스스로 일어나 唐나라를 건국하여 여러 세대 몇 해를 전했다.
조씨(趙氏)의 송(宋)나라는 평안하게 다스려진 때가 또한 몇 년이다. 그런데 북방의 여러 오랑캐가 송나라를 침범하여 마침내 타무르(鐵木兒)15)를 만나 그에게 멸망 당하였다. 대명(大明:명나라)은 천명을 누려 몇 세대 몇 년을 전했으나 누르하치(努哈赤)16)에게 멸망 당하여 거의 명맥이 끊어졌다.
아! 천도가 그릇된 것인가? 옳은 것인가? 어찌하여 황호(皇昊)17)가 떨치지 못한단 말인가. 혹 영력(永曆)18)이 이어지려는 것일까? 그러나 사해가 텅 비었고, 온갖 오랑캐가 발호하고 있으니, 또한 어느 때나 안정될 것인가? 장차 6만 년을 전해 온 문화가 이에 금수(禽獸)의 지경으로 들어가려는 것이 아닌가?
오늘날 천지가 크게 닫혔다고 하는데, 다시 열리는 기미는 언제쯤일까? 오랑캐를 크게 통일하여 문명이 밝게 빛나고 넓게 퍼져가는 날을 반드시 다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 울분과 원통함을 금치 못하고서 피를 토하고 울음을 삼키며 이 남악(南嶽:지리산) 천왕봉(天王峯)에 올라 만세 천왕(天王)의 대일통을 기록한다. 아! 슬프다.
숭정(崇禎) 후 여섯 번째 갑자년(1924) 가을 7월 임자일 초하루 나라를 잃은 유민 고죽(孤竹) 묵희(墨熙)19)가 짓고, 화산(花山:안동) 권륜(權倫)이 쓰다.(국역 최석기 교수님)
注 1) 만이(蠻夷) : 중국 황화문명권을 중심으로 동쪽의 오랑캐를 夷, 서쪽의 오랑캐를 戎, 남쪽의 오랑캐를 蠻, 북쪽의 오랑캐를 狄이라고 하였는데, 여기서는 사방의 오랑캐를 가리키는 의미로 쓰였다.
2) 중하(中夏) : 중국 황하 문명권을 가리킴. 中華 또는 華夏라고 한다.
3) 『춘추』의 대일통(大一統) : 공자가 魯나라 역사를 취해 微言大義를 붙여 『춘추』를 저술하면서 드러낸 크게 하나로 통일된 문명권을 말하는 것으로, 天命을 받은 천왕(天王:天子)이 모월을 正月로 하는 책력을 만들어 천하에 반포해서 하나로 통일되게 하는 것을 가리킨다.
4) 황극(皇極) : 『서경』 「洪範」에 보이는 말로 大中至正한 큰 표준이라는 뜻인데, 여기서는 天王을 가리킨다.
5) 기년(紀年) : 세월 또는 年歲를 가리킨다.
6) 삼황(三皇) : 伏羲, 神農, 黃帝를 가리킨다.
7) 삼왕(三王) : 夏나라 禹王, 商나라 湯王, 周나라 文王·武王을 가리킨다.
8) 조만(曹瞞) : 후한의 정승으로 삼국시대 魏나라를 세운 曹操를 가리킨다. 조조의 어릴 적 이름이 阿瞞이었기 때문에 그를 비하하여 부른 칭호이다.
9) 유궁후예(有窮后羿) : 夏나라 때 활을 잘 쏘던 인물로 하나라 임금 相을 내치고 천자의 자리를 찬탈한 인물이다.
10) 왕망(王莽) : 前漢 말 哀帝를 폐위하고 平帝를 세웠다가 독살한 뒤 찬탈하여 新나라를 세운 인물이다.
11) 소열황제(昭烈皇帝) : 중국 삼국시대 촉한(蜀漢)을 세운 유비(劉備)를 가리킨다.
