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六友堂記/♧작업실

법계사(法界寺)의 문창대(文昌臺)와 세존봉(世尊峰)

도솔산인 2022. 6. 29. 16:32

법계사(法界寺)의 문창대(文昌臺)와 세존봉(世尊峰)

 

 

  문창대(文昌臺)는 사람마다 위치를 다르게 말하고 있다. 그래서 지난 6월 초 법계사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법계사 서쪽 문창대(文昌臺)를 원 문창대(文昌臺)라고 하고, 세존봉 아래 문창대(文昌臺)를 신 문창대(文昌臺)라고 한다. 반대로 말하는 사람도 있다. 틀린 말은 아니다. 현장에 가보니 문창대(文昌臺)가 두 곳이다. 그러다 보니 구별하기 위해서 편의로 붙여진 이름이다. 문창대(文昌臺)는 아직도 제대로 정리가 되지 않았다. 법계사와 지리산국립공원관리공단, 故 최화수 선생은 법계사 옆 문창대(文昌臺)를 문창대(文昌臺)라고 하고, 세존봉 아래 세존암은 문창대(文昌臺)가 아닌 것으로 입장을 정하고 있다. 그러나 지리99에서는 세존봉(1386) 아래 세존암을 문창대(文昌臺)라고 주장한다.

 

 

1. 법계사(法界寺) 문창대(文昌臺)

 

  지리산법계사연기사적비(智異山法界寺緣起事績碑, 이하 법계사사적비)와 법계사 옆 문창대(文昌臺)의 최선생장구지소(孤雲崔先生杖屨之所) 석각 아래 월정(月汀)이라는 인물이 궁금했다. 염치불고(廉恥不顧)하고 운서리 가객님께 산청석각명문총람』(權由鉉, 2018) 빌렸다. 월정(月汀) 이병호(李炳昊, 1882~?)는 한말과 일제 강점기에 살았던 인물로 단성면 사월리 배양마을 출신이다. 법계사사적비(法界寺事績碑)를 쓴 이는 월정(月汀)이고, 비문을 지은 이는 쌍계사(雙磎寺) 사문(沙門) 김운성(金雲城)으로 되어 있다. 두 사람의 이름은 구곡산 동쪽 중턱에 자리 잡은 도솔암의 연기비문에도 나오는 인물이다. ‘최선생장구지소(孤雲崔先生杖屨之所)석각의 시기는 대략 법계사사적비(法界寺事績碑)의 연대와 같은 시기인 1939년으로 추정한다. 월정(月汀) 이병호(李炳昊)의 나이 57세 때이다.

 

 

 

지리산법계사연기사적비

 

▶ 智異山法界寺緣起事蹟碑

 

法界寺方丈山之中央名刹也溯其緣起新羅眞興王午年甲子起祖師始刱此寺距今一千三百九十年也其後朝鮮太宗大王五年乙酉碧溪禪師重刱焉近爲灰燼所毁今戊寅春淸信女史申德順氏發大願投臣款開拓舊址建法堂及大室舍凡三刱也盖烟起祖師先創華嚴寺次刱此寺又刱大源寺而皆建舍利塔所謂智異山三塔是也此寺之有舍利塔誠無雙聖跡而千有年間毁廢修理難以枚擧噫申氏慨塔之久廢盡誠建寺以守之可謂篤信善德者也自新羅時諸祖師莫不於此修道儒家大賢崔文昌常遊於此故寺前有文昌臺金濯纓先生亦留遊賞之跡本寺之形勝可知矣

 

義方山人月汀李炳昊書

世尊二千九百六十六年己卯 月 日

雙磎寺沙門金雲城善紋謹述

華嚴寺陳震應考閱

雙磎寺立

 

▶ 지리산 법계사 연기 사적비

 

  법계사는 지리산 가운데 있는 이름난 절이다. 절의 연기(緣起,유래)를 거슬러 살펴보면 신라 진흥왕 5 (544, 甲子)에 연기조사가 처음 이 절을 창건했으니, 지금으로부터 1 3 9 5년 전이다. 그 후 조선 태종대왕 5(1405, 乙酉)에 벽계선사가 중창하였다. 근래에 들어 불타서 잿더미가 된 채 폐사(1908)가 되었다가, 이번 무인년(1938) 봄에 청신녀( 불교신자) 신덕순씨가 큰 원()을 세우고, 많은 금전을 들여 옛 절터를 손질하고 법당과 큰 방을 갖춘 요사(僚舍)를 지었으니, 무릇 세 번째 창건이다.

