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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석봉(文錫鳳)의 『의산유고(義山遺稿)』 「토비략기(討匪略記)」

도솔산인 2025. 3. 14. 21:34

문석봉(文錫鳳)의 『의산유고(義山遺稿)』 「토비략기(討匪略記)」

 

 

  1895년 1월 6일(음 94년 12월 11일) 진잠에 출진한(출진하는데), 충청감사 박제순(朴齊純)이 이르기를, “진잠에 사는 박만종(朴萬宗)은 삼남의 비류 도대장(都大將)이며, 또한 금영(錦營)1)을 범하여 이미 금산을 함락하고, 사람을 죽인 것이 전봉준·김개남 2적보다 더 많다. 만일 이 적을 잡게 되면 공이 막대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대답하기를, “진잠은 거리가 이곳에서부터 60리입니다. 오늘 해시(亥時, 오후 911)에 박만종을 잡아 휘하에 바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1) 금영(錦營) : 충청도() 남영. 

 

  이에 즉시 군대가 마구점(馬口店, 공주시 반포면 마암리) 20리까지 행진하여 먼저 여행증명서(路文)2)를 진잠에 보냈으며, 소모관 문석봉(文錫鳳)의 군대가 진잠에 출진한 일을 알렸다. 기밀군관 신영휴(申英休)를 따로 보내어 밀계를 주었다. 이러이러해서 유시(酉時, 오후 79) 쯤에는 어리석은 듯한 1명의 병사를 택하여 또 봉서 1개를 주고 박만종의 집에 직접 전하였는데, 박만종이 집에 있는 여부를 묻지 않고 그의 식구에게 주고 오게 했다.

 

2) 로문(路文) : 공무()로 지방에 나가는 벼슬아치에게 역마()와 음식 등을 제공해 주라고 연도(沿)의 관아()에 미리 알리는 공문().

 

  그 편지에는 날씨는 생략하고, 지금 과천에서 온 소모관 문석봉이 다소의 의병을 이끌고 우리 읍으로 출진한다고 들었습니다. 글을 먼저 보내어 도착할 것이라고 하는데, 오늘 술시(戌時, 오후 79)와 해시(亥時, 오후 911) 쯤에 읍에 도착한다고 합니다. 또한 제가 감영에 사는 매우 절친한 자에게서 듣기로는 문()이라는 자는 기교를 부리는 것이 귀신과 같다고 합니다. 36계 중에서 5()을 쓰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그래서 저와 아무개 아무개 등 6,7인이 오늘 밤에 도착하여 황혼에 가수원의 다리(대전시 서구 가수원동과 정림동을 있는 다리) 근처에 있는 공점(空店)에 가서 기다리겠습니다. 원컨대 형께서는 빨리 행장을 차리고 1구의 단도(短刀)만 가지고 오십시요. 밤을 잊고 경상도 김산읍(金山邑)을 넘으면 투탁(投託)하여 서로 의지할 곳이 있습니다. 빨리빨리 날듯이 서둘러서 나오시는 것이 어떨까 합니다. 예로부터 사람을 기다리는 것은 힘들다고 하였습니다. 하물며 목숨을 보전하기 위해 달아나면서 살기 위한 길을 찾기 위한 것에서야 말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제발 그르치지 마시기 바랍니다. 눈썰미가 좋고 손이 빠른 군관이 반드시 사방으로 흩어져서 찾아낼 것입니다. 제발 지체하지 마십시오. 이름을 쓰지 않습니다. 두 번 인사드립니다라고 하였다.

 

  편지를 보낸 후 천천히 군대를 움직여 해시가 끝날 무렵 진잠(유성구 원내동)에 도착하였다. 말안장에서 내리지도 않은 상태에서, 신영휴가 말 앞에서 인사를 하고 말하기를, “소인은 가르쳐주신 대로 가수원 다리 근처에 있는 공점에 도착하였더니 과연 해시 무렵에 박만종이 등에 반보자기를 지고 1구의 단도를 걸고 와서 도착하여 빈 터의 옆에 서 있었습니다. 그가 누구신데 이곳에 계십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소인이 자사리(刺斜裏흑영리(黑影裏)3)를 꺼내어 이야기하기를, ‘내가 여기에서 너를 기다린 지 오래 되었다라고 하고, 곧이어 그를 결박하여 잡아왔습니다라고 하였다.