12) 진무제(晉武帝) : 司馬懿의 손자로 魏元帝로부터 선양을 받아 晉나라를 세운 司馬炎을 가리킨다.
13) 염흥(炎興)을 만나 : 炎興은 蜀漢 後主 劉禪의 아들 劉諶의 연호로, 염흥 원년(263)에 魏나라가 대거 침입하자, 유심은 항복하지 않고 자결하였다. 여기서는 蜀漢이 망한 때를 만났다는 말로 쓰였다.
14) 오호(五胡) : 晉나라 말 북방의 匈奴族·鮮卑族·羯族·氐族·羌族 등 중국 북방을 침략하여 北朝를 세운 다섯 胡族을 가리킨다.
15) 타무르(鐵木兒) : 元나라를 일으킨 타무르를 가리킨다. 帖木兒, 鐵穆兒로 표기하기도 한다.
16) 누르하치(努哈赤) : 淸나라를 일으킨 누르하치를 가리킨다. 奴兒哈赤, 奴兒合赤, 老乙可赤 등으로 표기한다.
17) 황호(皇昊) : 위대한 천왕의 권위를 가리킨다.
18) 영력(永曆) : 명나라 말의 永明王(1647-1662)의 연호.
19) 묵희(墨熙, 1875-?) : 老白軒 鄭載圭(1843~1911)의 문인으로, 자는 正晦, 본관은 孤竹, 일명 묵근자(墨根子),구절산인(九節山人)이다. 固城 구절산 아래 章基(현 고성군 동해면 장기리)에 살았다.
○ 석각 내용 요약
이 글은 한말 경상우도의 유학자 노백헌(老柏軒) 정재규(鄭載圭, 1843~1911)의 문인 묵희(墨熙, 1875~? )가 짓고, 권륜(權倫)이 글씨를 써서 1924년(갑자) 7월 1일(임자일)<양력 8월 1일> 지리산 천왕봉 밑의 바위에 새긴 것이다. 글자수는 모두 392자이다.
이 글의 요지는 공자가 지은 『춘추(春秋)』의 대일통(大一統: 天王의 예악문물이 널리 미쳐 천하가 하나로 크게 통일되는 세상)을 주제로 하여, 천왕(天王)을 상징하는 지리산 천왕봉의 위엄을 빌어 오랑캐(日帝)를 물리쳐 밝고 빛나는 세상이 오기를 갈망하면서 나라를 빼앗긴 울분을 비분강개한 어조로 토로한 것이다.
이 글에는 동아시아 역대 왕조가 일어났다가 망한 것을 간추려 기록하고 있는데, 그것은 일제가 강점한 암울한 시대는 반드시 끝나고 새로운 세상이 올 것이라는 희망을 잃지 않기 위해 역사를 돌아본 것이다. 또한 단순히 역사를 회고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역대로 전한 성인의 문명, 공자의 춘추대의(春秋大義)를 지키고자 하는 강렬한 의지를 드러내고 있다. 이런 점에서 이 글은 한말의 유학자들이 지리산 천왕봉을 천왕으로 여기면서 ‘성인이 다스리는 문명국’이라는 자존의식을 잃지 않으려는 정신을 드러낸 것이라 하겠다.
2024년 월 일
최석기(한국선비문화연구원 부원장)
■ 묵희(墨熙, 1875~1942) 노백헌(老白軒) 정재규(鄭載圭, 1843~1911)의 문인으로, 본관은 고죽(孤竹) 자는 정회(正晦), 호는 경산(敬山) 일명 묵근자(墨根子),구절산인(九節山人)이다. 선생은 경남 고성군 동해면 장기리(군진마을)에서 태어나 1900년대 초 문장력과 서예가 뛰어난 인물로 선생의 유문(遺文)이 일본에까지 전해져 소장되고 있다.
