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학암, 지장암, 보조암과 상불암 불지령등 관련 자료
1. 1472년 <김종직> 선생의 [유두류록]
○ 8월 17일 신사일
해공이 또 악양현(岳陽縣)의 북쪽을 가리키면서 청학사동(靑鶴寺洞)이라고 하였다. 아! 이곳이 옛날에 신선(神仙)이 산다는 곳인가. 인간의 세계와 그리 서로 멀지도 않은데, 미수(眉叟) 이인로(李仁老)는 어찌하여 이곳을 찾다가 못 찾았던가? 그렇다면 호사가가 그 이름을 사모하여 절을 짓고서 그 이름을 기록한 것인가? 해공이 또 그 동쪽을 가리키면서 쌍계사동(雙溪寺洞)이라고 하였다. 세속에 얽매이지 않았던 고운 최치원이 일찍이 노닐었던 곳으로 각석(刻石)이 남아 있었다. 기개를 지닌 데다 난세를 만났으므로, 중국에서 불우했을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에서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마침내 고고하게 속세 밖에 은둔함으로써 깊고 그윽한 산천은 모두 그가 노닐며 거쳐 간 곳이었으니, 세상에서 그를 신선이라 칭하는 데에 부끄러움이 없겠다.
[원문] 又指岳陽縣之北曰. 靑鶴寺洞也. 噫. 此古所謂神仙之區歟. 其與人境. 不甚相遠. 李眉叟何以尋之而不得歟. 無乃好事者慕其名. 構寺而識之歟. 又指其東曰. 雙溪寺洞也. 崔孤雲嘗遊于此. 刻石在焉. 孤雲. 不羈人也. 負氣槩. 遭世亂. 非惟不偶於中國. 而又不容於東土. 遂嘉遯物外. 溪山幽闃之地. 皆其所遊歷. 世稱神仙. 無愧矣.
2. 1487년(정미 성종18년) 남효온의 지리산일과
○ 10월 9일 쌍계사
서쪽에서 동쪽으로 시내를 건너니 양쪽에 문같이 생긴 바위가 있었는데, ‘쌍계석문(雙溪石門)’이라는 네 글자가 큰 글씨로 새겨져 있었다. 이 글씨는 문창후(文昌侯) 최치원(崔致遠)이 손수 쓴 것이다. 석문 안쪽으로 1, 2리쯤에 쌍계사가 있었다. 내가 승려에게 묻기를, “청학동이 어디에 있습니까? [누가 이곳을 청학동이라고 하는가?] ”라고 하니, 의문이 말하기를, “석문 밖 3, 4리 못 미쳐 동쪽에 큰 동네 가 있는데 그 동네 안에 청학암(靑鶴庵)이 있으니 아마도 그곳이 옛날의 청학동인 듯합니다.”라고 하였다. 내 생각으로, 이인로(李仁老)의 시에 “지팡이를 짚고서 청학동 찾고자 하니, 숲 속에선 부질없는 원숭이 울음소리뿐이구나. 누대에 삼신산(三神山)이 아득하게 있고, 이끼 낀 바위엔 네 글자만 희미하구나.”라고 하였으니, 그는 성문 안 쌍계사 앞쪽을 청학동이라고 여긴 것은 아닌가. 쌍계사 위 불일암 아래에 청학연(靑鶴淵)이란 곳이 있으니, 이곳이 청학동인 것은 의심할 나위가 없다.
[원문] 自西涉東. 有兩地石如門. 有刻雙溪石門四大字. 崔文昌侯手題者也. 石門內一二里許. 有雙溪寺. 余問僧曰. 誰是靑鶴洞. 義文曰. 未及石門三四里. 有東邊大洞. 洞內有靑鶴庵. 疑是古之靑鶴洞也. 余惟李仁老詩杖策欲尋靑鶴洞. 隔林惟聽白猿啼. 樓臺縹緲三山遠. 苔蘚依稀四字題. 則石門內雙溪寺前. 無乃是耶. 雙溪寺上佛日庵下. 亦有靑鶴淵. 此爲靑鶴洞無疑矣.
