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六友堂記/实踐人文

頭流庵(두류암) 관련 유람록과 기행시(181006)

도솔산인 2018. 12. 23. 06:39

頭流庵(두류암) 관련 유람록과 기행시(181006) 

 

  두류암에 대한 의문을 갖게 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어느날 선인들의 지리산 유람록에 나오는 두류암 관련 자료를 읽고 쑥밭재 아래 '두류암 승탑'을 찾게 되었는데, 선인들의 유람록과 천령지의 기록과 부합(符合)하지 않았다. 유몽인의 유두류산록을 좇아 용유담-마적동-송대-장구목-두류암 코스를 답사하고, 승탑 연구가 임병기(善果님) 선생의 답사 자료를 보고 자문을 구하니, 부도의 형태는 조선 후기의 양식이고 어떤 유람록에도 부도에 관한 기록이 없다. 승탑이 있는 곳은 유람록에 나오는 두류암 터의 기록과 일치하지 않는다.' '그곳이 두류암 터는 아니다. 승탑은 있지만 기록에 나오는 두류암터는 아니다. '라는 말씀을 들었다.

 

  두류암 관련 선인들의 유람록은 1580년 변사정(邊士貞)의 유두류록, 1611 유몽인(柳夢寅)의 두류산록, 1867년 김영조(金永祚)의 유두류록, 1871년 배찬(裴瓚)의 유두류록 등이 있는데, 1656년 정수민이 편찬한 천령지(1888년 간행)에 "두류암은 군자사 동쪽 삼십 리에 있다. (두류암) 동쪽으로 송대가 있는데 운치가 그윽하고 한가하다. 지금은 없다."라는 기록으로 미루어, 1871년 이후와 1888년 이전의 시점에 폐사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어쨌거나 두류암지에 대한 나의 견해는 선답자들과는 다르다. 지산대 아래 정자와 동종이 있는 부근을 두류암터로 추정하고 있으니, 교주고슬(膠柱鼓瑟)하는 억지 논리가 오히려 측은(惻隱)하기만 하다.

 

  감수재가 두류산일록에 云『무릇 천하의 만물 가운데 욕심을 가진 놈은 남에게 제압당하지 않은 놈이 없다.(凡天下之物。有欲者無不見制於人)』라고 하였다. 선답자들이 지리산 인문학을 주창한 것은 사실이지만, 지리 99가 아무런 검증도 없이 성급하게 발표한 세석산장 앞 습지의 엉터리 영신사지와 가짜 청학연못이 국회 전자도서관에 전자문서로 영구 보존된 박사 학위 논문[조선시대 유람록에 나타난 지리산 경관자원의 명승적 가치 = (The)scenic site value of scenic resources in Mt. Jiri documented in the Joseon era travelling records / 상명대학교 이창훈 이용률 높음]에 겁(怯)도 없이 실려있으니, 문제의 파급성을 심각하게 인식하고 앞으로 자신들의 결과물을 점검하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본다. 오류를 인정하고 수정하는 것도 실력이다. 끝.

 

 

1. 1580邊士貞의 유두류록

 

 [원문] 早食發行. 過龍遊潭. 至頭流庵. 層崖削出. 壁立萬仞. 百花爭發. 襲香一洞. 竟日坐玩. 不覺其暮遂入禪房. 共宿焉.

 4月 初七日, 아침에 일찍 밥을 먹고 출발하여 용유담(龍遊潭)을 지나 두류암(頭流庵)에 도착하였다. 층층의 벼랑이 깎아지를 듯 솟아 있고 절벽이 만 길 높이로 우뚝 서 있었다. 온갖 꽃이 다투어 피어나니 꽃향기가 계곡을 온통 뒤덮었다. 하루 종일 앉아서 완상하니 날이 저무는 것도 몰랐다. 마침내 선방(禪房)에 들어가 함께 잤다.

 

[원문] 晨朝促喫. 紫眞洞. 攀巖飛杖. 登天王峯. 是日也天氣淸朗. 極目無碍. 精神灑落.  

四月 初八日. 아침 (두류암에서) 일찍 밥을 먹고 자진동(紫眞洞)을 지나 바위를 잡고 지팡이를 날리며 천왕봉(天王峯) 에 올랐다. 이 날은 날씨가 매우 맑고 화창하여 시계가 막힘이 없었고 정신이 씻은 듯 상쾌하였다.

 

紫眞洞(자진동) : 어름터 주변으로 추정함.

 

두류암 북쪽 대

虛壁脩縑繟 : 텅 빈 절벽은 긴 비단을 드리운 듯하고/淸光碎石縫 : 맑은 햇빛은 부서진 바위를 꿰맨 듯하네(유몽인의 두류암 시) 

 

 

2. 1611 유몽인(柳夢寅)의 유두류산록

 

[원문] 遂入頭流菴. 菴之北有臺. 直南而望之. 有飛瀑瀉于巖間. 如懸玉簾數十仞. 雖竟夕坐玩. 不覺其疲. 而會雨新晴. 谷風淒緊. 以爲過爽不可久淹. 遂入禪房安頓焉.

