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六友堂記/♧작업실

한말 항일의병 박회성의 상원(추성)진과 백무동의 백무진

도솔산인 2022. 3. 17. 23:41

한말 항일의병 박회성의 상원(추성)진과 백무동의 백무진

 

 

1. 연곡사 전투(1907년 10월 17일)

 

  1907년 10월 17일(음력 09.11) 새벽, 연곡사에서 일본군의 기습으로 고광순(高光洵, 1848~1907) 의병장을 잃고 흩어진 의병들의 일부는 이듬해(1908년)에도 화개동의 의신 부락에 거점을 마련하고 계속 활동하였다. 『화개면지』 (김동곤, 2002)

 

  1907년 10월 17일(음력 09.11) 새벽, 연곡사를 포위한 채 일제 군경은 공격을 개시하였다. 일제 군경은 총공격을 가하며 피아골을 유린한 끝에 의병들을 연곡사 구석으로 몰아갔다. 의병장 고광순(高光洵, 1848년~1907년)과 부장 고제량(高濟亮, 1849~1907) 이하 25~6명의 의병이 연곡사 일대에서 장렬히 전사 순국하였다.

 

  ☞ 고광순(高光洵, 1848~1907) 요약 개항기 을미사변 후 기우만과 의병을 모집하여 좌도의병대장으로 활약한 의병장. 본관은 장흥(長興). 초명은 고광욱(高光旭) 또는 고광순(高光珣·高光詢). 자는 서백(瑞伯), 호는 녹천(鹿川). 전라남도 담양 출신. 생부는 고정상(高鼎相), 양부는 고경주(高慶柱), 항일투사 기산도(奇山度)가 사위이다. 1895년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각 읍에 격문을 띄우고, 기우만(奇宇萬)과 의병을 모집하여 좌도의병대장에 추대되었다. 나주를 본영으로 의병을 불러모으자 일본군이 나주로 집결하므로 광주(光州)로 옮겼다. 명성황후(明成皇后)의 원수를 갚기 위해 북진하던 중 선유사(宣諭使)의 권고로 의병을 해산하였다.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된 뒤 19064월 최익현(崔益鉉)이 순창에서 의병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듣고 고제량(高濟亮)과 순창에 이르렀으나, 최익현은 이미 패전하여 서울로 압송된 뒤였다. 다시 기우만·백낙구(白樂九)와 모사하였으나, 그들도 곧 붙잡혔다. 1907124일 저산(猪山)의 제각(祭閣)에서 고제량·고광훈(高光薰고광채(高光彩) 등 족친들과 윤영기(尹永淇박기덕(朴基德) 등과 의병을 일으켰다. 12월 말 남원의 양한규(梁漢圭)와 남원성을 공격, 관군과 접전을 벌이던 중 양한규가 죽고 남원의진이 붕괴하여 퇴진하였다. 19075월에는 능주(綾州), 8월에는 동복(同福)을 습격하였다.

 

  그 뒤 지리산 문수암(文殊庵)을 거점으로 활약하던 김동신(金東臣)과 연합작전을 구상, 지리산으로 집결하였다. 그 동안 고광순의 종가는 적의 습격으로 사당만 화를 면하였을 뿐 피해가 컸다. 8월 구례 연곡사(燕谷寺)로 가서 화개동(花開洞)과 문수암 일대를 거점으로 대원들을 머무르게 한 뒤, 군대를 훈련시키고 군량을 보충하며 불원복(不遠復)’이라는 깃발을 만들어 의기를 북돋웠다. 그 뒤 지리산을 거점으로 하여 많은 전과를 올렸으나, 9월 적의 연곡사 복멸작전에 의한 야습을 받아 부장인 고제량을 비롯, 주요 장졸들과 함께 전사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출처 : 다음백과]

 

2. 의신 전투(1908년 2월 2일)

 

