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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령(黃嶺)과 황령암(黃嶺庵)에 대한 문헌의 기록

도솔산인 2023. 2. 13. 10:33

황령(黃嶺)과 황령암(黃嶺庵)에 대한 문헌의 기록

 

 

  서산대사의 황령암기에 "마한(馬韓)의 왕이 피신하여 달궁에 도성을 쌓을 때, 黃·鄭 두 장군을 시켜 공사를 감독하였으므로, 두 사람의 성을 따서 황령(黃嶺)과 정령(鄭嶺)이라고 하였다."라고 황령과 정령의 유래를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반야봉의 좌우에 황령과 정령이 있다."라는 문구는 오히려 황령의 위치에 혼란을 준다. 황령의 위치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얼마전 칠성님이 '황령은 어디인가?'라는 질문을 던졌다. 그래서 관련 자료를 읽어보고 지리산길 지도에 표기된 황령암 터를 답사하게 되었다. 황령암(黃嶺庵) 관련 기록을 요약하면, 만복대에서 동쪽으로 뻗은 산줄기가 황령의 주능선이다. 황령은 만복대 동릉에 있는 황장군이 달궁을 지키던 고개이다. 황령 남쪽에 황령암이 있다. 달궁 남쪽 골짜기가 황령골이다. 황령암 앞에는 황계수가 흐른다. 어찌 되었든 황령과 황령암은 불가분의 관계이다. 황령을 떼어놓고 황령암만을 논할 수는 없다고 본다.

 

 

  ① 황령과 황령암, 황령골, 황계수는 한 세트...

  ② 만복대에서 동쪽으로 뻗은 산줄기가 황령의 주능선

  황령암 앞에 황계수(黃溪水)가 흐른다.(유몽인의 황계) 

  ④ 달궁 남쪽 골짜기 황령골, 황령은 황장군이 달궁을 지키던 고개

  ⑤ 진지왕 원년(576)에 운집대사가 황령 남쪽에 절을 세우고 황령암이라고 하였음.

 

 

 

▶ 황령암과 황령에 대한 문헌의 기록

 

1. 1487년 남효온의 「지리산일과」


  그 북쪽에 중봉산(中鳳山)은 빈발봉(貧鉢峰)의 북쪽에 솟은 봉우리이고 산등성이 절벽 아래에 적조암(寂照庵)․무주암(無住庵)등의 암자가 있었다. 그 북쪽의 금봉산(金鳳山)에는 금대암이 있었고 봉우리 서쪽에는 방장산이 있었다. 산봉우리에 만복대(萬福臺)가 있었으며 만복대 동쪽에는 묘봉암(妙峰庵)이, 북쪽에는 보문암(普門庵)이 있는데 일명 황령암(黃嶺庵)이라고도 하였다. 이 반야봉 남쪽에는 고모당(姑母堂_노고단)이, 고모당의 남쪽에는 우번대(牛翻臺)가 있는데 우번선사(牛翻禪師)의 도량(道場)이었다. 이 반야봉 동쪽에 선인대(仙人臺)가 있고, 그 동쪽이 바로 쌍계동(雙溪洞)이었다. 빈발봉이 봉우리의 동쪽에 있었고 천왕봉(天王峰)도 그 동북쪽에 있었다.

 

 

2. 1545년 서산대사의 황령암기(黃嶺庵記)

 

   산은 혼돈(混沌)의 뼈요, 바다는 혼돈의 피다. 동해(→해동 : 우리나라) 안에 한 산이 있으니 이름은 지리산이라 하고, 그 산의 북쪽 기슭에 한 봉우리가 있으니 이름은 반야봉이라 하며 봉우리 좌우에 두 재(嶺)가 있으니 이름은 황령(黃嶺)과 정령(鄭嶺)이라 한다. [山也 混沌之骨也 海也 混沌之血也 東海中有一山 名智異山也 山之北麓 有一峯 名般若峯也 峯之左右 有二嶺 名黃與鄭也]

 

注 서산대사의 황령암기에 나오는 문제의 이 문구가 오히려 황령의 위치에 혼란을 준다. 원문을 확인했으나 "반야봉의 좌우에 두 고개(황령과 정령)가 있다."라는 의미이다.