 

3) 자사리(刺斜裏흑영리(黑影裏) 죄인을 묶는 끈 또는 밧줄. 붉은 색 또는 검정색이다.

 

  곧바로 관청에 올라서 자리를 열고, 박만종을 잡아 들여 곧바로 군율을 시행하려 하였다. 그랬더니 박만종이 울면서 고하여 말하기를, “소인이 지은 죄가 천지지간에 용서받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소인의 보잘것없는 재주를 사용하여 법헌(法軒, 최시형)을 잡고 여러 우두머리들을 체포하여 공으로써 속죄하고자 합니다라고 하였다. 박만종의 사람됨을 보니 기밀과 관련한 것은 그가 능하지만, 놓아주고 다시 잡는 것은 또한 내가 어렵게 여기지 않기 때문에, 묶은 것을 직접 풀어주면서 윽박지르는 동시에 은혜와 위엄도 함께 보였다. 이에 마음에 품었던 것을 이야기하기에, 곧바로 여비를 주어 그에게 나아가서 잡아오도록 하였다.

 

  이러한 뜻으로 편지를 써서 순영에 보냈는데, 감사가 이를 듣고 깜작 놀라서 몰래 영교(營校)를 우리 진중에 보내어 박만종을 잡도록 하였다. 1월 8일(음 12월 13일) 유시(酉時, 오후 57) 무렵 박만종이 적을 염탐하고 돌아오다가 영교에게 잡혔으며, 박만종은 스스로 그의 죄를 벗어날 수 없음을 알고 기회를 보아 도주하였다. 현감 이세경과 영교들은 당황하여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으며, 어느 길을 택해야 할 지 두려워하면서 나에게 청하여 말하기를, “박만종을 놓쳤으니 어찌 하면 좋겠습니까? 원컨대 병정을 빌려주시면 밤을 잊고 쫓아가서 잡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내가 깊이 생각하여 보니, 영원히 잡지 못할 것이 뻔하였다. 계책을 제대로 행하지 못하면 오히려 큰 우두머리를 놓치게 되는 것이니 아깝고 한스러웠다. 그러나 후회를 한들 어찌 하겠는가? 병정들을 모두 내어서 현감에게 붙여주니, 현감과 영교 및 본읍의 이교들이 병정을 이끌고서 박만종을 쫓아서 갔다.

 

  나는 다시 일의 기미를 짐작하고 박만종의 사람됨을 헤아리니, 박만종은 반드시 곧바로 큰 길로 달려가지 않고 단지 한쪽에서 소리를 내는 듯하면서 다른 쪽으로 돌아갈 것이 분명하였다. 즉시 이방을 불러, “여기에서 동편으로는 무슨 마을이 있는가?”라고 물으니, “교촌(校村, 대전시 유성구 교촌동)입니다라고 하였다. 세력이 있는 집으로는 어떠한 집이 있는가? 관리의 집인가? 양반의 집인가?”라고 물으니, 이방이 말하기를, “별로 없습니다. 서리는 이상신(李相信)으로 조금 나이가 있으며, 양반은 민금해(閔金海)로 태어난 집에서 거주하고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래서 곧바로 이방과 함께 민가의 집으로 가서 확인만 하고 돌아왔다.

 

  무릎과 다리에 두른 것을 풀고(슬갑과 각반을 풀고) 아랫 사람들을 물려서 병풍으로 촛불을 막아 옅은 잠을 한 차례 잔 후에 해시(亥時, 오후 911) 무렵 다리를 묶고(각반을 묶고) 머리에 띠를 둘러 행장을 차리고, 손에 철편(鐵鞭)을 가지고 곧바로 민가(閔家)의 집에 도착하여 담을 넘어 들어갔다. 이 집은 정침(正寢, 주로 일을 보는 곳으로 쓰는 본채의 방)에 대청이 있으며, 큰 방에는 부녀들이 언문으로 된 고소설을 읽고 있었다. 작은 방으로 건너가서 어둠 속에서 손을 내밀어 2개로 된 창을 열었는데, 떨어진 것 당석(唐石) 1개를 얻어 불을 켜서 휘둘었다. 과연 박만종이 벽 아래쪽을 향하고서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그를 부르면서, “박만종, 박만종 고생이 매우 많다라고 말하고서는, 곧바로 잡아서 가두었다. 이어서 순영에 편지를 써서 알렸으며, 다시 오랑캐를 이용하여 오랑캐를 치는 계책을 써서 법헌을 잡고 싶었다. 때마침 법헌이 청산에서 소란을 피워서 박만종이 잡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부득이 눈물을 훔치고 박만종을 금영(錦營)으로 보냈다. 머리를 베고 많은 사람들에게 돌려 보였는데, 1월 12일(음 12월 17일)이었다.