  연곡사에서 패한 고광순 부대 잔여 의병들은 외당재와 내당재를 넘어 의신으로 들어온다. 도덕봉 주변 검각을 거점으로 활동하다 설을 쇠기 위해 의신마을에 내려왔다가 일본군의 매복에 걸려 대부분 전멸하였다. 무신(1908)년 정월 초하루 떡국 한 그릇과 목숨을 바꾼 것이다. 도덕봉 아래 샘터 주변 군데군데 석축은 한말 항일 의병들의 주둔지로 추정된다. 도덕봉 아래 샘터 부근의 바위 암벽에는 탄흔 자국이 남아있다. 여기에서 살아난 의병들은 벽소령을 넘어 석상용의 상원의진에 합류한다. 《비호장군석상용약전》(이종인, 1974)에 나오는 "고려천(고록천의 오기일 듯)이 이끄는 일대"는 의신에서 살아 남은 "고광순(高光洵, 1848년~1907년)의 잔류부대"로 이해가 된다. 녹천(鹿川)은 고광순의 호이다.

 

  소철굴암터(용화정사)에서 숙영을 하던 의병들은 갑자기 들이닥친 일본군에게 화승총으로 대항했으나 달걀로 바위 치기였다. 신형무기로 무장한 정예 일본군에 농민·의병들은 적수가 아니었다. 순식간에 형세는 흩어지고 계곡으로 도망치는 의병들은 거의 전멸하고 말았다. 지금 의신마을에서 원대성 마을로 들어가는 논들 위 도로변에 30여 의병의 원혼이 묻혀있다. 『화개면지』 (김동곤, 2002)

 

3. 대궐터 박회성의 상원진

 

  1907년 남원에서 양한규와 고제량이 찾아와서 합세하고 곡성, 장성, 고창, 구례 등지에서 왜병들에게 기습작전을 하면서 싸우다가 쌍계사를 거쳐 마천으로 넘어오던 도중, 고려천(고록천?)이 이끄는 일대(잔류부대)를 만나 지리산 중턱 상원에서 합세하였다. 그후 문태수(文泰洙, 1889~1913) 신명선(申明善, ?~1908)이 이끄는 일대가 추성으로 들어와 상원에서 합세하여 대진을 이루었다.《비호장군석상용약전》(이종인, 1974) 상원진과 백무진에 대한 기록은 석상용의 구술을 기록한 《비호장군석상용약전》에 유일하게 보인다. 상원사터는 초암능선 자락 박회성 아래에 있다. 일본군의 진중일지(1908)에는 상원진을 대궐터(박회성)로 기록하고 있다.

 

※ 상원진 : 고광순 일대(一隊), 문태수, 신명선 일대(一隊)

 

양한규(梁漢奎, 1844~1907) 요약 한말의 의병장. 본관은 남원. 초명은 월서(月瑞). 호는 초계(初桂초계·측헌(則軒). 아버지는 맹석(孟錫)이다. 1882(고종 19) 임오군란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남원부사 심의두(沈宜斗)에게 장정 300명을 모집해 서울로 올라가 난군을 토벌하자고 청했으나 심의두의 반대로 실행하지 못했다. 1891년 선략장군부사과(宣略將軍副司果), 1892년에는 통훈대부(通訓大夫)로 승진하고 초계군사(草溪郡事) 겸 내금위장(內禁衛將)이 되었으며 곧 통정대부로 가자되었다. 1894년 갑오농민전쟁이 일어나자 기병하여 난민을 토벌할 것을 도모하다 그 사실이 누설되자 중지했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체결되자 국권을 회복하고자 의병을 일으키니 근방의 1,000여 명이 이에 호응했으며, 유병두(柳秉斗박재홍(朴在洪양문순(梁文淳) 등이 그를 의병대장으로 추대했다. 1907212(음력 12. 30)에 일제히 집합해 남원으로 진격할 계획을 수립하여, 다음날 새벽 남원 주둔 진위대 장병들의 연말연시 휴가를 틈타 별다른 격전 없이 남원에 입성하는 전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그는 도주하는 적을 추격하던 중 유탄에 맞아 죽었고, 전열을 재정비한 진위대의 공격으로 의진의 남원 점령은 무산되었다. 1968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 文泰洙(문태수, 1889~1913)/문태현(文泰鉉) 한말의 의병장. 본관은 창원. 본명은 태현(泰鉉). 태서(泰西)·태서(泰瑞)라고도 한다. 1904년 금강산에서 병서를 배웠으며, 1905년 지리산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1906년 팔공산으로 이동한 뒤 장수읍 함락, 무주 부남면 습격 등의 활동을 벌였다. 이후 무주 덕유산을 근거로 삼남 일대에서 의병활동을 했다.

