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에 나오는 화적패의 산채 사리암터(180706~07)
▣ 일 시 : 2018년 07월 06일 ~ 07일
▣ 코 스 : 도로 초입 - 사리암터(원점회귀)
▣ 인 원 : 2명(완폭대님)
▣ 날 씨 : 첫날 비, 맑음
지난 달 6월 27일 완폭대님에게 釘(정) 맞은 판석이 사리암터에 있다는 SOS를 받고 지난주에는 태풍과 폭우로 지리에 내려갈 수 없었다. 덕분에 사리암터와 예종과 성종 연간에 火賊 장영기에 대한 자료를 찾아볼 수 있었다. 전라도 무안 출신 장영기라는 도적이 화개동천에 산채를 마련하고 인근 고을을 약탈한 시기는 공교롭게도 점필재 김종직 선생이 두류산을 유람한 두세 해 전의 일이다. 김종직 선생의 유두류록을 좇아 답사한 나로서는 외곽의 이야기지만 유두류록에 나오는 도적 장영기의 山寨가 있었다는 沙里庵址를 필히 답사해야하는 이유가 있다. 선인들의 유람록을 읽고 답사를 하면서 불교에 관한 지식이 日淺하기 때문에, 승탑(부도)에 관한 자료를 검색하다가 30년 동안 전국에 산재해 있는 승탑(부도)을 모두 답사하신 선과 임병기 선생님께 도움을 받았다.
금요일 비는 장대처럼 퍼붓는데 집에 와서 홀로 셀프 점심을 먹고, 식량 2식과 배낭을 하나를 더 싣고 출발을 하는데, 비가 그치지 않아 다시 대형 타프를 하나 더 챙긴다. 고속도로 상황도 비는 오락가락하고, 2시간 30분 만에 약속 장소에 도착해서 꽹이를 가지고 산행에 임한다. 실계곡 초입을 들어서니 산길은 곧추섰고 지그재그 갈지자로 이어진 산길이 된비알로 진행이 된다. 함께한 동행인에 의하면 이 길이 沙里庵으로 가는 가장 빠른 길이라고 한다. 1469년 경상우도 절도사 이극균이 많은 군사를 가지고도 도적을 쉽게 제압할 수 없었던 까닭을 이해할 수 있었다. 고개 마루까지 급경사는 계속되는데 등로 옆에 돌로 쌓은 참호 하나가 눈길을 끈다. 빨치산의 진지가 아니면 혹시 산적 초병의 막터는 아닐었을까 하는 상상이 들었다. 땀으로 온몸을 흠뻑 적시고야 산마루 고개에 올라서 잠시 휴식을 갖는다.
승탑(부도) 터에 도착하니 승탑(부도)과 맞지 않는 큰 신발을 신은 화강암으로 된 청색 줄 무늬의 승탑(부도)이 우리를 맞는다. 예전에 부도는 우측 개활지에 쓰러져 있었는데, 쌍계사에서 무덤 뒤에 임시로 수습해 놓았다고 한다. 나는 승탑(부도)에 대한 식견이 日淺하니, 지대석, 하대석, 중대석, 상대석, 옥개석과 기단부, 탑신부, 상륜부 등 부재의 이름이 다양한데, 지대석 위에 탑신부와 상륜부가 일체형으로 지리산 구중심처 깊은 산중의 승탑(부도)은 탑신부에 양각으로 새겨진 문양이 특이하고 사각으로 된 원통형이다. 배낭을 내려놓고 먼저 지대석에 덮인 흙을 걷어내니 상당한 두께의 장방형 판석이었고, 가운데는 지름 약 60cm 정도의 원통형 홈이 파여져 있었다. 그러는 사이 비는 한 두 방울씩 떨어져 어느덧 배낭의 겉면을 적시고 있었다. 완폭대님이 내일 올라올 팀에게 전화를 하여 막걸리 한 병과 포, 과일을 가지고 오라고 하였다.
어둠이 내리고 오랜만에 타프에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를 들었다. 釘 맞은 판석이 모퉁이만 조금 나와 있었는데 어떻게 눈에 띄었을까. 얼마 전에 '승탑(부도)이 물속에 잠기어 물빛에 어른어른하는 꿈'을 꾸고, 꿈이 이상해서 이곳으로 순찰을 나왔고 한다. 평소 지대석이 제 짝이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그날 마침 정 맞은 판석 모퉁이를 보았고, 그 자리에서 사진을 바로 찍어 내게 보냈다. 나는 승탑(부도)에 관해서도 문외한이라 사학를 전공한 동료에게 도움을 요청하여 자료를 보내주었으며, 완폭대님은 그것을 읽고 자기 자신에게 지대석이나 하대석이 아닐까하는 질문을 던졌고, 그 질문은 급기야 답사 산행으로 이어졌으니, 不狂不及(불광불급)은 이를 두고 하는 말이다.
