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六友堂記/점필재길

1472년 김종직의 유두류록 점필재길 길라잡이(2)

도솔산인 2020. 1. 16. 22:59

 

1472년 김종직의 유두류록 점필재길 길라잡이(2)

 

 

2. 천왕봉에 오르다[고열암-천왕봉]

 

8월 15일 날씨 흐림, 고열암 요주(寮主)(*)가 '오늘은 필시 비가 오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하여 담부(擔夫, 짐꾼)를 일부 돌려보내고 고열암 중에게 시 한 수를 남기고 출발한다.

 

* 요주(寮主) : 선사(禪寺)의 소임(所任). 요원(寮元)을 보좌(補佐ㆍ輔佐)하는 소임(所任)으로, 한 달ㆍ반 달ㆍ10일씩 교대함.

 

 

贈古涅僧(고열암 중에게 주다)

 

求名逐利兩紛紛 : 명예를 구하고 이익을 좇는 일 둘 다 어지러우니

緇俗而今未易分 : 지금은 승려와 속인을 분간하는 것이 쉽지 않구나

須陟頭流最高頂 : 모름지기 두류산의 최고봉 천왕봉에 올라보게나

世間塵土不饒君 : 세간의 흙먼지는 그대를 배부르게 하지 못한다네

 

紛紛 : 어지럽다. : 검은옷치, 승복치, 승려, 중치

 

고열암에서 쑥밭재로 이어지는 상 허리 길인 아홉 모랭이(구롱) 은 골로 몇 걸음 내려서서 너덜지대를 지나 언덕 바위 위로 조금 올라서면 산죽밭으로 희미하게 길이 나타난다. 허리 길을 따라가면 점필재가 언급한 도사목(倒死木)의 약작(略彴, 통나무 다리)이 있었던 건 계곡을 건너 대형 숯 가마터에 닿는다. 경사지를 가로질러 능선에 오르면 향로봉에서 벽송사로 이어지는 등달 길을 만난다. 경사지 길은 오래 묵어 흙이 많이 흘러내려 길의 흔적이 희미하다. 첫 번째 등달[일강(一岡, 벽송사 능선]을 넘으면서, 안내한 승려 해공이 점필재에게 '구롱(九隴) 중 첫 번째입니다.'라고 설명하였다. 이곳에서 미타봉과 소림선방이 바로 지척에 있다.

 

 

의논대에서 바라본 일강과 미타봉

 

고열암과 일강 구간 전망대에서 바라본 미타봉

 

일강(一岡)에서 사립재골 방향 상 허리길로 진입하면, 길은 완만하게 이어지고 숯가마터를 만난다. 여기에서 아래로 진행하다가 너덜길을 건너고 사립재골 집터를 지나 사립재골 상부인 동부(洞府)에 닿는다. 동부(洞府)는 사립재골 고원지대의 습지 주변을 말한다. 유두류록에 '그 동쪽은 산등성이인데 그리 험준하지 않았고, 그 서쪽으로는 지세가 점점 내려가는데, 여기서 20리를 더 가면 의탄촌(義呑村)에 도달한다. 만일 닭과 개, 소나 송아지(鷄犬牛犢)를 데리고 들어가서 나무를 깎아내고 밭을 개간하여 기장, , , 콩 등을 심어 가꾸고 산다면 무릉도원(武陵桃源) 보다 그리 못하지는 않을 듯했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동부(洞府)는 도교에서 '신선이 사는 곳'으로 '너덜이 없고 평탄하고 넓은 지형으로, 마을을 형성하여 사람이 농사를 짓고 살 수 있는 곳'을 말한다.

 

여기에서 나오는 구롱(九隴)의 의미도 새롭게 이해할 필요가 있다. 글자 그대로 풀이하면 '아홉 언덕'이지만 순수한 우리말인 '아홉 모롱이(아홉 모랭이)'를 한자로 한역한 어휘이다. '아홉 모롱이'는 사투리로 '아홉 모랭이', 또는 '아홉 모래이', '아홉 모티이'라고도 하는데, '산기슭의 쏙 내민 귀퉁이'라는 의미이다. ()(언덕부)+龍(용용, 언덕롱)으로 '용의 형상처럼 구불구불한 산모롱이 언덕 길'을 뜻한다. 순수한 우리말인 '모롱이'를 롱()으로 기록하고 그것을 다시 우리말로 번역하면서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지금에 와서 생각하니 등산의 개념에서 생각한 산길의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것이 그 한계였다. 산촌 사람들의 생활길은 가축(牛犢, 소나 송아지)을 끌고 또는 짐을 지고 이동하기 때문에 가장 편안한 길이어야 하고, 시간과 거리 또한 단축해야 하니 시간과 공간의 개념이 혼합(混合)된 지혜가 들어있다고 볼 수 있다.