 

  염정동(廉貞洞)은 고산·진산·연산·진잠 4개 읍의 경계에 있는데, 대참산(大旵山, 대둔산)은 천참(天旵)의 높고 험함이 난야(蘭若촉산(蜀山)4)과 구별하기 힘들 정도였다. 오동(烏洞, 대전시 서구 오동 벌곡면과 경계 )에 사는 백성들은 67백호이며 또한 산 앞과 산 뒤에 있는 부근의 동은 수천 호나 되었다. 을미년(乙未年, 1895) 2월 18일(음 정월 24일) 비류 중에서 교화되지 않은 자는 최사문(崔士文최공우(崔公友양양옥(梁良玉박중집(朴仲執이홍기(李洪基김치선(金致善) 등이다.

 

4)(蘭若)·촉산(蜀山) 난야는 높은 산에 있는 절, 촉산은 중국 사천성에 있는 산을 말한다.

 

  듣건대, 청산의 적들이 다시 일어나, 도당 1,000여 명을 모으고 상응하려는 생각이 있었다. 연산현감 정대위(丁大緯)는 편지를 써서 급한 사정을 알렸으며, 또한 순무영 암행참모(暗行參謀)인 이명상(李明翔)은 글을 써서 내게 진으로 돌아오라고 요구하였다. 같은 날 신시(申時, 오후 35)에 회덕에서 병정 20명과 장관 23인 등 43인을 거느리고 길을 재촉하여 진잠 남면(南面) 증촌(增村, 대전시 서구 평촌동 증촌마을)으로 가서 진을 쳤다. 적의 허실과 무기 및 식량과 땔감이 얼마나 되는지 알지 못하여, 잠시 진에 머무르다 등짐장사(負商) 2인을 보내어 그들의 사정을 정탐하도록 하였다. 이들 두 사람은 이수령[梨樹嶺, 梨峙(이치, 금산군 진산면 묵산리에 있는 고개)]에 도착하여 기밀을 염탐하는 일을 치밀하게 하지 못하여, 반대로 영() 위에 있는 비도들이 파견하여 지키는 군대에게 잡혀서 처참하게 죽임을 당하였다. 그 보다 수일 전에 연산현감 또한 정탐하기 위하여 별감을 보냈는데, 그 또한 죽임을 당하였다. 이러한 지경에 이르게 되자 병력이 약하고 적어서 할 수 있는 계책이 없어서, 참으로 근심스러웠다.

 

  한 가지의 계획을 생각하였는데, 기밀장관(機密將官)을 염정동에 보내어 3면을 드나드는 길 입구에서 피란하는 자 1명을 잡았다. 그는 본동에 사는 진사인 권도현(權道賢)이었다. 그곳의 속사정을 자세히 들어 보니, 그들의 세력이 크고 무기를 갖추고 있다고 하였다. 아무런 계책을 행하지 못하는 때에 2월 20일(음 1월 26일) 하늘에서 눈이 많이 내렸다. 기뻐서 마음속으로 말하기를,“ 이는 하늘이 나에게 성공하게하려고 하신 것이다라고 하고, 곧바로 장군의 무리들을 불러서 귓속말로 이러저러하라고 말을 해주었다.

