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자사지(君子寺址)와 진평왕 태자 태실지 소고(小考)
1. 진평왕(眞平王)과 군자사(君子寺)
1684년(숙종 10년) 방장산 승려 형곡(荊谷) 복환(復還)이 쓴 군자사 사적기에 '신라 진평왕(眞平王)이 군자사에 머물며 태자를 낳았고, 이후 환도하면서 머물던 곳을 사찰로 만들어 ‘군자사’라는 사명(寺名)을 지었다. 고려조 1198년에 불일국사(佛日國師)가 상무주암에서 수도를 마치고 송광사로 돌아가는 길에 옛터를 보고 영건(營建)하려다가 이루지 못한 것을 한하였다. 이듬해 1199년 진각국사(眞覺國師)가 이곳에 중창하였다. 이후 다시 흥폐를 거듭하다가 1317년(충숙왕 4)에 혜통(慧通) 화상이 군자사를 중수하였다. 여말선초 왜구의 침략으로 소실된 것을 1404년(태종 4년)에 행호(行呼)대선사가 중창하였다. 1680년(숙종 6년) 선사 순일 운석(淳一 韻釋)이 옛 누각을 중건하였다.'라는 기록이 있다.<1783년 이덕무 청장관전서 군자사 사적(君子寺事蹟)> 『여지도서(輿地圖書. 1757∼1765)』와 『범우고(梵宇攷, 1779)』에 군자사의 존재가 확인되고, 1807년 남주헌의 지리산행기에 군자사의 기록이 마지막으로 보인다. 1832년에 편찬된 『경상도 읍지』에는 ‘지금은 폐지되었다’라고 전하는 것으로 보아 19세기 초 1807년~1832년 사이에 폐사된 것으로 보인다.
가. 위치
군자사 터는 경상남도 함양군 마천면 군자리 산37-2번지 일원 삼정산(1,225m)의 동쪽 사면 말단부 군자마을 내에 있다. 마천면 소재지에서 서쪽의 가흥교를 건너면 바로 군자마을에 도착할 수 있다. 마을 입구가 장승배기로 마을을 지키는 장승이 1990년대까지 있었다.
나. 현황
군자사 터는 남동쪽으로 인접하여 덕전천과 임천의 합류된다는 점을 고려할 때 역원의 기능도 병행하였을 가능성이 크다. 주민들은 1990년대까지 군자마을 내 대밭 속에는 팔각 원기둥꼴 승탑과 당간 지주, 기단석 등이 있었다고 전한다. 민가와 포장도로 등으로 사찰 관련 내용은 확인되지 않는다. 원래 군자사(도마사) 터에 있었던 3기의 승탑은 추성리에 있는 함양 벽송사 삼층석탑 옆으로 옮겨 세워져 있다. 민가를 조성하는 과정에서 고려~조선 시대의 기와 조각들이 다량으로 확인되었다. 지금도 대밭에는 부도 옥개석이 남아 있다. 민가 근처에 탑 군이 장독대 주위에 있고, 민가의 디딤돌로 사용하는 곳이 있다. 승탑 몇 기는 대밭 속에 파묻어 놓았다고 지역민들은 이야기한다. 1980년대 까지만 하여도 군에서 이곳을 관리하는 비용을 군에서 지급하였다고 하나 지금은 없다.
다. 의의와 평가
군자사 터는 남북국시대 산지 승가람의 구조와 변천 과정, 사회 및 경제적 양상을 파악하는 데 중요한 자료를 제공할 것으로 판단된다.
2. 고문헌에 나오는 군자사
군자사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1472년 김종직의 유듀류록에 보이지만, 자세하게 기록된 것은 1530년에 편찬된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이다. 1530년 편찬된 『동국여지승람』은 1481년에 초고본, 1486년에 1차 수찬본, 1499년에 2차 수찬본이 각각 편찬되었고, 1530년에는 증수된 『신증동국여지승람』이 완성되었다. 우리가 읽고 있는 것은 신증동국여지승람 이다.
군자사는 지리산에 있다. 전설에, “신라 진평왕(眞平王)이 왕위를 피해서 여기에 살다가, 태자를 낳아서 나라에 돌아가고, 집은 희사하여 절로 만들었다.” 한다. (君子寺. 在智異山 俗傳新羅眞平王避位居此. 生太子還國. 捨家爲寺.),<신증동국여지승람> |
진평왕(567~632)은 신라 제26대 임금으로 진흥왕(540~576)의 태자 동륜(銅輪)의 아들이고 진흥왕의 장손 자이다. 576년 진흥왕이 서거하자 차자(次子) 진지왕이 즉위한다. 동륜(銅輪) 태자의 아들인 진평왕은 경주를 떠나 함양 마천 영정사로 피신한다. 이때 진평왕의 나이가 10살이다. 579년 진지왕이 폐위되고 화백회의를 비롯한 조정의 추대로 왕위에 오른다. 진평왕이 이곳에서 왕자를 낳아서 579년 잠저시 별궁을 군자사(君子寺)라는 이름으로 창건하였다고 한다.