 

김종직 선생이 동부(洞府)에서 청이당에 이르는 길도 상 허리길인 구롱(九隴) 길을 이용하였다. 모롱이를 돌 때마다 연이어 실 계곡이 나오고 너덜지대는 돌을 깔아 포장을 하였으며, 쓰러진 고목나무와 거대한 바위가 그림처럼 즐비하게 펼쳐진다. 집터를 지나 어름터에서 옹암(독바위)으로 오르는 능선을 넘어 같은 고도에서 평탄한 지형으로 상 허리길은 계속 이어진다. 송대 마을 지인(知人)의 전언(傳言)에 따르면 '그 길은 독녀암에서 시작하여 쑥밭재로 이어지는데, 지금도 산 아래 마을 주민들이 나물을 뜯을 때 가끔 왕래하는 길'이라고 한다.

 

 

동부(洞府)구롱(九隴), 방장문(方丈門), 소림선방(少林禪房) 관련 자료

 

1. 김종직의 유두류록에 나오는 동부(洞府)와 구롱(九隴) : blog.daum.net/lyg4533/16488278

2. 점필재의 구롱(아홉 모롱이) 길 방장문 석각 발견(200516)blog.daum.net/lyg4533/16488315

3. 김종직 선생의 유두류 기행시 의논대에 나오는 소림 선방 : blog.daum.net/lyg4533/16488289

 

 

 

여덟 모랭이 방장문 석각
방장문 석각

구롱(九隴) 길은 어름터에서 쑥밭재로 오르는 길과 연결된다. 마지막 구롱(九隴)은 쑥밭재로 올라오는 길과 동부 능선이 만나는 부근으로 추정한다. 점필재는 이곳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아홉 고개(모랭이)를 다 지나고 산등성이를 따라 걸어가니 지나는 구름이 갓을 스쳤다. 풀과 나무들은 비가 내리지 않았는데도 젖어 있었다. 그제야 비로소 하늘과 멀지 않음을 알았다. 몇 리를 못 가서 산줄기가 갈라지는데, 그 산등성이를 따라 남쪽으로 가면 바로 진주 땅이다. 안개가 자욱하여 주위를 조망할 수 없었다. 청이당(淸伊堂)에 도착하였는데, 판자로 지은 집이었다. 네 사람이 당 앞의 시냇가 바위를 차지하고 앉아 조금 쉬었다.김종직 선생은 상 허리길로 구롱(九隴)를 지나 쑥밭재를 넘어 청이당에 닿는다. 청이당 앞 계석에서 쉬고 하봉 옛길을 따라 영랑대(유두류록에는 영랑재)소년대(하봉)해유령(하봉 헬기장)선암중봉마암(중봉샘)천왕봉에 오른다. 김종직 선생의 유두류록에서 마암중봉샘이다.

 

申時(오후 3시~5시)에 천왕봉에 오르자 구름과 안개가 일어나 사방이 어두워져 중봉도 보이지 않았다. 길을 안내한 승려 해공과 법종이 성모묘(聖母廟)에 들어가 날이 개이게 해달라고 예불을 드리자, 김종직 선생도 손발을 씻고 의관을 정제한 후 사당에 들어가 술과 과일을 올리고 축문을 읽으며 제를 지낸다. 그러나 바람이 더욱 거세지고 기온이 급격히 떨어져 솜옷을 껴입는다. 잠시 달빛이 보이다가 이내 구름 속으로 사라지고 광풍이 휘몰아친다. 8월 15일은 아침부터 날씨가 흐리고 바람이 불었으며 구릉(새봉)에 올라갔을 때 운무가 갓을 스치고 지나가 이슬이 맺혔다고 기록하고 있다. 영랑대에 올랐을 때는 중봉과 천왕봉이 잠시 열렸으나, 상봉에서 날씨로 인해 한가위 달맞이를 하고자 했던 점필재의 계획은 차질을 빚는다. 김종직 선생은 일행 네 사람과 비좁은 사당에서 하룻밤을 留하며 당시의 상황과 심경을 7언율시『中秋天王峯不見月(중추절 천왕봉에서 보름달을 보지 못함)로 남긴다. (성모당의 위치는 후일 사진으로 첨부하겠음)   