 

  옛날에 한(漢) 나라 소제(昭帝)가 즉위한 지 3년(BC 84)에, 마한(馬韓)의 왕이 진한(辰韓)과 변한(弁韓)의 난리를 피하여 이곳에 도성을 쌓을 때 黃·鄭 두 장군을 시켜 공사를 감독하였으므로 두 사람의 성을 따서 재를 이름하고, 도성을 72년 동안 보호하였다. 그 뒤 신라 진지왕(眞智王) 원년(576)에 운집대사(雲集大師)가 중국에서 나와 황령 남쪽에 절을 세우고, 그 이름을 따라 황령암(黃嶺庵)이라 하였다. 그 암자의 규모는 가운데 황금전(黃金殿)이 있고 동쪽에는 청련각(靑蓮閣)이 있으며 서쪽에는 백옥교(白玉橋)가 있어 꽃과 대나무가 서로 비추어 그 그림자가 금지(金池)에 떨어지면 마치 安養世界(극락세계)와 비슷하였다.

 

  <중략> 이 암자는 신라를 지나 많은 세월을 겪는 동안에 신승(神僧)과 고사(高士)들이 중창하면서 대대로 살았더니 우리 中廟(중종시대)에 이르러 무술(戊戌, 1538)년의 난리에 모두 없어지고 다만 물소리와 산빛이 남아 있을 뿐이다. 성희(性熙) 법사 또한 운수(雲水)의 도인으로서 가정(嘉靖) 23년 갑진(甲辰, 1544)년 봄에 그 터를 지나가다 개연히 절을 다시 일으킬 마음을 갖고 신사(神師) 강연(姜淵)의 무리들과 더불어 절을 세우고 시주를 널리 교화하니 물건은 마치 하늘에서 오는 것 같았고 공사는 귀신을 부리는 것 같아서 을사(乙巳, 1545)년 가을에 낙성을 보았다.

 

 

3. 서산대사가 완산 노부윤에게 올리는 글[上完山盧府尹書]


두류산으로 가서 내은적암에서 삼 년을 지냈으며, 이내 황령을 지나 능인암, 칠불암 등 여러 암자에서 다시 삼 년을 지냈습니다

 

注 이 기록만 본다면 놓고 본다면 내은적암의 위치도 문제가 있다. 도마 마을 도화골에 은적암터가 있다.

 

 

4. 조경남의 『난중잡록

 

1597년 815 나와 양형(梁兄) 및 백암(白嵓) 이공직(李公直)의 부형과 가족 수백 명이 돌의 모서리를 붙잡고 기어서 내려갔다황류동(黃流洞)[지리산의 황령사(黃嶺寺)향로봉의 사이에 있는데, 수원(水源)은 반야봉(般若峯)에서 나와 삼기(三岐) 묘봉(眇峯)을 두루 돌아서 내려온다.]에 이르러 밤을 지냈다.

 

1597년 816 흉적(兇賊)이 남원을 함락했다. 밤중에 고촌(高村)으로 내려가 보니 적병이 넘쳐나 길을 건너기 어려운 형세이므로 바로 그대로 돌아왔다. 즉시로 양형과 이공직 등 여러 사람과 같이 황류천을 건너 은신암(隱身庵)의 옛터[향로봉의 북쪽 기슭 아래 있다.] 들어가 막을 치고 머물렀다.

 

1597년 92 양형과 이공직의 형 등 여러 사람과 같이 도로 은신암으로 내려갔다. 이때에 왕래하는 왜적이 끊어지지 아니하고, 산골짜기를 날마다 수색하게 되어 길이 꽉 막혀버려 식량주머니가 텅 비었으나 어쩔 수 없이 향로봉으로 해서 도로 은신암으로 돌아왔다. 하루를 머무르니 왜적의 형세가 약간 멎게 되었다. 이공직의 형 등은 운봉으로 나갔다가 연상산(煙象山)으로 내려가고, 우리들은 밤에 황류천을 건넜는데, 늙은이와 어린이들이 병들고 고단하여 행보가 더디었다.

