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六友堂記/♧작업실

13. 姜錫佐의 『重隱集』卷1 遊錦山記

도솔산인 2022. 12. 14. 16:32

13. 姜錫佐(1777~1853)의 『重隱集』卷1 遊錦山記

 

 

遊錦山記 有詩有歌詞逸

錦山號稱小金剛 擅名於東國者也 歲己卯秋 與族人仲直景雲甫 約日登程 賚略干糧 至鼓洞文生家暫憩 暮抵龍湖 訪鄭士克門 碁酒永夕

 

유금산기 시와 가사가 있었는데 잃어버렸다. 금산은 소금강이라고 불리고, 우리나라에서 이름난 산이다. 기묘년(1819, 순조 19) 가을, 집안사람인 중직(仲直경운(景雲)과 날을 정해 유람길에 올랐다. 약간(略干)의 양식을 챙겨서 고동(鼓洞) 문생(文生)의 집에 이르러 잠시 쉬었다. 저물녘 용호(龍湖)에 이르러 정사극(鄭士克)의 집에 방문하여, 바둑을 두고 술을 마시면서 밤을 지새웠다.

 

翌日 至前芳村 三從弟善之 贅於梁生潝者 有年欣倒款接 仍過仲坪 有朴生必權 中路要之 朴願從 許之 訪大峴 鄭毅之講道舊故 是夕 鄭義卿德老氏來見

 

다음날 전방촌(前芳村)에 이르렀다. 삼종제(三從弟) 선지(善之)는 양흡()의 사위가 되었다. 몇년만인지라 기뻐하여 신발을 거꾸로 신고 나와 환대해 주었다. 이에 중평(仲坪)을 지나니 박필권(朴必權)이 도중에 기다리고 있었다. (필권)이 유람을 따라가기를 원하여 이를 허락하였다. 오랜 벗인 정의지가 도를 강학하는 대현에 방문했다. 이날 저녁 의경(義卿) 정덕로(鄭德老)씨가 왔기에 만났다.

 

翌日 到露梁津 風恬利涉 有忠武公祠 扁其門曰淸海樓 有大碑 宋尤庵撰 同春書 仍曠感 吟一絶 時昆倅攜二客三妓 向錦山云 路次華芳寺

 

다음날 노량진에 이르렀다. 바람이 잔잔하여 물을 건너기가 수월했다. 충무공 사당이 있는데, 그문에 청해루라 편액하였다. 큰 비석이 있는데, 송우암이 비문을 짓고 동춘당이 썼다. 이에 격세지감을 느껴 절구 한 수를 읊었다. 마침 곤양 군수가 두 나그네와 세 명의 기생을 데리고 금산을 향했다고 한다. 가는 길에 화방사에 머물렀다.

 

翌朝 飯南海邑 入黌堂 有金鄭兩有司 在賖酒待之 仍之城南靑帘 在在當壚者 皆冶容 景雲笑曰 此可謂小江南 留宿何如 僉曰 然 第見潮方退 隊隊採蚌而歸者 童女錯焉 龍門寺距此四十里

 

다음 날 아침 남해읍에서 밥을 먹고 향교로 들어갔다. 김씨·정씨 두 유사가 술을 사서 대접해 주었다. 이어서 성의 남쪽에 있는 술집으로 가니 곳곳에 술을 파는 사람들은 모두 얼굴을 곱게 단장한 주모였다. 경운(景雲)이 웃으며 말하기를 여기가 소강남(小江南)이라고 이를만하니, 유숙하는 것이 어떻습니까?’라고 하였다. 모두 말하기를 그러지요라고 하였다. 다만 조수가 막 물러나고 곳곳에서 조개를 캐다가 돌아가는 사람이 보였는데, 그 무리 속에 어린 여자아이도 섞여 있었다. 용문사는 여기서 거리가 40리이다.

