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六友堂記/♧작업실

산동 목동마을 부안김씨 세보

도솔산인 2021. 5. 5. 13:54

남원 산동 목동마을 부안김씨 세보

 

김익복(金益福, 1551~1598) : 본관은 부안(扶安), 자는 계응(季應), 호는 금릉(金陵), 시호는 충경(忠景). 문정공(文貞公) 지포(止浦) 김구(金坵)의 후손이며, 찰방(察訪) 김광(金光)의 아들이다. 김익복은 옥계(玉溪) 노진(盧禛)의 문하에서 수학했고, 충청도 연산으로 옮겨 살면서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과 교류했다. 1573(선조 6)에 생원시에 합격하고, 1580(선조 13)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좌랑(佐郞도사(都事) 등을 역임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능성현령으로 있으면서 전() 현감 임계영(任啓英) 등과 같이 의병을 일으켜 성주와 개령을 지키고, 금산에서 무주로 넘어오는 적을 막았다. 1597년 정유재란 때는 부모 상중이었는데 도원수 권율(權慄)이 격문을 보내자 다시 나와서 권율 장군의 종사관이 되었다. 1598(선조 31) 영광군수로 부임하여 명나라 장수 진린(陳璘)과 협조 아래 예교(曳橋) 싸움에 참여하였다가 적의 화살을 맞고 세상을 떠났다.

 

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에서 활약한 의병. 김익복은 순흥안씨 사재당(思齋堂) 안처순(安處順)의 손녀사위가 되어 남원 지역으로 옮겨 살게 되었다. 이로 인해 후손들이 대대로 남원에 세거하여, 지금은 전라북도 남원시 남골(木洞)과 전라북도 장수군 산서면 사창(社倉)에 살고 있다. 맏아들 김유(金瀏)는 정유재란 때 운량관(運糧官)으로 공을 세워 교관(敎官)에 증직(贈職)되었고, 둘째 아들 참봉(參奉) 김화(金澕)는 이괄의 난 때 의병을 일으켜 집의(執義)에 증직되었으며, 막내아들 진사(進士) 김연(金沿)은 이괄의 난과 병자호란 때 의병을 일으켜 교관에 증직되었다.

손자인 참봉 김지순(金之純)은 병자호란 때 의병을 일으켜 집의에 증직되었고, 손자인 생원(生員) 김지중(金之重)은 병자호란 때 화의(和議)를 물리쳐서 교관에 증직되었으며, 손자인 교관 김지백(金之白)도 역시 병자호란 때 화의를 배척하여 집의에 증직되었다. 그리하여 세상 사람들은 이 집안을 ‘37(三世七忠)’이라고 칭송하였다.

 

저술로는 금릉유고(金陵遺稿)가 있는데, 부안김씨세고(扶安金氏世稿)속에 수록되어 있다. 조정에서는 김익복에게 이조참판(吏曹參判)을 증직했고, 이후 이조판서(吏曹判書)와 충경공(忠景公)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전라남도 나주시 충장사에 제향하였다.

 

출처 :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http://www.grandculture.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