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六友堂記/♧작업실

1610년 박여량의 두류산일록에 나오는 초령과 엄뢰대

도솔산인 2021. 7. 2. 05:31

1610년 박여량의 두류산일록에 나오는 초령과 엄뢰대

 

 

일 시 : 1610(광해 2) 0902~0908

대상산 : 두류산

동 행 : 박여량(57세, 전世子侍講院文學), 정경운(55, 남계서원임), 박명부(40, 합천군수), 박명계, 신광선, 박명익, 이윤적, 노륜, 안국사 승려(처암, 운일), 악공(윤걸), 종[박여승의 종(혜금연주), 신광선의 종(피리연주), (박여량의 종(옥로, 손득)]등외(15명외)

일정&코스

9/2 : 함양 병곡면 도천리-어은정-목동 박춘수의 집

9/3 : 목동(함양군 휴천면 목현리)-탄감촌(휴천면 문정리)-용유담-군자사(마천면 군자리)

9/4 : 군자사-백모당-하동암(우리동)-옛제석당터-제석당

9/5 : 제석당-향적사(서천당)-중봉(제석봉)-천왕봉-천왕당

• 9/6 : 천왕봉-증봉(甑峰)-마암(중봉샘)-소년대(하봉)-행랑굴(현 마암)-두류암과 상류암 갈림길(쑥밭재)-상류암

• 9/7 : 상류암-초령-사립재-방곡촌(方谷村)-신광선(愼光先)의 정자-최함씨의 계당

• 9/8 : 최함씨의 계당-엄뢰대(嚴瀨臺)-상사(上舍) 정여계(鄭汝啓)의 집-뇌계(㵢溪)-도천 감수재(感樹齋)

 

 

박여량 두류산일록의 감수재 길은 2015년 9월 19일 조개골 상류에서 만난 슬기난님과 행랑굴에 대한 대화에서 시작되었다. 산행을 마친 후 고전번역원에서 박여량의 두류산일록 원문을 다운로드하여 정독하였다. 그로부터 약 2년 후 2017년 7월 3일 100mm가 넘게 폭우가 오는 날 행랑굴을 알았고,  2018년 4월 14~15일 답사팀을 꾸려 상류암터를 찾았다. 2020년 2월 22일~23일 상류암터에 베이스캠프를 설치하고 상류암에서 초령 길을 이었다. 그 후 초령을 넘어 사립재까지 연결하고도 최근에야 초령을 알았다. 초령은 마천에서 삼장으로 넘어가는 고개로 진주독바위와 새봉 사이의 안부이다.

 

 

마천에서 삼장면을 잇는 우마길 초령(1917년 조선의 지형도)

 

박여량은 1610년 9월 7일(양력 10월 23일 土) 상류암을 출발하여 초령을 향한다. 상류암에서 초령까지 박여량의 기록이다. 「상류암으로 가서 아침밥을 먹었다. 내가 피곤하여 잘 걷지 못할까 염려해서 따라온 승려들이 남여(藍輿) 두 대를 구해놓았는데, 하나는 박여승을 위한 것이었다. 남여를 타기도 하고 걷기도 하다가 한 곳에 이르러 쉬었다. 울창한 숲에 넝쿨이 기어오르고 나무 위에 열매(다래)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일행 중 한 승려와 종이 마치 원숭이처럼 나무를 잘 탔다. 그들이 나무 위에 올라가 흔들어 떨어뜨린 열매는 서리를 맞아 매우 달았다. 모두들 실컷 먹었다. 초령(草嶺)을 넘었다. 초령은 함양과 산음(山陰)으로 나뉘는 두 갈래길의 분기점이었다.」

 