○ 10월 10일~11일 불일암에서 사자암
10일 병자일. 물을 거슬러 10리쯤 올라 왼쪽으로 고개 하나를 넘어서 불일암에 이르렀다. 이 암자는 혜소가 도를 닦던 곳으로 암자 앞에는 청학연이 있는데, 고운이 일찍이 그 위를 유람하였다. 나는 암자의 승려 조성(祖成)에게 같이 가서 찾아보자고 하였지만 길이 후미져서 찾을 수 없었다. 또 보주암(普珠庵)에 올랐는데, 바로 보주선사(普珠禪師)가 옛날에 거처하던 곳으로 그로 인해 보주암이란 이름을 얻게 되었다. 한 늙은 승려가 나에게 배와 감을 내주었다. 다시 불일암으로 돌아와 묵었다. 조성이 시 한 수를 지어 나에게 주었는데 시운(詩韻)이 원숙하였으며, 맑고 넓으면서도 주밀하여 시를 짓는 데 공력을 들인 사람이었다. 나에게 차운(次韻)하기를 청하여, 나는 다음과 같이 화답하였다.
[원문] 丙子. 泝流上將十里許. 左度一峴. 到佛日庵. 庵乃慧昭鍊道之所. 庵前有靑鶴淵. 孤雲嘗遊其上. 余要庵僧祖成往尋. 路僻不得尋. 又上普珠庵. 乃普珠禪師舊居. 庵因玆得名. 有老釋饋余梨杮. 還投佛日寓宿. 祖成作詩一首贈余. 詩韻圓熟. 淸曠且密. 曾於詩家下功者. 要余次韻. 余和曰.
孤雲歸不駐(고운귀불주) 고운은 머무르지 않고 가버리고
靑鶴返何遲(청학반하지) 청학은 어찌하여 돌아오지 않는가
人物無今古(인물무금고) 인물은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으니
淸寒賈島詩(청한가도시) 청한한 가도(賈島)의 시로다.
나는 조성의 재능이 남다르다고 여겼는데, 유가(儒家)의 기상을 가졌기 때문이었다. 이 날 비와 눈이 섞여 내렸다.
[원문] 余觀成才能異常. 而有儒家氣象. 故云. 是日雨雪.
11일 정축일. 조성이 봉천사에서 지은 나의 율시(律詩)에 차운하여 나를 송별하였다. 나는 조성에게 사례하고, 보주암(普珠庵)을 지나 불지령(佛智嶺)에 올랐다가 묵계동(黙溪洞)으로 내려왔는데 물과 돌이 매우 맑고도 기이하였다. 오서연(鼯鼠淵)․광암연(廣巖淵)․용회연(龍廻淵)을 지나 비문령(碑文嶺)을 넘어 사자암(獅子庵)에 이르렀다. 암자에서는 해한(海閒)과 계징(戒澄)이 나를 맞아주었다. 해한은 내가 젊었을 때 불가(佛家)에서 만난 벗이었는데, 10여 년을 만나지 못하다가 반가운 눈빛〔청안(靑眼)〕으로 마주 대한 것이다. 이때 밝은 달이 하늘에 떠 있었다. 큰 대나무가 암자를 두르고 있었는데 길이가 사람 키의 3, 40배나 되는 것도 있었다. 암자에서 옛 회포를 나누다가 밤이 깊어서야 잠자리에 들었다.
丁丑. 祖成和余奉天律詩韻. 爲余別. 余辭成過普珠庵. 登佛智嶺. 下默溪洞. 水石最淸奇. 過鼯鼠淵,廣巖淵,龍廻淵. 度碑文嶺. 抵獅子庵. 庵有僧海閒,戒澄迎我. 閒乃余少日空門友. 不見十餘年. 見余靑眼. 是時明月中天. 鉅竹圍庵. 其梢可準人長三四十矣. 展談舊懷. 夜深乃寢.
