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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3년 진주성 함락과 의병장 변사정의 부장 이잠(李潛)

도솔산인 2021. 10. 15. 09:32

1593년 진주성 함락과 의병장 변사정의 부장 이잠(李潛)

 

1. 燃藜室記述卷之十六 宣祖朝 晉州城陷阴兵撤還

 

○ 二十九日賊陷晋州。倡義使金千鎰與其子象乾。慶尙右兵使崔慶會。忠淸兵使黃進。(以上三人三忠祠于晉陽) 全羅復讎大將高從厚。右義兵副將高得賚。左義兵副將張潤。義兵副將李潛。靈光義將沈友信。泰仁義將閔汝雲。海南義將任希進。陶灘伏兵將姜希甫。義兵將李繼璉。金海府使李宗仁。泗川縣監金俊民。藍浦縣令宋悌。本州府使徐禮元。義兵將姜熙說。金海縣令曹慶亨。判官崔琦弼。佐郞梁山璹(숙)。主簿柳復立等。皆死之。(忠淸守令之從兵使死者多不記)

 

1593년 6월 29일(음) 왜적이 진주성을 함락하였다. 창의사 김천일(金千鎰, 1537-1593)과 그의 아들 김상건(金象乾), 경상도우병사 최경회(崔慶會, 1532-1593), 충청병사 황진(黃進, 1550-1593), 전라복수대장 고종후(高從厚, 1554-1593), 우의병부장 고득뢰(高得賚), 좌의병부장 장윤(張潤, 1552-1593), 의병부장 이잠(李潛, 1561년~1593년), 영광의장 심우신(沈友信, 1544-1593), 태인의장 민여운(閔汝雲, ?-1593), 남해의장 임희진(任希進), 도탄 복병장 강희보(姜希甫), 의병장 이계연(李繼璉), 김해부사 이종인(李宗仁), 사천현감 김준민(金俊民),  감포현령 송제(宋悌), 본주(진주)부사 서예원(徐禮元), 의병장 강희열(?)(姜熙說), 김해현령 조경형(曹慶亨), 판관 최기필(崔琦弼), 좌랑 양산숙(梁山璹), 주부 유복립(柳復立) 등이 모두 진주성에서 죽었다.

 

○ 時金千鎰領兵三百進。領七百。慶會領五百。從厚領四百。潤領三百。繼璉領百餘。邊士貞遣其副將李潛領三百。汝雲領二百。二十二日賊大至。分陣於開慶院。山腰及鄕校前路。交戰城中死殺三十餘人。賊歛兵退。初昏又進大戰二更退。三更又進五更退。射殺不知其數。

 

때에 창의사 김천일(金千鎰)이 군사 300을 거느리고 진주성에 들어가고, 700명을 거느리고, 경상도우병사 최경회(崔慶會)가 500명, 전라복수대장 고종후(高從厚)가 400명, 충청병사 황진(黃進)이 300명, 의병장 이계연(李繼璉)이 100여명, 변사정(1529~1596)이 그의 부장 이잠(李潛)을 보내 300명 거느리게 하고, 태인의장 민여운(閔汝雲)이 200명을 거느렸다.  6월 22일 적이 크게 이르러 개경원에서 진을 나누었다. 산 허리와 향교 앞에서 교전을 하여 성안에서 (적병) 30여명을 사살하였다. 왜적이 병을 물리기를 바라였으나 초저녁에  쳐들어와서 크게 싸우고 2更에 물러갔다. 3更에 또 쳐들어왔다가 5更에 물러났다. 사살한 적병이 부지기수였다.

 

 

2. 조경남(趙慶男, 1570~1641)의 난중잡록 2(亂中雜錄二)

 

○ 敵愾義兵將邊士貞。領軍向京。先是士貞以單騎馳謁鄭澈。澈許以軍官李潛使爲副將。士貞與之同還。以爲其副。至是行至公州。因體察使分付。還向沃川。留兵討賊。

 

○ 적개의병장(敵愾義兵將) 변사정(邊士貞)이 군사를 거느리고 서울로 향했다. 이보다 먼저 사정(邊士貞)이 단기(單騎)로 달려가 정철을 보았더니, 정철이 군과 이잠(李潛)을 내주며 부장으로 삼게 하였다. 변사정(邊士貞)이 더불어 같이 돌아와서 부장으로 삼았다. 이때에 이르러 행군하여 공주까지 이르렀다가 체찰사의 분부로 인하여 돌아와 옥천으로 가서 군사를 주둔하고 적을 토벌하다.

 

○ 二十九日。賊兵陷晉州。倡義使金千鎰。慶尙右兵使崔慶會。忠淸兵使黃進。以上三人爲三忠其後八年建三忠祠于晉陽祀之 全羅復讎大將高從厚。右義兵副將得賚。左義兵副將張潤。敵愾義兵副將李潛。靈光義將沈友信。泰仁義將閔汝雲。海南義將任希進。陶灘伏兵將姜希甫。▣▣義將李繼璉。金海府使李宗仁。泗川縣監金俊民。藍浦縣令宋悌。知州徐禮元等。皆死之。忠淸守令從兵使死者甚多而名不記 賊連日屠戮不能盡。詐曰。避入司倉大庫者免死云云。愚民被迫。競入庫舍。賊一炬燒之。南原人從諸義兵。入晉城者。三百餘名。自南江泳出生還者。鄭麒壽等數人而已。賊盡毀城濠。軍死之數詳見下文 方賊入城。崔慶會金千鎰走保矗石樓上。將士咸集。賊兵厮殺以進。李潛金俊民等弓矢已盡。直以竹槍相對搏戰。賊兵暫不能近。竟力詘而死。千鎰等相抱投江溺死云。