문제는 '초령을 넘었다. 이곳은 함양과 산음 두 길의 갈림길이 시작되는 곳(분기점)이다.(踰草嶺 此乃咸陽山陰兩路之所由分也.)'라는 문구이다. 초령의 비밀은 이 문구에 있다. 초령에서 사립재로 가는 길이 새봉 왼쪽으로 숨어있다. 현 등산로의 개념으로 보면 절대 이해하지 못한다. 새봉을 넘어 사립재로 가는 길은 새로 만들어진 길이다. 짚신을 신고 짐을 지고 진행할 수 없다. 상류암에서 올라오면 초령은 함양 마천(추성)으로 가고, 사립재를 넘어 산음 금서(오봉)로 가는 갈림길인 셈이다. 1924년 강계형은 이 길을 역으로 사립재에 사는 친구 치조의 집에서 통천문으로 올라왔다. 박여량은 함양과 산음의 갈림길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초령을 찾고도 1년이 넘어서야 이곳이 초령이라는 것을 알았다. 나의 추론이 틀릴 수도 있다. 길을 연결했지만 그 길이 박여량의 길일 수도 있고, 후에는 약초꾼의 길일 수도 있다.

 

앞에서 기술했지만 초령은 마천과 삼장을 잇는 고개이다. 초령은 새봉에 가려져 잊혀진 이름이 되었지만 마천과 삼장을 연결하는 사람과 가축, 물류가 이동하던 주 통로였다. 새봉 바로 옆에 초령이 있다. 이 고개를 통해 송대마을 박영남 할머니(1938년생, 84세)는 젊었을 때에 송대에서 대원사까지 나물과 약초를 배달했다고 한다. 초령을 넘으면 왼쪽으로 새봉을 비켜서 사립재까지 이어진다. 몇 개의 숯가마터와 숯 집하장이 있고, 좌우로 여러 개의 석굴이 있다. 초령에서 사립재까지는 거의 직선 길이다. 곰샘에서 내려오는 물길을 만나고 우측 사면으로 조금 나아가면 사립재를 만난다. 이 길은 오봉 사람들이 구롱 길로 청이당으로 올라오는 길이다. 이 길을 화개 사람들은 아홉 사리 길이라고도 한다. 사립재를 내려서면 오봉리까지 비교적 평탄한 길이지만 지금은 산죽으로 통행하기가 다소 불편하다. 폐가를 지나 계곡을 건너면 임도가 나타나고 계곡을 다시 건너 조양래 씨 독가에서 오봉마을까지 이어진다. 이곳이 두류산일록에 나오는 방곡의 상계로 추정한다. 이곳의 지적도를 보면 지금은 집이지만 전답으로 되어있다.

 

박여량은 방곡의 상계(오봉리)에서 가마에서 내려 말을 타고 방곡촌을 지난다. 길은 방곡촌에서 자혜리로 이어진다. 총독부가 1913년~1917년에 만든 조선 오만 분지일 지형도(朝鮮五万分之一地形圖)를 보면 그 루트를 짐작할 수 있다. 조선의 지형도에 자혜리에서 지곡동으로 건너는 다리가 지도에 표기되어 있다. 항공사진을 보면 그 지점이 물이 얕은 여울(瀨)이다. 박여량은 '임천을 건넜다[越瀶川]'라고 기록하고 있다. 지금은 도로와 하천이 정비되고 경지 정리가 되었지만 지적도에 옛길이 그대로 살아있다. 박여량은 임천을 건너 신광선의 정자에서 술을 서너순배 마시고 인근에 있는 최함의 계당에서 하룻밤 묵는다. 박여량은 계당의 풍광을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계당은 작은 시냇가에 있는데 시냇물을 끌어다 연못을 만들고, 매화나무∙대나무∙소나무∙국화가 그 주위에 가득했다.' 다음날 좌수 최응회가 아침 대접을 하고 엄뢰대에서 주연을 베푼다. 다음은 엄뢰대에 대한 박여량의 묘사이다.