 

1907년 12월 각도 의병부대가 서울을 총공격하려고 할 때 호남군 100명을 이끌고 참가하여 13도연합 의병부대 중 호남창의대장이 되었다. 그러나 총대장인 대한관동창의장 이인영(李麟榮)이 부친상 때문에 귀향하면서 서울진격계획이 좌절되자 무주로 돌아왔다. 1908년 2월 무주주재소를 습격하다가 붙잡혔으나 탈출했다. 4월 신명선(申明善) 부대와 장수읍을 습격한 뒤 학교와 군청 등을 불태우고 돌아갔다.

 

그후 용담군 이동면 장전리 습격, 5월 남원 이문성 동북방 전투, 10월 경부선 이원역 습격·방화 등 활동을 계속했다. 11월 이후에는 무주군을 근거로 하여 금산·영동·옥천·상주·청주·보은 등지에서 활동했다. 1910년 서울로 진격하고자 했으나 중과부적으로 다시 덕유산으로 돌아와 재기를 꾀하던 중 1911년 8월 붙잡혔다. 대구감옥에서 서울로 옮겨진 뒤 1913년 2월 옥중에서 자결했다. 1963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출처 다음백과]

 

☞ 신명선(申明善, ?~1908)/신명선(申明先), 대한제국기 군대해산 후 전라북도 무주 덕유산을 거점으로 활동한 의병. 1907년 8월 일제에 의하여 한국군이 강제 해산되자, 전라북도 무주 덕유산을 거점으로 동지를 규합해서 의거하였다. 그해 10월 전라북도 진안군 정천면 양원사(梁院寺)에서 의병장 김동신(金東臣)의 의진과 합세하여 일본군과 교전하여 큰 타격을 주었다. 순창·무주·진안 등지에서 항일투쟁과 국권회복운동의 전개를 독려하는 활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하였다. 1908년 4월 무주·안성 등지로 이동하여서 그들을 추격한 일본군 부대와 최후까지 분전하면서 지휘하던 중 일본군에 의하여 수명의 동지와 함께 피살되어 순국하였다. 1977년에 건국포장, 1990년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4. 백무동 고점마을 백무진

 

  충북 제천에서 박화선이 일대를 이끌고 백무동으로 들어왔다. 그 후 김동신, 홍영대 등이 안의에서 들어와서 지리산에서 의병진이 웅거하였다. 공은 지리 사정에 밝고 지략도 겸비하였으므로 백무진과 상원진의 총참모로 추대되어 수백 대원들의 군량과 군기 화약의 공급과 작전과 정찰까지 맡아서 맹활약을 계속하였다. 《비호장군석상용약전》(이종인, 1974) 백무진의 위치는 백무동 고점마을 인민군사령부터로 추정한다. 

 

※ 백무진 : 제천의 박화선, 안의 김동신, 홍영대

 

  ☞ 김동신(金東臣, 1871~1933) : 경상남도, 전라북도의 접경 지대와 덕유산, 지리산 인근 지역을 중심으로 활약한 의병장이다. 김동신은 1906년 음력 3월경 약 30명의 의병을 이끌고 덕유산에 있는 자원암(紫原庵)으로 내려와 머무르면서 거사를 준비하였다. 군대 해산 후 의병 항쟁이 본격화되자 1907년 8월 전라북도 정읍군 백양사(白洋寺)에서 고광순(高光洵)과 더불어 기병할 것을 의논하고 인근에 통문을 돌려 의병을 일으켰다. 그리고 삼남 의병 도대장(三南義兵都大將)이 되어 경상남도 거창군을 비롯하여 전라남북도, 충청남북도 접경 지역에 출몰하여 활동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5. 연합의진 상원진과 백무진의 실상사 기습(1908년 4월 29일)