이른 새벽 새소리에 잠에서 깨어나니 상쾌하기만 하여라. 환희의 빛이 숲을 뚫고 들어와 만물을 일깨우고, 계곡의 물소리 또한 우렁차게 들린다. 이른 아침을 먹고 승탑(부도) 터 주변을 정리하니, 이어서 역사문화조사단 2차 팀 세 분이 올라와 계측을 하고 좌표를 찍고 사진 등 자료를 수집한 후, 제물을 차리고 약식으로 禮를 올렸다. 토지신에게 한 잔, 이름 모를 부도의 주인인 禪師님께 한 잔, 세상을 어지럽힌 흉악한 도적 장영기에게도 한 잔을 가득 따랐다. 산행을 마치고 감사한 마음으로 내가 쓰던 비록 헌 젤트지만, 생각이 같은 동행인에게 快擲(쾌척)하고 올라왔다. 다음 날 사리암터로 올라온 박찬용님, 송승윤님, 박은경님께도 감사를 드립니다.^^ 끝.
인연이란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하나로 시공을 초월하여 소통하고 윤회하는 것인가. 그동안 산에 들어 가치 있는 삶에 대하여 얼마나 많이 고뇌했던가. 맞지 않는 옷을 입고 살았던 30년의 교직생활이 지대석과 짝이 맞지 않는 승탑이 忍苦의 세월을 견디고 서있었던 것처럼.... 생각이 다른 사람들과 마음의 문을 굳게 닫고 전혀 소통하지 않고 살아왔으나, 그 동안 내가 산행을 하며 쌓은 경험과 축적된 자료를 역사문화 보전업무에 관련된 분들과 공유한다고 생각하니, 가슴 한켠으로 뜨거운 희열이 밀려 들어왔다. 오는 길에 어머니를 모시고 함께 저녁을 먹고 집으로 돌아와, 자료를 정리하여 하동 군청 김성채 학예연구사님에게 정리한 자료를 보내주고, 매장문화재 발견신고서를 제출하였다.
화개대교
1일차
故마등자님에게 먼저 한 잔 올리고 ...
새벽 숲의 향기
2일차
현부도와 본래 부도터의 지대석 위치
방향이 황장산을 향하고 있음
가로 140cm
세로 110cm
두께 25cm
지름 62cm
부도탑 높이 120cm× 폭 60cm/탑신 상단 문양
☞ 사리암터와 도적 장영기 관련 문헌 자료
1. 조선왕조실록
가. 예종실록 예종 1년 1469년(己丑) 11월 1일(辛巳日)
경상우도 절도사(慶尙右道節度使) 이극균(李克均)이 치계(馳啓)하기를,
"진주(晉州)의 목사(牧使)와 판관(判官)이 광양현(光陽縣)의 보고를 받고 출동하여 화개현(花開縣)에 이르러 도둑을 보리암(菩提庵)의 옛 터전에서 발견하였는데, 도둑들이 초막 19간을 짓고 제대(祭臺)를 설치하였으며, 버려두고 간 말이 14필 있었는데 안장을 혹은 찢어버리고 혹은 불살랐으며, 한 남자를 죽였다 합니다. 구례(求禮)의 백정(白丁) 철산(哲山)이 이르기를, ‘내가 구례현감을 따라 도적과 더불어 보리암 골짜기에서 싸우다가, 현감이 패배(敗北)하여 퇴각하자 도적이 군사 3인을 죽이고 도망하였습니다.’ 하였습니다. 생각건대, 반드시 지리산(智異山)으로 깊이 들어갈 것이므로, 신이 곧 진주로 가서 본주(本州)와 사천(泗川)·곤양(昆陽)·하동(河東) 등 고을의 군사를 뽑아 거느리고, 화개동구(花開洞口)에 진을 치고 도둑들의 종적을 탐후(探候)하니, 도둑들은 사리암(沙里庵)의 옛 터전에 둔치고 있었습니다. 그 곳은 진을 친 곳에서 60여 리나 떨어져 있고 산길이 험악하므로, 신이 불의(不意)에 엄포(掩捕)하고자 하여 군사로 하여금 모두 도보로 도둑들의 둔친 곳에 이르게 하니, 도둑들이 먼저 고개 위로 올라가고, 그에 앞서 여인(女人)과 치중(輜重)을 보내버렸습니다. 도둑 16인이 신의 선봉(先鋒)과 더불어 싸웠는데, 신이 30여 리를 추격하면서 모두 여섯 번 합전(合戰)하여 도둑 오덕생(吳德生)을 활로 쏘아서 잡고 그의 재산을 탈취하였으며, 도둑들이 밤을 타서 크게 부르짖으며 관군의 진에 쳐들어 왔으나, 신의 복병(伏兵)이 배후에서 쫓으며 활을 쏘니, 도둑들이 이에 도망하여서 구례로 향하였습니다. 신이 40리를 따랐으나, 식량이 다하고 행군한 지 3일에 군사들이 피곤해 하므로, 군사들을 퇴각시키고 본진의 군사로 하여금 진을 쳤던 곳에 머물러 방호(防護)하게 하고, 탈취한 재산은 진주로 부쳤습니다."라고 하였다.