 

○ 1598년 4월 10일 반야봉(般若峯)을 넘어 14일에 몰래 남원의 황령암(黃嶺庵), 운봉(雲峯)의 대암(臺嵓) 등의 절에 이르러 함부로 살육 약탈하고, 여러 왜적이 다시 칠불사로 집합하여 먼저 몇 놈의 적을 보내어 석주성(石柱城)을 밀탐하였다.

 

 

5. 조선 중기의 문신 노형하(盧亨夏, 1620~1654)의 시문집 [백초유고(白草遺稿)]

 

유황류동(遊黃流洞)은 황류동 골짜기를 유람하면서 봄인데도 곱게 물들어 있는 단풍을 보고 아름다운 자연을 찬탄한 시이다. 황령암연구(黃嶺菴聯句)황령암에서 밤을 지새우면서 경치, 심금을 울리는 독경소리, 밤의 적막을 깨는 목탁소리 등 신선의 경계에 있는 듯하다고 자신의 느낌을 표현한 것이다

 

 

6. 1753 용담(龍潭: 1700~1762) 스님의 황령암 중창기

 

(황령암)암자 뒤로는 우뚝 솟아 곧장 구름으로 들어가 만복(萬福)을 굽어 본다. 암자 앞에 우뚝 서 있으며 허공을 가로질러 있는 것은 생각하건대 반야봉이다. 바람을 막고 암자 우측에 우뚝 오묘한 봉우리가 서 있다. 수레 자취를 끊어버리고 암자 좌측을 삥 둘러싸고 있는 것은 실상동(實相洞)이다. 암자(황령암)는 실상동 안에 있으면서 복, 지혜, 오묘함, 진실의 덕을 가지고 있다. ‘황령(黃嶺)’이라고 이름을 붙인 것은 일법 위에서 중도(中道)의 본체를 잃지 않아서 아니겠는가? 그리고 황령암 앞에는 황계수(黃溪水)가 있다.


<중략> 정묘년(丁卯年: 1747)이다. 그 해 3월에 팔인지화(八人之禍)를 당했는데 전각(殿閣)이 하나도 남김없이 불에 타버렸다. <중략> 그 해 1747년 4월에 공사를 시작하였다. 1749년에 대전(大殿)을, 1750년에 정루(正樓)를, 1751년에 익실(翼室: 좌우 양옆에 딸린 방)을, 1753년 5월에 단청공사를 하여 마무리를 지었다.

 

 八人之禍 : 화재(八+人=火)

 

 

7. 1765년 편찬된 여지도서(輿地圖書)

 

  달궁은 지리산 향로봉 아래에 있는데 유허지의 주춧돌과 무너진 담장이 지금까지도 남아있다. 휴정(休靜)대사의 황령기에는 “한소제(漢昭帝) 3(BC 84-정유년) 마한이 한의 난을 피하여 여기에 도성을 쌓고서 황씨정씨 두 장군으로 그 일을 감독케 하고 그 재를 수비하도록 하였다.”고 한다. 황령은 황장군이 지킨 곳이며, 정령은 정장군이 지킨 곳이다. 어디에서 근거했는지는 알지 못하겠다. 그 후 백성들이 달궁에 거주하는 사람들이 수십여 가구가 되었다. 신해년(1731, 영조 7) 홍수에 의한 산사태로 반야봉이 무너져 내리면서 엄몰(渰沒)되어 한 마을도 남지 않았다. 임금께서 향과 축문을 내려 제사를 지냈다. [達宮 在智異山香爐峯下 廢礎 頹垣 至今尙存 僧休靜 黃嶺記: “漢昭帝三年 馬韓避辰韓之亂 築都於此 以黃 鄭二將 監其事 守其嶺 黃嶺卽黃將所守 鄭嶺乃鄭將所守云 未知何所據也 其後民戶之居於達宮者 數十餘家 辛亥大水沙汰 自般若峯頹下渰沒 一村無餘 自上降香祝以祭]

 

注 여지도서: 1757년(영조 33)∼1765년에 각 읍에서 편찬한 읍지를 모아 성책한 전국 읍지.