3. 1558년(가정(嘉靖) 무오년(명종13년)남명 조식의 유두류록
○ 4월19일
동쪽으로 있는 폭포는 나는 듯 백 길 낭떠러지로 쏟아져 학담(鶴潭)을 이루고 있었다. 내가 우옹을 돌아보고 말하기를, “물이란 만 길의 골짜기를 만나면 아래로만 곧장 내려가려고 하여, 다시는 의심하거나 돌아보지 않고 앞으로만 내려가니, 이곳이 바로 그곳이네.”라고 하였더니, 우옹이 말하기를, “그렇네.”하였다. 정신과 기운이 상쾌하였지만 오래 머무를 수는 없었다. 잠시 후 뒤쪽 능선으로 올라가 두루 지장암(地藏菴)을 탐방하니 모란이 활짝 피어있었다. 한 송이가 한 말 정도가 되는 붉은 꽃이었다. 이곳에서 곧바로 내려가 한 번에 몇 리를 가서야 겨우 한 차례 쉴 수 있을 정도로 가팔랐다. 양의 어깻죽지를 삶을 정도의 짧은 시간에 쌍계사로 돌아왔다. 처음 위쪽으로 오를 적에는 한 걸음 한 걸음 내딛기가 힘들더니, 아래쪽으로 내려올 때에는 단지 발만 들어도 몸이 저절로 내려갔다. 그러니 어찌 선(善)을 좇는 것은 산을 오르는 것처럼 어렵고, 악(惡)을 따르는 것은 무너져 내리는 것처럼 쉽지 않겠는가. 인숙과 강이가 팔영루(八詠樓)에 올라 우리를 맞이하였다. 저녁에 인숙, 우옹과 함께 다시 절 뒤채의 동쪽 방장의 방에서 잤다.
東面瀑下. 飛出百仞. 注爲鶴潭. 顧謂愚翁曰. 如水臨萬仞之壑. 要下卽下. 更無疑顧之在前. 此其是也. 翁曰. 諾. 神氣颯爽. 不可久留. 旋登後崗. 歷探地藏菴. 牧丹盛開. 一朶如一斗猩紅. 從此直下. 一趨數里. 方得一憇. 纔熟羊胛. 便到雙磎. 初登上面. 一步更難一步. 及趨下面. 徒自擧足. 而身自流下. 豈非從善如登. 從惡如崩者乎. 寅叔. 剛而. 登八詠樓以迎. 夕與寅叔. 愚翁. 更宿後殿之東方丈.
4. 1686년 정시한 산중일기(山中日記)
○1686년 8월 19일 새벽부터 종일 비
<발휘심경> 15장을 보고 <독서록> 상중 2편을 보았다. <황정경> 외경 하편을 보고 상권을 마쳤다. 저녁밥을 지어서 제공한 자는 성욱수좌였다.
十九日 自昧爽雨終日 看發揮十五 張讀書錄上中二篇 再看黃庭下篇終上卷 炊夕飯饋旭首坐
○8월 20일 날이 갬
성욱이 아침을 준비하여 상하 모두에게 대접하였다. 남은 양미 1승 정도를 남겨 두고 아침 식사 후에 수좌와 함께 뒷 봉우리에 올라가서 보조의 터를 보았다. 대략 2리쯤 거리에 폭포수가 있는데 그 머리 위에는 청룡 변으로 이어지는 폭포수가 석담으로 흘러 내리고 있었다. 그 아래가 곧 불일폭포였다. 향로봉과 청학봉 등이 무릎 아래의 청룡 백호가 되니, 몸에 가까운(?) 안쪽의 용호 역시 매우 신기하였다. 갈산(葛山)이 고리처럼 둘러서 비어 있거나 흠이 있는 곳이 없었다. 암자 터가 평평하고 반듯하였으며 손방(巽方)에는 큰 가뭄에도 마르지 않는 甘泉이 있고, 그 아래 중보조터가 있었다. 나머지 기운이 불일암이 된 것이다. 앉아 있는 땅이 상무주암보다 높았으며 바람을 간직하고(*) 양지바른 데다 과목 채전까지 있고 또 토질도 좋았다. 보통 안목으로 보아도 지리산의 정맥인 듯하여 너무 마음에 들어서 차마 떠나지 못하였다.
二十日晴 性旭備朝食 而饋上下 留餘粮米一升許 朝食後 與首坐上後峰 見普照基 約二里許正在瀑㳍 頭上邊連 有瀑流石潭 其下即佛一瀑流也 香爐靑鶴等峰 爲膝下靑龍白虎 而櫬身龍虎亦皆奇妙 葛山環擁無有空缺久闕 處菴基平正 巽方有大旱不渴之甘泉 其下中普照基 餘氣爲佛一坐地 高於上無主菴 而藏風向陽 亦有果木菜田 且土厚 凡眼所見以地異正脈愛玩不忍離
(*) 櫬身 : 몸을 담은 널 안쪽의... 櫬 : 內棺 , 巽方 : 서북방
(*) 藏風 : 풍수지리설에서, 바람이 운반하는 생기는 받아들이고 모인 생기가 바람에 의해 흩어지지 못하도록 하는 것
한동안 있다가 불일암으로 다시 내려와서 그대로 쌍계사로 내려오는데 중간에 천휘, 원식, 민혜 등이 와서 맞이하였다. 방장실에 도착하여 젖은 버선을 벗고 즉시 출발하였다. 옥헌 노장등 여러 승려가 석문 밖에서 작별하였다. 걸어서 냇가에 이르러 외나무다리를 건너 몇 리를 가서 말을 탔다. 민혜가 작별하고 갔다.
