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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경남의 『난중잡록』에 나오는 황류동과 향로봉

도솔산인 2023. 3. 17. 10:25

조경남의 『난중잡록』에 나오는 황류동과 향로봉

 

 

  조경남의 『난중잡록』에 나오는 향로봉은 반야 중봉, 투구봉, 남원산하의 향로봉 중 한 곳으로 좁혀진다. 정유재란 때에 조경남이 피난온 '은신암 옛터'는 향로봉의 북쪽 기슭에 있고, '수백 명이 피난할 수 있는 곳'이다. 투구봉을 향로봉으로 보면 지리산길 지도의 망바위봉이 향로봉의 북쪽 기슭에 해당된다. 그곳의 평지가 피난하기 가장 안전하고 따스하며 적이 오는 것을 살피기도 좋고 도망가기도 좋다.(산영님) 조경남의 『난중잡록』에 "1594년 12월 초5일 임걸년(林傑年) 향로봉에 주둔했다가 운봉 군사에게 밤에 습격을 당하여 패하여 달아났다." 향로봉 북쪽 기슭 은신암 옛터에 도적 임걸년의 산채가 있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注 참고로 지리산길 지도의 망바위봉(1378.8)에는 망을 볼 수 있는 바위가 없다. 망을 볼 수 있는 봉은 망바위봉에서 심마니능선을 내려와서 전망대라고 표기된 1319.0봉이다. 2021년 남원문화원에서 발간한 남원산하』에는 투구봉 아래 심마니 능선의 1378.8봉을 향로봉으로 표기하고 있다.

 

  조경남의 『난중잡록』에 "황류동(黃流洞) 지리산의 황령사(黃嶺寺) 향로봉의 사이에 있는데, (황류수의) 수원(水源)은 반야봉(般若峯)에서 나와 삼기수(三岐水: 세갈래 물줄기)가 묘봉(眇峯)을 두루 돌아서 내려온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뒤 문장은 황류수(황계: 만수천)의 수원을 설명한 것으로 보인다. 1765년경 편찬된 여지도서(輿地圖書)』에 "달궁이 지리산 향로봉 아래에 있다."라고 하였다. 1818년 정석구(鄭錫龜)의 「두류산기」에 "그(만복대) 동쪽으로 낮아지는 산줄기는 황령(黃嶺)의 주능선이다." 서산대사의 황령암기에 "황령 남쪽에 절을 세우고, 그 이름을 따라 황령암(黃嶺庵)이라고 하였다." 황령과 황령암, 황류동과 향로봉을 떼어놓고 이야기할 수 없다. 황류동과 황류수, 황계와 황령골은 한 곳을 가리키고, 황령과 황령암에서 유래된 이름으로 보인다.

 

 

 

2021년 남원문화원에서 발간한 '남원의 산하' 수록된 남원의 산
'남원의 산하' 향로봉

 

 

■ 조경남의 『난중잡록

 

 ○ 1594년 6월 초3일 이 때에 영남 사람 임걸년(林傑年)이 또한 도당을 모아 지리산 반야봉에 주둔하고 출몰하며 도적질을 하였다.[時嶺南人林傑年 亦聚徒屯于智異山般若峯 出沒作賊]


  1594년 12월 초5일 임걸년(林傑年)이 지리산의 여러 절을 다 무찌르니 중들과 인민이 피해를 입음이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었고, 향로봉(香爐峯)에 주둔했다가 운봉 군사에게 밤에 습격을 당하여 패하여 달아났다.[林傑年盡屠智異諸刹 僧俗被害 不知其數 屯于香爐峯 爲雲峰軍夜襲敗走]

 

 1597년 8 15 나와 양형(梁兄) 및 백암(白嵓) 이공직(李公直)의 부형과 가족 수백 명이 돌의 모서리를 붙잡고 기어서 내려갔다황류동(黃流洞)[지리산의 황령사(黃嶺寺) 향로봉의 사이에 있는데, 수원(水源)은 반야봉(般若峯)에서 나와 삼기(三岐) 묘봉(眇峯)을 두루 돌아서 내려온다.]에 이르러 밤을 지냈다.

 

 1597년 8 16 흉적(兇賊)이 남원을 함락했다. (중략) 밤중에 고촌(高村)으로 내려가 보니 적병이 넘쳐나 길을 건너기 어려운 형세이므로 바로 그대로 돌아왔다. 즉시로 양형과 이공직 등 여러 사람과 같이 황류천 건너 은신암(隱身庵)의 옛터[향로봉의 북쪽 기슭 아래 있다.] 들어가 막을 치고 머물렀다.