 

☞ 코스 : 고열암 -첫 번째 구롱(一岡)-세 번째 구롱(洞府)-아홉 번째 구롱(쑥밭재)-청이당-영랑재(영랑대)-소년대(하봉)-해유령-선암-중봉-마암-천왕봉-성모당

 

 

中秋天王峯不見月(중추절 천왕봉에서 보름달을 보지 못함)

 

抽身簿領陟崔嵬 : 공무에서 잠시 벗어나 높은 산에 올랐는데

剛被良辰造物猜 : 좋은 날 조물주 강한 새암을 받는구나.

霧漲寰區八紘海 : 운무는 천지에 넘쳐서 팔방(팔굉)이 바다이고

風掀巖萬搥雷 : 바람이 바위에 몰아쳐 뇌성벽력을 치네.

勝遊天知難繼 : 천왕봉 달맞이 놀이(승유) 계속되기 어려워

淸夢瓊臺未擬回 : 경대의 맑은 꿈(천왕봉 달맞이) 다시 함을 헤아리지 못하겠네.

時有頑雲暫成罅 : 때때로 무지막지한 구름 잠시 틈을 만들지만,

誰能月滿懷來 : 누가 능히 보름달을 취해 가슴에 품고 올 수 있으리?

 

위의 푸른색 글자는 고전번역원은 , ,  , 모 한시 카페에는 , , 로 나와 있는데 8구는 로 생각되고 나머지는 두자는 전체적인 의미에서 큰 차이가 없다.

 

 

미타봉에서 독녀암까지 전체를 와불산(와불의 형상)으로 보고 향로봉(?)

향로봉에서 경상도 방언 구개음화 현상으로 상내봉이 되었는데, 향로봉의 위치는 과연 어디일까? 부처님 얼굴이 미타봉인데 미타봉을 상내봉이라고 이름한 이유는 무엇일까.

 

 

전체가 와불산(사진 지리의 은자님)

 

새봉 너럭바위

 

옹암(甕巖) 진주독바위(김종직은 옹암과 새봉을 크게 우회하여 쑥밭재로 올라간다. )

 

점필재가 쉬어간 계석
1610년 감수재 박여량이 점심을 먹은 행랑굴/1871년 배찬은 마암/1877년 허유는 개운암이라고 함.

 

 

 

 

영랑재/영랑봉/영랑대/영랑참

 

 

☞ 유람록에 보이는 영랑대에 대한 명칭

유람록 영랑대 비고
1    1472년 김종직 선생의 유두류록 영랑재(永郞岾)  
2    1586년 양대박 선생의 두류산기행록 영랑봉(永郞峯)  
3    1611년 유몽인 선생의 유두류산록 영랑대(永郞臺) 랑현(郞峴)-장편고시
4    1823년 김선신 선생의 두류전지 영랑참(永郞站)  
5    1849년 민재남 선생의 산중기행   기이한 명승

 

소년대(하봉)
선암

 

 

중봉샘(80년대 초 김경렬 선생이 붙인이름)
김종직 선생의 유두류록에 나오는 마암

 

 

♣ 관련 자료 링크

 

가. 청이당(淸伊堂) 관련 선인들의 유람록 : http://blog.daum.net/lyg4533/16488100

나. 지리동부 행랑굴과 마암의 묵서 개운암 이야기 : http://blog.daum.net/lyg4533/16487748

다. 영랑대(永郞臺) 관련 유람록과 기행시(181006) : http://blog.daum.net/lyg4533/16488115

라. 소년대(少年臺) 관련 유람록과 기행시(181006) : http://blog.daum.net/lyg4533/16488103

마. 해유령(蠏踰嶺)&선암(船巖) 관련 선인들의 유람록 : http://blog.daum.net/lyg4533/16488185

 

 

☞ 위 내용은 저의 주관적인 생각으로 오류가 있을 수 있습니다.

 

 

2. 천왕봉에 오르다[고열암-천왕봉]

 

15, 기묘일.