 

  1908년 4월 29일(음력 3월 그믐날) 캄캄한 야음을 이용해 약 50여 명의 병력으로 왜군을 습격하였다. 크게 놀란 왜군은 절 뜰에 쌓아둔 나뭇가지에 불을 질러 어둠을 밝히고 반격하였다. 오랜 접전 끝에 의병대는 서쪽 노루목으로 퇴각하였다.의병장석상용선생전적비(최점갑, 1995)

 

6. 의병에 협조한 도마마을 주민 학살 위협(5월 11일)

 

  그 후 5월 11일(음력 4월 12일) 왜군들은 본면 도마리의 서당에다 주민들을 모아놓고 집단 학살하겠다고 위협하는 것을 당시 본면 면장 노지현(盧址鉉)씨의 끈질긴 설득으로 위기를 모면하였다.《의병장석상용선생전적비(최점갑, 1995)》

 

7. 대궐터 상원의진 토벌 기록(1908년 6월 18일~22일)

 

  1908년 6월 29일 함양 수비 제 5중대 西原 중위 보고 요지(6.23. 함양) : 6월 18일(음력 5월 20일)부터 22일(음력 24일)에 걸쳐 함양 서남방 지구 검거를 위해 출장한 당대(當隊, 입석立石 수비대 포함)는 6월 21일 지리산의 절정 방장봉(方丈峰) 북방 유곡(幽谷, 깊숙한 골짜기) 및 동북방 사면(斜面)에 있는 대궐터(大闕基)에 적의 소굴(巢窟)이 있어서, 그 유곡에 있는 총기제작소(銃器製作所)는 지난날(過日) 구례(求禮) 수비대로 인해 깨뜨렸지만(破却), 대궐터에는 아직 토벌대가 진입할 수 없음을 알고서, 마천(立石 동남방 2리) 면장을 향도(嚮導)하게 해 병풍연(屛風然)이라는 험산(險山)에 깊이 들어가(深入) 어려움(荊棘)을 물리치고(排) 개암나무와 덤불(榛莽)을 밟고 간신히 대궐터에 도달하였다.

 

  적의 그림자(賊影)를 탐지할 수 없었지만, 현재(目下) 적(賊)이 신축중인 가옥은 80여 명을 수용하기에 족한 규모로서, 그 공사를 끝내고 그 주위에는 석루(石壘)를 설치해 목책 울타리(樹枝鹿柴)를 편성하여 소굴로 삼았다. 따라서 가옥 및 방어설비를 파괴하고 일부로 하여금 주위를 수색하여 좌(左)의 여러 물건(諸品)을 획득하였다. 화승총(火繩銃) 12, 탄환 4貫目, 백미(白米) 7두, 기타 잡품. 파괴 가옥은 마천 면장이 방화·소각하고 말하기를 면민을 위해 적의 근거를 끊었다고 함.〔『(보병 제14연대) 진중일지』Ⅱ〕

 

8. 지리산 의병활동 상황

 

가. 연곡사 전투(1907년 10월 17일)

나. 의신 마을 전투(1908년 2월 2일)

다. 연합의진 상원진과 백무진 결성

라. 실상사 기습(1908년 4월 29일)

마. 도마마을 주민 학살 위협(1908년 5월 11일)

바. 대궐터 상원의진 토벌(1908년 6월 18일~22일)

 

9. 박회성의 어원(진주교대 곽재용 교수님)

 

  박회성의 어원을 추적하다가 박(朴)과 회(回)의 의미보다는 우리말 소리를 빌려 온 것으로 추정하여 아래와 같이 두 가지 설을 제기해 봅니다. 즉 바위성이라는 의미이거나 바퀴성이라는 의미입니다. 앞의 바위성이라는 의미가 자연스럽습니다. 두 의미의 근거를 제시합니다.


