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六友堂記/♧작업실 43

군자사지(君子寺址)와 진평왕 태자 태실지 소고(小考)

군자사지(君子寺址)와 진평왕 태자 태실지 소고(小考) 1. 진평왕(眞平王)과 군자사(君子寺) 1684년(숙종 10년) 방장산 승려 형곡(荊谷) 복환(復還)이 쓴 군자사 사적기에 '신라 진평왕(眞平王)이 군자사에 머물며 태자를 낳았고, 이후 환도하면서 머물던 곳을 사찰로 만들어 ‘군자사’라는 사명(寺名)을 지었다. 고려조 1198년에 불일국사(佛日國師)가 상무주암에서 수도를 마치고 송광사로 돌아가는 길에 옛터를 보고 영건(營建)하려다가 이루지 못한 것을 한하였다. 이듬해 1199년 진각국사(眞覺國師)가 이곳에 중창하였다. 이후 다시 흥폐를 거듭하다가 1317년(충숙왕 4)에 혜통(慧通) 화상이 군자사를 중수하였다. 여말선초 왜구의 침략으로 소실된 것을 1404년(태종 4년)에 행호(行呼)대선사가 중창하였다..

感樹齋先生文集券之五 雜著 天嶺孝烈錄

感樹齋先生文集券之五 雜著 天嶺孝烈錄  愼孝先字百源。居池谷村。以善父母友兄弟。見稱於人。父母有疾。雖流離困頓中。憂悸之色。常在於面。藥餌之物。傍求必致。連遭父母喪。啜粥過哀。遂不起。其葬也。余佐幕本道。哀孝子之無勸。且憐其窮無以入土。發軍窆之。事聞㫌閭。 신효선의 자는 백원(百源) 지곡촌(池谷村)에 살았다. 부모님을 잘 봉양하고 형제간에 우애가 있어서 사람들에게 칭송을 받았다. 비록 떠돌며 가난한(困頓) 가운데에도 근심하고 두려워하는 빛이 항상 얼굴에 있었다. 약이 되는 음식(藥餌之物)을 가까운데서 구하여 반드시 이루었다. 연달아 부모의 상을 당하여 죽을 마시며 애통함이 지나쳐 마침내 일어나지 못하였다. 그 장례를 행할 때 내가 본도(경상도)의 좌막(비장, 보좌관)이 되어 효자를 위해 힘쓸 것이 없음을 슬퍼하였다. 또 그 궁벽..

1610년 박여량의 두류산일록에 나오는 초령과 엄뢰대

1610년 박여량의 두류산일록에 나오는 초령과 엄뢰대 ▣ 일 시 : 1610년(광해 2) 09월 02일~09월 08일 ▣ 대상산 : 두류산 ▣ 동 행 : 박여량(57세, 전世子侍講院文學), 정경운(55세, 남계서원임), 박명부(40세, 합천군수), 박명계, 신광선, 박명익, 이윤적, 노륜, 안국사 승려(처암, 운일), 악공(윤걸), 종[박여승의 종(혜금연주), 신광선의 종(피리연주), (박여량의 종(옥로, 손득)]등외(15명외) ▣ 일정&코스 • 9/2 : 함양 병곡면 도천리-어은정-목동 박춘수의 집 • 9/3 : 목동(함양군 휴천면 목현리)-탄감촌(휴천면 문정리)-용유담-군자사(마천면 군자리) • 9/4 : 군자사-백모당-하동암(우리동)-옛제석당터-제석당 • 9/5 : 제석당-향적사(서천당)-중봉(제석..