새벽에는 날이 더욱 흐려졌는데, 요주가 말하기를, “빈도(貧道)가 오랫동안 이 산에 거주하면서 구름의 형태로써 점을 쳐본 결과, 오늘은 필시 비가 오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그래서 나는 기뻐하며 짐을 싸는 인원을 줄여서 돌려보내고 절에서 나와 곧바로 푸른 등나무 덩굴이 깊숙이 우거진 숲속으로 나아갔다. 큰 나무가 저절로 말라 죽어 좁은 길에 넘어져 있으면서 외나무다리 역할을 하였는데 절반쯤 썩어 있는 가지가 그래도 땅을 지탱하고 있어 행마(行馬)와 같은 모습이여서, 머리를 숙이고 그 밑으로 지나갔다. 그리하여 한 언덕을 지나니, 해공이 말하기를, “이것이 아홉 고개, 바로 구롱(九隴) 가운데 첫 번째입니다.”

라고 하였다. 이어서 세 번째, 네 번째 언덕을 지나 한 동부(洞府)를 만났는데, 지경이 넓고 조용하고 깊고 그윽하며, 수목들이 태양을 가리고 등나무 덩굴이 덮이고 얽힌 가운데 계곡 물이 돌에 부딪혀 굽이굽이 소리가 들렸다. 그 동쪽은 산등성이인데 그리 험준하지 않았고, 그 서쪽으로는 지세가 점점 내려가는데 여기서 20리를 더 가면 의탄촌(義呑村)에 도달한다. 만일 닭과 개, 소나 송아지를 데리고 들어가서 나무를 깎아내고 밭을 개간하여 기장, , , 콩 등을 심어 가꾸고 산다면 무릉 도원(武陵桃源)보다 그리 못하지는 않을 듯했다. 그래서 내가 지팡이로 계곡의 돌을 두드리면서 유극기를 돌아보고 이르기를, “, 어떻게 하면 그대와 함께 은둔(隱遁)하기를 기약하고 이곳에 와서 노닐 수 있단 말인가?” 라고 하고는, 그에게 바위의 한가운데에 이끼를 긁어내고 이름을 쓰도록 하였다.

[원문]

己卯黎明益陰翳寮主云貧道久住此山以雲卜之今日必不雨余喜减擔夫遣還出寺卽行蒼藤深菁大木之自斃者顚仆于磎徑因爲略彴其半朽者枝條猶拒地若行馬然挽出其下度一岡空云九隴之第一也連度三四得一洞府寬閑奧邃樹木蔽日蘿薜蒙絡溪流觸石曲折有聲其東山之脊也而不甚峭峻其西地勢漸下行二十里達于義呑村也若携鷄犬牛犢以入刊木墾田以種黍稌麻菽則武陵桃源亦不多讓也余以杖叩澗石顧謂克己曰嗟乎安得與君結契隱遁盤旋於此耶使之刮苔蘚題名于巖腹

 

구롱(九隴)을 다 지나서는 문득 산등성이를 타고 가는데, 가는 구름이 나직하게 삿갓을 스치고, 초목들은 비를 맞지 않았는데도 축축이 젖어 있으므로, 그제서야 하늘과의 거리가 멀지 않음을 알았다. 이로부터 몇 리 가지 않아 등성이를 돌아 남쪽으로 가면 바로 진주(晉州) 땅이다. 그런데 안개가 잔뜩 끼어서 먼 곳을 바라볼 수가 없었다. 청이당(淸伊堂)에 이르러 보니 지붕이 판자로 만들어졌다. 우리 네 사람은 각각 청이당 앞의 시내 바위를 차지하고 앉아서 잠깐 쉬었다. 이로부터 영랑재(永郞岾)에 이르기까지는 길이 심하게 가팔라서, ‘봉선의기(封禪儀記)’에서 말한, “뒷사람은 앞사람의 발 밑을 보고, 앞사람은 뒷사람의 정수리를 보게 된다.”는 것처럼, 나무뿌리를 부여잡아야만 비로소 오르내릴 수가 있었다. 그래서 이미 한낮이 지난 뒤에서야 비로소 영랑재로 올라갔다. 함양(咸陽)에서 바라보면 이 봉우리가 가장 높아 보이는데, 여기에 와서 보니, 다시 천왕봉(天王峯)을 올려다보게 되었다. 신라(新羅) 때 화랑(花郞)의 우두머리였던 영랑이 3천 명의 무리를 거느리고 산과 물을 찾아 노닐다가 일찍이 이 봉우리에 올랐었기 때문에 이렇게 이름 한 것이다.