1900년대 초반부터 1930년대까지 왕성하게 활동하며 많은 작품을 남겼다고 전해지나 현재 남아 있는 작품은 구만면 이회서당에 보관중인 무이구곡가(武夷九曲歌) 초서체 10폭 병풍과 육경일금(六經一琴) 편액작품 1937년 4월 25일자 매일신보의 제자(題字)『광풍제월(光風霽月)』등 3점이 확인되었으며, 최근 고성지역에서도 묵희(묵근자) 선생의 작품으로 추정되는 작품을 소장하고 있는 것이 확인되고 있다. 1937년 당시 매일신보에 선생의 글씨가 소개된 것으로 보아 전국적으로 인정받은 명필가였다.
현재 이회서당에 보관중인 선생의 대표작인『무이구곡가(武夷九曲歌)』 초서체 친필 10폭 병풍 작품은 신암 허격 선생의 부친인 성재 허홍 선생과 묵희 선생이 젊은 시절 교류하며 성재 선생의 자택을 방문해 쓴 작품으로 전해지며 그 시기는 1900~1910년대로 추정된다. 그리고, 묵희 선생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을 하다가 3년간의 옥고를 치르기도 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그에 대한 기록은 확인되지 않았으며, 1942년 작고하였다.
출처 : 고성군청 홈페이지 고성의 인물
■ 『 고성의 얼(고성문화원 발간, 2021) 』에 소개된 묵희(墨熙)
묵근자 墨根子 묵희墨熙: 신필神筆이라 불리던 서예가
고성을 빛낸 서예의 인물로서는 단연 구한말의 묵희라는 인물이 있다. 자는 정회正晦, 호는 구절산인九節山人, 경산敬山, 묵근자墨根子로 불렸다. 그의 작품에 대한 평가는 극명하게 대비되는데 한편에서는 신필神筆이라 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글도 그림도 아닌 황칠이란 혹평을 받기도 하나 현재 남아 있는 그의 작품을 대하는 순간, 왜 신필이라 칭하는지 그 연유를 깨닫게 된다.
묵근자墨根子는 누구일까. 1981년에 간행된 경허법어에는 경허가 해인사 조실로 있을 때 경상도에서 유명한 묵근자를 찾아가 만난 얘기가 실려있다. 경허가 묵근자가 앉아 있는 방안에 들어가자 묵근자는 경허를 보고도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두 사람은 한참 동안 말없이 마주 보고 있다가 경허가 먼저 “묵근자! 묵근자! 내 그대의 성화를 들은 지가 오래더니, 과연 헛된 이름이 아니로군.” 하자 묵근자가 “네, 경허대사, 경허대사! 성망을 들은지 오래인데 바로 경허대사가 아니시오.”라 하고 서로 뜻이 통하였다. 묵근자는 바로 다인상을 차려오라고 분부하였고, 여러 날 동안 경허를 모시고 법담法談을 나누었다고 전해진다.
경허가 해인사에 주석할 무렵 경남 고성 동해면 장기리의 묵희墨熙(1878?~1942?)라는 인물이 바로 그다. 그는 축지법을 하고 도술을 부리는 이인異人이었다고 한다. 전해지는 얘기로는, 그의 선대는 서울 점곡店谷에 살았으며 조부가 통영 통제사 아래 무관 벼슬을 지냈으나 정변으로 몰락, 삼족을 멸하는 수난 속에 유일하게 천애의 고아로 살아남아 통영의 어느 학자 집에 묵동墨童으로 들어가게 되면서 묵희라는 성과 이름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항시 그 선비의 먹이나 갈면서 먹빛에 젖어 있는 그를 드나들던 선비들이 농 비슷하게 성은 묵씨고 이름은 먹물이 말라 반짝거리는 빛날 희熙로 했다는 것이다. 그는 곳에서 타고난 재주로 스펀지가 물을 빨아들이듯 한학에 조예가 깊어지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묵근자는 중국 출신으로, 통영에서 고성 동해면 용흥마을 일대에 거주했으며 묵근자의 형제는 모두 5남매로, 이중 여동생은 동해면 장기리의 제씨 집안에 시집갔다고 했다”고 했다. “1940~50년대에 묵근자의 묘가 동해면에 있었으나 비가 많이 와서 떠내려가 유해를 찾지 못했지만 유골을 보았다.”고 한다. “묵근자는 키가 크고, 상투를 틀어 망건을 하고 다녔다. 얼굴은 둥글고, 눈이 부리부리하게 생겼다”고 증언하고 있다.
