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설악 저항령&마등령의 폭염 산행(180813~15)
▣ 일 시 : 2018년 08월 13일~15일
▣ 코 스 : 백담사-길골-저항령(1100m)-저항봉(1249봉)-마등봉(1326봉)-마등령-나한봉-오세암-백담사
▣ 인 원 : 3명(도, 솔, 산)
▣ 날 씨 : 찜통, 맑음
멀고도 오랜 기억이 아련히 떠오르는 설악의 북주릉, 그 중간 지점에는 저항령이 있다. 비바람과 폭우가 퍼붓는 10년 전의 기억이 너무나 선명하다. 그것은 바로 2008년 태풍 갈매기가 몰아치는 설악산 미시령에서 북주릉&서북능선에서 남교리까지 종주산행(080719~22)이다. 악천후의 날씨에도 춥고 배고프고 최악의 상황을 이겨냈던 기억이다. 한동안 장거리 박산행의 교과서처럼 미산 팀의 정회원이 되기 위한 검증의 필수 코스로 여러 사람들이 이 길을 다시 밟았고 이제는 모두 전설이 되었다. '짐에는 장사가 없고, 술에도 장사가 없다 .'라는 말은 이미 알았지만, 이번 산행에서는 '더위에도 장사가 없다.'는 山行의 質言을 체득한 산행이었다.
♣ 설악산 북주릉&공룡능선과 서북능선 종주산행 http://blog.daum.net/lyg4533/16126004
솔박사로부터 북설악 산행의 콜을 받고 이번 기회가 아니면 금년에는 설악에 가기 어렵겠다는 판단에 선뜻 참가한다는 OK 의사를 밝혔다. 폭염 속에 2회에 거쳐 점필재길 화첩산행을 하였기 때문에 피로가 누적되어 있었지만, 설악의 유혹은 차마 뿌리칠 수 없었다. 무엇보다 비 내리는 저항령의 기억이 너무나 뚜렷하기 때문에 다시 돌아볼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하였다. 길골은 초입부터 저항령까지 완만하고 유순한 길로 이루어져 있다. 황철봉과 저항봉의 너덜겅이 길골 쪽으로는 흘러내리지 않아 설악 속의 육산으로 계곡을 크게 이탈하지 않고 좌우로 길이 주욱 이어져 있다. 아름다운 절경은 아니지만 아름드리 전나무 군락지가 이어져 원시의 미를 간직하고 있다. 건계곡이 시작하고 얼마 되지 않아 길골 상단에 샘이 있는데 그곳부터 저항령까지는 거리가 그리 멀지 않다.
♣ 저항령에 대하여
저항령(低項嶺)은 설악산의 주능선인 북주능선(北主稜線)에 있는 해발 1100m의 고개이다. 북주능선은 주봉인 대청봉에서 북쪽으로 마등령~저항령~황철봉~미시령~신선봉~진부령으로 이어진다. 명칭은 원래 '길게 늘어진 고개'를 뜻하는 '늘으목' 또는 '늘목'에서 유래한 '늘목령'이라 부르다가, 이를 한자로 표기해서 장항령(獐項嶺)이라 표기되었고, 변음되어 저항령이 되었다고 한다. 동쪽으로는 무명용사비가 있는 정고평(丁庫坪)에 닿아있고, 서쪽으로는 길골(路洞)을 거쳐 백담사로 이어진다.[펌]
다음날 일찍 저항령을 출발하여 마등령을 향했다. 저항봉에서 얼마간은 급경사와 오르막이 계속 이어지다가 완만한 흙길이 나타나고 마등봉의 磧石 사면길이 다시 앞을 가로막는다. 솔박사님에게 남은 물을 따라주고 먼저 마등봉에 오르니 곧바로 동해로부터 운무가 밀려와서 주변을 에워싸고 지나온 길을 모두 지워버리더라. 마등령에 배낭을 놓고 샘터로 내려가 날진 병으로 온몸에 찬물을 마구 퍼부었다. 젤트를 설치한 후 이른 저녁을 먹고 홀로 나한봉 방향으로 나아가 조망 터에서 안개가 걷힌 석양의 풍광을 둘러보고 막영지로 내려오니, 수담씨는 이미 깊은 단잠에 빠져있고 나뭇가지 사이로 달이 떠오르고 별이 빛나는 마등령의 밤을 맞는다.