 

路邊 店無飯 野多饁 或全器進勸 淳厖之民彝 於此 可見 申刻到招提境 峯巒回環 樹林幽邃 前通滄海 罔有涯涘 登洗塵閣 諸僧恭納叉拜 有一老釋 笑曰 此非商雒 不圖四老來臨也

 

길가의 밥을 먹을 만한 객점이 없었고, 들에서 들 밥(: 들밥엽)을 먹는 일이 많았다. 그중에는 혹은 그릇을 온전히 하여 대접을 하였으니, 순박하고 후한 백성들의 도리를 이곳에서 볼 수 있었다. 신각(오후 3~5시 사이)에 용문사의 경계에 이르렀다. 산봉우리가 빙 둘러있고 나무와 숲이 그윽하고 깊숙하였으며 앞은 푸른 바다와 통해 있어, 물가가 없었다. 세진각(洗塵閣)에 올라가니 여러 승려가 공손히 맞아 절을 하였다. 어떤 노승이 웃으며 말하기를 여기는 상락도 아닌데 4명 노인이 여기에 올 줄은 생각지도 못했습니다.’라고 하였다.

 

是夕 香燈互暎 鍾磬交發 令人心神惺惺 有一釋淸癯 認非凡容 接話頗博古 余問 玆山 或云 白雲來 故曰望雲 或云 金鰲落而渡海 故曰露梁 二說孰是華芳寺 有古蹟證 來白雲 道僧所識云

 

이날 저녁 향불과 등불이 서로 빛나고, 종소리과 풍경 소리가 서로 울려서. 사람의 마음과 정신을 깨어 있게 하였다. 정신이 맑고 몸이 여윈 한 노승이 있어 범상치 않다고 생각했는데, 직접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어 보니 자못 옛일에 해박하였다. 내가 묻기를 이산은, 혹자는 이르기를 백운산으로부터 왔다고 하여 '망운'이라고 하고, 혹자는 금오산으로부터 떨어져서 바다를 건너왔다고 하여 '노량(露梁)'이라고 하는데, 두 가지 설 중에 어느 것이 옳습니까?”라고 하니 (승려가) 말하기를 화방사에 옛 유적과 적합한(분명한) 증거가 있으니 백운산으로부터 왔다는 것으로 저는 알고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又問 南極老人 得見否 曰是星出地 自有時海 則無日不瘴 是以 見者鮮矣 而小僧纔再見 曰見則延壽云者 信諸 曰錦山下居人 多八九十歲 或有過百歲者 是亦異事也

 

또 묻기를 남극 노인성을 볼 수도 있습니까?”라고 하니, (승려가) 말하기를 이 별이 뜨는 것은 절로 때가 있는데 남해에서는 해도 없고 해무가 없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본 자가 드무니 소승도 겨우 두 번 보았습니다.”라고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노인성을 보았다면, 오래 산다고 하는 것은 믿을만합니까?” (승려가) 말하기를 금산 아래에 사는 사람은 8090세가 많습니다. 그중에 100세가 넘는 사람이 있으니 또한 기이한 일입니다.”라고 하였다.

 

有措大一人姜姓云 余問 聖德曁遠 命八大姓 自汾陽 徙于此 已有世到今 皆何樣 曰李河稍振 姜最衰 余曰 此所謂渡海爲枳也

 

강씨 성을 가진 가난한 선비가 있었다. 내가 묻기를 임금의 성대한 덕이 이 먼 곳에까지 미쳐서 8개 큰 성씨에게 명하여 분양에서 부터 여기로 옮겨와 살게 한 것이, 이미 대를 이어 지금에까지 이르렀는데 모두 어떻게 지내고 있습니까?”라고 하자, (선비가) 말하기를 이씨와 하씨는 점점 떨치고 강씨가 가장 쇠퇴하였습니다.”하고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이것이 이른바 귤이 바다를 건너면 탱자가 된꼴이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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卯刻離桑門而下 諸僧出餞 頗似知禮 然有官邊人 號呼於洞口 山掀葉振 須臾緇徒數十人 夾道奔走 問之曰 地倅與昆倅命來擧藍輿云 余笑曰 官令之嚴嚴於猛虎也 到山下兩倅聯輿先登 趍從者不可勝記 問錦山幾里 僧曰十里 有奇而費人力甚於平地二三十里云 艱關登登到烽燧

 