 

  증촌(增村, 대전 서구 평촌동 증촌마을)에서부터 염정동까지는 30리로서, 산이 험한 길이었다. 그날 신시에 밥을 지어 먹고 배가 부르자, 각각 밥 한 덩어리를 싸고, 각각 탄() 5()을 가지고서 길을 떠나 곧바로 염정동으로 향하였다. 눈이 내린 가운데 1보를 가면 한번 넘어져서 매우 고생하였다. 술시(戌時, 오후 79) 쯤에 이수령 20리쯤에 도착하였으며, 산 위를 습격하여 파수막 중 7개에서 적졸들을 잡아서 모두 결박하여 막중에 가두었다. 각각 가지고 있는 탄불(炭火)을 일으켜 손과 다리를 따뜻하게 하고, 칼자루와 총머리를 데웠다. 날쌔게 마을 가운데 있는 김세마(洗馬)의 집으로 갔는데, 이때 진사 권도현은 앞에서 길을 인도하였다. 이 집은 담장의 높이가 2척이며 대문은 굳게 잠겨져 있었다. 틈 사이로 살펴보니, 불빛이 밝게 빛나고 있었는데, 모두 사람의 소리가 없었다. 대개 눈이 많이 왔기 때문에 적도들이 마음을 놓고 잠을 자고 있어서 우리 군대가 뜻하지 않게 출병한 것을 몰랐다.

 

  사졸들이 먼저 몸을 앞세우지 않으면 성공하기 힘들 것 같았다. 그래서 즉시 사람들에게 담 아래에 서있게 하고, 등을 밟고 담장에 올랐다. 담장 위는 가시로 차례로 엮어서 넘어서 내려갈 수 없었다. 담요를 덮어 미끄러져 떨어지게 하여 먼저 문고리를 뽑고 문을 열어서 군사들이 들어오게 하였으며, 발자국소리를 줄이면서 방옥(房屋)으로 갔다. 만일 총자(銃子)를 앞세우지 않았으면 완전히 큰 공을 거두기 힘들었다. 창문 틈으로 거울을 비쳐 보니, 2칸의 큰 방에 비도들의 대장이 사용하는 막()이 있었다. 적의 무리들이 삼, 사겹으로 가로 막아 어긋나게 드러누워 있었다. 북벽의 뾰족 튀어난 곳 구석에는 무리들이 모여 있었고, 수십 자루의 총이 세워져 있었다.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고 왼손에는 철편(鐵鞭)을 오른손에는 환도(環刀)를 가지고 몸을 던져 쳐들어가서 적들의 배를 밟고 적들의 머리를 밟아 곧바로 총을 세워 놓은 주위로 날개를 덮치듯이 섰다. 그때 밖에 있던 44명의 죽음을 무릅쓴 의사들이 큰 소리와 고함을 지르면서 말하기를, “경병과 신영병(新營兵) 4,000여 명은 3겹으로 포위하여 철통같이 하라. 또한 큰 문 가운데에 대포를 설치하고 만약 움직이는 자가 있으면 처참하게 죽여라라고 하였다. 그러자 여러 적들은 삼가고 조심하여 얼굴을 묻고 처분을 기다렸다. 큰 우두머리를 섬멸하고 협박에 의해 따른 자는 마땅히 사면하였다.

 

  모든 곳에 흰 눈이 내려서 마치 수많은 사람들이 협곡에 열을 지어 서 있는 것 같았고, 총을 쏘는 소리와 고함 소리가 마치 천둥과 번개가 치는 듯했다. 때는 밤 12시 정각이어서 비록 담이 큰 장사라고 해도 누군들 감히 꼼짝달싹할 수 있었으랴. 비도들 중에서 놀라서 일어난 자들은 하나하나 총이 있는 쪽으로 향하여 서게 하였으며, 머리를 숙이고 들어오게 하여 하나가 들어오면 하나를 베고 둘이 들어오면 둘을 베었다. 방내의 적 16인의 목을 베는 것이 끝나자, 남은 무리들을 모두 포박하였으며 투항 한 자들은 모두 400여 명이었다. 모두 옷을 벗기고 빈 방에 가두었으며, 남은 탄불을 켜서 손과 발에 불을 쬐고, 무기를 데웠고 보자기로 싼 밥을 따뜻하게 하여 몇 사람에게 먹도록 하였다. 곧바로 대성사(大城寺)를 향하여 10리를 가서 먼저 적의 우두머리를 잡게 하였으며, 투항한 자가 모두 400여 명이었다. 그때가 3시 무렵(丑末)이었다. 3시가 지난 때에 다시 토굴로 가서 40여 명을 사로잡았다. 이때 얻은 말과 소, 곡물들은 모두 마을에 있는 잘 살지 못하는 집들에게 진휼로 나누어 주었다. 우두머리 5놈의 목을 베고 나머지 무리들은 귀화시켰다. 이날은 2월 22일(음 정월 28일)일이었다.