 

   연기조사가 먼저 화엄사를 창건한 후 다음으로 이 절을 창건하고, 또 대원사를 창건했으며 세 곳 모두에 사리탑을 세웠으니, 이 탑들을 이른바 지리산 3’이라 부른다. 이 절(법계사)에 있는 사리탑은 실로 둘 도 없는 성스러운 사적으로, 천여 년 동안 무너져 버려지고 수리한 것을 일일이 들어 설명할 수 없다. , 신덕순 씨가 탑이 낡고 무너진 것을 개탄하고 성심을 다해 절을 세우고 지켜왔으니, 믿음이 도탑고 착한 덕을 쌓은 이라 이를 만하다.

 

  신라 때부터 여러 조사들 중 이 절에서 수도하지 않은 분이 없고, 유가의 대현(大賢, 크게 어질고 지혜로운 인물)이신 문창후 최치원 선생이 자주 이 절에서 지냈기에 절 앞에 문창대가 있다. 탁영(濯纓) 김일손 선생 또한 이 절에서 머물며 유람하고 감상한 자취가 있으니, 본사의 아름다운 경승을 알 만하다.

 

의방산인 월정 이병호가 쓰다.

세존 탄생 후 2966 기묘(1939) 월 일

쌍계사 사문 운성 김선문 삼가 짓다.

화엄사 진진응이 교열하다.

 

 

  『산청석각명문총람(權由鉉, 2018)에서 필요한 부분을 아래 한글로 옮겼다. 법계사사적비(法界寺事績碑)는 문창대를 언급하고 있다. “신라 때부터 여러 조사들 중 이 절에서 수도하지 않은 분이 없고, 유가의 대현(大賢, 크게 어질고 지혜로운 인물)이신 문창후 최치원 선생이 자주 이 절에서 지냈기에 절 앞에 문창대가 있다. [自新羅時諸祖師莫不於此修道儒家大賢崔文昌常遊於此故寺前有文昌臺]”라고 하였. 두 곳 모두 글 쓴 이가 월정(月汀)이니 ‘고운최선생잔구지소(孤雲崔先生杖屨之所)가 있는 곳을 문창대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최화수 선생은 지리산 365에서 문창대를 명확하게 밝히고 있다. 『진양지(晉陽誌)』 「불우조(佛宇條)」에 근거하여 "(법계사) 문 서쪽 수십 보쯤에 문창대가 있다. 고운이 노닐던 곳이다. [門西數十步許 有文昌臺 崔孤雲所遊地]" 라고 하였으니, 현재 세존봉 아래 세존암과는 거리가 멀다.

 

 

진양지 권2, 불우조 법계사(자료 : 김준형교수님)

 

▶ 『진양지(晉陽誌)』 「불우조(佛宇條)」 법계사

 

  법계사는 천왕봉에서 10리쯤에 있다. 석불 삼좌(三座)가 있고 기도객들이 줄을 이어 끊이지 않는다. 문 서쪽 수십 보쯤에 문창대가 있는데  최고운 선생이 노닐던 곳이다. 그 북쪽 오리쯤에 암봉이 우뚝 서있는데 세존봉이라고 한다. [法界寺 在天王峯十里許 有石佛三座 祈禱者 聯綿不節 門西數十步許 有文昌臺 崔孤雲所遊地 其北五里許 石峰突立 名曰世尊峰]

 

 

 

세존봉 능선에서 바라본 옥녀봉(옥추봉, 산공부 하는 분들은 옥추봉으로 부른다) 사진 : 칠성님

 

  문제는  진양지(晉陽誌)』 「불우조(佛宇條)」에 "문창대  북쪽 오리쯤에 암봉이 우뚝 서있는데 세존봉이라고 한다. [其北五里許 石峰突立 名曰世尊峰]"라는 문구이다. 현재의 세존봉(1386봉)과는 다르다. 진양지(晉陽誌)』에서 세존봉은 분명히 '문창대 북쪽 오리쯤 서 우뚝 서있는 암봉이다.'라고 언급하고 있다. 부사(浮査) 성여신(成汝信)의 장편고시 유두류산시(遊流頭山詩)에 세존봉의 비밀이 들어있다. "동쪽으로 걸터앉은 세존봉은/우뚝한 바위가 사람이 서 있는 듯하네.[東蹲世尊峯/石角如人立]"  천왕봉으로 올라가는 옛 등산로는 법계사 경내에 있었다. 법계사에서 옥녀봉은 정북 방향이다. 성여신은 천왕봉에서 법계사로 내려오는 등로를 기준으로 '동쪽으로 걸터 앉은 세존봉서쪽으로는 문창대가 솟아 있다.'라고 읊은 것이다. 본래 세존봉의 위치는 사찰 앞에 있을 수 없다. 부처님 사리탑이 적멸보궁의 앞에 있지 않은 것과 같은 이치이다. 그렇다면 세존봉이 법계사 뒤 옥녀봉이 아닐까. 개인적인 생각이다.

