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六友堂記/实踐人文

내원골 폐3암자(옥소·영대·불출) 관련 유람록

도솔산인 2018. 10. 25. 15:20


내원골 폐3암자(옥소·영대·불출) 관련 유람록



 선인들의 유산기에 나오는 내원골 3암자는 1618년 조위한의 <유두류산록>, 1651년 오두인의 <두류산기>와 1655년 김지백의 <유두류산기>에 옥소암, 영대암, 불출암이 나타난다. 한 가지 일치하는 것은 세 사람은 모두 서쪽에 있는 봉우리 비로봉을 청학봉이라고 하였다. 유산기마다 청학봉의 위치가 다른데, 1611년 유몽인의 <유두류산록> 이후부터 1708년 김창흡의 <영남일기>까지 약 100년 간(광해 3년에서 인조, 효종, 현종, 숙종 46년) 비로봉을 청학봉이라고 하였다. 그 이유는 모르겠으나 1558년 남명 조식의 <유두류록> 이후, 1720년에 이르러 신명구(申命耉)의 <유두류속록>에 비로봉이라는 이름이 다시 등장한다.



 1618년 조위한의 <유두산록>에 '완폭대에서 시 몇 편을 짓고 온 길을 되짚어 가다가 한 가닥 좁은 길을 찾아내서 풀을 헤치고 덩굴을 제치며 곧장 몇 리를 내려가 옥소암(玉簫庵)에 닿았고, 옥소암에서 비탈진 길(마치 구덩이나 우물에 빠지는 느낌)로 곧바로 수백걸음 가면 영대암에 닿고, 영대암에서 수백걸음 가면 불출암이 나오고, 불출암에서 1리쯤 가면 쌍계사가 나온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옥소암의 풍광에 대해서 '암자는 깎아지른 절벽 위에 있는데, 절벽을 뚫고 허공에다가 기둥을 세우고 난간을 설치해서 아득하게 허공에 떠서 새가 나래를 펴고 있는 것 같아, 마치 그림 속에 있는 듯해서 일반적인 승방이나 절과는 비할 바가 아니었다.'라고 상세하게 기술하였다. 그리고 '이 암자는 담양 선비 이성국(李聖國)이 이 산에 들어와 이십 년 동안 도를 닦다가 재산을 다 털어 절에 시주해서 지은 것'이라는 기록으로 미루어 옥소암은 1600년대 초반에 지어졌다고 추정한다.



 1651년 옥소암(玉簫庵)을 다녀간 오두인(寅, 1624~1689)의 父 오숙(吳䎘, 1592∼1634)은 1631년  이곳을 다녀간 후 옥소암시 외에도 佛日, 雙磎, 石門 등의 기행시를 남겼다. 또한 오두인()의 季父 오핵(吳翮, 1615∼1653)은 1646년 옥소암을 다녀간 후, 청학동(내원골) 계곡 하류 바위에 장원암(狀元巖) 詩를 남겼는데, 詩가 조카인 오두인()의 <두류산기>에 전한다, 




* 1631년(인조 9) 오숙(吳䎘)의 기행시



玉簫庵 (옥소암 ) - 오숙 (吳䎘

 

獨夜邀仙鶴 (독야요선학 ) : 홀로 있는 밤, 선학을 맞아

淸晨禮釋曇 (청신예석담 ) : 맑은 새벽, 부처님께 예배한다

乾坤一方問 (건곤일방문 ) : 천지 안의 어느 곳을 찾으니

今古此伽藍 (금고차가람 ) : 예나 지금이나 이 절간이로구나

雰氣生危檻 (분기생위함 ) : 안개 기운은 높은 난간에 피고

香煙擁小龕 (향연옹소감 ) : 향불 연기는 절 탑을 감싸는구나

從來貪佛日 (종래탐불일 ) : 종래에 불일암을 탐내었는데

更別玉簫庵 (갱별옥소암 ) : 다시 옥소암을 떠나야 하는구나



佛日(불일) - 오숙(吳䎘)

 

人世吾何事(인세오하사) : 나는 무슨 일로 인간 세상에서

名區得此山(명구득차산) : 산수가 이름난 이 산을 차지했나

佛日玉簫庵(불일옥소암) : 불일암과 옥소암은

香爐靑鶴間(향로청학간) : 향로봉와 청학봉 사이에 있구나

銀河垂絶壑(은하수절학) : 은하수는 깎아지른 구렁에 드리우고

琪樹繞空壇(기수요공단) : 옥 같은 나무는 빈 법당을 둘러있도다

且愛胡僧在(차애호승재) : 장차 參禪僧이 있음을 사랑하여

徐飛錫杖還(서비석장환) : 천천히 석장을 날리며 돌아가리라


출처 : 한시속으로 http://cafe.daum.net/heartwings



불출암 석축(170909)



♣ 유산기에 나타난 청학봉과 백학봉(작성자 : 이재구 선생)


* 백학봉은 1724년 명암(明庵) 정식(鄭栻)[1683~1746] 의 <두류록>에 처음 등장한다.