良久遠下佛一 仍下䨇磎 中路天輝垣湜敏慧等來迎 到方丈脫濕襪 卽發行 玉軒老長等諸僧別於門外 步至川邊越獨木橋 行數里乘馬 敏慧辭去
5. 1699년 명안(明安)의 상불암기(上佛庵記)
지리산의 한 줄기가 남으로 우뚝 솟아 하늘에 가까이 간 것이 설봉(雪峰)이다. 이 봉우리의 서쪽에 옛 사람이 숨어 쉬던 터가 있는데, 그 이름을 잃어버린 것이 몇 년이나 되었는지 알 수 없다. 강희(康熙) 정축(丁丑 1697)년에 승단(僧團)에서 형 동생이 되는 호영(浩影)도인 해기(海機)와 사민(思敏)선사가 일찍이 청학동 대은암에서 함께 선업을 닦다가 문득 그 거처가 깊지 않은 것을 싫어해서 대매(大梅)가 집을 옮긴 일을 우러러 좇아 이 곳으로 옮겨 들어와 집을 짓기 시작하였는데 한 해가 지나지 않아 완성되었다. 이곳이 불일암(佛日庵)의 위에 있기 때문에 ‘상불(上佛)’이라고 편액을 붙였다.
기묘(己卯 1699)년에 또한 정토삼성(淨土三聖:극락세계의 세 성인이니, 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대세지보살을 말한다.)을 조성하여 봉안하고 그대로 단청을 입혔는데, 이는 모두 사민(思敏)의 힘이고 호영(浩影)의 가르침이다. 이에 기수(祇樹:인도 최초의 사원인 기수급고독원, 곧 기원정사를 말한다)가 다시 봄을 맞고 꽃비가 향기롭게 내리며 새로운 사람은 선정(禪定)에 들어가고 옛적의 학은 둥지로 돌아왔다. 나아가 바람 불고 구름 일고 눈 내리고 달 뜨며 네 계절이 변하는 모습이나 밤과 낮이 저물고 밝는 것에 이르기까지 모두 천기를 누설하고 선심(禪心)을 활발하게 일으켰지만, 오히려 세상 사람들이 이를 물건으로 취할까 두려워하여 보존하기만 하고 논하지는 않았다.
석탄(釋坦)대사 가 사민(思敏) 노승의 뜻과 부탁으로 나에게 글을 구하니 내가 굳이 사양하였지만 면할 수가 없어서 그 대강을 들어 다른 날 참고할 수 있는 자료를 갖출 뿐이다. 그들이 집을 옮기고 깊이 들어간 마음에 대해서라면, 내가 물고기가 아니니 어찌 물고기의 마음을 알 수 있겠는가? 물고기의 마음을 아는 물고기가 그것을 알고 드러내어 보여주기를 다시 기다릴 뿐이다.