 

 

일정 민선생님과 조용헌 박사
문창대에서 바라본 세존암

 

2. 세존봉(世尊峰) 문창대(文昌臺)

 

  법계사 서쪽 수십 보의 거리에 고운의 발자취가 서린 문창대가 있는데도, 법계사 남쪽 500m나 떨어져 있는 1.386봉 아래 큰 바위를 문창대(文昌臺)라고 하였을까. 그 근거는 세 가지가 있다. 첫째 '文昌星照 朴正民出世(문창성조 박정민출세)' 석각이다. 여기에서 문창성조(文昌星照)는 문창성(文昌星)이 조림(照臨)한다는 의미이다. 문창성은 북두칠성 중의 여섯 번째 별을 달리 이르는 말로 학문을 관장하는 별이다. 뛰어난 문장가는 이 별과 교감을 갖는다. 박정민이라는 인물이 이곳을 문창대(文昌臺)라고 생각하고 문창성조(文昌星照)를 새겼다고 본다. 박정민은 이곳에서 문장가의 능력을 구했던 것으로 보인다. 사람들이 문창성조(文昌星照) 석각의 문창(文昌)을 보고 문창대(文昌臺)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둘째  문창대(文昌臺) 바위 면에 최치원이 쓴 글씨가 있었다고 전한다. 과두(蝌蚪) 문자로 쓰여 있어 판독할 수 없었다고 한다 그 글씨를 주전(籒篆)이라고 표현하기도 하였다. 1896 2월 법계사에서 노인성을 보기 위해 지인과 함께 산행한 두산(斗山) 강병주(姜柄周, 1839~1909)의 두류행기(頭流行記)

 

  "어렵사리 중봉(中峯)에 도착하니, 궁암(穹巖)과 천작대(天作臺)가 있으며, 상고시대의 문자인 과두문자(蝌蚪文字)가 가파른 절벽에 새겨져 있었다. 이지러지고 마모되어 상세히 알 수 없지만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의 글씨라고 한다." "바위 겉면은 절구 모양이며 맑은 물이 담겨 있어 세심천(洗心泉)이라고 하였다. 북쪽 근처에는 몇 마지기 평평한 곳이 있으며 바위 위에는 탑 하나가 쓸쓸히 있었다. 나이든 노인이 말하기를 '옛날에는 법계암(法戒庵)이 있었는데 지금은 폐허가 되었다.'라고 하였다. 그 터를 닦아 집 한 칸을 지었는데 삼사십 명은 수용할 수 있다."라고 하였다. 두산(斗山) 강병주(姜柄周)의 기록은 문창대라는 직접적인 언급은 없지만, 현 세존봉 아래 세존암을 가리킨다. 

 

셋째  1902년 우천(愚川) 김회석(金會錫, 1856~1934)의 지리산유상록(智異山遊賞錄)이다. 우천은 심석재(心石齋) 송병순(宋秉珣, 1839~1912) 등 당시 쟁쟁한 인물들과 지리산을 유람하였다. 우천(愚川)의 문창대(文昌臺)에 대한 묘사는 현장감이 있고 구체적이다. ” 점심을 먹은 뒤 문창대(文昌臺)에 올랐다. 바위 사이에 구멍이 하나 있는데, 겨우 한 사람이 들어갈 만했다. 부여잡고 올라가니 수십 명이 앉을 만한 평평한 바위가 나왔다. 바위에는 두 개의 구덩이가 있었다. 맑고 시원한 물이 가득했고 깊이는 한 자 정도 됐다. 이 물을 감로수(甘露水)라고 불렀다. 큰 가뭄에도 마른 적이 없으며, 긴 장마에도 넘친 적이 없다고 했다. 모두 둘러앉아 각자 물을 떠마셨다."

 

  "우리를 따라온 승려가 '만약 이 물을 다 떠내면 하늘이 바로 비를 보내니 다 뜨지 마십시오.'라고 했다. 승려가 그렇게 말하여 한 표주박의 물만 남기고 한참을 지켜보았다. 그러자 조금도 빈틈이 없는 구덩이에 절로 물이 스며들어 구덩이를 가득 채우고는 넘치거나 줄지 않아 물을 뜨지 않았을 때와 같아졌다."