[원문]

九隴便由山脊而行行雲低拂篢子草樹不雨而濕始覺去天不遠也不數里循脊南乃晉州之地也烟霧瀰漫不能眺望淸伊堂以板爲屋四人各占堂前溪石上小憩自此至永郞岾道極懸危正如封禪儀記所謂後人見前人履底前人見後人頂攀挽樹根始能下上日已過午始登岾自咸陽望此峯最爲峻絶到此則更仰視天王峯也永郞者新羅花郞之魁領三千徒遨遊山水甞登此峯故以名焉

 

소년대(少年臺)는 봉우리가 곁에 있어 푸른 절벽이 만 길이나 되었는데, 이른바 소년이란 혹 영랑의 무리가 아니었는가 싶다. 내가 돌의 모서리를 안고 아래를 내려다보니, 곧 떨어질 것만 같았다. 그래서 종자(從者)들에게 절벽 난간에 가까이 가지 말도록 주의를 주었다. 이 때 구름과 안개가 다 사라지고 햇살이 내리비추자, 동서의 계곡들이 모두 환하게 트여 여기저기를 바라보니, 모두가 삼나무, 노송나무, 소나무, 녹나무로 그 중 3분의 1이나 말라 죽어 뼈만 앙상하게 서 있었다. 간간이 마치 그림처럼 단풍나무가 섞여 있었다. 그리고 등성이에 있는 나무들은 바람과 안개에 시달려서 가지와 줄기가 모두 왼쪽으로 치우쳐 주먹처럼 굽었으며 잎이 거세게 나부끼었다. 승려가 말하기를, “여기에는 잣나무海松가 더욱 많으므로, 이 고장 사람들이 가을철마다 잣을 채취하여 공물로 충당하는데, 금년에는 잣이 달린 나무가 하나도 없으니, 만일 정한 액수대로 다 징수하려 한다면 우리 백성들은 어찌 하겠습니까? 수령께서 마침 보았으니, 이것은 다행한 일입니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여기에는 곳곳에 서대초(書帶草)와 같은 풀이 있었는데, 부드럽고 질기면서 매끄러워 이것을 깔고 앉거나 누울 만하였다. 청이당 이하에는 오미자나무 숲이 많았지만, 이곳은 오미자나무는 없고, 다만 땅두릅獨活과 당귀(當歸)만이 있었다.

[원문]

少年臺在峯側蒼壁萬尋所謂少年豈永郞之徒歟余抱石角下窺若將墜也戒從者勿近傍側時雲霧消散日脚下垂山之東西谿谷開豁望之無雜樹皆杉檜松枏槁死骨立者居三之一往往間以丹楓正如圖畫其在岡脊者困於風霧枝榦皆左靡拳曲雲髮飄颺海松尤多土人每秋採之以充貢額今歲無一樹帶殼苟取盈則吾民奈何守令適見之是則幸也有草類書帶柔韌而滑可藉以坐臥在在皆然淸伊以下多五味子林密而到此無之只見獨活當歸而已

 

해유령(蟹踰嶺)을 지나면서 보니 곁에 선암(船巖)이 있었는데, 법종(法宗)이 말하기를, “상고 시대에 바닷물이 산릉(山陵)을 넘쳐흐를 때 이 바위에 배를 매어두었는데, 방게螃蟹가 여기를 지나갔으므로 이렇게 이름 한 것입니다.”하였다. 그래서 내가 웃으며 말하기를, “그대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때의 생물들은 모두 하늘을 부여잡고 살았단 말인가?” 라고 하였다. 또 등성이의 곁을 따라 남쪽으로 중봉(中峯)을 올라가 보니, 산중에 융기하여 봉우리가 된 것들은 모두가 돌로 되었는데, 유독 이 봉우리만이 위에 흙을 이고서 단정하고 장중하게 자리하고 있으므로, 발걸음을 자유로이 뗄 수가 있었다. 여기에서 약간 내려와 마암(馬巖)에서 쉬는데, 샘물이 차고 맑아서 마실 만하였다. 가뭄이 들었을 때, 사람을 시켜 이 바위에 올라가서 마구 뛰며 배회하게 하면 반드시 비를 얻게 되는데, 내가 지난해와 금년 여름에 사람을 보내서 시험해 본 결과, 자못 효험이 있었다.