이 전투에서 이극균이 보병을 거느리고 도둑이 둔치고 있는 봉우리를 포위하자, 도둑이 그 아내로 하여금 갈고(羯鼓)를 치게 하고, 모든 도둑으로 하여금 봉우리의 아래로 나누어 지키게 하며, 관군 두 사람을 활로 쏘아 맞히고, 드디어 이극균을 핍공(逼攻)하므로, 이극균이 위로 공격하는 것이 불리하여 마침내 수리(數里)되는 곳에 물러와서 둔을 쳤다. 군졸 하나가 돌이 구르는 소리를 듣고 도둑들의 짓이라고 말하자, 모두 놀래어 도주하였다. 그때 날이 이미 어두우므로 모든 군사들이 서로 짓밟으면서 삽시간에 흩어졌다가 한참 뒤에야 〈적도들의 소행이 아닌 줄을〉 알고 조금씩 도로 모여서 행군하였는데, 한밤중에 도둑들이 진으로 돌진(突進)하여 산에 불을 놓아 자취를 없애고 도망하니, 관군이 두려워서 감히 움직이지 못하였다. 출처 :【태백산사고본】 3책 8권 15장 A면【국편영인본】 8책 427면 【분류】사법-치안(治安)
☞ 조선왕조실록 慶尙右道節度使)이극균(李克均)이 치계(馳啓)하기를 : http://sillok.history.go.kr/id/kha_10111001_002
나. 성종실록 성종 1년(경인) 1470년 2월 1일(경술)
허종(許琮)이 치계(馳啓)하기를,
"장영기(張永奇) 등이 이달 21일에 장흥(長興) 땅에 이르렀으므로, 신이 부사(府使) 김순신(金舜臣)과 더불어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포위하여 장영기를 사로잡고 그들의 무리 중에 서불정(徐佛丁)을 쏘아 죽였는데, 다만 김순신이 도둑의 화살에 맞아 가슴을 상하였습니다. 남은 무리들은 도망하여 달아났으므로, 다시 근심(根尋)하여 쫓아 잡게 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출처 : 태백산사고본】 1책 3권 1장 A면【국편영인본】 8책 462면 【분류】사법-치안(治安)
☞ 조선왕조실록 전라도 병마절도사 허종(許琮)이 치계(馳啓)하기를 : http://sillok.history.go.kr/id/kia_10102001_006
조선왕조실록에 도적 장영기에 대한 기록은 여러 번 등장한다. 경상우도 절도사 이극균의 토벌군을 맞아 지형이 험준한 곳에서 진을 치고 저항하여 이극균이 끝내 진압하지 못하고, 도적 장영기는 지리산을 탈출하는데 성공하지만, 성종 1년 1470년(경인) 2월 1일(경술) 전라도 병마절도사 허종과 장흥부사 김순신에게 전라도 장흥에서 체포되어 처형을 당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2. 김종직선생의 유두류록 1472년 8월 17일
점필재 김종직 선생은 창불대에 올라 해공이 신흥사동을 가리키며 위치를 설명하자 도적 장영기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여러 구렁이 모인 곳을 가리키면서 신흥사동이라고 하였다. 일찍이 절도사 이극균이 호남의 도적 장영기와 여기에서 싸웠는데 영기는 구서 같은 자라서 험준한 곳을 이용했기 때문에 이공 같은 지용으로도 그가 달아나는 것을 막지 못하고 끝내 장흥부사에게로 공이 돌아갔으니, 탄식할 일이다.(空指衆壑之會曰。新興寺洞也。李節度克均。與湖南賊張永己戰于此。永己。狗鼠也。以負險故。李公之智勇。而不能禁遏其奔逬。卒爲長興守之功。可嘆已。)
3. 1652년 임진 5월 16일(병술) 전 장령 안방준의 상소
옛날 태평 무사(太平無事)하던 날에 장영기(張永起)·임거정(林巨正)과 같은 강적들이 연달아 일어났는데, 장영기는 이극균(李克均)에게 패배하여 호남 지방으로 도망하여 죽었고, 임거정은 방어사 남치근(南致勤)을 파견하여 한 도의 병사를 출동시켜서 사방에서 포위하였으나, 서림(徐霖)이 투항하여 의로움에 향하지 않았더라면 1년 내에 적의 괴수를 쉽게 잡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在太平無事之日。强賊如張永起。林巨正之徒。相繼而起。永起爲李克均所敗。走死湖南。巨正至遣防禦使南致勤。動一道之兵。四出追捕。倘非徐霖投降嚮義。則一年之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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