진지왕(眞智王, ?~579)은 신라의 제25대 임금으로 진흥왕의 둘째 아들이다. 성은 김(金)이며, 이름은 사륜(舍輪) 또는 금륜(金輪)이다. 태자인 동륜(銅輪)이 572년(진흥왕 33)에 죽었기 때문에 태자의 아들이 있었지만 거칠부의 세력에 힘입어 왕위에 올랐다. 삼국유사에는 정란과 황음으로 인해 폐위되었다고 전한다. 재위 기간은 576년~579년이다. 579년 죽어 시호를 진지(眞智)라고 하고 영경사 북쪽에 장사 지냈다.
1586년 양대박의 두류산기행록에 '음산한 행랑채는 반쯤 무너졌고 불전은 적막하여 예전의 군자사가 전혀 아니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유람객들이 연이어 찾아오고 관청의 부역이 산더미처럼 많아 군자사가 퇴락하였음을 언급하고 있다. 양대박은 '가혹한 정치의 폐단이 산속에서 걸식하는 승려들도 백성들과 마찬가지로 부역에 시달리니, 살을 깎는듯한 고통으로 금수라도 면치 못할 것이다.'라며 탄식하고 있다.
음산한 행랑채는 반쯤 무너졌고 불전은 적막하여 예전의 군자사가 전혀 아니었다. 내가 괴이하게 여겨 그 까닭을 물으니 승려가 얼굴을 찡그리며 말하기를 “유람객들이 연이어 찾아오고 관청의 부역이 산더미처럼 많으니, 중들이 어찌 줄어들지 않을 것이며, 절이 어찌 옛 모습 그대로 보존될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고서, 손가락을 꼽아가며 관청에서 시키는 부역을 헤아리며 그 까닭을 낱낱이 말하였다. 아! 가혹한 정치의 폐단이 이 지경까지 이르렀는가? 산속에서 걸식하는 승려들도 백성들과 마찬가지로 부역에 시달리니, 살을 깎는듯한 고통은 금수(禽獸)라도 면치 못할 것이다. |
1610년 9월 2일 박여량은 군자사에서 1박을 하였는데, 감수재의 기록은 너무나 사실적으로 묘사했다. 군자사에서 '박명부가 술이 너무 취해 기생의 치마 속에 손도 넣지 못했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감수재의 시각에서 일행들의 몰상식한 행동에 촌철살인을 한 것이다. 군자사의 기록은 10여 편의 유람록에 나오는데, 지리산을 유람하는 관리와 유생들의 숙소 역할을 하였다. 조일전쟁(임진왜란)이 끝난 후인데도 관리와 사족들의 적폐가 극심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 9월 2일, 군자사는 옛 이름이 영정사(靈淨寺)이다. 신라 진평왕이 즉위하기 전에 어지러운 조정을 피해 이 절에 와 거처하였다. 그때 아들을 낳게 되어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다고 한다. 안국사(安國寺)도 이때에 그 이름을 얻은 듯하다. 전란을 겪은 뒤에 중창한 것은 법당∙선당(禪堂)∙남쪽 누각뿐이다.(君子者. 古之靈凈寺也. 新羅眞平王避亂居此寺生子. 因改以今名. 其曰安國寺者. 亦因其時而得此稱歟. 戰兵火之後. 所重刱者. 法堂禪堂南樓而已.)<1610년 박여량의 두류산일록> |
1611년 유몽인의 유두류산록에서 군자사에 대한 기록이다. 박여량은 군자사의 옛 이름이 영정사라고 한데 반해 군자사 앞에 영정(靈井)이 있어서 영정사라고 하였다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설명하고 있다. 대신 진평왕과 태자의 출생에 대해서 아예 언급하지 않고 있다. 영정사에서 군자사로 이름을 바꾼 이유를 모르겠다고 하는데, 진평왕과 태자의 출생에 대해 믿기지 않았던 듯하다.