① 바위성
〇 고문헌
바회: 바위. 바횟방:巖房(용가1:46). 구무바회:孔巖(용가3:13).巖은 바회라(석보6:44)
〇 박회(朴回)의 표기
‘바’ 자의 한자음이 없으므로 바위의 중세국어 바회를 음차.
〇 관찰
박회성은 지리산 높이 조성한 거대한 석성임.
인공적인 축조물과 함께 자연의 바위 자체를 성벽으로 최대한 활용하였음.

② 바퀴성
〇 고문헌
바회 : 바퀴(輪). 輪은 바회라(월석2:38) 바회 륜:輪(훈몽중26)
박회 : 바퀴(輪). 박회 륜: 輪 (왜어하19). 박회: 輪(물보 舟車) 車只有輪方言曰 朴回(아언2)
박회 : 바퀴. 세 박회ᄅᆞᆯ ᄒᆞ고(가례10:45)
바회>박회>바퀴
〇 박회(朴回)의 표기
바퀴(輪)는 바회, 박회로 나타냄
<아언각비2>에서 ‘車只有輪方言曰 朴回’가 나오는데 박회(朴回)가 그대로 나옴
〇 의미
· 명사 : 돌리거나 굴리려고 테 모양으로 둥글게 만든 물건.
· 의존명사 : 둘레를 빙 돌아서 제자리까지 돌아오는 횟수를 세는 단위
〇 유추
· 성의 모양이 둥글게 만들어져서 바퀴가 되었음
· 성을 한 바퀴 돌기에 너무 힘들어서 바퀴가 되었을 수도.

 

 

 

 

경상대학교 역사교육과 김준형 교수님

 

※ 일본군의 『진중일지(1908)』와 『조선폭도토벌지(1913)

 

1. 일본군 『(步兵 第14聯隊) 陣中日誌』

 

  1908년 6월 29일 함양 수비 제 5중대 西原 중위 보고 요지(6.23. 함양) : 6월 18일부터 22일에 걸쳐 함양 서남방 지구 검거를 위해 출장한 당대(當隊, 입석立石 수비대 포함)는 6월 21일 지리산의 절정 방장봉(方丈峰) 북방 유곡(幽谷, 깊숙한 골짜기) 및 동북방 사면(斜面)에 있는 대궐터(大闕基)에 적의 소굴(巢窟)이 있어서, 그 유곡에 있는 총기제작소(銃器製作所)는 지난날(過日) 구례(求禮) 수비대로 인해 깨뜨렸지만(破却), 대궐터에는 아직 토벌대가 진입할 수 없음을 알고서, 마천(立石 동남방 2리) 면장을 향도(嚮導)하게 해 병풍연(屛風然)이라는 험산(險山)에 깊이 들어가(深入) 어려움(荊棘)을 물리치고(排) 개암나무와 덤불(榛莽)을 밟고 간신히 대궐터에 도달하였다.

 

  적의 그림자(賊影)를 탐지할 수 없었지만, 현재(目下) 적(賊)이 신축중인 가옥은 80여 명을 수용하기에 족한 규모로서, 그 공사를 끝내고 그 주위에는 석루(石壘)를 설치해 목책 울타리(樹枝鹿柴)를 편성하여 소굴로 삼았다. 따라서 가옥 및 방어설비를 파괴하고 일부로 하여금 주위를 수색하여 좌(左)의 여러 물건(諸品)을 획득하였다. 화승총(火繩銃) 12, 탄환 4貫目, 백미(白米) 7두, 기타 잡품. 파괴 가옥은 마천 면장이 방화·소각하고 말하기를 면민을 위해 적의 근거를 끊었다고 함.〔『(보병 제14연대) 진중일지』Ⅱ〕

 

자료 출처 : 경상대학교 역사교육과 김준형 교수님

 

2. 명치 41년(1908) 4-12월 경상남도에서의 토벌

 

