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六友堂記/♧작업실

화학동천(花嶌洞天)과 梅村鄭先生遊憩所 운학정(雲鶴亭)

도솔산인 2021. 12. 1. 20:13

화학동천(花嶌洞天)과 梅村鄭先生遊憩所 운학정(雲鶴亭) 

 

 

마천면 소재 마애석각 명문을 조사하면서 문헌과 지역민들의 세보를 통해 옛 지명을 더러 확인할 수 있었다. 개암선생 유허비의 구송정(九松亭)과 삼괴정(三槐亭), 해주석씨세보의 두류암(頭流巖), 나주임씨세보의 공달비산(蚣達飛山)과 청주한씨세보의 공달산(蚣蟽山), 도화곡(桃花谷, 견성골), 한조봉(鷴鳥峰, 황새봉)과 학조봉(鶴鳥峰), 택리지의 벽소운동(碧宵雲洞), 와유강산(臥遊江山)의 칠성동(七星洞)과 천진폭포(天津瀑布) 등 여러 곳이다. 구전과 일치하는 곳도 있지만 잊혀지거나 와전된 지명도 있었다.

 

마천면 덕전리 소재 화학동천(花嶌洞天) 암각 명문도 그중 하나이다. 嶌는 본래 자전에 '섬도(嶋)'의 이체자인데, 겸암일기(유운룡)와 와유강산(임응택)에서 '청학동(靑嶌洞)'으로 쓴 용례가 있어 화학동천(花嶌洞天)으로 읽었다. 실덕 마을 삼정동 초입에 꽃밭 마을(花田村, 꽃밭말)이라는 지명이 있다. '嶌'를 '섬도'로 보면 도촌(島村) 마을과 관련이 있을 수도 있다. 화전촌(花田村, 꽃밭말)과 도촌(島村, 섬말)을 연결하면 화도동천(花島洞天)이 된다. 속전에 이르기를 '청학쌍계실상백학(雙磎靑鶴 實相白鶴)이라.' 하였으나, 벽소운동, 선유동(삼정동), 백무동, 화학동, 운학동, 칠성동, 추성동, 등구동, 용유동 등을 포함하여 매촌(梅村) 정복현(鄭復顯, 1521∼1591)선생이 노닐었던 두류 북록을 일컬어 백학동이라고 했는지 추가 조사가 필요하다. 끝.

 

 

花嶌洞(화학동)

소재지 : 함양군 마천면 덕전리 산 52-5 번지

행적자 : 미상    연대 : 미상   석각시기 : 미상

[개요] 

자전에 嶌는 島(섬도, 嶋)의 이체자이다. 겸암(謙菴) 류운룡(柳雲龍, 1539~1601) 선생의 겸암기(謙菴記)와 임응택(林應澤, 1879~1951) 선생의 와유강산(臥遊江山)의 필사본에 靑鶴洞(청학동)을 靑嶌洞(청학동)으로 쓴 예가 있다. '꽃이 피고 학이 날아드는 신선의 세계'로 이해가 된다. 실제로 실덕마을에 꽃밭머리라는 지명이 남아있다. 꽃밭머리(실덕마을)는 화학동천으로 들어가는 초입이라는 의미이다. 䳽(학)에서 우측 鳥(새조)를 생략하고 隹(새추) 대신 鳥를 썼다.

 

 

 

雲鶴亭은 梅村公鄭先生休憩之所로 在於慶南咸陽郡馬川面하니 白頭山一脈이 蔓延於南端하야 聳出智異山하니 南則靑鶴洞이요 北則白鶴洞이라. 山水秀麗하고 景致絶勝故로 先生이 卜築精舍於此하야 講論道禮하니 鄕人이 稱之嶠南鄒魯也라.

 

운학정은 매촌 정복현선생의 휴게지소로 경남 함양군 마천면에 있으니 백두산 일맥이 남단으로 뻗어내려와 지리산에서 우뚝 솟아닜으니 남쪽은 청학동이요 북쪽은 백학동이다. 산수가 수려하고 경치가 절경이라. 고로 선생이 이곳에 살 만한 땅을 가려서 정사를 지어 도와 예를 강론하니 고장 사람들이 이곳을 영남의 추로지향이라고 일컬었다. 