한때, 그는 통영을 떠나 지금의 진양군 정촌면 동물리冬勿里 안락암安樂庵이란 동굴에 기거하면서 아랫마을 만석군의 대부호인 구기언具基彦과 의기투합하여 독립을 위한 양병養兵의 식량으로 암자가 있는 일대의 전답을 구씨가 사들였으며 경산敬山을 상해 임정의 연락책으로 삼았다고 한다. 그렇게 활동하던 중, 둘 다 체포돼 구씨는 대구형무소에서 옥사했고 경산은 3년여 옥고를 치르고 풀려나게 되었는데 그가 풀려난 이면에는 경산의 필적을 본 일본 관리인들이 탄복하여 아부하여 글씨를 받아갔다 하니 필시, 감형減刑에 그의 글씨가 작용했을 터이다.
그 후, 그는 고성군 동해면 대초방 점골이란 곳에 서당 겸 집을 지어 후학들을 가르쳤다. 지금은 작고하신 고성오광대의 조용배도 그에게서 수학을 했다고 한다. 묵근자의 글씨는 일본에까지도 전해져 가보로 소장되고 있으며, 동해면 장기리 군진고개에 있는 ‘창녕 조씨 열녀비문’과 1937년 4월 25일자 매일신보 기사 제자題字로 쓴 ‘광풍제월光風霽月’이 그가 남긴 글씨이다. 현재 남아있는 그이 작품으로는 1900~1910년을 전후한 것으로 고성 구만면 이회서당에 걸려 있는 무이구곡가武夷九曲歌 초서체와 육경일금六經一琹 편액 등의 글씨다.
■ 서예가 묵근자(墨根子), 묵희(墨熙 1878-1938?) 거제 장목면 출신
일제강점기 시절, 경상남도 고성군 동해면 장기리에 묵근자(墨根子)라는 거사가 살았다. 그의 본명은 묵희(墨熙 1878-1938?)이다. 그의 호는 경산(敬山) 또는 구절산인(九節山人)인데, 축지법을 하고 도술을 부리는 묵근자(墨根子, 墨君子)로 더 알려진 이인(異人)이었다. 그는 서당 훈장을 하면서 서예에도 조예가 깊어 많은 작품을 남겼으나 전해오는 작품은 그 수량이 적은 편이다. 묵근자의 글씨는 일본에까지도 전해져 소장되고 있으며, 경남 고성군 동해면 장기리 군진고개에 있는 '창녕조씨 열녀비문'의 글씨가 묵희 선생의 것이다.
묵희(墨熙) 선생의 글씨로는, 1937년 4월25일자 매일신보 기사 제자(題字)로 쓴「光風霽月(광풍제월)」이 있고, 이회서당에 편액되어있는 「六經一琴(육경일금)」이 있다. 육경과 거문고, 즉 군자가 문사철(文史哲) 못지않게 예(藝)와 풍류에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뜻으로 보인다. 묵근자(墨根子)는 초서체(草書體)의 신필(神筆)로 알려졌으며, 그의 유작(遺作) ‘六經一琴’에 대하여 근세의 명필(名筆) 청남(菁南) 오제봉(吳齋峰) 거사(居士)가 평하기를 “六經一琴의 글씨는 무심(無心)의 경지(境地)에서 우연히 사출(寫出)된 것이다”라며 극찬하였다.