43, 드디어 두류암(頭流庵)에 들어갔다. 암자 북쪽에 대()가 있어 그곳에 올라 정남쪽을 바라보니, 바위 사이로 폭포수가 쏟아지고 있는데 마치 옥으로 만든 발을 수십 길 매달아놓은 것 같았다. 저녁 내내 앉아 구경하더라도 피곤하지 않을 듯하였다. 마침 비가 그치고 날이 활짝 개었다. 골짜기에서 서늘한 바람이 불어와 매우 상쾌한 느낌이 들었다. 오래 앉아 있을 수 없어 선방으로 들어가 편히 쉬었다.

 

층층의 벼랑이 깎아지를 듯 솟아 있고 절벽이 만 길 높이로 우뚝 서 있었다.(1580 邊士貞의 유두류록)

 

 

 

 

암자 북쪽에 대()가 있어 그곳에 올라 정남쪽을 바라보니, 바위 사이로 폭포수가 쏟아지고 있는데 마치 옥으로 만든 발을 수십 길 매달아놓은 것 같았다.

 

傳聲通翠筧 물소리는 푸른 대숲을 통해서 들려오고/ 飛注作寒舂 : 떨어지는 폭포는 차갑게 절구질을 하네.

 

 

頭流菴 - 柳夢寅

 

虛壁脩縑繟 : 텅 빈 절벽은 긴 비단을 드리운 듯하고

淸光碎石縫 : 맑은 햇빛은 부서진 바위를 꿰맨 듯하네

傳聲通翠筧 물소리는 푸른 대숲을 통해서 들려오고

飛注作寒舂 : 떨어지는 폭포는 차갑게 절구질을 하네

雙柏西僧老 : 두 그루 잣나무 서쪽 승방 가에서 늙었고

層壇北斗封 : 층층의 법단은 북두성인듯 우뚝하구나

長風生萬籟 : 긴 바람 불어와서 온갖 소리 일으키니

深省寄前峰 : 깊이 성찰하며 앞산 봉우리에 기대 섰네.

 

* 1구 맨 끝자 +은 자전에 없어 느슨할 단, 계속될 선(다른 표현: 띠 늘어질 천)으로 보았고 ()이 아니고 : 찧을용이 맞음,


頭流菴 贈慧日 兼示修師 - 柳夢寅

(두류암 혜일에게 주고 아울러 수선사에게 보여주다.)

 

先賢曾訪頭流境 路由義呑村之南 : 선현들이 두류산 선경을 찾아 나섰으니/ 길은 의탄촌 남쪽을 경유하였지.

我今尋眞入頭流 偶然一宿頭流菴 : 내 이제 진경을 찾아 두류산에 들어와서/ 우연히 하룻밤을 두류암에 묵었네.

頭流菴在義呑上 我行適與先賢同 : 두류암은 의탄 마을 위쪽에 있으니/ 내 산행이 마침 선현들의 유람 길과 같네.

                                                                                       [출처 : 지리산유람 기행시 1]

 

3. 1867년 김영조(金永祚)의 유두류록

 

[원문] 向文殊寺. 境甚幽僻. 暮抵松臺村. 村在頭流山下. 四山簇立. 林壑蔚然. 川聲滾滾. 亦一別景也. 訪朴德元. 因畱宿. 踰一嶺. 至林下石澗盤上. 各啖梨一枚. 歷大坂至頭流菴. 田家數十戶. 皆升茅構木爲居也.

 

826~29, 문수사(文殊寺)를 향하니, 장소가 매우 깊숙하고 치우쳐 있었다. 저녁에 송대촌(松臺村)에 이르니, 마을이 두류산 아래 있어, 사방에 산이 빽빽하게 들어서서, 숲과 골짜기가 울창하며, 시내 소리가 세차게 들리니, 또 하나의 색다른 경치였다. 박덕원(朴德元)을 찾아가서 하룻밤 묵었다. 고개(장구목) 하나를 넘어 숲 아래 있는 돌 시내에 이르러, 각자 소반 위의 배 하나씩을 먹었다. 큰 언덕을 지나 두류암(頭流菴)에 이르니, 농가 수십 호가 모두 띠풀로 지붕을 얹고, 나무를 얽어서 살고 있었다.

 

[생초-엄천사지-문정동-세동마을-송대리(1)-벽송사능선-어름터-두류암-말바우산막-중봉-천왕봉]

 

4. 1871년 배찬(裴瓚)의 유두류록

 

[원문] 須臾四山忽黑海風. 甚冷凜乎. 其不可乆留也. 因促行還到馬巖幕. 從者先詣. 朝飯已熟矣. 飯後. 遂直下頭流菴. 小憇. 至五峯村後麓. 村人員簞食壺漿而來. 一行皆頼此免飢. 侯命給其價而謝之.