 

29일. 적병이 진주를 함락시키다. 창의사(倡義使) 김천일, 경상 우병사 최경회, 충청 병사 황진 이상 3인은 삼충(三忠)이라 하는데 그 뒤 8년 만에 진주에 삼충사(三忠祠)를 세워 제사지내다. 전라 복수 대장 고종후(高從厚)ㆍ우의병 부장 고득뢰(高得賚), 좌의병 부장 장윤, 적개 의병 부장(敵愾義兵副將) 이잠(李潛), 영광 의장(靈光義將) 심우신(沈友信), 태인 의장(泰仁義將) 민여운(閔汝雲), 해남 의장(海南義將) 임희진(任希進), 도탄 복병장(陶灘伏兵將) 강희보(姜希甫), □□의장 이계련(李繼璉), 김해 부사(金海府使) 이종인(李宗仁), 사천 현감(泗川縣監) 김준민(金俊民), 남포현령(藍浦縣令) 송제(宋悌), 진주 목사 서예원 등이 다 죽다. 충남 수령을 따라온 병사 중에 죽은 이가 심히 많으나, 이름을 다 기억하지 못한다. 적이 매일 죽여도 다 죽이지 못하자, 속이기를, “사창대고(司倉大庫)에 피란하여 들어가는 자는 죽음을 면한다. 운운” 하였다. 어리석은 백성들이 협박을 당하여 앞다투어 창고에 들어갔더니 적이 한번에 불을 질러 태워 죽이다. 남원 사람으로 여러 의병을 따라 진주성에 들어갔던 자가 3백여 명인데 남강(南江)으로부터 헤엄쳐 나와 살아 돌아온 사람은 정기수(鄭麒壽) 등 두어 사람뿐이었다. 적이 성과 참호를 다 헐어버리다. 군사의 죽은 수효는 아래에 상세히 보인다. 적이 바야흐로 성에 들어올 때에 최경회ㆍ김천일이 달아나 촉석루(矗石樓)에 오르매 장수와 군사들이 다 모였다. 적병이 죽이며 나아오는데 이잠ㆍ김준민 등은 화살이 이미 다되어 바로 죽창을 가지고 육박전으로 싸우매, 적병이 잠시 가까이 오지 못하였으나 마침내 힘이 다되어 죽었다. 천일 등은 서로 안고 강에 떨어져 죽었다 한다. <출처 : 고전번역원>

 

 

▶ 이잠[李潛, 1561년(명종 16)~1593년(선조 26)]

 

요약 조선시대 선무원종공신 2등에 책록된 공신. 무신. 자는 원인(原仁). 효령대군(孝寧大君) 이보(李?)의 7대손이며, 선공시(繕工寺) 감역(監役) 이태빈(李台賓)의 아들이다.

 

무과에 급제하여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도체찰사 정철(鄭澈)의 막료로 있었는데, 적개의병장(敵愾義兵將) 변사정(邊士貞)이 이잠의 현명함을 듣고 청하자 부장이 되었다. 처음에는 부하들이 잘 따르지 않았으나, 신상필벌(信賞必罰)을 강화하고 사졸과 고락을 함께 하니 사람들이 점차 이에 복종하였다.

 

이듬해 진주성의 위급함을 듣자 주위의 만류를 뿌리치고 300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나아가, 황진(黃進) 등과 더불어 싸우다가 성의 함락과 함께 전사하였다. 1600년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2등에 서훈되고 통정대부 병조참의 적개의병장에 추증되었으며, 진주의 창렬사(彰烈祠)에 제향되었다.

 

참고문헌

・ 『선조실록(宣祖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진양읍지(晋陽邑誌)』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변사정(邊士貞, 1529~1596)

 

본관은 장연(長淵). 자는 중간(仲幹), 호는 도탄(桃灘). 이항(李恒)의 문하에서 수업하였다. 1583년 학행(學行)으로 천거되어 경기전참봉(慶基殿參奉)이 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남원에서 2,000여 명의 의병을 모집, 정염(丁焰)·양사형(楊士衡) 등에 의하여 의병장으로 추대되었다.

 

체찰사(體察使) 정철(鄭澈)이 비장(裨將) 이잠(李潛)을 보내어 변사정의 부장(副將)이 되게 하였다. 그때 순찰사 권율(權慄)이 수원 독산성(禿山城)에서 구원을 청하자 의병장 임희진(任希進)과 함께 이를 구출하였으나, 정철의 권유로 호남을 지키기 위하여 옥천으로 내려와 상수·선산 등지에 주둔하고 황길·창원·함안·성주·대구 등지에서 적을 무찔렀다.

 

1593년 제2차 진주성싸움에서 재외운량장(在外運糧將)에 추대되어 산음(山陰)에 가서 병곡 수백 석을 구하여 겨우 진주성에 운반하였으나 곧 성이 함락되었다. 선조에게 중흥책(中興策)을 상소하기도 하였으며, 1595년에는 첨정(僉正)으로 승진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정유재란 때 남원성이 함락되자 정염이 “변사정이 있었다면 적이 어찌 여기까지 이르렀겠는가?”라고 하였다 한다.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에 추증되고,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에 녹훈(錄勳)되었으며, 전라북도 운봉(雲峰)의 용암서원(龍巖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도탄집(桃灘集)』이 남아 있다.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