○ 4월 2일, 저물녘에 군자사(君子寺)로 들어가 잤다. 이 절은 들판에 있는 사찰이어서 흙먼지가 마루에 가득하였고 선방(禪房) 앞에 모란꽃이 한창 탐스럽게 피어 있어 구경할 만하였다. 절 앞에 옛날 영정(靈井)이 있어 영정사(靈井寺)라 불렀다. 지금은 이름을 바꿔 군자사라고 하는데, 가져온 뜻이 무엇인지 모르겠다.(暮投君子寺. 寺野刹也. 埃氛滿堂. 獨牧丹對禪房方敷榮. 可賞. 寺前舊有靈井. 號靈井寺. 今改以君子. 未知取何義也.)<1611년 유몽인의 두류산록> |
1643년 박장원은 유두류산기에서 군자사에 대하여 동국여지승람의 기록을 좇았다. 영정사에서 군자사로 이름을 바꾼 것은 진평왕이 이곳에서 아들을 낳았기 때문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다고 설명하고 있다. 법당과 건물에 대한 설명도 구체적이다. '절의 법당과 건물들이 모두 웅장하고 화려하였다.' '삼영당에 청허(淸虛), 사명(四溟), 청매(靑梅) 세 대사의 초상화가 있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전란이 끝난 후 사세를 회복한 것으로 이해가 된다. 1680년 송광연의 두류록에서는 영정사에서 군자사로 이름을 바꾸었는데 무엇을 근거해서 군자사로 바꾸었는지 의문을 표기하고 있다.
저녁 때 군자사(君子寺, 현 함양군 마천면 군자리)에 이르렀다. 이 사찰의 본래 이름은 영정사(靈井寺)였었는데, 신라 진평왕이 이곳에서 아들을 낳았기 때문에 사찰 이름을 군자사로 고쳤다고 한다.’ 사찰 건물들이 모두 웅장하고 화려하였다. 서쪽에 있는 삼영당(三影堂)은 새로 지은 건물인데, 노란 빛과 푸른 빛을 곱게 발하고 있었다. 그 안에는 청허·사명·청매 세 대산의 초상화가 있었다. 촛불을 들어 비추어보니 부드러운 음성이 들리는 듯하였다. 그 중 사명대사는 머리를 깎지 않았는데, 머리가 길고 아름다웠다. 정말로 잘 생긴 남자였다. |
1783년 이덕무 청장관전서 군자사 사적(君子寺事蹟)에 계묘년(1783) 6월 23일에 나는 아들 광류(光霤)와 함께 두류산(頭流山) 구경을 가서 군자사(君子寺)에서 묵었다. 이 절의 사적(事蹟)을 적은 현판이 걸려 있기에 이를 줄여서 적는다. 청장관전서 69권에 나오는 이덕무의 글은 사근역 찰방으로 있을 때에 군자사에 와서 사적기 현판의 내용을 옮긴 것이다. 현판 사적기 말미에 '강희 23년(갑자, 1684)에 방장산 승려 형곡 복환이 쓰다.'라는 기록이 있다. 이덕무는 동사(東史)에 진평왕이 후사가 있었다는 기록이 없는데 군자사라고 명명한 것이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고 부정하고 있다.
천령의 남쪽 50리쯤에 지리산이 있고, 지리산의 동쪽 기슭 아래 큰 시냇가에 군자사가 있다. 진 대건(태건) 11년(579 무술(578) 신라 진평왕(579~632 재위) 이 잠저 시절 왕위를 피하여 여기에 살다가 태자를 낳고서 서울로 돌아갔다. 드디어 그 집을 희사하여 절로 만들고 이것으로 이름 지었다. 그 뒤로 여러 번 병화를 만나 흥폐를 거듭하였다.(天嶺之南五十許里。有智異山。智異之東麓下大溪邊。有君子寺。陳大建十一年戊戌。新羅眞平王潛邸。避位居此。因生太子而還國。遂捨家爲寺。以是名焉。自爾厥后。荐遭兵燹。或興或廢。) 동사(東史)를 상고하건대, 진평왕(眞平王)은 후사가 없는데 지금 '이곳에서 태자를 낳고 인하여 군자사라고 명명하였다.' 하였으니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 |
1790년 이동항(李東沆)의 방장유록(方丈遊錄)에 '군자사는 신라 진평왕 왕비의 원당이다. 이 절에 머물 때 태자를 낳았기 때문에 군자사라고 하였다. 나라에 바치는 벌꿀과 각종 공물을 바치는데 그 액수가 매년 증가하여 승려들이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절반 이상 도망갔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군자사는 신라시대에 창건된 왕비의 원당이었다. 왕비가 이 절에 머물 때 태자를 낳았다. 그래서 절 이름을 군자사라 하였다고 한다. 듣자니, 이 산 속에 사는 사람들은 수십 년 전부터 벌꿀과 각종 공물을 바치는데, 그 액수가 매년 증가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다른 곳으로 절반이 넘게 도망쳤다. |
1807년 남주헌의 지리산행기에 군자사의 사세가 기울고 퇴락하였음을 알 수 있다.
