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六友堂記/♧작업실

1611년 유몽인의 유두류산록에 나오는 와룡정

도솔산인 2021. 5. 25. 17:11

1611년 유몽인의 유두류산록에 나오는 와룡정

 

 

▣ 일 시 : 2021년 05월 23일(일)

▣ 코 스 : 쌍계사-화개-와룡정(?)-남창(구례 광의면)-숙성치-용담-남원관아(남원 용담초교)

▣ 인 원 : 2명(지리산아님)

▣ 날 씨 : 맑음

 

 

유람록을 읽고 답사를 하면서 옛 지명을 이해하려면 많은 시행착오를 겪어야 한다. 작년 1월 초 남원의 신강님과 백장암에서 와운 마을까지 차량으로 답사를 하였다. 그 후 재간당에서 백장암, 백장암에서 도탄, 반선에서 영원사, 영원사에서 군자사, 용유담에서 마적사, 송대에서 두류암, 두류암에서 옹암, 남원관아(용성초교)에서 숙성치, 쌍계사에서 숙성치로 이어나갔다.

 

구례군 토지면 용두리 섬진강변에 용호정이 있다. 나는 용두리의 지명과 용호정이라는 정자 이름에 주목하였다. 1611년 4월 7일 아침 유몽인은 일행인 승주(순천) 수령 유영순(柳永詢)과 재간당 김화(金澕)와 쌍계사에서 작별을 한다. 두사람을 전송한 뒤 생질 신상연(申尙淵), 신제(申濟)와 함께 불일암을 유람한 후 쌍계사를 출발한다. 화개를 지나 섬진강을 따라 서쪽으로 나아가 룡정(臥龍亭)에서 쉬어간다. 여기에서 와룡정(臥龍亭)의 위치를 토지면 용두리에 있는 용호정(龍湖亭)으로 추정한다. 이번 답사에서 섬진강 물속의 바위가 내 눈에는 '물에 잠긴 용(潛龍)의 형상'으로 보였다. 문득 용유담과 용담의 모습이 떠올랐다. 묵자(墨子)에 '천하무인(天下無人)'이라는 말이 있다. 천하에는 남이 없다. 자타불이(自他不二)가 아니런가. 답사를 함께 하신 남원의 지리산아님과, 사진과 카톡으로 도움을 주신 산님들께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끝.

 

 

 

자료 : 조박사님
사진 : 순천산님(전남 구례군 토지면 468-1번지)
사진 : 순천산님

☞ 용두리의 유래 : "용두"라는 지명은 전국에 많이 있고 대부분 산맥에서 물로 이어진곳에 지명이다. 노고단의 기운이 월령봉능선을 타고 섬진강까지 이어지는 끝자락에 자리 잡은 용두리 또한 그런 지명에 부합되는 곳이다. 길지(吉地)라 그런지 배틀재 이후로는 고금의 봉분이 산재되어있고 섬진강변까지 이어진 평지에 용두마을이 자리 잡고 있다. 주변에 용두재 저수지와 용호정이 자리하고 있다.(토산 칠성님)

 

 

어우집 후집 제2 () 두류록(頭流錄)

 

 

와룡정(卧龍亭)-유몽인(柳夢寅)

 

 

巖居寥落兩三家 : 바위는 두어 집뿐인 쓸쓸한 곳에 위치하고

臺下江聲繚白沙 : 높은 대 밑 강물소리 백사장을 둘러 흐르네.

地暖南溟饒翠篠 : 남쪽 지방 따뜻하여 푸른 조릿대가 무성하고

山高方丈足靑霞 : 높고 높은 방장산엔 푸른 노을이 넉넉하네.

舟人捩柁叉銀鱖 : 뱃사공은 키를 틀어 은빛 쏘가리를 낚아채고

村女持鑱擷玉椏 : 시골 여인은 칼을 들고 옥빛 나물을 뜯는구나.

堪笑龍城五斗米 : 녹봉위해 남원에서 벼슬하는 신세 우습구나

堆床朱墨鬢成華 : 책상에 위 공문에 귀밑머리 허옇게 세었다네.

 

선인들의 지리산 기행시(최석기, 강정화)

 

 

▶ 1611년 유몽인의 유두류산일록(불일암에서 남원 관아)

 

○ 4월 7일 병자일 순지가 작별을 고하며,“나는 몇 년 전에 청학동을 유람하여 이제 다시 가볼 필요가 없으니, 어찌 곧장 돌아가지 않겠소?”라고 하였다. 김화도,“저도 전에 청학동을 실컷 구경하였습니다. 농사철이 되어 일이 있으니 먼저 돌아갈까 합니다.”라고 하였다. 나는 두 사람을 전송한 뒤 돌아와 혼자 신상연(申尙淵)의 무리와 함께 동쪽 고개를 넘어 깊은 골짜기로 들어갔다. <중략> (불일암을 유람하고 쌍계사를 출발하여 화개를 지나), 정오 무렵 섬진강을 따라 서쪽으로 나아가 와룡정(臥龍亭)에서 쉬었다. 이 정자는 생원 최온(崔蘊)의 장원(庄園)이었다. 큰 둔덕이 강 속으로 뻗어 마치 물결을 갈라놓은 것 같았다. 말을 타고 반석 위로 나아가니 솜을 타놓은 듯 수백 보의 백사장이 보였다. 그 둔덕 위에 초당 서너 칸을 지어놓고 비취빛 대나무와 검푸른 소나무를 주위에 심어놓았다. 그림 같은 풍광이 둘러쳐져 초연히 속세를 떠난 기상이 있었다. 이 날 남원부 남창(南倉)에서 묵었다.

 

4월 8일 정축일. 숙성령(肅星嶺)을 넘어 용담(龍潭) 가에서 잠시 쉬었다가 관아로 돌아왔다.

 

 

☞ 최온(崔蘊, 1583~1659) : 본관은 삭녕(朔寧), 자는 휘숙(輝叔), 호는 폄재(砭齋)이다. 광해군 1년(1609)에 사마시에 합격하였으나 임금의 패륜을 보고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두류산 아래에 지금의 구례군 토지면 용두마을 섬진강 기슭에서 초막 용두정(龍頭亭)을 짓고 유유자적하며 살았다. 그는 남원 출신으로 1589년에 증광시(增廣試)에 문과(文科)에 합격하여 한림(翰林) 검열(檢閱)이 되었고 임란에 권율 장군의 계청으로 종사관으로 활약했던 미능재(未能齋) 최상중(崔尙重, 1554~1604)의 아들이며 성만 최연(崔衍 1576~1651)의 동생이다. 1649년(효종 즉위) 사업(司業)이 되었으나 사직하고, 1653년 세자시강원진선(世子侍講院進善)·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을 거쳐 동부승지(同副承旨)에 이르렀다. 남원(南原)의 노봉서원(露峯書院)에 배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