 

  고산 대둔산은 가운데가 하늘로 솟아올라, 매우 높게 각이 진 바위가 3층의 길을 이루고 있다. 1명이 관문(關門)을 지키어도 1만 명이 열 수 없다는 곳이 바로 이곳이었다. 비류들의 거괴인 최공우·최사문 3부자 및 숙질로 이루어진 6명의 큰 우두머리가 그 위에서 거점을 차지하고 몇 칸의 집을 지었으며, 무기와 식량을 갖추었는데, 수개월을 지탱할 수 있는 것이었다. 멀고 가까운 적들의 우두머리로 사나운 자인 김치삼(金致三장문화(張文化김태경(金台景정옥남(鄭玉男고판광(高判光송인엽(宋仁業) 등 십수 놈이 또한 산위로 올라가서 들어간 자가 많았는데, 다른 지역에서 붙어 와서 화를 일으킬 마음을 가지고 장차 도적질을 하고 다시 일어날 계획이 있었다.

 

  2월 13일(음 1월 19일)에 조방장(助防將) 김학립(金鶴立)과 함께 신영병 40명을 이끌고 산 아래에 이르러서, 험한 산속의 좁은 길을 바라보니, 마치 하늘 위에 있는 것으로 힘으로는 빼앗을 수 없고, 다만 지혜로 취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래서 다음 날 군사들을 진산읍(珍山邑) 20리 되는 곳으로 물러나 진을 치게 하였으며, 기밀장교인 구형덕(具亨德)에게 고산(高山) 주암동(舟巖洞)으로 가서 최공우의 심복인 김공직(金公直, 의 오자)을 잡아오라고 하여, 이치로 그를 깨우쳤다. 그의 모양을 보니, 비록 귀화를 한다고 하였으나 끝내 진심은 아니었다.

 

  계책을 이용하여 계책을 취하는 법을 이용하는 것인데, 편지를 봉하여 주어서 산위에 있는 적들 사이를 헐뜯게 하여 서로 멀어지게 하였다. 편지에 쓰기를, “김치삼·장문화 등은 보아라. 너희들이 산으로 올라간 날에 정녕 나와 약속하기를 최사문·최공우 3부자 숙질의 머리를 베어 갖다 바쳐서, 공을 세우는 것으로 속죄하기로 약속하였다. 기일을 크게 어기고 있는데, 기회를 얻지 못하여 다만 손을 쓰지 못하고 있는가? 아니면 변심한 것인가? 사람이라면 누군들 잘못한 것을 고쳐서 선한 일을 하려 하지 않겠는가마는, 너희들이 만약 끝내 미혹하려 한다면 마땅히 너희들이 사는 산의 앞과 뒤를 모두 포위하여 너희들에게 물과 곡식을 대어 주는 길을 끊어서 불과 반 개월이면 마땅히 굶어 죽은 귀신을 볼 수 있을 것이며, 또한 너희들의 식구들을 모두 죽일 것이다. 빨리 계책을 행하고 하루 빨리 최적 3부자 숙질들을 베어서 머리를 가지고 와서 공을 세워 속죄를 하라고 하였다.

 

  소모관이 편지를 몰래 김공진(金公眞)에게 주어 부탁하기를, “너는 이 편지를 가지고 마천대(摩天臺)에 올라 가서 장문화(張文化김치삼(金致三) 등에게 전해 주고 힘을 함께하여 일을 이루면 모두 너희들의 공이다라고 하고 술과 먹을 것을 주고 관대하게 대하여 보냈다. 과연 김공진이 편지를 품고 산에 올라갔는데, 장문화·김치삼에게 주지 않고 몰래 최적(崔賊)에게 주었다. 최적이 직접 편지를 열어보고, 비로소 장문화·김치삼 등 나중에 온 놈 6명이 그의 3부자 숙질들을 기도하려고 왔음을 알게 되었다. 최적이 동생과 조카를 불러서 각각 귀에 대고 낮은 목소리로 편지에 쓰인 내용을 말해주고, 있는 힘을 다하여 재빠르게 장문화·김치삼 등 나중에 온 6놈들에게로 향하여 가서 하나하나 죽이고 그들의 죽은 시체의 목을 치고 낭떨어지로 던졌다.