[원문] 上佛庵記 智異之一支 南而斗之而近天者 卽雪峰 峰之西 有古人隱休之地而墟 失其名者 不知幾年也 康熙丁丑 浩影道人海機與思敏禪 爲法門昆仲 嘗居靑鶴洞大隱庵 同修白業 忽厭其居之不深 仰追大梅之移舍 乃轉入此 庇工幹事 不年成之 由其在佛日之上 以上佛扁焉 越己卯 又雕淨土 三聖而安之 仍爲丹雘 皆敏之力而影之誨也 且祇尌回春 華雨芳霏 新人入定 舊鶴還巢 以至風雲雪月四時之變態 晝夜之晦明 皆漏洩天機 活起禪心 還恐世人 以物取之 存而不論也 有釋坦大師 以敏老之志托 而求文於余 余固辭 而不免 擧其梗槪 以備他日參考之資而已 若其移舍 入深之心 子非魚也 安知魚乎 更竢知魚之魚 知之而揭露云爾
명안(明安) 1646(인조 24)∼1710(숙종 36). 조선 후기의 고승. 속성은 장씨. 자는 백우(百愚), 호는 석실(石室) 또는 설암(雪巖). 진주출신.12세 때 출가하였으며, 지리산 덕산사(德山寺) 성각(性覺)의 제자가 되었고, 안국사(安國寺)의 금대암(金臺庵), 지리산의 심적암(深寂庵), 지리산의 내원암(內院庵), 방장산의 대원사(大源寺)·율곡사(栗谷寺), 삼신산의 신흥사(神興寺)·화엄사(華嚴寺)·감로사(甘露寺)·연곡사(燕谷寺)등지에 머무르면서 수선(修禪)에 몰두하거나 설법하였다. 1709년 지리산의 칠불암(七佛庵)에 주석하면서 70여명의 동지를 모아 서방도량(西方道場)을 결성하였고, 같은해 겨울 화계의 왕산사(王山寺)로 옮겼다가 이듬해 4월 13일에 서쪽을 향해 세 번 절하고 죽었다. 세수 64세, 법랍 52세이다. 출처 지리99
6, 1708년 <김창흡>의 영남일기
○15일. 맑음<중략> 애초에 나는 불일암에서 하룻밤을 묵으면서 가슴속의 정취를 펼쳐 볼 요량이었으나, 흉이 다 된 데다 병든 승려가 있어 잠시 쉬고는 곧장 일어났다. 폭포를 따라 위로 올라 숲을 헤치고 들어가 상불암(上佛菴)에 이르렀다. 상불암의 주지 해기(海機)는 영남지역의 대수좌(大首座)로서, 나이가 겨의 여든 살에 가까워 기력이 쇠잔했지만, 그가 품고 있는 바를 시험해 보니 수창(酬唱)하는 것이 꿋꿋하였다. 내가 묻기를 “끝없이 일어나는 번뇌 망상은 어찌하면 없앨 수 있습니까?”라고 하니, 그가 답하기를 “이는 마음의 그림자로, 갑작스레 일어났다가 돌연 사라지는 것이니, 우리의 참된 본마음[眞空]에 누를 끼칠만한 것이 못 됩니다. 『금강경(金剛經』 「야보해(冶父解)」에 ‘대해(大海)는 물고기가 뛰도록 내버려 두고, 장공(長空)은 새가 날도록 맡겨둔다.’고 하였으니, 새가 날고 물고기가 뛰는 것은 그것들이 스스로 왕래하는 것인데, 또한 장공과 대해에 무슨 누가 되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절구 한 수를 지어 주자, 한 번 낭랑하게 읊고는 소매 속에 집어넣었다.
上佛菴贈老僧海機 : 상불암 노승 해기에게 주는 시
跌坐仙山逈脫塵 : 홀로 속세를 떠나서 신선이 사는 산에 주저 앉아
萬緣灰盡獨枯身 : 외로운 몸은 쇠하고 모든 인연은 다 재가 되었네
西來妙意何須問 : 서국에서 온 묘한 뜻 누구에게 묻고자 기다리나
巖鳥溪花自在春 : 산새 소리와 계곡 꽃들이 스스로 봄을 묻는구나
<도솔譯>
7. 1807년 <남주헌>의 지리산행기
○ 3월 28일(경오). 맑음. 남여를 타고 잠시 청학암(靑鶴菴)을 둘러보고 신흥사(神興寺)에 이르렀다. 쌍계사와 20리 정도 떨어져 있는 곳이다. 신흥사 문에 '삼신산 신흥사(三神山神興寺)' 여섯 글자가 쓰여 있었다. 지나온 곳마다 선경(仙境)이 아닌 데가 없었다. 바위들은 빼어남을 다투고 골짜기들은 경쟁하듯 흘러내렸다. 대나무 울타리의 초가집이 복사꽃 사이로 언뜻언뜻 보였다. 따라온 사람들이 갈증이 심해 모두 시냇가 바위에 엎드려 물을 마셨다. 나무 그늘이 하늘 높이 뒤덮여 빛이 새어들지 못하고, 돌이 층층이 비탈길을 이루어 이끼가 덮었으니, 인간 세상이 아니라고 할 만하다.