 

注 南則靑鶴洞 北則白鶴洞 : 옛말에 '雙磎靑鶴 實相白鶴'이라는 말이 있다. 鄒魯之鄕(추로지향) : 공자(孔子)와 맹자(孟子)의 고향이란 뜻으로, 예절을 알고 학문이 왕성한 곳을 말함. 

 

출처 : 鄭復顯, 『梅村實紀』

 

 

소재지 : 함양군 마천면 군자리 148-2번지

행적자 : 매촌(梅村) 정복현(鄭復顯, 1521∼1591)  연대 : 조선 중기   석각시기 : 미상

[개요]

운학정 매촌정선생유게소(雲鶴亭 梅村鄭先生遊憩所) 매촌(梅村) 정복현(鄭復顯, 1521∼1591) 선생이 노닐고 쉬었던 곳. 

 

 

☞ 정복현(鄭復顯, 15211591)의 자는 수초(遂初)이고 호는 매촌(梅村)이며, 본관은 서산(瑞山)으로 함양(咸陽)에 거주하였다. 그는 1521(중종 16) 4 18일에 아버지 신()의 아들로 거창(居昌) 무등리(無等里) 죽곡(竹谷)에서 태어났다. 그는 당곡(唐谷, 鄭希輔)선생의 문인(門人)이기도 하며, 그가 남긴 자료는 매촌실기(梅村實紀) 2 1책이 전한다.

 

급문 : 정복현은 13(1533)에 당곡선생의 문하에서 공부하다가, 22(1542)에 덕천으로 남명선생을 찾아가 며칠간 머무르면서 시서(詩書)를 강질(講質)하였고, 일찍이 남명선생은 ()은 나와 더불어 상장(相長)할 만하다(南冥集, 編年 42歲條; 梅村實紀, 卷下, 附錄, 年譜 22歲條)’고 하였다.강학 및 교유 : 정복현은 10(1530)에 함양의 대수촌(大樹村)에서 독서하였고, 15(1535) 상서를 공부하였다.
30(1550)에 오건과 더불어 경호수(鏡湖水)로 남명선생을 모셨고, 33(1553)에 노진, 강익, 오건과 더불어 지리산을 유람하였다.
41(1561)에는 마천동(馬川洞)에 운학정(雲鶴亭)을 지었다. 강익과 더불어 원원상종(源源相從)하였고, 도의로 강마하였다.

43(1563)에는 운학정에 머물러 있었고, 3월에 남명선생이 남계(灆溪)로 와서 일두(一蠹, 鄭汝昌)선생의 사당을 배알하고 여러 문생들의 강론을 들었다. 이 때 그는 문경호, 강익, 정유명, 임희무 등 이 지역 선비들과 이 자리에 참석하여 남명선생과 같이 온 하항(河沆), 하응도, 유종지, 진극경 등과 강론하였다(嶧陽集).

45(1565)에는 남명선생을 따라 지곡사를 유람하였는데 당시 오건, 도희령, 권문임, 정구(鄭構) 등이 모였고, 또한 단속사로 따라가 경의(敬義)를 강론하였다. 9월에 오건, 조종도 등이 운학정(雲鶴亭)으로 찾아왔다.

46(1566) 5 13일에는 강익, 노관, 양홍택, 김우굉, 김우옹 등이 남계서원에 모였다.

49(1569)에는 조식(曺湜)이 찾아와서 이기론(理氣論)을 변질(辨質)하였다.
51(1571)에는 남계서원을 배알하고 원근의 선비들이 모였는데, 이 때 백록동규도를 써서 보여주었다. 52(1572) 에는두 아들 길()과 오()에게 오건(吳健)을 사사(師事)하라고 명하였다. 53(1573)에는 뇌계(雷溪) 위에 지은 제광정(霽光堂)에서 주역을 공부하였고, 54(1574)에는 갈천(葛川)선생을 방문하였다.
저술 : 정복현은 47(1567) 심학전서』를 저술하였고, 역리연설(易理演說)』을 지었다.
서원창건활동 : 정복현은 31(1552)에 강익, 노관(盧祼), 임희무, 박승임(朴承任) 등과 더불어 일두선생의 서원을 창립하였다.
향사 : 정복현은 1591(선조 24)에 세상을 떠난 후 1777(정조 1)에 거창의 영빈서원(瀯濱書院)에 배향되었다.

 참고자료

德川師友淵源錄 6 2.
鄭復顯, 梅村實紀 2 1.

[출처] 매촌 정복현자료|작성자 문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