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六友堂記/♧작업실 45

조경남의 『난중잡록』에 나오는 황류동과 향로봉

조경남의 『난중잡록』에 나오는 황류동과 향로봉 조경남의 『난중잡록』에 나오는 향로봉은 반야 중봉, 투구봉, 『남원산하』의 향로봉 중 한 곳으로 좁혀진다. 정유재란 때에 조경남이 피난온 '은신암 옛터'는 향로봉의 북쪽 기슭에 있고, '수백 명이 피난할 수 있는 곳'이다. 투구봉을 향로봉으로 보면 지리산길 지도의 망바위봉이 향로봉의 북쪽 기슭에 해당된다. 그곳의 평지가 피난하기 가장 안전하고 따스하며 적이 오는 것을 살피기도 좋고 도망가기도 좋다.(산영님) 조경남의 『난중잡록』에 "1594년 12월 초5일 임걸년(林傑年)이 향로봉에 주둔했다가 운봉 군사에게 밤에 습격을 당하여 패하여 달아났다." 향로봉 북쪽 기슭 은신암 옛터에 도적 임걸년의 산채가 있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注 참고로 지리산길 지도의 망바위봉..

황령(黃嶺)과 황령암(黃嶺庵)에 대한 문헌의 기록

황령(黃嶺)과 황령암(黃嶺庵)에 대한 문헌의 기록 서산대사의 「황령암기」에 "마한(馬韓)의 왕이 피신하여 달궁에 도성을 쌓을 때, 黃·鄭 두 장군을 시켜 공사를 감독하였으므로, 두 사람의 성을 따서 황령(黃嶺)과 정령(鄭嶺)이라고 하였다."라고 황령과 정령의 유래를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반야봉의 좌우에 황령과 정령이 있다."라는 문구는 오히려 황령의 위치에 혼란을 준다. 황령의 위치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얼마전 칠성님이 '황령은 어디인가?'라는 질문을 던졌다. 그래서 관련 자료를 읽어보고 지리산길 지도에 표기된 황령암 터를 답사하게 되었다. 황령암(黃嶺庵) 관련 기록을 요약하면, 만복대에서 동쪽으로 뻗은 산줄기가 황령의 주능선이다. 황령은 만복대 동릉에 있는 황장군이 달궁을 지키던 고개이다. 황령..

13. 姜錫佐의 『重隱集』卷1 遊錦山記

13. 姜錫佐(1777~1853)의 『重隱集』卷1 遊錦山記 遊錦山記 【有詩有歌詞逸】 錦山號稱小金剛 擅名於東國者也 歲己卯秋 與族人仲直景雲甫 約日登程 賚略干糧 至鼓洞文生家暫憩 暮抵龍湖 訪鄭士克門 碁酒永夕 유금산기 【시와 가사가 있었는데 잃어버렸다.】 금산은 소금강이라고 불리고, 우리나라에서 이름난 산이다. 기묘년(1819, 순조 19년) 가을, 집안사람인 중직(仲直)·경운(景雲)과 날을 정해 유람길에 올랐다. 약간(略干)의 양식을 챙겨서 고동(鼓洞) 문생(文生)의 집에 이르러 잠시 쉬었다. 저물녘 용호(龍湖)에 이르러 정사극(鄭士克)의 집에 방문하여, 바둑을 두고 술을 마시면서 밤을 지새웠다. 翌日 至前芳村 三從弟善之 贅於梁生潝者 有年欣倒款接 仍過仲坪 有朴生必權 中路要之 朴願從 許之 訪大峴 鄭毅之講道舊故 是..

선인들의 유람록에 나오는 장정동(長亭洞)과 삼정(三丁)

선인들의 유람록에 나오는 장정동(長亭洞)과 삼정(三丁) 마천면 삼정리(三丁里)의 옛 이름은 천령지(1656년 편찬, 1888년 간행)와 함양군지(1956)에 정장(亭庄)으로 기록하고 있다. 1994년 마천애향회에서 편찬한 마천면지에는 삼정(三丁) 마을의 유래를 '정쟁이' 또는 '정재이'로 한자로 정장(丁莊, 일꾼들이 사는 마을)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하정(下丁) 마을 선유정 상량문(仙遊亭上梁文, 1976)에는 "진(秦)나라 혜문공(惠文公)이 촉도(蜀道)를 뚫으려고 거짓으로 금우(金牛)를 변경에 설치했으니 그 당시 다섯 역사(力士)가 쓰던 도끼로 삼정(三丁) 마을을 개척하였네."라고 하였다. 이렇게 기록마다 한자의 표기가 다르다. 선인들의 지리산 유람록에 장정동(長亭洞)이 나오는데, 정황상 삼정(三丁)을 ..