 

[원문]

蠏踰嶺傍有船巖宗云上古海水懷襄時船繫于玆巖而螃蠏過之故名余笑曰信汝之言其時生類盡攀天而活耶又並脊南登中峯山中凡隆起爲峯者皆石獨此峯戴土而端重可以布武焉稍下步馬巖有泉淸冽可飮値歲旱使人登此巖蹈躪便旋則必致雷雨余前年及今夏遣試之頗驗

 

 

신시(申時)에야 천왕봉을 올라가 보니, 구름과 안개가 성하게 일어나 산천이 모두 어두워져서 중봉(中峯) 또한 보이지 않았다. 해공과 법종이 먼저 성모묘(聖母廟)에 들어가서 소불(小佛)을 손에 들고 날씨가 개이게 해달라고 외치며 희롱하였다. 나는 처음에 이를 장난으로 여겼는데, 물어보니 말하기를, “세속에서 이렇게 하면 날이 갠다고 합니다.”라고 하였다. 그래서 나는 손발을 씻고 관대(冠帶)를 정제한 다음 석등(石磴)을 잡고 올라가 사당에 들어가서 술과 과일을 올리고 성모에게 다음과 같이 고하였다. “저는 일찍이 선니(宣尼)가 태산(泰山)에 올라 구경했던 일 과 한자(韓子)가 형산(衡山)에 유람했던 뜻을 사모해 왔으나, 직무에 얽매여 소원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이번 중추(仲秋)에 남쪽 지경에 농사를 살피다가, 높은 봉우리를 쳐다보니 그 정성이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진사(進士) 한인효(韓仁孝), 유호인(兪好仁), 조위(曺偉) 등과 함께 구름 사다리雲梯를 타고 올라가 사당의 밑에 당도했는데, 비구름의 귀신이 빌미가 되어 운물(雲物)이 뭉게뭉게 일어나므로, 황급하고 답답한 나머지 좋은 때를 헛되이 저버리게 될까 염려하여, 삼가 성모께 비나니, 이 술잔을 흠향하시고 신통한 공효로써 보답하여 주소서. 그래서 오늘 저녁에는 하늘이 말끔해져서 달빛이 낮과 같이 밝고, 명일 아침에는 만리 경내가 환히 트여서 산과 바다가 절로 구분되게 해 주신다면 저희들은 장관(壯觀)을 이루게 되리니, 감히 그 큰 은혜를 잊겠습니까.” 제사를 마치고는 함께 신위(神位) 앞에 앉아서 술을 두어 잔씩 나누고 파하였다. 그 사옥(祠屋)은 다만 3칸으로 되었는데, 엄천리(嚴川里) 사람이 고쳐 지은 것으로, 이 또한 판자 지붕에다 못을 박아놓아서 매우 튼튼하였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바람에 날릴 수밖에 없었다.

[원문]

晡時乃登天王峯雲霧蓊勃山川皆闇中峯亦不見矣空宗先詣聖母廟捧小佛呼晴以弄之余初以爲戲問之俗云如是則天晴余冠帶盥洗捫石磴入廟以酒果告于聖母曰某甞慕宣尼登岱之觀韓子遊衡之志職事羈纏願莫之就今者仲秋省稼南境仰止絶峯精誠靡阻遂與進士韓仁孝兪好仁曺偉等共躡雲梯來詣祠下屛翳爲祟雲物餴餾遑遑悶悶恐負良辰伏丐聖母歆此泂酌報以神功致令今日之夕天宇廓然月色如晝明日之朝萬里洞然山海自分則某等獲遂壯觀敢忘大賜酹已共坐神位前酒數行而罷祠屋但三間嚴川里人所改創亦板屋下釘甚固不如是則爲風所揭也

 