군자사(君子寺)로 항하였는데, 이 절은 들판에 있다. 승려들이 합장을 올리며 동구 밖까지 나왔으니, 그것은 내가 함양군수로서 왔기 때문이다. 절이 매우 퇴락하여 내가 부임한 후에 승려들이 조금 모여 들었다. 사찰의 산수와 종소리・경쇠소리는 쌍계사나 칠불암에 비해 한참 못한 듯하였다. |
1833년경 편찬된 「경상도읍지」에 '지금은 폐지되었다.'라는 기록으로 미루어 폐사된 시기를 짐작할 수 있다. 진평왕의 태자에 대한 기록은 俗傳(속전)으로 받아들이면 그만이다. 의문을 가질 이유는 있지만 진위를 고증할 수는 없다. 군자사에 대한 기록은 1571년 양경우, 1651년 오두인, 1767년 홍씨, 1807년 하익범의 유람록 등에 나오는데 진평왕에 대한 내용이 없어서 참고 자료에서 제외했다.
3. 영정사(靈井寺) 우물터
군자사(君子寺)에 관한 기록에는 영정사(靈井寺)에 대한 기록이 있다. 1611년 유몽인의 유두류산록에 영정(靈井)에 대한 기록이 보인다. 영정(靈井)은 글자 그대로 신령스러운 샘이다. 현지 주민들의 말에 의하면 군자마을에 다섯 군데의 우물터가 있었다고 한다. 군자사 주위로 높은 산이나 계곡이 없는데 수량이 풍부하다. 1601년에서 1604년 함양군수를 지낸 고상안(高尙顔, 1553-1623) 태촌 집(泰村集)에 ‘군자사 아래 우물이 있고 우물가에 미나리꽝이 있다. 옛날부터 개구리가 없다.’라는 흥미있는 기록이 있다.
고상안은 우물의 발원처에 응황(雄黃, 광물질)이 있어 그렇다는 내용을 소개하고 있다. 필자의 생각으로는 수온이 너무 낮아 개구리가 살 수 있는 환경이 아닌가 추측하지만, 고상안의 말대로 맞는지는 모르겠다. 군자사로 앞에 있는 영정은 매립되어 그자취를 찾을 수 없는 것이 안타깝다. 현재 남아 있는 우물은 농업용수로 쓰이고 있다. 지금은 군자 마을 위에 군자 저수지가 있고 마을 입구에 작은 저수지가 있다. 현재 마을 입구에 있는 작은 저수지는 물을 저장하는 용도보다 물을 데우는 역할을 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군자사(君子寺)는 함성(含城) 치소 남쪽에 있다. 곧 두류산 서북쪽의 기슭이다. 절 아래 우물이 있고 우물가에 미나리 밭이 있다. 옛날부터 개구리가 없다. 어떤 이는 우물의 발원처에 웅황(雄黃:광물, 살충제)이 있기 때문에 그렇다고 하였다. 옳은지 여부는 모르겠다. 대체로 사물의 이치는 깨달을 수 없는 것이 많다. 이를테면 영가(永嘉:안동) 성안에 모기가 없는 것이나 상주(尙州) 사불산(四佛山)에 칡이 없는 것과 같은 것이 그것이다. 《泰村集 제5권》 함양군수(1601-1604) 고상안(高尙顔, 1553-1623) 지음 |
군자사는 규모가 큰 절이었다. 군자마을 앞 세미들은 사찰 소유의 들로 여겨진다. 소작농에게 세(稅)를 받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마을 뒷들은 애편들(아편들)이라고 하였다. 군자사에서 이곳에 양귀비를 재배한 것으로 지역 주민들은 이야기한다. 지금의 우물은 두 곳만 사용하고 있고 세 군데는 폐쇄되었다. 군자사(君子寺)지 바로 앞 미나리꽝 위에 있는 우물은 지금도 딸기 재배 하우스의 농업용수로 사용하고 있다. 이 우물에서 나오는 물의 수량이 얼마인지 짐작이 간다. 1960년대에 군자사 절터로 여겨진 입구에 절을 지키는 수장문이 있었고 본체 및 아래채를 목재로 절 모습 그대로 보존되어 민가로 사용하고 있었다. 아래채는 그 후 대왕재 밑에 이축하여 절을 지었으며 언제 소멸하였는지 알 수 없으나 민가로 변하였다. 지금도 군자사(君子寺)지에 살았던 분들의 후손이 군자마을에 살고 있다.