 

 

8. 1793년 도원 스님의 「두류산기」 

  남원의 심원동(深源洞)까지를 통틀어 만수동(萬水洞)이라고 한다. 만수동(萬水洞) 안에는 황령암(黃嶺庵)이 있는데, 이곳은 마한(馬韓)이 진한(辰韓)과 변한(弁韓)을 피한 곳으로 황령(黃嶺)과 나란히 우뚝하여 월령(月嶺)이라 한다. 물은 이곳으로부터 흘러나와 파근사(波根寺)에 이르러서는 골짜기처럼 되어 위아래로 12개의 용추(龍湫)가 만들어졌다.

 

 

9. 1818년 정석구(鄭錫龜)의 「두류산기」

 

  동남쪽으로 가파르게 솟아 있는 곳이 정령(鄭嶺)이다. 고개 위에 둘레가 10여 리나 되는 성이 있는데, 「황령기(黃嶺記)」에 이르기를 "옛날 마한(馬韓)이 진한(辰韓)과 변한(卞韓)에 쫓겨 당궁(達宮)으로 피해 왔는데, 황(黃) 장군에게 황령(黃嶺)을 지키게 하고 정(鄭) 장군에게 정령(鄭嶺)을 지키게 하였다."라고 하였다. 이 두 곳이 그런 이름을 얻은 것은 혹 그럴듯하지만, 또한 무엇을 근거했는지는 알 수 없다. <중략> 오른쪽으로 만복대(萬福臺)가 된다. 그(만복대) 동쪽으로 낮아지는 산줄기는 황령(黃嶺)의 주능선이고, 서쪽으로 낮아지는 산줄기가 가까이에서 혈(血)을 이룬 곳이 파근사이며, 남쪽으로 뻗어내려 잔강(潺江, 신월리 잔수역)에서 멈춘다.

 

 

10. 1823 김선신의 『두류전지

 

  지리산 산중(황령 골짜기 안에 있다고 해야 한다)에 있다. 고려 공민왕 때에 처음 창건됐다. 가정 정유년(1537)에 중수했는데 대들보·기둥·서까래 등은 모두 예전 재목을 그대로 사용했다. 그러므로 사람의 어깨와 다리에 닳아 기둥의 형체가 요(凹) 자 모양으로 됐다. 사찰로 가는 길이 매우 험하고 멀어 병화가 미치지 못한다.

 

 

11. 성해응(1760~1839)의 연경재전집(硏經齋全集)

 

반야봉 북쪽에 혼묵동과 월락동, 그 북쪽에 중봉산(中鳳山), 또 북쪽에 금봉산(金鳳山)이 있다. 반야봉(般若峯) 서쪽에 방장산이 있고, 방장산 꼭대기에 만복대(萬福臺)가 있다. 만복대 동쪽에 묘봉암이 있고 묘봉암 북쪽에 보문암(普門菴)이 있으니, 일명 황령암(黃嶺菴)이다.[般若峯之北 有昏黑月落之洞 其北中鳳山 又其北金鳳山 峯西有方丈山 山頭有萬福臺 臺東有妙峯菴 菴北有普門菴 一名黃嶺菴]

 

注 중봉산(中鳳山) : 삼정산, 금봉산(金鳳山) : 금대산

 

 

12. 1995년 간행된 『용성지』

 

  가. 황령과 정령

 