두 승려가 그 벽()에 그림을 그려 놓았는데, 이것이 이른바 성모(聖母)의 옛 석상(石像)이란 것이었다. 그런데 눈썹과 눈, 쪽머리髻鬟에는 모두 분대(粉黛)를 발라놓았고 목에는 갈라진 틈이 있으므로 그 사실을 물어보니 말하기를, “태조(太祖)가 인월역(引月驛)에서 왜구(倭寇)와 싸워 승첩을 거두었던 해에 왜구가 이 봉우리에 올라와 그 곳을 찍고 갔으므로, 후인이 풀을 발라서 다시 붙여놓은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그 동편으로 움푹 들어간 석루(石壘)에는 해공 등이 희롱하던 소불(小佛)이 있는데, 이를 국사(國師)라 호칭하며, 세속에서는 성모의 음부(淫夫)라고 전해오고 있었다. 그래서 또 묻기를, “성모는 세속에서 무슨 신()이라 하는가?” 라고 하니, 대답하기를, “석가(釋迦)의 어머니인 마야부인(摩耶夫人)입니다.”라고 하였다. ! 이런 일이 있다니. 서축(西竺)과 우리나라는 천 개 백 개의 세계(世界)로 막혀 있는데, 가유국(迦維國)의 부인이 어떻게 이 땅의 귀신이 될 수 있겠는가? 내가 일찍이 이승휴(李承休)제왕운기(帝王韻記)를 읽어보니, ‘성모가 선사를 명했다聖母命詵師라는 주석에 이르기를, “지금 지리산의 천왕(天王)이니, 바로 고려 태조(高麗太祖)의 비()인 위숙 왕후(威肅王后)를 가리킨다.” 라고 하였다. 이는 곧 고려 사람들이 선도 성모(仙桃聖母)에 관한 말을 익히 듣고서 자기 임금의 계통을 신격화시키기 위하여 이런 말을 만들어낸 것인데, 이승휴는 그 말을 믿고 제왕운기에 기록해 놓았으니, 이도 고증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더구나 승려들의 세상을 현혹시키는 황당무계한 말임에랴. 또 이미 마야부인이라 하고서 국사(國師)로써 더럽혔으니, 그 무례하고 방자하며 공경스럽지 못한 것이 무엇이 이보다 더 심하겠는가? 이것을 변론하지 않을 수 없다.

[원문]

有二僧繪畫其壁所謂聖母乃石像而眉目䯻鬟皆塗以粉黛項有缺畫問之云太祖捷引月之歲倭冦登此峯斫之而去後人和黏復屬之東偏陷石壘空等所弄佛在焉是號國師俗傳聖母之淫夫又問聖母世謂之何神也釋迦之母摩耶夫人也有是哉西竺與東震猶隔千百世界迦維國婦人焉得爲玆土之神余甞讀李承休帝王韻記聖母命詵師註云今智異天王乃指高麗太祖之妣威肅王后也高麗人習聞仙桃聖母之說欲神其君之系創爲是談承休信之筆之韻記此亦不可矧緇流妄誕幻惑之言乎且旣謂之摩耶而汚衊以國師其褻慢不敬孰甚焉此不可不辨

 

날이 또 어두워지자 음습하고 찬바람이 매우 거세게 동서쪽에서 마구 불어와, 그 기세가 마치 집을 뽑고 산악을 진동시킬 듯하였고, 안개가 모여들어서 의관(衣冠)이 모두 축축해졌다. 사당 안에서 네 사람이 서로를 베개 삼아 누웠노라니, 차가운 기운이 뼈에 사무치므로 다시 두터운 솜옷을 껴입었다. 종자(從者)들은 모두 덜덜 떨며 어쩔 줄을 몰랐으므로, 큰 나무 서너 개를 태워서 불을 쬐게 하였다. 밤이 깊어지자 달빛이 어슴푸레하게 보이므로, 기뻐서 일어나 보니 이내 검은 구름에 가려져 버렸다. ()에 기대서 사방을 내려다보니, 천지와 사방이 서로 한데 잇닿아 마치 큰 바다 가운데서 하나의 작은 배를 타고 올라갔다 기울었다 하면서 곧 파도 속으로 빠져들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그래서 세 사람에게 웃으며 이르기를, “비록 퇴지(退之)의 정성과 일의 기미를 미리 살펴 아는 도술(道術)은 없을지라도 다행히 그대들과 함께 기모(氣母 : 우주의 원기를 이름)를 타고 혼돈(混沌)의 근원에 떠서 노닐게 되었으니, 어찌 좋은 일이 아니겠는가?” 라고 하였다.

[원문]

日且昏陰風甚顚東西橫吹勢若撥屋振嶽嵐霧坌入衣冠皆潤四人皆枕藉祠內寒氣徹骨更襲重綿從者皆股戰失度令燒大木三四本以熨之夜深月色黯黮喜而起視旋爲頑雲所掩倚壘四瞰六合澒洞若大瀛海之中乘一小舟軒昂傾側將淪干波濤也笑謂三子曰雖無退之之精誠知微之道術幸與君輩共御氣母浮游混沌之元豈非韙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