4. 당흥(堂興) 마을 태봉(胎封)지와 마애석각 명문
태봉(胎封)은 왕실의 태(胎)를 봉안하는 태실 중에서 그 태의 주인이 왕으로 즉위하면 태실을 봉하는 제도. 왕실에서는 아기가 새로 태어나면 그 태를 소중하게 취급해 전국에서 길지(吉地)를 골라 태실을 만들어 안태 하였다. 태봉에는 태실을 중심으로 사방 300보(540m) 안에는 경지를 개간하는 행위를 금하며, 만약 위반하는 사례가 발생하면 국법에 따라 엄벌하게 되어 있다. 태실의 역사를 마치면 토지신에게 보호를 기원하는 고후토제(告后土祭)·태신안위제(胎神安慰祭)·사후토제(謝后土祭) 등의 제례를 치른다. 태실의 주위에 금표(禁標)를 세워 채석·벌목·개간·방목 등 모두 행위를 금지한다. 금표를 세우는 범위는 신분에 따라 차이가 있다. 왕은 300보(540m), 대군은 200보(360m), 기타 왕자와 공주는 100보(180m)로 정하였다.
가. 마천 당벌(堂伐)마을 태실지 추정 마애석각 명문
옛날 민간에 전해 내려온 이야기에 '신라 진평왕이 이산에 들어왔을 때 봉토를 허락하여 이곳을 차지하였다 그 후 주민들이 모두 땅에 대하여 입을 다물었다.'라고 한다.
古諺傳眞平王入此山時聽封次占此而其后居人皆以噤地云
이 석각은 언제 명문 하였는지 알 수 없다. 군자사와 안국사 그리고 금대암이 주변에 있다. 지금 안국사나 금대암, 등구사 오도재를 다닐 때 당벌(堂伐) 마을 이곳을 지나다녔다. 주위에 있는 사찰들이 모두 신라시대 때 창건된 것으로 추정된다. 옛날에는 마애석각 주변에 마을이 형성 되었다고 한다. 지금은 흔적만 남아 있을 뿐이다.
나. 진평왕 왕자 태실지에 관한 구전
지난해 12월 5일 당흥마을에 사시는 김수태(92세) 어르신을 뵙고 태실지에 관한 구전을 채록하였다. 김수태 어르신은 1929년생(현 92세) 본관은 김해 아호는 문성당(文星堂). 명(名)은 수태(守泰) 당호(堂號)는 일자문성당(一字文星堂)이다. 어르신은 탁영 김일손 선생의 후손으로, 선대에 경북 청도에서 남원으로, 12대조께서 인월로 이거(移居)하였고, 7대조께서 마천 당흥 부락에 정착하였다. 조부께서는 한말 과거에 급제하여 사헌부 감찰을 지내셨다. 어르신의 장자 김○신(54년생)씨는 약관에 행정고시에 합격하여 건설교통부에서 정년을 하셨다. 손자는 육군사관학교를 나와 얼마 전에 대령으로 진급했다고 한다. 일자문성당의 당호에 맞게 벼슬이 끊어지지 않는 집안이다. 어른께서는 서당에서 천자문과 소학을 읽으시고 함양 향교에서 사서삼경을 공부하셨다고 한다.
신라 진평왕 태자 태실지에 대해서 말씀하신 내용이다. 당흥 마을 진평왕 태자 태봉이 있다. 태봉은 구전으로 전한다. 동으로는 금대암이 있고 서쪽으로는 안국사가 있는데 그 길목에 있다. 이 길이 절에서 절로 다니는 옛길이다. 옛날에는 태봉 인근에 마을이 형성되어 있었다고 한다. 봄이 되면 마을 사람들이 임천 강변에서 모여서 화전놀이를 했다. 남자들은 임천에서 천렵도 하고, 여자들은 음식을 준비하여 마을 잔치를 열었다. 그런데 술을 마시고 주민들끼리 싸워 사람이 죽는 사고가 발생했다. 이런 일이 해마다 거듭되자 마을 어른들이 회의를 하여 마을을 아랫동네로 옮기게 되었다. 터의 기운이 강해서 마을 주민들의 성정이 포악해진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언제인지는 확실하지 않고 선대로부터 전해오는 이야기라고 하셨다. 금대산(金坮山)의 다른 이름은 금태산(金台山)으로 금성(金星)을 상징한다. 또 다른 이름은 금마대(金馬坮)로 방장제일문 명문 시에도 나타나 있다. 금마는 왕이 타는 말이다. 금마라는 지명은 전북 익산에도 있는데 백제 왕궁터 인근에 있다. 내 추측으로는 마을이 옮기는 시점에 향계(鄕契)에서 금표를 새긴 듯하다. 당벌(堂伐)이라는 지명에서 당은 사당을 뜻한다.