 

「좌수(鄕廳의 우두머리) 최응회씨가 우리에게 아침 식사를 대접하였다. 최군은 어려서부터 나와 친한 사이였다. 중풍으로 걷기가 어려웠지만 우리들을 위하여 엄뢰대(嚴瀨臺)까지 찾아왔다. 엄뢰대(嚴瀨臺) 아래에는 큰 내가 있었는데 이 내는 두류산에서 흘러 내려온 물이다. 이곳에 이르러 몇 리나 되는 맑은 못을 이루었는데, 물고기를 헤아릴 수 있을 정도로 맑고 배를 타고 다닐 수도 있을 정도로 깊었다. 시험 삼아 대추를 던져보았더니 돌아다니던 물고기가 많이 모여들었다. 물결 위로 유유히 헤엄치는 비단 물고기도 많았다. 야외에 술자리를 마련하고 악기를 연주하며 노래를 시작할 즈음, 강가에는 가랑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마을에는 안개가 갓 피어올라 또 하나의 빼어난 경관을 이루었다.」

 

신광선은 박여량과 두류산 유람을 같이했던 인물이다. 두류산일록에 박여승과 아우 아우 박명계(朴明桂), 사위 노륜(盧腀)이 9월 1일 목동(휴천면 목현리)의 이수의 집에서 자고 지곡(池谷)을 향해 출발했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신광선과 최함, 최응회는 지곡 사람인 듯하다. 다음날 좌수(鄕廳의 우두머리) 최응회가 찾아와 아침을 대접하고 엄뢰대에서 주연을 베풀었다. 함양군지(咸陽郡誌, 1956)에 「엄뢰(嚴瀨)는 군 남쪽 25리에 있다.(지금의 휴천면 동강리) 엄천의 북쪽 물가에 거대한 바위가 우뚝 솟아 저절로 높은 대 모양을 이루고 있는데, 참으로 경치가 아름다운 뛰어난 지경이다.[嚴瀨 增在郡南二十五里(今休川面桐江里) 川之北涯. 巨巖斗起. 自作高臺牀. 眞佳絶之境(天嶺誌)<咸陽郡誌>]」라고 천령지를 인용하여 기록하고 있다. 엄뢰 베리에 2차선 도로가 났지만 중풍에 걸린 좌수 최응회가 다녀갔다면 지곡 마을에서 멀지 않다. 지곡 쪽에 있으면 남아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엄뢰대(嚴瀨臺)는 어디일까. 

 

 

○ 7일(무신 →기유)[1610년 10월 23일 土]

 

상류암으로 가서 아침밥을 먹었다. 내가 피곤하여 잘 걷지 못할까 염려해서 따라온 승려들이 남여(藍輿) 두 대를 구해놓았는데, 하나는 박여승을 위한 것이었다. 남여(藍輿)를 타기도 하고 걷기도 하다가 한 곳에 이르러 쉬었다. 울창한 숲에 넝쿨이 기어오르고 나무 위에 열매(다래)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일행 중 한 승려와 종이 마치 원숭이처럼 나무를 잘 탔다. 그들이 나무 위에 올라가 흔들어 떨어뜨린 열매는 서리를 맞아 매우 달았다. 모두들 실컷 먹었다.

 

초령(草嶺)을 넘었다. 초령은 함양과 산음(山陰)으로 나뉘는 두 갈래길의 분기점이었다. 내려오는 길에 오미자가 많이 보였다. 따라온 자들로 하여금 넝쿨을 뜯고 그 열매를 따게 하고서, 나는 먼저 시냇가의 앉을 만한 반석으로 갔다. 또한 따라온 자들에게 산포도(山葡萄)를 따오게 하고, 나는 반석 위에서 여러 사람들을 기다렸다. 몸을 씻거나 거닐며 소요할 만한 시내와 바위가 어우러진 곳이 한둘이 아니었다.

