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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수천(萬水川)의 옛 이름 황류천(黃流川)와 황계(黃溪)

도솔산인 2024. 7. 1. 11:11

만수천(萬水川)의 옛 이름 황류천(黃流川)와 황계(黃溪)

 

 

  옛 기록을 상고하여 현재의 지명을 고증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3년 전 어우당 유몽인길을 답사하면서 황계(黃溪)에 대한 의문은 좀처럼 풀리지 않았다. 조경남의 『난중잡록』을 좇아 용추와 파근사 거쳐 정령치를 넘어, 서산대사의 황령암기에 나오는 황령암에 이르기까지 손끝이 보이지 않는 짙은 안개속 걸어왔다. 황계의 유일한 단서는 옛 문헌에 나오는 황류동(黃流洞)황령암(黃嶺庵)이다.

 

  조경남의 『난중잡록』에 "황류동(黃流洞)은 지리산의 황령사(黃嶺寺, 황령암)와 향로봉의 사이에 있는데, 수원(水源)은 반야봉(般若峯)에서 나와 삼기수(三岐水: 세 갈래 물줄기)가 묘봉(眇峯)을 두루 돌아서 내려온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뒤 문장은 황류천(황계:만수천)의 수원에 대한 설명이다. 1765년경 편찬된 『여지도서(輿地圖書)』에 "달궁이 지리산 향로봉 아래에 있다."라고 하였다. 1818년 정석구(鄭錫龜)의 「두류산기」에 "그(만복대) 동쪽으로 낮아지는 산줄기는 황령(黃嶺)의 주능선이다." 서산대사의 황령암기에 "황령(黃嶺) 남쪽에 절을 세우고, 그 이름을 따라 황령암(黃嶺庵)이라고 하였다." 위 내용을 종합하면 황령(黃嶺)황령암(黃嶺庵)황류동(黃流洞)황계(黃溪)를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 황류동(黃流洞)달궁(達宮), 황류천(黃流川)과 황계(黃溪)만수천(萬水川)의 옛 이름으로 이해가 된다. 확인이 더 필요하겠지만, 부연정(釜淵亭) 차운시에 나오는 황강(黃江)임천()을 가리킨다.

 

 

조경남의난중잡록

 

○ 1597년 8 15 나와 양형(梁兄및 백암(白嵓이공직(李公直)의 부형과 가족 수백 명이 돌의 모서리를 붙잡고 기어서 내려갔다황류동(黃流洞)[지리산의 황령사(黃嶺寺) 향로봉의 사이에 있는데수원(水源)은 반야봉(般若峯)에서 나와 삼기(三岐묘봉(眇峯)을 두루 돌아서 내려온다.]에 이르러 밤을 지냈다.

 

○ 1597년 8 16 흉적(兇賊)이 남원을 함락했다. (중략밤중에 고촌(高村)으로 내려가 보니 적병이 넘쳐나 길을 건너기 어려운 형세이므로 바로 그대로 돌아왔다즉시로 양형과 이공직 등 여러 사람과 같이 황류천(黃流川) 건너 은신암(隱身庵)의 옛터[향로봉의 북쪽 기슭 아래 있다.] 들어가 막을 치고 머물렀다.

 

○ 1597년 9 2 양형과 이공직의 형 등 여러 사람과 같이 도로 은신암으로 내려갔다이때에 왕래하는 왜적이 끊어지지 아니하고산골짜기를 날마다 수색하게 되어 길이 꽉 막혀버려 식량 주머니가 텅 비었으나 어쩔 수 없이 향로봉으로 해서 도로 은신암으로 돌아왔다하루를 머무르니 왜적의 형세가 약간 멎게 되었다이공직의 형 등은 운봉으로 나갔다가 연상산(煙象山)으로 내려가고우리들은 밤에 황류천(黃流川) 건넜는데늙은이와 어린이들이 병들고 고단하여 행보가 더디었다.