태봉의 추정 위치에는 현재 진주 강씨 묘가 있다. 진주 강씨는 이 지역에서 명망이 높은 가문이다. 노강정하양박(盧姜鄭河梁朴)에서도 으뜸이다. 묘를 쓴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조선이 무너진 한말이나 일제 강점기일 가능성이 크다. 무덤을 쓸 때 땅을 파니 처음에는 물이 나오고 더 깊이 파니 부처가 나왔다고 한다. 부처는 진주 강씨 집안에서 가지고 갔다. 이 이야기는 선대로부터 전해지는 이야기이다. 석각 명문이 있는 곳에 대숲이 우거지고 이끼가 끼어 어르신이 이끼를 제거하고 능소화를 심고 가꾸셨다고 한다. 마을을 이전할 당시 당흥 부락 동계(洞契)에서 금표(禁標)로 석각을 새긴 것으로 추정한다. 금대사 아래 하금대가 있는데 절터라는 말씀도 하셨다. 금대암이 상금대이다. 하금대에 어렸을 때 소 풀 뜯기러 그곳에 자주 갔다. 그곳에 불두(佛頭) 한쪽이 깨진 석불이 있었다. 맷돌도 있었다. 서산대사가 이곳에 머물렀다고 전한다. 그 석불은 오래전에 없어졌다고 한다.
진평왕(567~632)은 신라 제26대 임금으로 진흥왕(540~576)의 태자 동륜(銅輪)의 아들이고 진흥왕의 장손 자이다. 576년 진흥왕이 서거하자 차자(次子) 진지왕이 즉위한다. 동륜(銅輪) 태자의 아들인 진평왕은 경주를 떠나 함양 마천 영정사로 피신한다. 이때 진평왕의 나이가 10살이다. 579년 진지왕이 폐위되고 화백회의를 비롯한 조정의 추대로 왕위에 오른다. 진평왕이 이곳에서 왕자를 낳아서 579년 잠저시 별궁을 군자사(君子寺)라는 이름으로 창건하였다고 한다. 진평왕의 왕자 출생과 군자사, 태실지의 석각 명문이 연결고리이다. 당흥 부락 김수태 어르신은 진평왕의 태자 태봉으로 말하고 있다. 오래전 태실지 부근에 마을이 있었던 것은 일자문성이 보이는 높은 곳에 마을이 형성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5. 땅벌(堂興) 마을 유래
가홍리는 마천면의 소재지가 있는 마을로 면의 각 기관이 모여 있고 오일장이 지금도 서고 있는 곳으로 마천면의 중심지이다. 1914 년 일제가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당흥(堂興) 마을과 가채(佳採)마을을 합해서 가채의 가자와 당흥의 흥자를 따서 가흥리라고 이름을 붙였다.
땅벌(堂興) 마을이라고 하는 말은 순수한 우리말로 당벌인데 경상도 발음으로 땅벌이라고 불러왔다. 한자어로 당벌(堂伐)은 당집이 있는 벌이라는 뜻이다. 지금도 당집의 흔적이 있다. 이곳에서 1960년대까지만 하여도 이곳에서 당산제를 지냈다. 금대암으로 가는 길을 당산 골목이라 한다. 마을이 형성되기 전 아주 옛날 당 할머니를 섬기고 사는 몇 사람이 생활하던 것이 차차 인가가 불어나서 마을로 형성하게 되었다. 뻘건 벌판이라는 뜻도 들어있는데 인가가 없었던 옛날에는 전답도 없어서 황폐한 벌판이었었다. 마을 앞들을 당 앞들이라고 부른다. 옛날에는 당산 골목 위에 마을이 형성되었으나(현재 상수도 물탱크 위쪽) 마을의 잦은 사고로 인하여 웃어른들이 마을을 아래로 옮기었다.