예전에 절도사 이극균(李克均)이 호남의 도적 장영기(張永己)와 이 곳에서 싸웠는데, 장영기는 교활한 놈인지라 험한 지형에 의지하였으므로 이극균의 지혜와 용기로도 막아낼 수 없었고, 끝내 장흥(長興)의 수령이 공을 이루었다고 한다. 절의 누각에서 쉬었다가 점심을 먹은 후 작은 바위에 나아가 앉았다. 세이암(洗耳巖)이라 하였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한처사(韓處士)가 노닐던 곳이라 한다. 두류산이 멀리서 푸른빛을 띠며 어렴풋이 보이기 시작했는데, 마치 옥잠(玉簪)을 뽑아 세워놓은 듯하였다.
길을 돌려 보조암(普照菴)을 찾아갔다가, 굽이굽이 돌아서 불일암(佛日菴)에 이르렀다. 이 암자는 신라 때 승려 혜소(慧昭)가 당나라에 가서 유학을 한 후 귀국하여 도를 닦던 곳이다. 벼랑과 골짜기가 깎아지른 듯 험준하여 갈 수 있는 지름길이 없으므로, 절벽을 중턱을 뚫고 길을 만들었는데 한 사람이 겨우 통과할 수 있었으며, 몇 그루의 나무를 베어내 손바닥만한 하늘만 보였다. 벼랑이 끊어진 곳에 이르자 나무를 엮어 잔도(棧道)를 만들었는데, 잔도 아래는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깊었다. 왕래하는 자들이 줄을 잡고 올라가니, 두려워 식은땀을 흘리고 머리털이 곧추 서지 않는 이가 없다.
산사의 승려들은 남여를 메는 일에 익숙하지만 남여도 이곳에서는 소용이 없었으니, 한 발이라도 헛디디면 만길 낭떨어지로 추락하게 된다. 내가 승려의 꾀를 빌려 여러 사람들에게 말하길 "군자는 평이한 데에 거처하면서 천명을 기다리고, 소인은 험한 것을 행하면서 요행을 바랍니다. 몸소 넝쿨을 부여잡고 조금씩 걸어가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다리가 후들거리고 몸에 소름이 돋아 감히 발길을 돌리지 못하였다. 하인들이 있었지만 잔도가 좁고 길이 비탈져 부축하기 힘들었다. 그러나 가서 구경하고 싶은 욕심에 기어올라 마침내 불일암(佛日菴)에 도착했다. 출처 [지리99옛산행기방]
8. 문헌에 나오는 청학암, 지장암, 보조암, 상불암, 상불재의 지명
문헌자료 | 청학암 | 지장암 | 보조암(상불암) | 상불재 | 비고 |
1472년 김종직 유두류록 | 청학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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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답 |
1487년 남효온 지리산일과 | 청학암 |
| 寶珠庵 | 佛智嶺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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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58년 남명의 유두류록 |
| 지장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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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2년 성여신 진양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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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조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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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86년 정시한 산중일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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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조의 터 |
| 중보조 터 |
1699년 明安의 상불암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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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불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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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8년 김창흡 영남일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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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불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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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7년 남주헌 지리산행기 | 청학암 |
| 보조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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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1884년 김성렬의 유청학동일기 상대, 중대, 하대에 대한 기록
올해 봄 龍潭에 사는 벗 李士元이 찾아와 함께 옛 역사를 토론하게 되었다. 청학동에 대해 언급하였는데, 李士元(이사원)이 말하기를, "작년 봄에 나는 山僧 智仙과 함께 청학동을 찾아갔다네. 쌍계사 석문을 경유해 국사암을 지나 불일암에 도착하자, 上臺, 中帶, 下臺, 三臺가 한 골짜기 안에 펼쳐져 있었다네. 두 봉우리가 우뚝하게 솟아 있고 한 가닥 폭포가 양 언덕 사이에서 곧장 떨어져 내리는데, 그 기괴한 모습을 다 기록하기 어려웠네. 예로부터 전해오는 청학동을 내가 그제야 마음 껏 보았다네."
[원문] 今春 龍潭李友士元見訪. 討論前史.語及靑鶴洞. 士元因言曰. 去春 我與山僧智仙. 訪所謂靑鶴洞者. 自雙溪石門. 歷國士菴. 至佛日菴. 上中下三臺. 一洞中開. 兩峯屹立. 一條瀑布. 直垂兩岸之間. 奇形詭觀. 難可勝記. 古所傳靑鶴洞. 我於是快覩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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