 

 

  1611년 유몽인의「유두류산록」

 

○ 4월 1일 경오일. 동행한 사람들은 각자 대나무 지팡이를 짚고 짚신을 신고 새끼로 동여매고서 남쪽으로 하산하였다. 물가 밭두둑을 따라 굽이굽이 난 길을 가니 큰 냇물이 앞을 가로막았다. 바로 황계(黃溪)의 하류였다. 동네가 넓게 열리고, 돌이 구를 정도로 물이 세차게 흘렀다. 북쪽은 폭포이고 아래쪽은 못인데, 못 위의 폭포수는 노하여 부르짖는 듯 쏟아져 내리며 벼락이 번갈아 치는 듯한 광경이었다. 아! 얼마나 장대한 모습인가. <중략> 황계 폭포(黃溪瀑布)를 지나 환희령(歡喜嶺)을 넘어 이어진 30리 길이 모두 푸른 노송나무와 단풍나무였으며, 비단 같은 날개를 가진 새들이 사람을 아랑곳하지 않고 날아다녔다. 내원(內院)에 이르니 두 줄기 시냇물이 합쳐지고, 꽃과 나무가 산을 이룬 곳에 절이 세워져 있었다.

 

 

 이병연(李秉延, 18941977)이 편찬한 조선환여승람에 나오는 달궁

 

달궁 : 지리산 향로봉 아래 있다. 폐허된 채 주춧돌과 무너진 담장이 지금까지 아직 남아있다. 즉 마한의 왕궁터라고 하며 후에 백성들이 거주하였으나 신해년(1731) 홍수로 산이 무너져 내려마을이 하나없이 엄몰되었다. 임금으로부터 향과 축문이 내려져 제사를 지냈다.[達宮 在智異山香爐峯下 廢礎 頹垣 至今尙存 卽馬韓王宮址 後爲民居 辛亥大水山頹渰沒  一村無餘 自上降香祝以祭之]

 

황계 내원동(內院洞) 향로봉(香爐峯) 아래 여러 골짜기 물이 합해져 흐른다. 그리하여 일명 만수동(萬水洞)이라 한다이상은 본 운봉군(雲峰郡, 지금의 운봉읍)에 있는 것으로 거리는 본 구읍지(운성지)것을 그대로 계산한 것이다.

 

 조선환여승람 충남 공주(公州)의 유학자인 이병연(李秉延:18941977) 1910년부터 1937년까지 전국 241개 군 중 129개 군의 인문 지리 현황을 직접 조사, 편찬하였다. 1933년부터 1935년까지 3년 동안 26개 군에 관한 것이 책으로 만들어져 간행 보급되었으나, 나머지는 일본 경찰의 감시와 재정난 등으로 간행되지 못한 상태로 보관되어 오다가 1990년 그 후손이 국사편찬위원회에 기증하여 나오게 되었다. 조선환여승람 남원편은 2000년 남원문화원에서 국역하여 간행하였다.

 

 

  부연정(釜淵亭) 시

 

又韻(우운)                       玄孫 泰源

 

指點黃江舊釣坮 : 황강의 옛날 낚시하는 바위 언덕을 가리키니

吾家先業是由來 : 우리 가문 선대의 일이 여기에서 유래했네.

明沙白礫三分雪 : 하얀 모래 흰 자갈에 세 갈래로 백설 뿜어내고

怒瀑長風十里雷 : 성난 폭포 긴 바람에 우레 소리 십리까지 들리네.

問宅何煩詹尹事 : 집터 찾기 어찌 첨윤(詹尹)의 점치는 일 번거롭게 하리

芸山却憶祝融盃 : 향기로운 산에서 도리어 축융(祝融)의 술잔을 생각하네.

誰知南北腥羶日 : 누가 알겠는가, 남북이 피비린내 나게 전쟁하던 날에도

惟有斯亭不染埃 : 오직 世俗塵埃에 물들지 않은 이 정자만이 있었음을.

 

 

又韻(우운)                        春溪 河琪鉉

 

雲峰缺處屹孤坮 : 구름 낀 산간의 뻥 뚫린 곳에 우뚝한 바위언덕

吸盡黃江一口來 : 黃江의 물을 다 들이켜서 한 입으로 토해 내네.

坐石淸凉無暑日 : 앉아 있는 이 석대는 시원하여 더운 날이 없고

立泉磊落旣風雷 : 떨어지는 폭포는 성대하여 이미 우레 소리 나네.

偏憐二釜但沈土 : 두 가마솥 흙 속에 잠겼음을 매우 안타깝게 여기고

爲賀三楹更擧盃 : 세 기둥 정자 건립을 축하하며 다시 술잔을 드네.

徊憶從前韓子筆 : 옛날 南嶽(衡山)을 유람하고 쓴 韓愈의 글을 생각하니

能令南嶽洗氛埃 : 南嶽의 산신으로 하여금 티끌 기운을 씻어내게 하였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