 

[누락 부분] 방곡의 上溪까지 내려오니 종들이 말을 가지고 와서 기다렸다. 시내에 앉아서 각각 마음을 진정시키는 것을 마치고 남여를 버리고 말을 탔다. [下至方谷之上溪。奴輩以馬來待矣。臨溪而坐。各罷鎭心。舍輿乘馬。].[下至方谷之上溪。奴輩以馬來待矣。臨溪而坐。各罷鎭心。舍輿乘馬。] 방곡촌(方谷村)을 지나는데 마을의 집들은 다 대나무를 등지고 집을 지었으며 감나무로 둘러 싸여있고 인가와 접하였으나 두루 속세를 벗어난 지경과 같았다. [村舍皆負竹爲家。繚以柿木。鷄鳴犬吠。洽一別境也。]임천을 건너[越瀶川]

 

신광선(愼光先)의 정자에 도착하여 술을 서너 순배 마시고, 최함씨의 계당으로 가서 묵기로 하였다. 저녁밥을 차려놓았는데, 동네 여러 벗들이 술과 안주를 가지고 모여들었다. 술을 마시며 환담을 나누다 2경이 되어서 파했다. 계당은 작은 시냇가에 있는데 시냇물을 끌어다 연못을 만들고, 매화나무대나무소나무국화가 그 주위에 가득했다. 최생을 속인이라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내가 보기엔 속된 사람이 아닌 듯하였다. <중략>

 

○ 8일(기유)[1610년 10월 24일 日]

 

좌수(*) 최응회씨가 우리에게 아침 식사를 대접하였다. 최군은 어려서부터 나와 친한 사이였다. 중풍으로 걷기가 어려웠지만 우리들을 위하여 엄뢰대(嚴瀨臺)까지 찾아왔다. 엄뢰대(嚴瀨臺) 아래에는 큰 내가 있었는데 이 내는 두류산에서 흘러 내려온 물이다. 이곳에 이르러 몇 리나 되는 맑은 못을 이루었는데, 물고기를 헤아릴 수 있을 정도로 맑고 배를 타고 다닐 수도 있을 정도로 깊었다. 시험 삼아 대추를 던져보았더니 돌아다니던 물고기가 많이 모여들었다. 물결 위로 유유히 헤엄치는 비단 물고기도 많았다.

 

* 좌수 : 조선 시대, 지방의 행정 단위인 주, , , 현에 두었던 향청(鄕廳)의 우두머리

* 嚴瀨 增在郡南二十五里(今休川面桐江里) 川之北涯. 巨巖斗起. 自作高臺牀. 眞佳絶之境(天嶺誌)<咸陽郡誌>

 

 

야외에 술자리를 마련하고 악기를 연주하며 노래를 시작할 즈음, 강가에는 가랑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마을에는 안개가 갓 피어올라 또 하나의 빼어난 경관을 이루었다. 대체로 이번 유람 중 줄곧 맑다가 이제 비가 내리니, 천신과 산신령이 우리들에게 좋은 일을 많이 베풀어준 줄 알겠다. 일행 중 남쪽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 이곳에서 떠나갔다. 동쪽으로 가는 사람은 나와 정덕옹과 박여승이었는데, 정덕옹은 상사(上舍) 정여계(鄭汝啓)의 집에 남았고, 나와 박여승은 큰 나무가 있는 시냇가에 이르러서 말머리를 돌려 작별하였다. 이 시내는 바로 뇌계(㵢溪, 백운산 발원)의 하류였다. 16일에 척서정(滌暑亭, 수동면 우명리 구라마을)에서 다시 만나 함께 유람한 이야기를 하기로 하였다. 척서정은 남계(灆溪, 덕유산 발원)의 상류에 있다.

 

 

 

 

▶ 덕재 愼孝先(15??~1602)은 거창 신씨의 후손으로 1506년(연산군 12년)에 손곡 마을에서 태어났다. 신효선은 어려서부터 재치 있고 민첩하며 어른을 공경하고 효성이 지극하였다. 추운 겨울에 아버님 병환이 났는데 효선은 끼니도 제대로 잇지 못하면서 병에 좋다는 약은 팔방으로 뛰어다니면서 구해다 드렸다. 병은 차도가 없고 아버지는 입맛이 떨어져 죽순나물과 잉어가 먹고 싶다고 하였다. 효선은 사람의 힘으로는 어쩔 수가 없으니 안타까웠다.