묘각(卯刻=아침 6시 전후)에 상문(桑門, 절)을 떠나 내려왔다. 여러 스님들이 전별하려고 나왔는데, 자못 예를 아는 것 같았다. 그러나 관변인(관리 주변 사람들?)들이 동구에서 부르는데, 산이 치켜들고 낙엽이 떨어지는 듯하였다. 잠시 후에 중들 수십 명이 협도에 분주하여 물어 보니 지역(남해)와 곤양 원님의 명으로 남여(藍輿)를 들고 온다.”라고 하였다. 내가 웃으며 말하기를 관청의 명령이 사나운 호랑이보다 매우 엄하다.”라고 하였다. 산 아래에 이르러 두 원님의 남여가 먼저 올라가니 추종하는 사람들(趍從者)이 다 기록할 수 없었다. 금산이 몇 리인가?”라고 물으니 중이 말하기를 십리지만 기이하게도 인력이 소모가 평지 2, 3십 리보다 심합니다.”라고 하였다. 어려운 길을 오르고 올라 봉수대에 이르렀다.

 

漢山屋憊苶 仍宿欲觀日出 被瘴霧未能 烽臺此山之最高處 依然坐 萬頃波上一葉艇 神眩髮竦 不可久留 余笑曰 帝恐漂流命六鰲戴之者非耶

 

한산옥에서 피곤하고 나른하여 이로 인하여 잠을 자고 일출을 보려고 하였으나 장무(瘴霧)가 끼어 일출을 보지 못하였다. 봉수대는 이 산의 가장 높은 곳이다. 의연히 앉으면 만경창파 위에 일엽편주라. 정신이 현란하고 모골이 송연하여  오래 머무를 수 없었다. 내가 웃으며 말하기를 임금이 표류할 것을 두려워하여 여섯 마리 자라가 머리에 이고 있는 것이 아닌가.”라고 하였다.

 

遙望風外點點 若浮來者曰 蓮花島浴池島頭尾嶼世尊嶼也 雲裏隱隱羅立者曰 日月峯將軍峯也 丹崖翠壁 便是神剜鬼刻 長松老檜延藤 落楓紅綠互暎 有若開畫展錦 錦山之名 蓋以此歟金剛

 

멀리 바람 밖으로 점점(點點)으로 흩어져 보이고 떠오는 것 같은 것은 연화도 욕지도 두미도 세존도이다. 구름 속에 흐릿하게 나열하여 서 있는 것은 일월봉과 장군봉이다. 붉은 단애와 푸른 절벽은 곧 귀신이 깎고 새긴 듯하고, 장송과 오래된 전나무, 늘어진 등나무와 지는 단풍이 울긋불긋 서로 비추니 그림을 그리고 비단을 펼친 것 같았다. 금산의 이름은 대개 이 때문에 금강이라 하였나 보다.

 

余所不見方丈 吾所棲止 至若雄俊鉅麗 此固祖乎方丈 而以奇絶言之 方丈之所無者 此或有之轉眄 石面往往多前輩之名 而吾先君去己未年登此 惟有日記可攷 景雲曰 山上惟有菩提一庵 而彼昆南兩倅先著鞕 吾輩於何留宿 此便仙境也 彼食肉輩 容易騰踏仙靈 何不呵禁也 余笑曰 如欲學仙雲卧何傷

 

내가 방장을 보지 못한 것은 내가 사는 곳이기 때문이다. 뛰어나고(雄俊) 크게 화려함으로 말한다면 이곳이 진실로 방장산보다 시초일 것이다. 기이한 절경을 말한다면 방장산에는 없는 것이다. 이곳을 또 둘러보면 석면에는 가는 곳마다 선배들의 이름이 많고 나의 선고(先考, 돌아가신 아버지)께서 지난 기미(1799)년에 이곳에 오르셨다. 오직 일기가 있어 헤아릴 수 있다. 경운(景雲)이 말하기를 산상에 오직 보리암이라는 한 암자가 있으나 저 곤양과 남해의 두 원님이 먼저 채찍을 잡았으니 우리들은 어디에서 유숙해야 합니까? 이곳이 바로 선경이다. 저 고기를 먹는 무리들은 선령(신선과 신령이 있는 곳)에 쉽게 올라가는데 어찌 소리를 질러 통행을 금하지 않는가?”라고 하였다. 내가 웃으며 말하기를 신선술을 배워 구름 위에 눕고자 한다면 무슨 해가 되겠는가?”라고 하였다.

