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11년 유몽인의 유두류산록에 나오는 혈암
1. 1611년 유몽인의 유두류산록
지난 고려 말 왜장 아기발도(阿只拔都)가 많은 병사를 거느리고 영남 지방을 침략하였는데, 그가 향하는 곳은 모두 견디지 못하고 무너졌다. 그 나라의 참위서(讖緯書:비결서)에 “황산에 이르면 패하여 죽는다.”라고 하였는데, 산음(山陰) 땅에 ‘황산(黃山)’ 이란 곳이 있어 그 길을 피해 사잇길로 운봉 땅에 들이닥친 것이다. 그때 우리 태조(太祖) 강헌대왕(康獻大王)께서 황산(荒山)의 길목에서 기다리다 크게 무찌르셨다. 지금까지 그 고을 노인들이 돌구멍을 가리키며, ‘옛날 깃발을 꽂았던 흔적’이라고 한다. 적은 군사로 감당하기 어려운 적과 싸워 끝없는 터전을 우리에게 열어주셨으니, 어찌 단지 하늘의 명과 인간의 지모 이 둘만을 얻어서이겠는가? 그 땅의 형세를 살펴보면 바로 호남과 영남의 목을 잡는 형국이다. 길목에서 치기에 편한 것이, 바로 병가(兵家)에서 말하는 ‘적은 수로 많은 수를 대적하는 방법’이다.지난 정유년(1597년, 선조 30년) 왜란 때, 양원(楊元) 등은 이 길을 차단할 줄 모르고 남원성을 지키려다 적에게 크게 패하고 말았다. 이 어찌 땅의 이로움을 잃어서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비석 곁에 혈암(血巖)이 있었는데 이 고을 사람들이 말하기를,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 이 바위에서 피가 흘렀는데, 끊이지 않고 샘처럼 솟아났다. 이 사실을 서울에 알렸는데 답변이 오기도 전에 왜적이 남쪽 변경을 침범하였다’라고 하였다.
昔麗朝末. 倭將阿只拔都擧大衆寇嶺南. 所向無堅壘. 其國有緯書曰. 到荒山敗死. 山陰有黃山. 以此避其路. 間道趨雲峯. 時我 太祖康獻大王. 徼荒山之隘. 大敗之. 至今故老指石窠. 謂建旗古跡. 蓋提單師. 敵難當之賊. 以肇我無疆之基. 豈但天命人謀两得之. 度其地勢. 正扼湖嶺咽喉. 夫控隘得便. 乃兵家寡敵衆之道也. 頃者丁酉之亂. 楊元輩不知截此路. 欲守南原城. 其致挫衂. 豈非失地利而然乎. 碑之傍有血巖. 邑民稱壬辰難未作. 是巖自流血. 如泉不絶. 事聞京師未返. 倭已寇南邊矣.
注 양원(楊元, 미상~1598) :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에 참전한 명나라 장수. 남원성 전투에 3천의 병력을 이끌고 참전. 여기서 양원은 남원성의 조선군, 주민들이랑 합심하여 일본군에 필사적으로 맞서 싸웠으나 결국엔 패하고, 남원성이 함락될 때 기병 50명을 데리고 성을 탈출. 이 때문에 명군에 붙잡혀 경리(經理, 총사령관) 양호(楊鎬)에 의해 패전의 죄를 물어 군법에 따라 처형됨.
2. 이수광(李睟光, 1563~1629)의 芝峯類說卷二 地理部
운봉(雲峯) 팔랑현(八良峴)에 血巖(피바위)가 있는데, 이것은 태조가 왜장 발도(拔都)를 쳐 죽인 곳으로 돌 위에 얼룩진 피가 지금까지 생생하다. 임진년에 바위에서 피가 맺혀 흐르고, 왜적이 왔으니 괴이한 일이다.
雲峰八良峴。有血巖。乃我太祖勦殲拔都之地。石上斑血。至今若新漬。壬辰歲。巖血流而倭寇至。怪矣。
3. 조희일(趙希逸, 1575~1638)의 竹陰集 卷之六 七言律詩 血巖注
혈암(血巖) 팔랑치 앞 바위에 혈흔 얼룩이 있는데 태조대왕이 왜적을 무찌른 곳이다.
血巖 八良嶺前巖。有血痕斕斑。卽太祖鏖賊處也。
注 조희일(趙希逸, 1575~1638) : 본관은 임천(林川). 자는 이숙(怡叔), 호는 죽음(竹陰) 또는 팔봉(八峰). 조선시대 예조, 형조참판, 승문원제조, 경상감사 등을 역임한 문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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