  지리산 첫 기슭에 있다. 모두 지극히 험준하다. 소(牛)나 말(馬)도 통하지 못하는 곳으로 부(府)가 서쪽 50리 거리에 있다. 옛날 승려 청허당(淸虛堂)이 황령(黃嶺)에 관한 기록에서 일컫기를 '옛날 한(漢) 나라 소제(昭帝)가 있었는데 그 즉위(卽位) 3년 마한(馬韓)의 임금이 진한(辰韓)의 난리(亂離)를 피하여 이곳에 도성(都城)을 축조하고 황(黃)과 정(鄭) 두 장군으로 그곳과 그 일을 지키게 하였기 때문이다. 드디어 두 사람의 성씨(姓氏)로 재(嶺)의 이름으로 하였으며  그 도성(都城)을 보존한 것이 71년이었다.'라고 하였다. 성(城)이 퇴폐하고 성벽이 헐리어 지금까지 보존되었다. 그 이른바 도성(都城)이라 한다면 세상에 전해오는 달궁(達宮)의 터이다. 이 두 재의 안에는 긴 골짜기가 있는데 옛날에는 남원(南原) 땅이었으나 지금은 운봉(雲峯)에 소속한 땅이다.

 

 나. 황령암

 

  지리산 산중에 있는데 고려 공민왕 때에 처음 창건된 사찰로 가정 정유년(1537)에 중수하였는데 대들보·기둥을 갈았으며 모두 옛날 재목이었다. 사람으로 하면 어깨와 다리가 갸름하게 하는 것이 좋은 것처럼 기둥을 오목하게 하였다. 길이 지극히 험난하여 멀어 병화가 미치지 못하였다. 

 

 

13. 1997년 간행된 『신운성지에 나오는 황령골과 새목재

 

  ① 황령골 : 달궁 남쪽에 있는 골짜기. 황장군이 달궁을 지키던 고개였다고 한다. ② 새목재 : 조항(鳥項). 보듸재(柳峙) 서남쪽에 있는 마을. 지형이 새의 목처럼 되어 있다. ③ 북당골 : 옛날에 불당이 있어서 불당골이라고 부르던 것이 변하여 북당골이라고 부르는 골짜기다.

 

 

14. 2020년 간행된 『남원의 산하』

                                                                                                                                           

  <문화유적과 명소> [황령암 터,정령, 황령]


  정령치와 황령, 황령암터에 대한 문헌은 다음과 같다.1522년, 청허당집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동해에 한 산이 있으니 이름은 지리산이라 하고, 그 산의 북쪽 기슭에 한 봉우리가 있으니 이름은 반야봉이라 하며 그 봉우리 좌우에 두 재(嶺)가 있으니 이름은 황령과 정령이라 한다. …(중략)… 그 뒤 신라진성왕 원년에 운집대사가 중국에서 나와 황령 남쪽에 절을 세우고, 그 이름을 따라 황령암(黃嶺庵)이라 하였다.

   서산대사의 「지리산 황령암기」의 서두로서, 황령과 정령의 실체를 최초로 세상에 알린 달궁(마한 도성)의 역사가 탄생하는 기록이다. "황령 남쪽에 황령암을 세웠다.”는 기록을 유추해 보면 황령암 북쪽에 위치한 산줄기는 황령암 터가 있는 매막봉 능선에 황령이 있어야 한다. 용성지는 황령과 정령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해 놓고 있다. "지리산 첫 기슭에 있다. 모두 지극히 험준하다. 소나 말도 통하지 못한 곳으로 남원부가 서쪽 50리에 있다. 옛날 승려 청허당의 황령에 대한 기록으로서 일컫기를 옛날 한나라 소제가 있었는데 ……(중략)… 성이 퇴폐되고 성이 헐리어 지금까지 보존되었다. 그 이른바 도성이라 한다면 세상에 전해오는 달궁 터이다. 이 두 재의 안에는 긴 골짜기가 있는데 가운데는 옛날 남원의 땅이었으나 지금은 운봉에 소속된 땅이다."

 

注 남원부의 서쪽 50리에서 '남원부가 서쪽 50리'로 수정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