 

  2월 16일(음 1월 22일)  바야흐로 비천포(飛天砲)를 만들었고, 최적들을 죽일 때인 2월 18일(음 1월 24일) 강화병영의 군사와 일본군사들이 도착하여 힘을 합쳐서 함께 산위에 있는 적들의 바위 소굴을 공격하였다. 다만 많은 적들이 있었으나, 모두 최적을 보지 못하였다. 그들에게 물어보니, 22일에 김치삼과 장문화와 함께 서로 공격을 하여 김치삼과 장문화 등 6인을 쳐서 죽이고, 곧바로 김공진과 함께 산위 뒤편을 따라서 내려가서 어느 곳으로 갔는지 알 수 없다고 하였다. 곧바로 그들이 있는 곳으로 따라가서 죽이려 하였다. 과연 최적은 염정동(廉貞洞)에서 다시 기포하였고, 그 때문에 큰 눈이 오는 것을 이용하여 적을 공격하여 죽일 곳으로 들어갔다.

 

討匪略記[원문]

 

十二月十一日出陣鎭岑監司朴齊純曰鎭岑居朴萬宗卽三南匪類都大將且犯錦營已陷錦山殺傷之多甚於琫準介男兩賊若得此賊則功莫大焉對曰鎭岑距此六十里當於今日亥時捉朴萬宗獻於麾下卽行陣到馬口店二十里先送路文於鎭岑使之知文召募出陣鎭岑事別送機密軍官申英休授以密計如此如此酉時量擇一箇愚呆樸兵卒又授一封書直傳於朴萬宗家不問萬宗之在家與否給其家屬以來其書曰寒暄都却今聞果川來文召募錫鳳率多小義兵出陣吾邑云而先文來到必於今日戌亥量到邑且弟聞於營下親切人處則文也機發如神云三十六計用五策最好故弟與某某六七人今夜趁着黃昏往待于假水院橋邊空店願兄速速束裝只帶一口短刀而來罔夜越慶尙道金山邑則有投託相依處千千萬萬飛也似出來如何從古待人難況逃命求生之路乎勿誤勿誤眼明手快之軍官必四散探得矣勿滯勿滯不名拜拜送書後徐徐行陣亥時末抵到鎭岑未及下鞍申英休揖於馬頭曰小人依敎到假水院橋邊空店則果然亥時量萬宗背半褓子掛一口短刀來到立於空場邊問曰有誰在此云小人出刺斜裏黑影裏曰有吾在此待爾多時仍結縛捉來云卽升廳開座捉入萬宗卽欲施師律則萬宗泣告曰小人自知罪不容覆載之間然願用小人薄技捉法軒捕衆魁將功贖罪云云見萬宗之爲人則機密一款惟渠所能且縱擒一事亦吾不難故親解其縛授差壓驚竝施恩威仍許心肚卽地給盤纏使之出送跟捕以此意書告廵營矣監司聞之驚得呆了暗送營校於我陣中使之捉得萬宗十三日酉時量萬宗詗賊而歸爲營校之所捉萬宗自知其罪之難逭乘 機逃走縣監李世卿及營校惶不擇言恐不擇路請於我曰萬宗失捕如何是好願借兵丁則當罔夜追捕云吾深思則必永失矣計未得行反失巨魁惜乎恨矣悔之何及盡發兵丁給付縣監則縣監與營校及本邑吏校率兵丁追跟萬宗而去吾更以事機斟之又以萬宗爲人量之則萬宗必不直走長路但當聲東而還西矣卽召吏房問曰此東便有甚麽里名曰校村也又問曰有何許有勢之吏家乎斑家乎吏房曰別無別無吏則李相信稍長斑則閔金海生家居住也卽與吏房往閔家但知而還解膝解脚退隷屛燭假睡了一回於亥時量束脚纏頭手持鐵鞭直到閔家越墻而入此家正寢有大廳大房中婦女方讀諺文古說越小房暗黑裏手開雙窓落得一箇唐石煌揮之果然萬宗兀坐於對向壁下招出曰萬宗萬宗多苦多苦卽捉來囚之仍書告于廵營更欲以夷攻夷期捉法軒矣適法軒梗化於靑山非萬宗之所可捉得不得已揮淚送萬宗於錦營斬首廵衆乃十二月十七日也廉貞洞在高山珍山連山鎭岑四邑之界而大旵 