 

187197(하산길),조금 있으니 사방 산이 순식간에 어두워지고 해풍이 매우 차가워서 떨려서 오래 머무를 수가 없었다. 걸음을 재촉하여 마암의 산막으로 돌아왔다. 시종이 먼저 도착해서 조반을 이미 지어놓았다. 밥을 먹은 후에 마침내 바로 두류암으로 내려와 잠시 쉬고 오봉촌 뒤의 산촌[오봉리 독가]에 이르렀는데, 마을 사람이 밥과 음료수를 지고 와서 일행은 모두 이로 인해 갈증과 배고픔을 면하였다. 수령이 값을 쳐주어 사례하게 하였다.

 

[화림암-오봉리-사립재-쑥밭재-청이당(천녀당)-마암산막(1)-중봉-천왕봉(2)-마암산막(조반)-두류암-사립재-폐독가(늦은중식)-화림암]

 

5. 1922년 권도용(權道溶) 방장산부(方丈山賦)

 

[원문] 惟禪應之指路 幾俗臘之古稀 得般若之道力 倏登陟而如飛 憩氷峙徐進 得盤陀之石磯 出二派而匯合 成 自然之淸潿 蒼藤古木湲依依 山禽效吟樵歌忘機 遂乃弛擔午䭜脫略交譚 太守請余而錫名 名之曰三乂巖 溪壑荵蒨於耳 郭峯巒糾紛於眼簾 過杜里之廢寺 有兩巖之交粘問奚名 則曰金剛門 亦禪師之權辭以拈眡

 

4월 기망(旣望 *16) [벽송사 출발], 승려 응지가 길을 인도하였는데 세속 나이로 거의 고희에 가까웠지만 빠르게 산을 오를 때는 마치 나는 듯하였다. 빙치(氷峙)에서 쉬었다. 천천히 나아가 너럭바위에 이르렀는데 여울이 두 갈래로 흘러오다가 합쳐 저절로 맑은 웅덩이가 되었다. 푸른 등나무 고목은 물가에 푸릇푸릇하고, 산새는 나무꾼의 노래를 흉내 내어 울어 세상일을 잊게 하였다. 마침내 짐을 내리고 점심을 먹으면서 간단히 얘기를 나누었다. 태수가 내게 바위의 이름을 지어 달라고 청하여, 삼예암(三乂巖 *물결이 세 갈래로 둘러싼 바위)이라 이름 붙였다. 골짜기의 물소리 또렷이 귓가에 들리고 산봉우리들 중첩되어 눈앞에 보였다. 두리(杜里)의 폐사(廢寺)를 지나니 양쪽의 바위가 서로 붙어 있는 곳이 있어 무엇이라 부르는지 물었더니 금강문(金剛門)이라 하였다. 이 또한 승려들이 보이는 대로 갖다 붙인 말이다. [출처 지리99 글쓴이 이재구 선생]

 

권도용(1878-1959)은 근세의 유학자이자 언론인독립운동가

 

6. 정수민이 편찬한 천령지

 

[원문] 頭流庵. 在君子寺東三十里. 東有松臺. 韻致幽閑.今無.(천령지130)

 

두류암은 군자사 동쪽 삼십리에 있다. (두류암) 동쪽으로 송대가 있는데, (두류암은) 운치가 그윽하고 한가하다. 지금은 없다.

 

 정수민(鄭秀民)이 천령지(天嶺誌)를 편찬한 시기(1656)에는 두류암이 있었고, 천령지(天嶺誌)家藏(가장 : 간행되지 않고 후손에 의해 집에 보관 됨)되어 있다가, 후손 정환주(鄭煥周)가 간행한 시점(1888)今無가 추가 기입한 것으로 추정한다간행 시점(1888)에는 이미 두류암이 폐사된 것으로 보인다. 현재 전해지는 천령지는 정환주(鄭煥周)의 간행본이다.


 

7. 석상용 장군 묘소의 지명은 두류암(頭流巖)이다.

 

  선인들의 유람록에 나오는 폐사지에 대한 논란이 여러 차례 있었다. 두류암(頭流庵) 또한 그중 하나이다. 이번에 해주 석씨 세보에서 의병장 석상용 장군의 묘소 지명을 확인하니 두류암(頭流巖)이다. 지역 주민들이 구두로 '두람(두람→두류암→頭流巖)'이라고 하는 것을, 선답자들이 두류암(頭流庵)으로 잘못 해석한 듯하다.

 

▶ 《해주석씨 세보》

墓馬川面楸城里頭流巖甲坐有碑石一九八三年八月三十一日獨立有功褒賞受賞

묘 마천면 추성리 두류암(頭流巖) 갑좌 비석이 있다. 1983년 8월 31일 독립유공포상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