1. 1618<조위한>[遊頭流山錄]

  

* 불일암(414)

 

불일암에 도착하니 절은 오래 되었는데 승려는 없고 단청은 떨어져 나가 있으며 빈 감실(龕室)은 고요하고 창문은 영롱(구멍이 뚫리다)하였다. 오른쪽에 청학봉(靑鶴峯)을 마주하고 있는데 구름을 끼고서 푸른 절벽이 뾰족하게 서 있었다.


佛日. 則寺古無僧. 金碧散落. 虛龕寂歷. 窓壁玲瓏. 右對靑鶴峯. 上切雲天. 蒼壁削立.


<중략>


시 몇 편을 짓고 왔던 길을 되짚어 가다가 한 가닥 좁은 길을 찾아내서 풀을 헤치고 덩굴을 제치며 곧장 몇 리를 내려가 옥소암(玉簫庵)에 닿았다. 암자는 깎아지른 절벽 위에 있는데 절벽을 뚫고 허공에다가 기둥을 세우고 난간을 설치해서 아득하게 허공에 떠서 새가 나래를 펴고 있는 것 같아, 마치 그림 속에 있는 듯해서 일반적인 승방이나 절과는 비할 바가 아니었다. 승려가 말하기를, “이 암자는 담양 선비 이성국(李聖國)이 이 산에 들어와 이십 년 동안 도를 닦다가 재산을 다 털어 절에 시주해서 지은 것입니다.”라고 한다. 옷을 벗어 놓고 피곤해 누워 시를 짓고 돌아와 가마 타고 곧장 내려가니 마치 구덩이나 우물에 빠지는 느낌이었다. 수백 걸음 가서 영대암(靈臺庵)에 닿았고 수백 걸음 더 가서 불출암(佛出庵)에 이르렀다. 이 두 암자는 모두 험한 골짜기 위에 있어서 한 점 속세의 먼지가 없었으나 옥소암에 비한다면 풍격이 한참 못 미쳤다. 불출암에서 또 1 리쯤 가서 쌍계로 돌아와 묵었다.

 

賦詩數篇. 還向歸路. 而別尋一線鳥道. 穿蘿觸藤. 直下數里. 玉簫庵. 庵在斷巘絶壁上. 鑿崖凌虛而架棟設檻. 縹渺浮空. 翬飛鳥翼. 有若畫圖之中. 殆非尋常僧房佛屋之比也. 僧云. 此庵. 乃潭陽士人李聖國者入此山修道二十年. 破產傾財. 作大施主. 構之云. 脫衣困臥. 賦詩而還. 乘輿直下. 如墮坑入井. 行數百步. 靈臺庵. 又行數百步. 歷佛出庵. 玆二庵俱在絶壑上. 無一點塵垢. 而比玉簫則風斯 下矣. 自佛出. 又行一里許. 還到雙溪宿焉.

* 風斯在下 [풍사재하]새가 높이 날 때는 바람은 그 밑에 있다는 뜻으로,높은 곳에 오름을 이르는 말[장자]

 

 

2. 1640<허목>[지리산 청학동기]

 

* 지리산의 명소에 대해 두루 설명하다(93~4)

 

남쪽의 산 중에 지리산이 깊숙할 뿐 아니라 그윽하고 어두워 신산(神山)이라 한다. 기묘한 바위와 뛰어난 경치는 글로 표현할 수가 없다. 청학동(靑鶴洞)이 더욱 기이하다고 한다. 옛날부터 그렇게 기록하였다. 대체로 쌍계사 석문(石門) 위에서 옥소(玉簫) 동쪽 계곡 까지는 물이 깊고 큰 돌이 많기 때문에 사람들이 다니지 않는다. 쌍계사 북쪽 언덕을 따라 암벽을 붙잡고 올라가면 불일전대(佛日前臺) 석벽 위에 도착한다. 이곳에서 남쪽으로 향하여 서면, 곧 청학동을 굽어볼 수가 있다. 돌로 이루어진 골짜기는 가파른 바위인데, 바위 위에는 소나무, 대나무, 단풍나무가 많다. 서남쪽 석봉(石峯)은 옛날에는 학의 둥지가 있었다. 그런데 산중의 노인들이 전하기를, “학은 검은 깃, 붉은 머리, 자줏빛 다리를 가졌다. 그러나 태양 아래에서는 깃이 모두 푸르다. 아침에는 빙글 돌아 날아서 하늘 높이 갔다가 저녁에는 둥지로 돌아온다. 그런데 지금은 오지 않은 지가 거의 백 년이나 된다.”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봉우리를 청학봉(靑鶴峯), 골짜기를 청학동이라고 한다. 남쪽으로 향로봉(香爐峯)을 마주하고, 동쪽은 세 개의 석봉(石峯)이 줄지어 있다. 그 동쪽 계곡은 모두가 층층의 바위와 기암(奇巖)이다. 어제밤 큰비가 내려 폭포수가 골짜기에 가득하다. 그 대() 위의 돌에는 완폭대(玩瀑臺)’라고 새겼다. 그 아래에는 연못이 있다.

