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六友堂記 1194

해유령(蠏踰嶺)&선암(船巖) 관련 선인들의 유람록(190903)

해유령(蠏踰嶺)&선암(船巖) 관련 선인들의 유람록(190903) 해유령과 선암에 대한 기록은 1472년 김종직의 유두류록이 유일하다. 유람길은 안내한 승려 법종의 말을 인용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해유령을 지나면서 보니 곁에 선암이 있었는데 법종이 말하기를, "상고 시대에 바닷물이 산릉을 넘쳐흐를 때, 이 바위에 배를 매어 두었는데, 방해가 여기를 지났으므로 이렇게 이름 한 것입니다." 하였다. 내가 웃으며 말하기를, "그대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때의 생물들은 모두 하늘을 부여잡고 살았단 말인가?"라고 하였다.』법종의 말은 누군가 지어낸 말로 생각된다. 운해가 있을 때 영랑대에서 천왕봉 쪽을 바라보면 마치 바다에서 육지와 섬 사이로 바닷물이 넘쳐흐르듯 하봉 헬기장으로 운해가 넘쳐 하봉헬기장으로 ..

少年臺(소년대) 관련 유람록과 기행시(181006)

少年臺(소년대) 관련 유람록과 기행시(181006) 1. 1472년 김종직 선생의 유두류록 [원문]自此至永郞岾。道極懸危。正如封禪儀記所謂後人見前人履底。前人見後人頂。攀挽樹根。始能下上。日已過午。始登岾。自咸陽望。此峯最爲峻絶。到此。則更仰視天王峯也。永郞者。新羅花郞之魁。領三千徒。遨遊山水。甞登此峯。故以名焉。少年臺。在峯側。蒼壁萬尋。所謂少年。豈永郞之徒歟。余抱石角下窺。若將墜也。戒從者勿近傍側 。 ○ 8월15일, 이로부터 영랑재(永郞岾)에 이르기까지는 길이 심하게 가팔라서, ‘봉선의기(封禪儀記)’에서 말한, “뒷사람은 앞사람의 발밑을 보고, 앞사람은 뒷사람의 정수리를 보게 된다.”는 것처럼, 나무뿌리를 부여잡아야만 비로소 오르내릴 수가 있었다. 그래서 이미 한낮이 지난 뒤에서야 비로소 영랑재로 올라갔다. 함양(咸陽)에서 바라보..

마암과 행랑굴, 개운암 관련 유람록과 기행시(181006)

마암과 행랑굴, 개운암 관련 유람록과 기행시(181006) 1. 1472년 김종직 선생의 유듀류록 [8월14일] 又並脊南登中峯。山中凡隆起爲峯者。皆石。獨此峯。戴土而端重。可以布武焉。稍下步。憩馬巖。有泉淸冽。可飮。値歲旱。使人登此巖。蹈躪便旋。則必致雷雨。余前年及今夏。遣試之。頗驗。 [8월14일] 또 등성이의 곁을 따라 남쪽으로 중봉을 올라보니, 산중에 모두 융기하여 봉우리가 된 것들은 전부 돌로 되었는데, 유독 이 봉우리만이 위에 흙을 이고서 단중하게 자리하고 있으므로 발걸음을 자유로이 뗄 수가 있었다. 여기에서 약간 내려와 마암에서 쉬는데 샘물이 맑고 차서 마실만하였다. 가문 때를 만났을 경우, 사람을 시켜 이 바위에 올라가서 마구 뛰며 배회하게 되면 반드시 뇌우를 얻게 되는데, 내가 지난해와 금년 여름에 사람을 ..

淸伊堂(청이당) 관련 선인들의 유람록(181006)

淸伊堂(청이당) 관련 선인들의 유람록(181006) 청이당에 대한 유람록의 기록은 1472년 김종직 선생의 유두류록과 1611년 유몽인 선생의 두류산록에 청이당(淸伊堂)과 청이당(淸夷堂)으로, 1871년 배찬 선생의 유두류록에는 천녀당(天女堂)으로 각각 기록하고 있으나 같은 곳을 지칭한 것으로 추정된다. 1472년 김종직 선생이 쉬어간 계석은 청이당터 석축 앞 약 20m 지점에 위치해 있고, 1711년 배찬 선생은 이곳에서 '계곡 옆의 바위 위(澗邊石上)에 빙 둘러 앉아서 밥을 먹었다' 라고 한 장소는 같은 곳으로 추정된다. 현재 지리 마니아들이 알고 있는 청이당터(숙밭재 아래 평평한 터)와 유람록의 청이당터는 거리(약100m)가 있다. ​ ​ 1) 1472년 김종직 선생의 유두류록 [원문] 抵淸伊堂。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