묵희(墨熙) 선생은 그의 조부님 즈음 때, 중국 청나라에서 건너와 거제시 장목면(그의 선산이 있었다)에서 귀화해 살다가, 젊은 시절 경남 통영을 거쳐, 이후 고성군 동해면에 정착하여 살았던 유명한 서예가였다. 그의 청년시절 통영 입자방(笠子房)에 근무할 때부터 글씨에 조예가 깊었는데, 이후 합천의 유학자 애산(艾山) 정재규(鄭載圭 1843∼1911)의 문하생이 되고부터 일취월장(日就月將)하여 유명한 서예가로 명성을 날리게 되었다고 한다. 그의 성씨 묵(墨)도 중국 백이(伯夷)의 성씨인 묵태씨(墨胎氏)의 ‘墨’을 취해 직접 사용하게 되었다고 전한다(전국적인 호적 정리 時). 아마 그는 선조들로부터 중국말과 한문을 직접 어린 시절부터 배우고 익혀 남달리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 다음은 일제강점기 시절, 거제도의 유학자 명계(明溪) 김계윤(金季潤 1875∼1951) 선생이, 묵희(墨熙) 선생이 거제도 선산(先山)에 방문했을 때 잠시 만난 후, 묵희에 대한 짧은 기록을 그의 문집에 적어 놓은 글이다.
⇨ 통영에 묵희(墨熙)라는 어떤 사람이 나와 비슷한 연배인데 일찍이 장목리에 있는 선산(先山)을 찾아왔다가, 지나가던 나와 잠시 만났다가 갔다. 그 후에 윤규상(尹奎祥)이 학문을 배우려고 갔던 연고로, (거제도) 윤규상을 여러 차례 방문했고 내왕했다. 그 사람이 오니 지나는 사람이 의심이 많아 물으니, 장목리 김극련이 장목에서 말했다. “(그가) 통영으로 옮겨 갔을 때는 성(姓)씨를 생각해 본적이 없었다. 장목에서 왔던 이유로 성(姓)씨 목(木)과 소리(音)가 비슷한 묵(墨)으로 (성을) 삼고 통영 사람이 되었다. (그가) 입자방(笠子房)에서 일하면서, 항상 벼루에 먹을 갈고 있었던 이유로 (입자방이) 묵서방(墨書房)이라 부르며, 이로써 성(姓)이 묵(墨)씨가 되었다”전한다. (사실은) 묵희(墨熙)가 일찍이 유람하다가 합천출신 유학자 애산(艾山) 정재규(鄭載圭 1843∼1911)의 문하생이 되었고, 백이(伯夷)·숙제(叔齊)의 성씨인 묵태씨(墨胎氏)를 얻어 백이(伯夷)의 후예가 되었다. 정애산(鄭艾山) 어른이 그 마음을 보내면서 글씨(서예)를 권면케 했다한다.[統營有墨熙者一人與余同年嘗訪其先山於長木里而過余暫逢而去 其後尹奎祥往受學故累訪奎祥而來往焉 其人來歷人多疑論長木里金克連有言自長木而移去統營時姓無可考而自長木來故因姓木而音相近而爲墨云統營人云遊於笠子房常常磨墨故謂之墨書房而因姓墨云 熙嘗遊於鄭艾山載圭門以伯夷姓墨胎氏故爲伯夷之後裔艾山丈以其意贈書奬之云]
'♣ 六友堂記 > 마애석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지리산 대표 석각 명문 탁본전시회 (2) | 2024.11.04 |
---|---|
내원골 횡하대(橫河䑓) 건너편 석각 (0) | 2024.07.21 |
雙磎石門(쌍계석문) 석각 탁본(240612) (0) | 2024.06.12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나오는 불신당 관련 기록 (0) | 2023.07.10 |
용호구곡 불신당 용호품제 석각 (1) | 2023.06.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