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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포(灌圃)의 독녀심선(獨女尋仙)에 나오는 독녀성

도솔산인 2024. 7. 31. 09:02

관포(灌圃)의 독녀심선(獨女尋仙)에 나오는 독녀성

 

 

  2019221~22일 독녀성을 찾기 위한 첫 답사를 하였다. 답사 자료는 달랑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31권 경상도, 산음현에 "독녀성(獨女城) 현 서쪽 27리 지점에 있다. 석축이며 둘레가 천 730척이고, 시냇물과 샘(?)이 있었으나, 지금은 모두 무너졌다."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別集 17 변어전고(邊圉典故)의 폐지된 산성에 "독녀성(獨女城) : 현의 남쪽 27리에 있다."라는 기록이다. 두 기록의 방향이 서와 남으로 다르다. 당시 독녀암과 삼열암 일원, 선녀굴 주변의 망바위 석축과 미타봉을 잇는 지점을  조사하였다

 

  그로부터 몇 년이 흐른 뒤 산음 현감(재임 기간 1502~1508)을 지낸 관포(灌圃) 어득강(魚得江, 1470~1550)의 독녀심선(獨女尋仙) 시를 읽게 되었다. 독녀심선의 부기(附記)'오석강(烏石岡) 서쪽 석성터가 있는데 속칭 독녀암이다. 옛날 독녀가 도를 연마하여 하늘로 올라갔다.[烏石岡西有石城址 俗稱獨女岩 古有獨女 鍊道冲空] '라는 기록이다. 오석강은 오석행춘(烏石行春) 시의 부기(附記)'현의 서쪽 10리에 흑석촌(黑石村)이 있는데 내가 왕반산(王半山, 왕안석의 호)'過外弟飮(외사촌 집에 들러 술을 마시며)' 3구에 나오는 시어 오석강(烏石岡)을 본받아 고쳐서 오석(烏石)이라고 하였다.[縣西十里有黑石村 余效王半山改爲烏石]'라고 설명하고 있다. 본래 이름이 흑석촌(黑石村)인데, 관포가 오석촌(烏石村)으로 고쳤다는 이야기이다.

 

  관포(灌圃) 어득강(魚得江, 1470~1550)은 관아의 누각에서 독녀암을 바라보고 독녀심선(獨女尋仙)을 지었다. 환아정에 오르면 고동재 뒤 서쪽으로 독녀암이 보인다. 산청학연구소 권유현 선생님과 고동재를 답사하였다. 고동재를 넘으면 오봉리와 방곡리이다. 확인이 더 필요하겠지만 필자는 고동재를 오석강으로 추정한다. ()은 산등성이의 잘록한 고개이기 때문이다. 고동재에서 독녀암은 보이지 않았다. 권선생님께서 수철리에서 내려오는 계곡을 오계(烏溪)라고 설명하셨다.

 

  금서면은 본래 산청군 지역으로 금석면(今石面) 또는 검석면(黔石面)·오석면(烏石面)이라고 불렸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서상면(西上面)의 가등(佳鐙) 5개 리와 서하면(西下面)의 화계(花溪) 5개 리가 통합되어 12개 리로 개편되었고, 금석면과 서상면의 이름을 따서 금서면이 되었다고 한다. 흑석촌(黑石村)黑은 검을흑,  오석강(烏石岡)의 烏는 검을오, 검석면(黔石面)의 黔은 검을검, 금서면(今西面)의 今은 '검다.'라는 의미로 금(今)을 음차한 것으로 보인다.

 

 

獨女尋仙[독녀암에서 신선을 찾다.]

 

  烏石岡西有石城址 俗稱獨女岩 古有獨女 鍊道冲空[오석강(烏石岡) 서쪽 석성터가 있는데 속칭 독녀암이다. 옛날 독녀가 도를 연마하여 하늘로 올라갔다.]

 

                      어득강(魚得江, 1470~1550)

 

三峯森戟削 : 세 봉우리 창을 깎은 듯 뾰족한데

獨女露城稜 : 독녀암이 성곽 모서리를 드러냈네.

日日樓中望 : 날마다 누각 안에서 바라보았으니

躋攀記我曾 : 올라가면 이전의 나를 기억하리라.

 

독녀심선(獨女尋仙) : 관포선생시집(灌圃先生詩集)山陰十二詠 중 제8수이다.

 

 

烏石行春[오석(烏石)에 봄나들이를 가다.]

 

  縣西十里有黑石村 余效王半山改爲烏石[현의 서쪽 10리에 흑석촌(黑石村)이 있는데 내가 왕반산(王半山, 왕안석의 호)<過外弟飮(외사촌 집에 들러 술을 마시며)>1) 3구에 나오는 시어 오석강(烏石岡)을 본받아 고쳐서 오석(烏石)이라고 하였다.]

 

                     어득강(魚得江, 1470~1550)

 

茅屋皆臨水 : 띠집은 모두 계곡에 접해있고

桃花盡掩門 : 복사꽃이 피어 다 문을 가렸네.

籃輿烏石逕 : 남여를 타고 오석으로 가는 길은

擬入武陵村 : 무릉도원으로 들어가는 듯하네.

 

烏石行春(오석행춘)山陰十二詠 중 제2수이다.

 

1) 반산(半山)은 송나라의 문인이자 정치가인 왕안석(王安石)의 호이다. 그의 과외제음(過外弟飮)이라는 시에 모르겠어라 오석강 길을, 늙을 때까지 서로 찾아갈 일 몇 번일런고.[不知烏石岡邊路, 到老相尋得幾回?]”라고 하였다. 출처 : 고전번역원

 

어득강[魚得江, 1470(성종 1)~1550(명종 5)]

 

  본관은 함종(咸從). 자는 자순(子舜). 호는 자유(子游관포당(灌圃堂혼돈산인(渾沌山人). 증조는 어변질(魚変質)이고, 할아버지는 어효원(魚孝源)이며, 아버지는 어문손(魚文孫)이다.

 

  1492(성종 23) 진사가 되었다. 1496(연산군 2)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곡강군수(曲江郡守) 등 외관직을 거쳐, 1510(중종 5)에 장령(掌令), 1516년 교리(校理), 1518년 헌납(獻納), 1529년에는 대사간이 되었다. 1549(명종 4)에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랐으며, 상호군을 사직한 뒤 벼슬을 하지 않고 경상남도 진주에 물러나 살았다. 문명(文名)이 있고, 특히 농담을 잘하였다. 고성의 갈천서원(葛川書院)에 제향되었다.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환아정에서 바라본 독녀암
상대날등에서 바라본 독녀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