 

숭정(崇禎) 13(1640, 인조 18) 93일 나는 악양(嶽陽) 에서 섬진강을 거슬러 올라가 삼신동(三神洞)을 지나 아침에 쌍계사의 석문을 구경하였다. 쌍계사(雙溪寺)에서 최 학사(崔學士) 진감선사비(眞鑑禪師碑)’를 둘러보았다. 천 년이 지난 지금까지 이끼 사이로 보이는 문자를 읽을 수가 있다. 이어서 불일전대에 올라가 청학동기(靑鶴洞記)’를 지었다.

 

南方之山. 惟智異最深邃杳冥. 號爲神山. 其幽巖絶境. 殆不可數記. 而獨稱靑鶴洞尤奇. 自古記之. 蓋在䨥溪石門上. 過玉簫東壑. 皆深水大石. 人跡不通. 從䨥(오자정정)溪北崖. 隨山曲而上. 攀傅巖壁. 至佛日前臺石壁上. 南向立. 乃俯臨靑鶴洞. 石洞嶄巖. 巖石上. 多松多竹多楓. 西南石峯. 舊有鶴巢. 山中老人相傳. 鶴玄翅丹頂紫脛. 日色下見翅羽皆靑. 朝則盤回而上. 入於杳冥. 夕則歸巢. 今不至者幾百年云. 故峯曰靑鶴峯. 洞曰靑鶴洞. 南對香爐峯. 其東列爲三石峯. 其東壑皆層石奇巖. 前夕大雨. 瀑布滿壑. 其臺上石刻曰玩瀑臺. 其下潭水.

 

崇禎十三年九月三日. 余從嶽陽遡流蟾江. 過三神洞. 朝日觀䨥溪石門. 又䨥溪寺觀崔學士. 眞鑑禪師碑. 至今千餘年. 莓苔間尙見文字可讀. 因登佛日前臺. 作靑鶴洞記.



3. 1651년 <오두인>의 [두류산기(頭流山記)]

 

113

 

폭포가 흘러가는 곳에서 시작하여 양봉(兩峯 : 향로봉과 청학봉) 남쪽이 학연(鶴淵)이며, 바로 그곳이 쌍계 좌측 물줄기의 근원이다. 다시 청학봉을 넘어 봉우리 남쪽 기슭에 당도하니 두 세 개의 작은 암자가 있다. 어떤 암자는 남아 있고, 어떤 암자는 허물어져 없다. 옥소암영대암(玉簫靈臺) 그 명칭이고, 성불심원(成佛深院)은 그 터전이다. 불일암에는 스님 한 분이, 옥소암, 영대암에는 스님 세 분이 계셨는데 모두 곡기(穀氣)를 끊고 수도에 전념하는 부류의 스님이다.

 

아래로 내려와 청학동 하류에 도착하니 수석(水石)이 더욱 기이하여 정신이 상쾌해짐을 갑절이나 깨달았다. 계곡 주위를 배회하다가 갑자기 시 한 수가 바위 사이에 있음을 보았다.


장원암(狀元巖)


                   吳翮(오핵 : 1615∼1653)


靑鶴峯前路 : 靑鶴峯(청학봉) 앞 길

澄潭影翠杉 : 맑은 연못에는 비취빛 삼나무 그림자 

羽仙探勝處 : 우선(羽仙)이 찾은 경치 좋은 곳이라

仍號狀元巖 : 이에 장원암(狀元巖)이라고 부른다네


 