 

  "구경하던 10여 명의 사람들이 두세 번 이와 같이 해도 구덩이의 물은 이전과 같았다. 괴이하여 승려에게 물어보니 승려가 대답하기를, '옛날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말에 이 우물은 최치원 선생이 판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바위 끝에는 발을 디딜 만한 곳이 있는데, 그곳은 최 선생이 화살을 쏘던 곳입니다. 봉우리 아래에 과녁을 걸던 옛터가 있는데, 지금도 화살을 줍는 경우가 있다고 합니다.'라고 하였으니 그 말이 매우 허황되었다. 각자 시 한 수를 짓고 벽계암(법계사)으로 내려왔다.”라고 기록하였다.

 

벽계암은 법계사의 옛 이름이다. 1632년 진양지에는 법계사. 1896년 강병주 두류행기, 1902년 송병순 유방장록, 1902년 김회석의 지리산유상록, 1902 이택환 유두류록, 1917년 이수안의 유두류록」, 1936년 이학돈의 「지리산등척기」에 벽계암, 1903 안익제 두류록1935 하겸진 유두류록에 벽계사라는 기록이 보인다

 

  두산(斗山) 강병주(姜柄周)는 1896년, 우천(愚川) 김회석(金會錫)의 기록은 1902년이다. 두산(斗山) 강병주(姜柄周)와 우천(愚川) 김회석(金會錫)은 세존봉 문창대(文昌臺)를 문창대(文昌臺)라고 하였고, 『진양지』에는 법계사 문창대(文昌臺)를 문창대(文昌臺)라고 하였다. 1939년 월정(月汀) 이병호(李炳昊, 1882~?)는 『진양지』를 근거로 孤雲崔先生杖屨之所를 석각을 한 것으로 추정된다. 지리 99는 세존봉 아래 문창대를 진짜 문창대라고 주장한다. 두산(斗山) 강병주(姜柄周)와 우천(愚川) 김회석(金會錫)의 기록을 좇은 듯하다.

 

강병주(18391909) 호는 두산(斗山). 사천 곤명면 은사리 옥동마을에서 출생 만년에 하동 옥종으로 이주. 김회석(金會錫 1856~1932) : 호는 우천(愚川 거창 가조 출생연재(淵齋송병선(宋秉璿.우암의 9세손)의 문인으로 수학하여 주자대전(朱子大全), 송자대전(宋子大全), 성리이기설(性理二氣說)까지 통하는 학자로 문집 우천집(愚川集)에 약 350수에 달하는 시문(詩文등을 남겼다.

 

 

 

세존암 문창대 석굴
文昌星照/朴正民出世/文昌星照

 

 

 

3. 문창대(文昌臺)의 다른 명칭

 

. 세존암(世尊巖)

 

  1489년 일두(一蠹) 정여창(鄭汝昌)과 함께 지리산을 유람한 탁영(濯纓) 김일손(金馹孫, 1464~1498)의 두류기행록(頭流紀行錄)법계사에서는 이 이름(세존암, 世尊巖)과 함께 바위 옆 봉우리를 세존봉(世尊峰)으로 부르고 있다.”라는 세존암(世尊巖)을 기록하고 있다. “가파르게 솟은 한 벼랑을 만났는데, 세존암(世尊巖)이라고 하였다. 바위가 매우 급하고 높게 솟았으나 사다리가 있어서 올라갈 수 있었다. 올라가서 천왕봉을 바라보니 몇 십리 밖에 안 되는 거리였다. [遇一巘巖極峻拔有梯可上上而望天王數十里]”  탁영이 언급한 곳은 현재의 세존봉으로 보인다. 그러나 진양지(晉陽誌)』 「불우조(佛宇條)」 법계사 부분에 “문창대  북쪽 오리쯤에 암봉이 우뚝 서있는데 세존봉이라고 한다. [其北五里許 石峰突立 名曰世尊峰]"라고 하였으니 현재의 세존봉이 아닌 듯하다.

 

. 문장대(文章臺)

 

  문장대(文章臺)라고 쓴 기록이 여러 편 전한다. 경모재(敬慕齋) 권길(權佶, 1712~1774), 이곡(梨谷) 하인수(河仁壽, 1830~1904), 두산(斗山) 강병주(姜炳周, 1839~1909), 과재(果齋) 장석신(張錫藎, 1841~1923), 서강(西岡) 안익제(安益濟, 1850~1909), 석전(石田) 문진호(文晋鎬, 1860~1901), 경산(敬山) 권상직(權相直, 1868~1950) 등 다수의 인물이 남긴 문집에서 보인다.