 

忽見單房庵懸於巖罅 有老釋一人對蓮花經 見客而禮焉 仍請宿食 釋曰坐卧僅容 而客曾學辟粒之術乎 景雲曰 未也 吾當變通於官廚 老釋爲之 炊又兼海菜

 

문득 바위틈에 단칸방의 암자가 보였는데 노승 한 사람이 연화경(蓮花經)을 보다가 나그네를 보고 인사를 하였다. 이에 숙식을 청하니 노승이 말하기를 “(한 사람이) 앉거나 눕는 것을 겨우 용납합니다. 나그네께서는 일찍이 벽립지술(辟粒之術, 곡식을 먹지 않는 신선술)을 배우셨습니까?”라고 하니 경운(景雲)이 말하기를 배우지 않았습니다. 내가 마땅히 관주(官廚)에서 변통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노승이 우리를 위해 밥을 짓고 또한 미역국을 겸하였다.

 

寅刻齊興 望隅夷扶桑 又被瘴嵐戲之 余曰 大師老於玆山者 願爲我指路 曰敢不承 於是 裹餱聯筇 峯峯遍覽 有臺高數仞 如浮屠塔樣然 不容人巧而天作者曰 坐仙臺也 巨石對立 雙柱架之 以石高可建五丈旗 吐納雲嵐者曰 虹門也 巖面成臼以杵鼓之 則金石管絃之音發於地中者 曰聲音窟也 石面有泉 不溢不縮 飮之甚甘者 曰甘露泉也 有窟通崖 陰風飀飀 冷溜滴滴 以火燭之 不測其深長者 曰龍窟也 奇石坐於鉅巖上 殆類搏翼將鳴然者 曰鷄石也 老釋曰 外此別無可觀聞 有徐市過此四字 安在哉老釋曰 在逼海絶壁 泛船可指證 而苔沒不能審甚字也 余曰 玆山大觀蓋在海也 而目擊有勝於耳聞 安得良畫師移得一幅也

 

인시(寅刻 3~5)에 일제히 일어나 해가 뜨는 곳을 바라보니 또한 장람(瘴嵐 : 짙은 안개)에게 희롱을 당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대사께서 이산에서 늙은 것은 우리의 길잡이 되기를 원해서입니다.‘라고 하니 대사가 말하기를 감히 받들지 못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건량을 싸서 지팡이를 짚고 나란히 서서 나아갔다. 봉우리마다 두루 바라보니 대가 있는데 높이가 서너 길이나 되었고 부도탑의 모양과 같았다. 사람의 솜씨로 꾸민 것이 아니고 하늘이 만든 것을 좌선대(坐仙臺)라고 하였다. 큰 바위가 마주 보고 서 있고 두 개의 기둥이 가로지르고 바위 높이는 다섯 길의 깃발을 세울 수 있으며 구름과 남기(嵐氣)를 토하고 들이마시는 곳을 홍문(虹霓門, 홍예문)이라고 하였다. 석면에 확(절구)을 만들어 공이로 두드리면 땅속에서 금석(金石)과 관현(管絃)의 소리가 나는 곳을 성음굴(聲音窟)이라고 하였다. 석면에 샘이 있는데 넘치지도 않고 줄어들지도 않았다. 이것을 마시니 달콤한 것을 감로천이라고 하였다. 굴은 절벽과 통하고 음랭(陰冷)한 바람이 불고 차가운 낙숫물이 떨어지는데 불을 밝혔으나 그 깊이를 헤아리지 못하였다. 나이 먹은 사람이 말하기를 용굴(龍窟)입니다.”라고 하였다. 기이하게 생긴 돌이 큰 바위 위에 앉아 있는데 거의 날개를 치고 장차 울려고 하는 것과 비슷한 것을 닭 바위라고 하였다. 노승이 말하기를 이곳 외에는 달리 보거나 들을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 ‘서불과차(徐市過此)’ 네 자가 있다는 데 어디에 있는가?”라고 하니 노승이 말하기를 바닷가 절벽에 있는데 배를 띄워야 가리켜 밝힐 수 있으나 이끼에 파묻혀 어떤 글자인지 살필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이산에서 크게 보는 것은 대개 바다에 있고 직접 눈으로 보는 것이 귀로 듣는 것보다 낫다. 어찌 좋은 화공을 만나 한 폭의 그림에 옮겨 얻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