3일차 아침밥을 미리 지어 놓고 이른 새벽 나한봉을 향했다. 날마다 태양은 떠오르지만 특히 설악산 산정에서의 일출은 특별하다. 산에 들면 반드시 치루어 내야하는 의식처럼 그날 일과 시작이기도 하다. 대청봉에서 좌로는 1275봉과 범봉 그 뒤로는 화채능선이 펼쳐져 있고, 우로는 귀때기청봉, 1408봉, 대승령과 안산까지 어둠 속에서 실루엣으로 천천히 그 모습을 드러내며 조용한 아침을 맞는다. 설악의 저항령과 마등령에서 하룻밤을 보낼 산친이 있고, 아직은 체력이 있으니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 아닌가. 마등령에서 오세암으로 내려와 미역국을 공양한 후, 일행들과 백담사로 내려왔다. 답사나 목적 산행이 아닌 유람 산행을 하니 마음도 가볍고 정신적인 消耗도 덜되었다. 함께하신 두 분 무더운 날씨에 고생 많이 하셨습니다.
♣ 영시암에 대하여[펌]
영시암(永矢庵)은 삼연(三淵) 김창흡(金昌翕 : 1653~1722)이 세웠다. 삼연(三淵)은 병자호란 때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간 우의정 김상헌(金尙憲 : 1570∼1652)의 증손자로, 부친은 영의정까지 지낸 김수항(金壽恒 : 1629∼1689)이다. 삼연은 이십대 후반의 나이에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했으나 벼슬을 마다하고 한양을 떠나 한때 강원도 철원에서 살았다. 철원 삼부연폭포(三釜淵瀑布)의 이름은 삼연(三淵)과 인연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노론파의 영수인 부친이 세자 책봉 문제로 사약을 받아 죽임을 당하고, 뒤에 역시 영의정을 지낸 맏형 김창집(金昌集 : 1648∼1722)도 사약을 받고 죽었다. 삼연(三淵)은 오십이 넘어 이곳 내설악 수렴동(水簾洞) 골짜기로 들어왔다. 그는 살 집을 짓고 이름을 영시암(永矢庵)으로 지었다.
永矢庵(영시암)
김창흡(金昌翕 : 1653~1722)
吾生苦無樂(오생고무락) : 내 삶은 괴롭고 즐거움이 없으니
於世百不甚(어세백불심) : 세상 모든 일이 견디기 어렵구나
投老雪山中(투로설산중) : 늙은 몸으로 설악산 속에 들어와
成是永矢庵(성사영시암) : 여기에 영시암永矢庵을 지었노라.
[출처] 가을나들이(1) <내설악 : 백담사-영시암>|작성자 두류봉
「삼연 김선생 영시암 유허지비(三淵金先生永矢庵遺墟之碑)」에 의하면 “기축( 1709)년 10월 조원봉 아래 북쪽에 판잣집 8칸을 짓고 영시암(永矢庵)이라고 이름했다”고 한다. 영시암(永矢庵)이란 이름은 김창흡이 '이 곳에 은거하여 죽을 때까지 세상에 나가지 않겠다.'는 맹세의 뜻을 담고 있다.
황장폭
♣ 황장폭포의 異名
* 黃腸隅(隅 : 모퉁이우) : 유곡연기(遊曲淵記) 김수증 1698년
* 黃腸瀨(瀨 : 여울뢰) : 관동산수기(關東山水記) 성해응(1760-1839)
* 黃腸瀑(暴 : 폭포 폭) : 이조선(裏朝鮮)의 명산(名山)-최남선
황철봉
귀때기청봉
며느리밥풀꽃
귀때기골 초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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