 

. 문창대(文昌臺)

 

  문창대(文昌臺)의 문창(文昌)은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의 문창후(文昌侯)라는 시호(諡號)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고려 현종(顯宗)1023(현종 14) 최치원(崔致遠) 선생을 기려 추증(追贈)하면서 내린 시호(諡號)이다. 1623년 부사(浮査) 성여신(成汝信)78세에 두류산을 유람하고 장편고시 유두류산시(遊流頭山詩) 86句를 남긴다. 문창대(文昌臺)는 유두류산시(遊流頭山詩)에서 처음으로 명명한 듯하다. 관련 부분만 발췌하였다.

 

東蹲世尊峯 : 동쪽으로 걸터앉은 세존봉

石角如人立 : 우뚝한 바위가 사람이 서 있는 듯하네.

西峙文昌臺 : 서쪽으로는 문창대가 솟아 있으니

孤雲遺舊跡 : 고운의 옛 자취가 남아있는 곳.

人言石刻遺仙筆 : 그 바위에 고운의 필적 새겨있다 하는데

路險境絶無由覿 : 험하고 가파른 절벽이라 가볼 길이 없네.

 

  이후 월고(月皐) 조성가(趙性家, 1824~1904), 회산(晦山) 이택환(李宅煥, 1854~1924), 삼외재(三畏齋) 권명희(權命熙, 1865~1923), 오강(梧岡) 권봉현(權鳳鉉, 1872~1936), 아단(我丹) 하계휘(河啓輝, 1874~1943), 추범(秋帆) 권도용(權道溶, 1877~1963), 성재(惺齋) 권태정(權泰珽), 위당(韋堂) 정덕영(鄭德永, 1885~1956) 등의 글에서 보인다

 

 

. 학사대(學士臺)

 

  이곡(梨谷) 하인수(河仁壽, 1830~1904)의 글에 고로상전학사대(故老相傳學士臺)’라고 쓰고 있다. 하인수는 문장대와 학사대 두 가지 이름을 자신의 문집에 남겼다. 두 이름 모두 최치원과 관련이 있는 이름이다. ‘문장대학사대라는 이름은 잊혀졌다. 현재는 세존암문창대라는 이름으로 많이 부르고 있다. 세존암은 하나이고 문창대는 둘이다. 세존암을 제외하면 나머지 세 이름은 최치원(崔致遠)과 관련된 것이다

 

 

4. 결어

 

  문창대(文昌臺)의 위치를 구체적으로 나타낸 문헌은 없다. 『진양지(晉陽誌)』와 우천(愚川)의 기록 외에 어느 곳이 문창대인지 명확하지 않다. 글의 내용을 보고 추정할 뿐이다. 『진양지(晉陽誌)』와 법계사사적비(法界寺事績碑)에 나타난 문창대(文昌臺)와 우천(愚川)의 유람록에 묘사한 문창대(文昌臺)는 다른 장소이다. 『진양지(晉陽誌)』와 법계사사적비(法界寺事績碑)의 문창대는 법계사 서쪽 일출봉(日出峰)을 가리킨다. 성여신(成汝信)의 유두류산시(遊流頭山詩)에도 문창대의 위치는 『진양지(晉陽誌)』와 일치한다. 우천(愚川) 유람록의 문창대는 세존봉 아래 세존암이다. 두 곳 다 명확한 기록이 있으니 문창대에 대하여 헛되이 진위를 논할 필요가 없다. 그냥 법계사 옆 문창대세존봉 아래 문창대로 정리하는 것이 어떨는지. 어차피 문창대(文昌臺)는 후세 사람들이 꾸며낸 이야기이다. 또한 법계사 주변에 고운최선생장구지소가 두 곳일 수도 있다. 감수재 박여량이 「두류산일록」에 이르기를 "전하는대로 보는 것이 옳지, 어찌 다른 의견을 낼 필요가 있겠는가."  나 또한 그렇다. .

 

▶ 참고자료

1. 『진양지』(성여신, 1632)

2. 『지리산 365일』(최화수, 1918)

3. 산청석각명문총람(權由鉉, 1918)

4. 『선인들의 지리산 기행시』(최석기, 강정화, 2016) 

 

 
※ 주의 : 개인적인 의견으로 오류가 있을 수 있음을 밝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