마천 의중마을 임종달(林鍾達, 1843~1886) 공의 교지

마천 의중마을 임종달(林鍾達, 1843~1886) 공의 교지 임종달(林鍾達, 1843~1886) : 본관은 나주(羅州) 자는 도오(道吾) 호는 신정(愼亭) 한말 마천 의중마을에 살았던 인물, 공의 장남이 영택(英澤, 1866~1925), 둘째가 성택(性澤, 1868~1922), 셋째 아들이 와유강산(臥遊江山)을 지은 삼송(三松) 임응택(林應澤, 1879~1951) 선생이다. 삼송 공은 종구품(從九品) 선릉 참봉(宣陵參奉) 벼슬을 지냈다. 아래 교지는 임종달 공의 고손자인 임재운(林載雲, 1952~ ) 화백에게 받은 자료이다. 敎旨 林鍾達通政大夫爲左承旨(兼)經(?)筵參贊五衛都摠官副司諫者 光緖九年(1883년)二月 內府大臣金嘉榮宣 통정대부 임종달을 좌승지겸 경연청 참찬관과 오위도총관 부사간으로 삼음. 광서 9..

1611년 유몽인의 유두류산록에 나오는 와룡정

1611년 유몽인의 유두류산록에 나오는 와룡정 ▣ 일 시 : 2021년 05월 23일(일) ▣ 코 스 : 쌍계사-화개-와룡정(?)-남창(구례 광의면)-숙성치-용담-남원관아(남원 용담초교) ▣ 인 원 : 2명(지리산아님) ▣ 날 씨 : 맑음 유람록을 읽고 답사를 하면서 옛 지명을 이해하려면 많은 시행착오를 겪어야 한다. 작년 1월 초 남원의 신강님과 백장암에서 와운 마을까지 차량으로 답사를 하였다. 그 후 재간당에서 백장암, 백장암에서 도탄, 반선에서 영원사, 영원사에서 군자사, 용유담에서 마적사, 송대에서 두류암, 두류암에서 옹암, 남원관아(용성초교)에서 숙성치, 쌍계사에서 숙성치로 이어나갔다. 구례군 토지면 용두리 섬진강변에 용호정이 있다. 나는 용두리의 지명과 용호정이라는 정자 이름에 주목하였다. 1..

산동 목동마을 부안김씨 세보

남원 산동 목동마을 부안김씨 세보 김익복(金益福, 1551~1598) : 본관은 부안(扶安), 자는 계응(季應), 호는 금릉(金陵), 시호는 충경(忠景). 문정공(文貞公) 지포(止浦) 김구(金坵)의 후손이며, 찰방(察訪) 김광(金光)의 아들이다. 김익복은 옥계(玉溪) 노진(盧禛)의 문하에서 수학했고, 충청도 연산으로 옮겨 살면서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과 교류했다. 1573년(선조 6)에 생원시에 합격하고, 1580년(선조 13)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좌랑(佐郞)·도사(都事) 등을 역임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능성현령으로 있으면서 전(前) 현감 임계영(任啓英) 등과 같이 의병을 일으켜 성주와 개령을 지키고, 금산에서 무주로 넘어오는 적을 막았다. 1597년 정유재란 때는 부모 상중이었는데 도원수 권..

칠선봉 능선과 일자문성(一字文星)

칠선봉 능선과 일자문성(一字文星) 삼송(三松) 임응택(林應澤, 1879~1951)은 한말과 일제 강점기에 함양군 마천면 의탄리 의중 마을에 살았던 인물로 죽포(竹圃) 이규현(李圭玹, 1848~1935)공의 생질이다. 젊었을 때 지리산을 유람하고 와유강산을 저술하였다. 내용은 지리산 10勝地와 9奇, 18景을 읊은 3(4).4조의 4음보 가사 형식이다. 저술 시기는 산청의 지명으로 미루어 1914년 이후로 추정된다. 원본은 전하지 않고 마천면 당흥 부락 김수태(92세 1929생) 어르신이 17세 때(1945년)에 필사한 필사본이 전한다. 1994년 함양 서복연구회 문호성 회장님이 발굴하여 와유강산을 마천 향토지(1994년 8월 27일 발간)에 소개하였다. 지난 해 11월초에 마천의 당흥마을 김수태 어르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