 

 1597년 9 2 양형과 이공직의 형 등 여러 사람과 같이 도로 은신암으로 내려갔다. 이때에 왕래하는 왜적이 끊어지지 아니하고, 산골짜기를 날마다 수색하게 되어 길이 꽉 막혀버려 식량주머니가 텅 비었으나 어쩔 수 없이 향로봉으로 해서 도로 은신암으로 돌아왔다. 하루를 머무르니 왜적의 형세가 약간 멎게 되었다. 이공직의 형 등은 운봉으로 나갔다가 연상산(煙象山)으로 내려가고, 우리들은 밤에 황류천 건넜는데, 늙은이와 어린이들이 병들고 고단하여 행보가 더디었다.

 

 

 노형하(盧亨夏, 1620~1654)의 시문집 백초유고(白草遺稿)

 

  「유황류동(遊黃流洞)은 황류동 골짜기를 유람하면서 봄인데도 곱게 물들어 있는 단풍을 보고 아름다운 자연을 찬탄한 시이다. 황령암연구(黃嶺菴聯句) 황령암에서 밤을 지새우면서 경치, 심금을 울리는 독경소리, 밤의 적막을 깨는 목탁소리 등 신선의 경계에 있는 듯하다고 자신의 느낌을 표현한 것이다

 

 1765년 편찬된 여지도서(輿地圖書)』에 나오는 달궁

 

  달궁은 지리산 향로봉 아래에 있는데 유허지의 주춧돌과 무너진 담장이 지금까지도 남아있다. 휴정(休靜)대사의 황령기에는 “한소제(漢昭帝) 3(BC 84-정유년) 마한이 한의 난을 피하여 여기에 도성을 쌓고서 황씨정씨 두 장군으로 그 일을 감독케 하고 그 재를 수비하도록 하였다.”고 한다. 황령은 황장군이 지킨 곳이며, 정령은 정장군이 지킨 곳이다. 어디에서 근거했는지는 알지 못하겠다. 그 후 백성들이 달궁에 거주하는 사람들이 수십여 가구가 되었다. 신해년(1731, 영조 7) 홍수에 의한 산사태로 반야봉이 무너져 내리면서 엄몰(渰沒)되어 한 마을도 남지 않았다. 임금께서 향과 축문을 내려 제사를 지냈다. [達宮 在智異山香爐峯下 廢礎 頹垣 至今尙存 僧休靜 黃嶺記: “漢昭帝三年 馬韓避辰韓之亂 築都於此 以黃 鄭二將 監其事 守其嶺 黃嶺卽黃將所守 鄭嶺乃鄭將所守云 未知何所據也 其後民戶之居於達宮者 數十餘家 辛亥大水沙汰 自般若峯頹下渰沒 一村無餘 自上降香祝以祭]

 

注 여지도서: 1757년(영조 33)∼1765년에 각 읍에서 편찬한 읍지를 모아 성책한 전국 읍지.

 

 

 이병연(李秉延, 1894∼1977)이 편찬한 조선환여승람에 나오는 달궁

 

  달궁 지리산 향로봉 아래 있다. 폐허된 채 주춧돌과 무너진 담장이 지금까지 아직 남아있다. 즉 마한의 왕궁터라고 하며 후에 백성들이 거주하였으나 신해년(1731년) 홍수로 산이 무너져 내려마을이 하나없이 엄몰되었다. 임금으로부터 향과 축문이 내려져 제사를 지냈다.[達宮 在智異山香爐峯下 廢礎 頹垣 至今尙存 卽馬韓王宮址 後爲民居 辛亥大水山頹渰沒  一村無餘 自上降香祝以祭之]

 

  황계: 내원동(內院洞) 향로봉(香爐峯) 아래 여러 골짜기 물이 합해져 흐른다. 그리하여 일명 만수동(萬水洞)이라 한다. 이상은 본 운봉군(雲峰郡, 지금의 운봉읍)에 있는 것으로 거리는 본 구읍지(운성지)것을 그대로 계산한 것이다. 

 

 조선환여승람: 충남 공주(公州)의 유학자인 이병연(李秉延:1894∼1977)이 1910년부터 1937년까지 전국 241개 군 중 129개 군의 인문 지리 현황을 직접 조사, 편찬하였다. 1933년부터 1935년까지 3년 동안 26개 군에 관한 것이 책으로 만들어져 간행 보급되었으나, 나머지는 일본 경찰의 감시와 재정난 등으로 간행되지 못한 상태로 보관되어 오다가 1990년 그 후손이 국사편찬위원회에 기증하여 나오게 되었다. 조선환여승람 남원편은 2000년 남원문화원에서 국역하여 간행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