山天旵之高險與蘭若蜀山莫之辨烏洞中居民爲六七百戶且山前山後附近洞爲數千戶乙未正月二十四日匪類梗化者崔士文崔公友梁良玉朴仲執李洪基金致善等聞靑山賊之更起嘯聚徒黨千餘名爲相應之意連山縣監丁大緯以書告急且廵撫營暗行參謀李明翔急書要我還陣同日申時自懷德率兵丁二十將官二十三人合四十三人倍道往陣于鎭岑南面增村地方不知賊之虛實器械糧草之多小暫且留陣送負商二人探聽裏許右兩箇到梨樹嶺機事不密反爲 嶺上匪徒派守軍之所捉斫爲肉泥其數日前連山縣監亦探聽次送別監矣亦被所殺到此地頭兵微力寡無計可施正憂悶思得一計送機密將官于廉貞洞出來三面路口捉得一箇避亂人乃本洞居權進士道賢也詳聞裏許其勢壯大器械具備云計無所施之際二十六日天大雪喜而心語曰此天使我成功也卽招將官輩附耳語如此如此自增村去廉貞洞三十里山險之路也當日申時造飯喫得飽了各裹一塊飯各持炭五合申時登程直向廉貞洞雪中一步一顚千辛萬苦戌時量到梨樹嶺二十里襲擒山上把守幕中七箇賊卒竝結縛囚于幕中各起一半所持炭火呵暖手脚熱刀柄銃頭飛赴洞裏金洗馬家此時權進士道賢在前引路此家墻垣高二尺緊鎖大門從隙窺之火光煌煌竝無人聲蓋以大雪故賊徒放心就睡不知我兵之出其不意也若不身先士卒難可成功卽使人立於墻下踏背上墻墻上以荊棘鱗葺不可越下以毯褥覆之令滑而墜下先拔門鐶開門納士輕跫跫趁房屋而若不先銃子難可全收大功窺窓鏡視之二間大房爲匪徒大將 幕也賊輩橫三橫四臥了參差北壁角隅聚團立數十柄銃子奮不顧身左手鐵鞭右手環刀挺身搶入踏賊之腹踏賊之頭經到立銃邊掩翼而立時外面四十四敢死義士大聲大叫曰京兵及新營兵四千餘名圍了三帀鐵桶相似且大門中設大砲若有動彈者斫爲肉泥諸賊濟濟伏面以待處分殲厥巨魁脅從宜赦也滿地白雪如萬人堵立夾谷砲聲吶喊聲如雷霆時正子夜雖好大膽壯士誰敢動彈哉匪徒驚起者箇箇向立銃邊低頭入來一來一斫二來二斫斬了房內賊十六箇餘黨盡皆就縛投降共四百餘人盡去衣服囚了空室又起所存炭火烘了手脚熱了器械溫了裹飯喫得幾口直向大城寺十里使先擒賊魁招降四百餘名時丑末寅初又往土窟中擒四十餘名所得馬匹牛隻米租竝分賑洞中殘戶斬魁五漢餘衆歸化是正月二十八日也高山大芚山聳出中霄萬丈巖角三層棧道也一夫當關萬夫莫開正謂此也匪類巨魁崔公友崔士文三父子叔姪六箇巨魁盤據其上結構數間屋器械糧草可支日月而遠近賊魁梗化者金致三張文化金台景鄭玉男高判光宋仁業等十數漢子亦上山入夥客付而包藏禍心將爲竊發更起之計正月十九日與助防將金鶴立率新營兵丁四十名到山下望見鳥道如天上不可以力取只可以智取故翌日退兵珍山邑二十里留陣使機密將校具亨德往高山舟巖洞捉得崔公友腹心者金公直漢以理諭之觀其貌則雖許歸化終非眞心也用將計取計之法給以書封使之反間山上賊其書曰金致三張文化等見之汝等上山之日丁寧與我約以斬崔士文崔公友三父子叔姪首級來獻將功贖罪多誤期日未得機會姑未下手耶抑爲變心耶人誰無過改之爲善汝等若終始執迷則當圍住山前山後絶汝汲糧之道不過半月當見餒鬼且汝等家屬屠戮乃已速速行計不日斬崔賊三父子叔姪首級以來獻功以爲贖罪也召募書暗與金公眞囑曰汝持此書上摩天臺傳與張文化金致三等同力成事皆汝之功也賜酒食寬待以送矣果然金公眞懷書上山不給張文化金致三暗給崔賊則崔賊自坼書觀之始知金張等六個後來之漢欲圖渠之三父子叔 姪而來招弟與姪各各附耳低言書中之意奔力向前金張六個後來之賊一一結果擲開屍首於萬仞之下正月二十二日方造飛天砲滅了崔之際二十四日沁營兵丁及日兵來到合力共討上山窟宅則只有多賊竝不見崔賊問之則曰二十二日與金張自相攻擊殺金張等六人卽與金公眞從山後下去未知何往云卽隨在滅之矣果崔賊更起包於廉貞洞入於因大雪勦滅之中