경상남도 지리산은 경북 日月山과 같이 폭도의 소굴지로서 전년 이래 누차의 토벌을 가하였으나 심산유곡에서 교묘하게 우리 감시선을 벗어나 潛匿하면서 陰으로 향촌에 출동하여 약탈을 자행. 그들은 지리산 중 인적이 없는 곳에 가옥을 구축하고 장벽을 설치하고 防柵을 만들고 주식을 저축하여 永久之策을 강구하고 있었으나, 6월 21일 함양수비대는 심한 곤란을 무릅쓰고 드디어 그 근거지를 발견하여 총기탄약을 노획하고 기타는 전부 소각. 그 후부터 폭도는 거의 사산하였는데 그 대부분은 경상남도 전역으로 꺼지고 일부는 전라도 방면으로 이동하였다.『朝鮮暴徒討伐誌』(1913), 767쪽

 

3. 1907. 10.23: 남부수비관구사령관으로부터의 통보 : 鎭海灣要塞司令官으로부터의 통보

 

가. 폭도는 鷰谷寺,七佛寺 및 文珠庵(구례의 文殊庵의 誤記일 듯)에 근거, 그 수 300명 정도. 그 斥候는 섬진강 연안에 출몰. 5,6일 전부터 폭도의 척후는 매일 하동 정찰을 위해 그 近鄕에 왔다 감. 10일은 興龍店 부근에 11일은 石隙店 부근에 왔다. 적의 首領은 연곡사에 있는 듯하지만, 연곡사를 공격하면 칠불사 및 문수암 방향으로 도주할 관계가 있음.

 

나. 적의 수령은 구례 부근의 豪家의 주인을 인질로 해서 포박, 군자금의 多額을 강취하였음. 또 鍛冶屋에 2명을 연달아 돌려보내 목하 刀劍이나 刃器를 제조시키고 있음.

 

다. 지리산 북록 마천(속칭 마천면)은 종래 東學黨時代부터 不良民이 집합하는 장소로서 지금까지도 폭도가 근거하는 곳으로서 유명. 칠불사, 마천면과는 항상 기맥이 통하는 듯. 마천면, 칠불사, 연곡사, 문수암은 동일체인 듯. 마천면 부근은 불온한 형세를 확인.

 

라. 지리산, 般若峯 부근은 大森林으로 周圍 幾尋이 넘는 大木이 번무해서 주간에도 어두워 적의 소굴로서 자못 편함. 또 칠불사, 연곡사, 문수암, 마천면은 어느 것보다도 큰 寺院을 가지고 있고 양식은 결코 欠乏하지 않음. 또 삼림 때문에 한번 이 산중으로 逃入하면 손을 쓰기가 어려움. 동학당시대에도 정부는 결국 이를 토벌하는 것을 단념.

 

右 情報의 결과에 의해 兒島중대가 취한 처치 : 중대는 17일 정오를 기해 칠불사,연곡사 및 문수암을 남북 양 방면에서 포위공격하는 것으로 하고 좌의 配備를 취함 :

 

① 하동방면에서 1소대를 전진시키고 同小隊의 주력으로 院基 방향에서 일부로 하여금 五松亭 방향에서 칠불사를 공격하게 함.

② 함양을 거쳐 大井 방향에서 岩本소대의 일부 및 山田소대의 일부로 하여금 마천면에서 칠불사 및 문수암의 背面을 향해 공격하게 함. 하동방면에서 전진한 소대는 17일 예정대로 연곡사를 향해 공격. 적 100명과 충돌. 그들을 반야봉 방향으로 격퇴. 적 사자 22(수괴포함), 부상 30여명,--- (步兵 第14聯隊) 陣中日誌Ⅰ, 401-403쪽

 

4. 1908. 1.9 : 함양수비제5중대 서원중위보고(1.4,함양)

 

  함양의 四周가 목하 평온하지만 군대의 통과가 드물어서 적도가 배회하는 일이 의심하지 않을 정도가 아니다. 따라서 當隊는 잠복한 적도소탕을 목적으로 의 행동을 취하려고 한다.(?(步兵 第14聯隊) 陣中日誌?Ⅰ, 706-707)

兵力 行動地方 행동기간 記事
상등병 이하 7 馬川面이남지구 1.4-1.8 馬川面 이남 智異山間 각 부락에 폭도가 집합했다는 風說. 密偵을 시켜 정찰. 정보를 얻기 위해 上記의 병력을 差遣