이 시는 계부(季父 : 吳翮오핵)께서 직접 쓰신 시이다. 그리고 우선(羽仙 : 오숙)은 돌아가신 아버지의 호이다. 선인(先人 : 돌아가신 아버지인 오숙)께서 숭정(崇禎) 신미(辛未, 1631)에 남쪽에 관찰사로 계시면서 이곳에 유람한 적이 있으며, 그리고 작은 숙부도 또한 병술년(丙戌, 1646)에 장원 급제하여 두루 구경을 다니러 왔다가 떠난 적이 있다. 그러므로 시에 나타난 내용이 그런 것이다.  * 출처 : 지리99 산행기방(지리99 국역)


吳䎘[오숙 : 1592(선조 25)~1634(인조 12)]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숙우(肅羽), 호는 천파(天坡). 오수억(吳壽億)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경상좌도병마절도사 오정방(吳定邦). 아버지는 전부(典簿) 오사겸(吳士謙)이며, 어머니는 한성서윤 이집중(李執中)의 딸. 승문원권지정자, 에조좌랑, 순검사종사관, 헌납, 동부승지, 경상도관찰사, 황해도관찰사등을 역임함. 문장이 간결 명료했고, 특히 기유시(紀遊詩)에 뛰어남. 이조참판 겸 양관제학에 추증되었으며, 저서로는 천파집4권이 있음.


吳翮(오핵 : 16151653) 열네 살에 아버지를 여의고 큰 형인 오숙(吳䎘)을 따라 공부하였고, 장유(張維)의 문하에 들어갔다. 열아홉살에 성균관에 입학하여 1646(인조 24) 정시문과에 장원으로 급제, 전적·병조좌랑·정언(正言)을 병조좌랑, 사서(司書), 기사관(記事官), 지평(持平)를 역임함. 저서로는 척화삼신전(斥和三臣傳)·만세감(萬世鑑)4·백천당유고등이 있음.

 


4. 1655<김지백>[유두류산기]

 

108일 무오일 출발 불일암과 폭포를 구경하다

 

음날 비를 만나 그대로 머물며 날이 개기를 기다렸다가, 견여(肩輿)를 타고 출발하였다. 타다가 걷다가 하면서 불일암(佛日庵)에 거의 다 도착하니, 바위 벼랑이 입을 벌린 듯 가운데가 찢어져 있고, 건너지른 나무架木가 사다리가 되어, 겨우 인적이 통할 만하였다. 아래로는 깊이가 만여 길이나 될 듯한데, 몸을 비스듬히 기울이고 발만 믿고 걸으니, 혼이 떨리고 머리카락이 곤두섰다. 붙잡고 올라 불일암에 이르니, 암자 밖에 작은 석대(石臺)가 있는데, 완폭대(翫瀑臺)라고 부르는 것이다. 천신(天紳)수백 길이 향로봉(香爐峰)에서 흘러내리는 것을 바라보노라니, 그 형세가 마치 무지개가 일어나고 번개 치는 듯하여, 다만 여산(廬山) 폭포와 박연(博淵) 폭포만이 서로 견줄 수 있다. 전날 용추를 구경했던 사람들 또한 이 완폭대 아래에서 바람을 쐬었다. 날리는 물방울이 찬 기운을 만들어 내고 그늘진 골짜기가 서늘한 기운을 불러일으켜 몹시 추워 오래 머물 수 없었다. 산 막걸리를 두어 잔 데워 마시고 돌아오는 길에 청학봉(靑鶴峯)에서 지팡이 잡고 쉬면서 학 둥지를 엿보고, 내려와 옥소암(玉簫菴)에 들어가 이름을 쓰고, 다시 쌍계사로 돌아와 묵었다.

 

[원문] 

翌日. 遇雨仍畱. 遂待晴. 肩輿而作. 或乘或步. 幾至佛日庵. 石崖呀然中裂. 架木為棧. 纔通人跡. 其下深可萬餘丈. 側身信足. 魂悸髮竪. 乃躋攀到菴菴. 外有小石臺. 所號翫瀑者. 望見天紳數百丈. 掛流香爐之側. 勢若虹起電掣. 直與廬山慱淵上下. 往日龍湫之所賞者. 亦風斯下矣. 飛淙釀寒. 陰谷動爽. 凛乎不可乆畱. 遂煖進山醪數杯. 仍復路憇杖靑鶴峯. 窺鶴巢而下. 題名玉簫菴. 復還䨇溪宿.

 

* ☞ 김지백(金之白) [1623~1670]1648(인조 26) 사마시에 합격하였으나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평생 학문에만 정진하였다. 신독재(愼獨齋) 김집(金集)과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등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평생 명리를 구하지 않고 학문에 정진한 인물로, 사부일기류인 유두류산기(遊頭流山記)를 저술하기도 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담허재집[澹虛齋集]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유산기출처 : 한국문화콘텐츠닷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