마천면 내의 당집은 당벌(堂興) 마을과 백무동 입구에(현재 고불사) 있었다. 특히 백무동 당 할머니는 큰 바위 밑에 조그맣게 석상으로 모셔져 있는데 연중 소원을 비는 기도원들이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모여들고 있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당 할머니를 섬기는 지극한 신도가 기도원을 건축하리라는 말이 있어 지금은 고불사라는 사찰로 변하였다. 천왕 할머니를 모시는 당집은 1472년 김종직 선생의 지리산 기행문이나 1489년 김일손 선생의 속두류록에도 기록되어 있으며 성모사 여신에게 제문을 지어 날씨가 쾌청하여서 주기를 빌었다는 대목이 있다. 성모사는 지리산 정상에 있는 당집이다. 마을 동쪽에는 무당이 굿을 하다가 빠져 죽었다고 하는 무당 소가 있고 상투바위 지네바위가 동서로 나란히 있으며 마을 북쪽에 산짓골이 있는데 이곳은 매년 정월 초삼일에 산신제를 지내기도 했다.
가홍리에 있는 안국사는 신라 태종 3년에 창건한 것으로 되어 있다. 창건자는 행오조사라고 하며 절 뒤에는 부대 화상 탑이 있고 앞에는 행오조사의 부도가 있다. 이곳에서 난세를 평정하고 국태민안을 빌었다고 해서 안국사라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해방 후 소실되고 산신각만 남아있었다. 2002년 태풍 루사로 일부 부지가 소실 되었으나 복원되어 안국사가 중창되었다. 안국사의 산 등을 넘으면 금대암이 있다. 전설에 의하면 뒷산의 큰 바위가 밤중에 굴러 넘어지면서 부처님의 영기로 피하여 옆으로 굴러졌다고 하는 설이 있다. 6·25동란으로 소실된 것을 금대암 복구 기성회가 조직되어 지난날의 모습을 되찾았다. 금대암 삼층석탑은 유형문화재 34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 탑은 기단부가 없이 암반 위에 바로 탑이 세워진 것이 특징이다.
가치래미(佳採) 마을은 마을로 형성되기 전에 가채암이라는 큰 암자가 있었다고 한다. 마을 앞을 지나 강청마을로 가는 길가 논들을 한 절들이라고도 한다. 한 절이란 큰 절 즉 대사찰이라는 뜻이다. 논들 입구에 있는 한절보 개설 공적을 기리는 송덕비에도 대사평보(大寺坪湺)라고 적혀있다. 사찰의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으나 한 절들이나 가채마을 어느 곳을 파도 기왓장은 나온다고 한다. 당시에는 큰 절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마을 형성은 큰 절로 인하여 오래되었다고 생각되나 조선 인조 때 김해김씨가 순천 형성되었다고 추측되며 조선 인조 때 김해김씨가 와서 살았고 영조 때에 달성배씨가 담양에서 왔으며 경주정씨가 엄천에서 와서 살았다는 기록이 있다. 가채암은 세월이 오랫동안 흐름에 따라 그 이름이 변음되어 가치램이로 변화되었다고 본다. 조선 숙종 때 밀양박씨 경종 때 경주김씨 순조 때 청주한씨 철종 때 진주강씨나 김해김씨 고종 때 광산김씨들이 입촌 정착했다.
6. 군자(君子) 마을 유래
군자리는 남원시 산내면에서 들어오면 우측 강 건너 금대산을 마주하고 있는 동리다.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개편으로 군자마을과 도마(都馬)·[도만(桃滿)]마을, 그리고 외 마천(外馬) 등 세 마을을 합쳐서 이루어진 행정 동리이다. 군자(君子) 마을은 신라 26대 진평왕이 왕자를 낳고 신라로 돌아갈 때 진평왕의 집을 군 자사라 하고 그 주위를 군자마을이라 불렀다 한다. 그러나 진평왕이 아들이 있었다는 기록은 없다. 전설인지 사실인지는 확인할 수 없고 그의 딸이 여왕이 되었다. 진평왕이 서라벌로 돌아갈 때 왕이 거처하던 집을 궁실을 사찰로 만들어서 군자사라고 이름하였다 한다. 마천면 내에서 가장 오래된 사찰이 아니었나 싶다. 지금은 그 절이 없어졌지만, 탑신의 파편이 흩어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당흥마을 뒷산 지리면당설 천마시풍(地理明堂說 天馬嘶風)의 바람재를 지나 조금 오르면 태봉(胎封)이란 조그마한 산이 있는데 바위 밑에서 아들을 낳아 그 태를 묻었다 하여 한자로 글을 돌에 새겨놓았다. 마천교에서 군자마을로 들어가는 입구를 장승배기라고 한다. 옛날 군자사 절이 크게 발전하던 시절에 장승을 길 양편에 세워두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마을 동쪽에는 개구리처럼 생긴 개구리 봉이 있고 개구리를 잡아먹는 뱀의 형국인 배암날 모퉁이가 있다. 개구리봉 옆에 황새봉이 있다. 뱀이 개구리를 잡아먹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황새가 뱀을 쫓는 형국이라 한다.