 

효선은 고민하다가 문득 떠오른 것이 정성이 지극하면 하늘도 감동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하여 날씨는 몹시 춥지만 몸을 깨끗이 하고 옷을 단정히 차려입고는 마을 뒤 대밭으로 가서 정성을 다하여 하느님께 간절히 빌었다. 병환 중의 아버님이 죽순나물을 원하오니 아버님의 구미를 돋울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효선이 꿇어앉아 정성을 다하여 빌기를 하루해가 기울고 저물어갔다. 그때에 난데없이 차디찬 회오리바람이 대밭의 백설을 휙 쓸고 지나가더니 효선의 무릎 앞에 한자 가량이나 되는 보들보들한 죽순이 쑥 솟아올랐다고 한다. 그는 집으로 달려와 그 죽순을 삶아서 나물을 해드렸다.

 

그리고 이번에는 잉어를 해 드려야겠다고 생각하고 다음날 아침 엄천강 두리소로 갔다. 물은 꽁꽁 얼어붙어 있었다. 그는 잉어를 잡기 위해 한나절을 도끼로 얼음장을 깨고 잉어를 구했으나 불가항력이었다. 기진맥진 얼음장 위에 쓰러지고 말았다. 비몽사몽간에 천지가 진동하고 천둥소리가 울리면서 얼음장이 갈라졌다. 그러더니 얼음판 위로 싱싱한 잉어가 퍼덕이며 뛰어올라왔다. 효선은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고 잉어를 들고 집으로 가서 쪄서 기쁘게 아버님께 드렸다.

 

그리하여 차츰 건강이 회복되었는데 몇 년 후에 아버님이 노환으로 병석에 누워 돌아가실 날만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겨울에 마을을 지나가던 도인이 아버님의 병환에 풋대추가 약으로 좋다고 하였다. 효선은 그 말을 듣고 기뻤으나 그것도 잠깐 겨울이라 풋대추를 구할 수 없음을 깨닫고 괴로워했다. 며칠을 괴로워하다가 마을 앞 우물가에 있는 대추나무 아래로 갔다. 차디찬 겨울밤 추위를 무릅쓰고 밤새도록 울며 기도하였다. 날이 새고 아침이 되어서 대추나무를 쳐다보니 이 추운 겨울날 풋대추 수십 개가 주렁주렁 열려있었다. 효선의 기쁨은 헤아릴 수 없이 기뻤고 무릎이 닳도록 하느님께 감사의 절을 하고는 그것을 달여 들여서 병세가 호전되었다.

 

그 후 세월이 흘러 효선이도 세상을 떠났는데 마을에서 이 대추나무를 베어다가 다리를 놓았는데 그 이듬해 여름에 비가 많이 와서 이 다리가 떠내려갔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다른 나무는 다 떠내려갔는데 대추나무만은 떠내려가다가 마을 앞으로 거슬러 올라오는 기적을 낳았다. 마을 사람들은 이 광경을 보고 효선의 지극한 효성이 어려 있는 대추나무를 하늘이 알고 떠내려가는 것을 막아주었는데 우리가 천대할 수 없다 하여 대추나무가 섰던 본래의 자리에 단을 쌓고 세웠다. 지금도 그 마을에 가면 조목단이라 하여 신효자 대추나무 단이 있다. (손곡리) 출처 : 함양 문화원

 

愼孝先字百源。居池谷村。以善父母友兄弟。見稱於人。父母有疾。雖流離困頓中。憂悸之色。常在於面。藥餌之物。傍求必致。連遭父母喪。啜粥過哀。遂不起。其葬也。余佐幕本道。哀孝子之無勸。且憐其窮無以入土。發軍窆之。事聞㫌閭。<感樹齋先生文集券之五 雜著 天嶺孝烈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