 

5. 居秘收發 669(1908.2.?, 거창경찰분서장이): 폭도 정찰에 관한 건 보고

 

  함양군 마천면 지리산맥에 김동신이 이끄는 폭도가 맹렬히 배회하고 있으므로 함양남원구례하동진주의 각 수비대는 국지연대장의 명에 의해 16일부터 지리산맥으로 향해 토벌예정. 함양주재소 근무 4명 즉 순사부장 海江田元吉, 순사 狩野太郞,  安藤利助 3명과 한인 순사 房太震,  孫甲俊 2명이 함양수비대와 같이 정찰. 1. 16일 오전 5시반 함양을 출발하여 함양수비대 서원조장 이하 9명은 산청군 덕산 방면에서 서원대장 이하 11명과 해강전 순사부장, 순사 야수안등방손의 5명은 마천 방면에서 奧原軍曹 이하 4명은 전라북도 운봉 방면에서 또 진주하동구례남원의 각 수비대 및 우수비대주재지의 경찰대도 같이 각 방면에서 백방으로 손을 나누어 지리산의 정찰을 수행. 18일 각 정찰대 전부는 하동군 화개면 신흥에 회합하였으나 아무도 얻은 바가 없었다. 김동신 일파는 12일 국지연대장이 1중대를 이끌고 함양에 來着한 것을 재빨리 알고 그 근거지를 어디론가 이전한 것 같으므로 해강전부장 외 4명의 순사는 30일 함양수비대와 같이 일단 철수. 1. 12일 밤 수괴 李圭喆이 이끄는 40여 명의 폭도들은 함양 서방지를 통과하였는데 전라북도 장수 방면으로 도주한 것 같다.(국사편찬위원회, ?韓國獨立運動史 資料? 9(義兵篇), 166-168)

 

6. 居秘收 344호의 1(1908.6.11, 거창경찰분서장이 경무국장에게)

 

  歸順者에 관한 건 보고: 좌기 16명은 본년 6 11일 폭도의 수괴 朴東義의 협박에 의해 일시 該徒 隨從하여 전라북도 운봉군 입석수비대를 습격하자 그 향도가 된 자인 바 이후 前非 悔悟하고 귀순신청하므로 취조 후 免罪文憑 下付하였음. 좌기: 경상남도 함양군 마천면 堂興村 農 文星朱(45), 동상 농 朴春元(55) 동상 농 金文成(44), 동상 농 李聖三(45), 동상 농 金仁仲(59), 동상 농 金明云(49), 동상 농 朴成彦(42), 동상 都馬川洞  韓泰西(53), 동상 농 朴寬之(53), 동상 농 張明俊(57), 동상 농 韓聖瑞(76), 동상 堂興村  朴文汝(73), 동상 都馬村  申慶彦(56), 동상 농 林善慶(67), 동상 농 韓致明(26), 동상 농 韓元淑(55).(국사편찬위원회, ?韓國獨立運動史 資料? 11(義兵篇), 242-243)

 

7. 1910. 9.21.

 

  함양군 지리산 및 산청군 덕산 방면에는 폭도의 출몰이 빈번. 마천, 엄천면 내에는 폭도에 참가, 일시 양민을 가장하고 귀래한 자가 다수 있다. 이들은 그 부근에 격문을 발하고 함양읍을 습격한다고 양언.(국사편찬위원회, ?韓國獨立運動史 資料? 12(義兵篇), 142)

 

8. 1910. 10.26. 산청, 함양의 귀순자인명표

 

  曺采淳(산청군 上三壯面 弘溪上村), 安致明(삼장면 後川), 孫九龍(상삼장면 石南洞), 金聖培(함양군 馬川面 楊田), 姜水成(마천면 倉村), 權秉璣(休知面 眞寬洞), 林正洛(嚴川面 松台洞), 全李見(마천면 楸城洞), 申南圭(柏田面 下薪洞) 9.(국사편찬위원회, ?韓國獨立運動史 資料? 12(義兵篇), 224-225)

 

※ 자료 출처 : 경상대학교 역사교육과 김준형 교수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