마천지서장 하만수의 칠언절구 육이오동란

마천지서장 하만수의 칠언절구 육이오동란 六二五動亂 육이오동란 白頭風烈荒波動 : 백두산 바람은 매섭고 거친 물결이 이는데 北進軍兵攻擊越 : 북진하는 군병은 삼팔선을 넘어 공격하네 外勢當時千古恨 : 당시에 외세의 개입은 천고의 한이 되었고 胸中忿痛心流血 : 가슴속 분통함은 마음에 피가 되어 흐르네 대한민국경찰서부전투지휘함양경찰제칠중대장 퇴경 하만수 ※ 지리산 마천면사 편찬위원회 문호성회장님이 발굴한 자료임. ▶ 함양경찰서 마천지서 경비주임 하만수 관련 기록(編) 1.4후퇴로 북괴군이 지리산으로 들어와 빨치산이 기승을 부리자 마천주민들은 자발적으로 마천면에 통나무 목책을 쌓고 특공대를 조직했다. 당국에서 권유하기도 했지만, 17세 소년으로부터 50대의 장년층에 이르기까지 싸울 수 있는 사람은 모두 참여했다. ..

1616년 성여신의 방장산선유일기에 나오는 설봉과 숙묵암

1616년 성여신의 방장산선유일기에 나오는 설봉과 숙묵암 화개동천(花開洞天) 초입에서 바라보면 12시 방향으로 가장 높이 보이는 봉우리가 있다. 1301봉으로 이름이 없다. 정상에 헬기장이 있고, 빨치산 토벌을 위해 국군이 돌로 쌓은 참호가 있으며, 인위적으로 쌓은 석축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있다. 쌍계사 주차장에서 올려다보면 雪峰(설봉)으로 추정되는 1301봉이 보인다. 1301봉 남동 편에 하동 독바위가 있다. 지난주 산학동자(도필락)님에게 '설봉에 다녀온다.'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雪峰(설봉) 관련 자료를 공유하였고, 산행 후 성여신의 유람록 국역 부분을 물어왔다. 1616년 성여신의 「방장산선유일기」에서 " 번천동(樊川洞)을 지나 숙묵암(宿黙菴)을 거쳐서 설봉(雪峰)을 넘어 불일암(佛日菴)에서 묵었..

姜錫佐(1777~1853)의 『重隱集』 卷1 遊錦山記

姜錫佐(1777~1853)의 『重隱集』 卷1 遊錦山記(1,204자) 아직 발굴되지 않은 남해 금산 유람록이다. 강석좌(姜錫佐, 1777~1853)는 조선 후기 하동에서 활동한 학자이다. 기묘년(1819, 순조 19년) 가을 남극 노인성을 보기 위해 중직(仲直) 강경운(姜景雲), 박원종(朴願從), 박필권(朴必權) 등과 금산을 유람한다. 우리나라에서 노인성을 볼 수 있는 곳은 제주도와 금산 보리암, 지리산 법계사이다. 1896년 8월 천왕봉에서 노인성을 보기 위해 지인들과 함께 산행한 두산(斗山) 강병주(姜柄周, 1839~1909)는 두류행기(頭流行記)에 「"옅은 구름이 문득 개여 별이 남쪽에 나타났다. '크기는 계명성(啓明星)만하고 빛깔은 약간 붉으며, 춘분과 추분에 땅으로부터 30길 정도 떨어진 곳에 나..

법계사(法界寺)의 문창대(文昌臺)와 세존봉(世尊峰)

법계사(法界寺)의 문창대(文昌臺)와 세존봉(世尊峰) 문창대(文昌臺)는 사람마다 위치를 다르게 말하고 있다. 그래서 지난 6월 초 법계사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법계사 서쪽 문창대(文昌臺)를 원 문창대(文昌臺)라고 하고, 세존봉 아래 문창대(文昌臺)를 신 문창대(文昌臺)라고 한다. 반대로 말하는 사람도 있다. 틀린 말은 아니다. 현장에 가보니 문창대(文昌臺)가 두 곳이다. 그러다 보니 구별하기 위해서 편의로 붙여진 이름이다. 문창대(文昌臺)는 아직도 제대로 정리가 되지 않았다. 법계사와 지리산국립공원관리공단, 故 최화수 선생은 법계사 옆 문창대(文昌臺)를 문창대(文昌臺)라고 하고, 세존봉 아래 세존암은 문창대(文昌臺)가 아닌 것으로 입장을 정하고 있다. 그러나 지리99에서는 세존봉(1386봉) 아래 세존암을..

지리산 방장봉(方丈峯) 방등봉(方等峯) 정상(正峠)

지리산 방장봉(方丈峯) 방등봉(方等峯) 정상(正峠) 지리산 중봉에 대한 새로운 기록이다. 일본군 함양 수비대의 『진중일지』에 방장봉(方丈峯)이 나온다. 1908년 6월 18일에서 22일까지 초암능선 박회성에 있는 상원진 본거지를 토벌한 기록이다. 『진중일지』에 상원진의 본거지를 "지리산의 절정 방장봉(方丈峯) 북방 유곡(幽谷, 깊숙한 골짜기) 및 동북방 사면(斜面)에 있는 대궐터(大闕基)에 적의 소굴(巢窟)"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1912년 조선총독부에서 제작한 1/50,000 조선의 지형도에도 방장봉(方丈峯, 1867m)이 나온다. 1915년 조선총독부 지리산식물조사보고서의 등산 지도에도 방장봉(方丈峯)이 나오는데, 제석봉을 방등봉(方等峯) 장터목을 정상(正峠, 峠은 고개상)으로 표기하고 있다. 여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