도마(都馬) 마을은 도만(桃滿)마을이라고도 부른다. 복숭아꽃이 만발한다는 뜻이다. 도마마을 뒤 계곡 따라 조금만 올라가면 복숭아나무 골이라고 부르는 곳이 있다. 이곳이 복숭아나무 자생지로 적합한 곳이다. 옛날 복숭아나무가 가득히 나서 무성하여 봄날이 따뜻하면 이곳에서 떨어진 복사꽃 꽃잎이 계곡물에 가득히 떠내려왔다고 한다. 그야말로 도원경이다. 그래서 도만이 골이라고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그런데 행정구역 개편 시에 마천에서 으뜸가는 수도마을이라 하여 도마천(都馬川)이라고 하였다 하는데, 그 후에 줄여서 도마라고 했다.
이 마을은 6·25동란 때 인민재판이 열리기도 하였으며, 마을 뒤로 산내면 약수암과 실상사를 바로 연결되는 산길이 있다. 청주한씨의 정착촌이기도 하다. 또 마을 입구 강변에 아담하게 지어놓은 경치가 아름다운 정자가 있는데 그 정자의 현판이 도원정(桃源亭)이라고 되어 있다. 마을 서쪽에는 50여 명이 들어갈 수 있는 나한 굴이 있고 냇가에는 부연정(釜淵亭)이 있다. 부연정은 듬붓소에 가마솥을 넣어 백두산의 기가 일본으로 가는 것을 막아준다고 한다. 군자로 넘어가는 소목재가 있다
7. 맺는말
잊혀가는 우리 문화와 역사는 그 지역의 생명이다. 어렴풋이 우리 조상들이 살아왔든 이야기를 우리 후손들이 재미있게 보아주길 바란다. 특히 신라 시대에 진평왕이 지리산 마천에 왔었다는 이야기는 마천의 불교문화와 더불어 조선 시대의 선비들이 이곳을 찾은 배경 그리고 그들이 남긴 문헌은 마천의 크나큰 문화유산이다. 지리산 마천고을은 천왕봉의 천왕 할머니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천왕봉을 바라보고 지은 사찰들이 대부분이다. 진평왕도 지리산을 찾은 배경도 여기에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천왕 할머니에 관한 이야기도 신라 시대에 제사를 나라에서 지냈다는 기록은 흥미롭다. 당벌 마을에 당집을 지어 제사를 지낸 곳이 잘 보전되어 있다. 엄천사, 당벌과 백무동에서 천왕 할머니를 모셔놓고 당집을 만들어 천왕봉에 기도를 가지 못하면 이곳에서 제사를 지냈다는 것은 우리가 잊혀가는 문화가 아닌가 생각된다. 특히 진평왕의 부인이 마야부인이라는 내용은 지리산 성모에 관한 전설에도 있다. 성모상도 이 시대부터 모신 것으로 추정된다. 지금도 마천면에는 매년 천왕축제를 열린다. 천왕대신과 백모대신 이야기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이루어진 문화로서 마천의 소중한 문화가 될 것이다.
군자마을의 우물터는 영정사(靈井寺)에서 내려온 것으로 이러한 전설은 군자마을의 샘물의 귀중한 문화로 만들어야 한다. 당벌마을과, 군자마을, 도마마을은 군자사와 안국사 금대암을 중심으로한 신라시대에 진평왕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보여진다. 또한 이곳은 지리산 자락길의 초입으로 당흥마을 앞산과 마천소재지를 둘러보고 도마 다랭이논을 거처 군자사와 운학정(雲鶴亭)을 1일 관광 코스로 만들면 농촌 관광의 활성화로 도마마을의 다랑논 개발사업에 함양군은 지속 가능한 농촌 관광의 새로운 마천이 되리라 본다. 이에 따라 군자사지(君子寺址)의 영정(靈井)을 복원하여 관광 자원화한다면 살기 좋은 군자마을로 발전할 것이다.
덕선천-덕전천 입니다 . 사진 첨부 태실지 군자부락 도마부락 다락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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