 

출처 :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문석봉(文錫鳳,1851~1896) : 본관은 남평(南平). 자는 이필(而弼), 호는 의산(義山). 대구 출신. 아버지 문하규(文夏奎)로부터 한학을 수학하였다.

 

  생애 및 활동사항

  1893년 별시무과에 병과로 급제, 경복궁 오위장에 특제되었으며, 그 해 12월 공주부 진잠(鎭岑)현감으로 부임하였다.

 

  1894 11양호소모사(兩湖召募使)로 임명되어 동학농민군을 진압하는 데 공을 세웠다. 이 일로 연산·은진 등 공주부 내 6읍의 사민들이 송덕비를 세워 주기까지 하였다. 이 지역 유생들과의 이와 같은 관계가 훗날 경상도 출신인 문석봉이 진잠을 비롯한 유성·회덕 등지에서 의병활동을 전개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

 

  갑오경장 이후 개화정권에 의해 취해진 변복령과 단발령 등 제도의 개편을 반대했으며, 일제의 침략 행위를 물리치고자 항일의병을 일으켰다. 문석봉의 의병활동은 2차에 걸쳐 준비, 수행되었다.

 

  1차 의병활동은 문석봉이 붙잡힘으로써 실천에 옮겨지지는 못하였으나, 1895 2월경 무기를 준비하는 등 의병투쟁의 준비단계로서 의의가 있다.

 

  2차 의병활동은 을미사변 직후에 시작되었다. 1895 9 18 국수보복(國讐報復)’의 기치를 들고 충청도 유성에서 유성의진을 결성, 항일투쟁에 나섰다. 선봉장에 김문주(金文柱), 중군장에 오형덕(吳亨德), 군향관에 송도순(宋道淳)을 임명하였다. 유성의진의 병사수는 1,000여 명에 달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먼저 회덕과 진잠에 거주하던 송근수(宋近洙)와 신응조(申應朝) 등 전임 정승들이 뜻을 같이하여, 이들의 묵인하에 회덕군아의 무기고를 급습, 병사들을 무장시켰다.

 

  이어 진잠을 거쳐 공주부 관아를 점령하고자 진격했는데, 병법에 능한 무과 출신이고 전투지휘 경험이 있는 무장이었지만, 관군과 일본군 연합부대와의 전투에서 다수의 사상자를 내고 경상도 지역으로 패퇴할 수밖에 없었다.

 

  이어 오형덕 등과 고령·초계 등지에서 재기를 도모했으나 고령현감의 밀고로, 1895 11월 대구감옥에 갇히고 말았다. 1896년 초 동지들과 감옥을 부수고 나와 원주 일대에서 통문을 돌리며 전국적인 의병봉기를 독려하였다. 그러나 옥고를 치르며 얻은 병으로 그 해 5월 낙향하였고, 결국 11월에 죽었다.

 

 문석봉의 의병활동은 을미의병의 기점으로서, 단발령 직후 전개되는 반일의병투쟁의 촉발제 구실을 수행했다는 점에서 그 의의를 찾을 수 있다.

 

  저술활동

  문석봉이 남긴 기록으로 의산수록(義山隨錄) 2책이 전해 오고 있으며, 1934년 이를 저본으로 후손들이 간행한 의산유고(義山遺稿) 2책이 있다.

 

  상훈과 추모

 199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