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六友堂記/산행기록

1610년 박여량의 두류산일록에 나오는 兩流菴(180623~24)

도솔산인 2018. 6. 25. 06:19

 

 

1610년 박여량의 두류산일록에 나오는 兩流菴(180623~24)

 

 

▣ 일   시 : 2018년 06월 23일 ~ 23일

▣ 코   스 : 새재-상류암터-독바위-석문-부도터-어름터-두류암터-광점동

▣ 인   원 : 출발 4명(一丁님, 솔박사님, 송연목님), 독바위 (미산님, 조박사님), 무명암자부도터(조봉근님), 어름터(조중제님)

▣ 날   씨 : 한여름 날씨

 

 

지리는 바야흐로 춘추전국시대 제자백가가 쟁명하는 곳이 되었다. 산행의 流派(유파)를 굳이 분류한다면, 足遊家(족유가)가 있고 目遊家(목유가)가 있고 食遊家(식유가)가 있고 酒遊家(주유가)가 있고, 心遊家(심유가)가 있고, 수많은 자료로 모아 놓고 삿(邪ㅅ)된 소설을 쓰는 小說家가 있고, 심지어 내로남불 黃鳥歌(황조가)를 읊으며 짝을 찾아 求愛(구애)를 하는 獵色家(엽색가)도 있으니, 과연 百家爭鳴(백가쟁명) 시대라고 할 수 있다. 나는 거창하게 지리 인문학을 연구하는 사람도 아니고, 이것도 저것도 잘하는 재주가 없으니 아무것도 내세울 것이 없다. 다만 최근 들어 선인들의 유산기에 전하는 兩流菴(양류암)에 대한 논란이 다시 일어, 상류암과 두류암을 다시 찾게 되었다. 兩流菴(양류암:上流菴과 頭流菴)에 대한 내 생각은 지극히 주관적이며 판단의 오류가 있을 수 있음을 전제한 것이니, 오류가 있다면 눈이 밝은 후답자가 바로잡아주길 기대한다.

 

 

 

1. 상류암에 대한 나의 생각

 

상류암은 1610년 박여량의 두류산일록과 1632년 성여신 등이 편찬한 진양지, 그리고 산청군지에 잠시 나올 뿐이고 다른 문헌에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박여량의 두류산일록과 진양지를 근거하여, 상류암이 독바위 능선에 있다고 생각하고 상류암에 접근하였다. 폐암자터를 찾는데 반드시 와편이 나와야 폐사지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조선시대 儒者(유자)들의 유람기에 등장하는 깊은 산속에 있는 암자의 지붕이 기와라는 기록은 영신암 하나이다. 조선시대 수많은 儒者(유자)들이 찾았던 불일암만 보더라고 암자를 卍茅(만모)로 표현하였고, 산신각조차도 판자 또는 너와집으로 기록하고 있다. 여기에서 卍은 梵語(산스크리스트어)로 절이라는 뜻을 한자로 음차하면서 万茅(만모) 또는 萬茅(만모)로 기록하였는데, 산죽이나 갈대로 지붕을 덮은 암자를 뜻한다.

 

가. 1610년 박여량 [두류산일록]의 上流庵址에 대하여 http://blog.daum.net/lyg4533/16488197

나. 1610년 박여량 [두류산일록]의 上流庵址를 찾아서I(180413~15) http://blog.daum.net/lyg4533/16487928

다. 1610년 박여량 [두류산일록]上流庵址를 찾아서II(180504~06) http://blog.daum.net/lyg4533/16487945

 

 

 

 

2. 불일암에 대한 기록

 

가. 1618<조위한>[遊頭流山錄]

불일암에 도착하니 절은 오래 되었는데 승려는 없고 단청은 떨어져 나가 있으며 빈 감실(龕室)은 고요하고 창문은 영롱(구멍이 뚫리다)하였다.

나. 1727<김도수>[남유기]

암자에 도착해보니, 방 가운데 차가운 바람이 불어 마치 귀신이 휘파람을 부는 것 같았다.[卽之室中. 陰風颯颯. 如鬼物交嘯.]

다. 1743, 정식 [청학동록(靑鶴洞錄)]

청학동의 만모(万茅)(卍은 부처님 가슴에 새겨져 있는 문양으로 암자를 뜻함. 卍은 凡語로 萬으로 음역함)는 하나의 산수굴(山水窟)인데....

라 1883<전기주>[유쌍계칠불암기]

이것이 바로 불일암(佛日菴)이었다. 그 뒤로는 산신각(山神閣)이 있었는데, 완전히 박달나무 껍질로 기와를 대신했다.

 

마. 1899<하겸진>[유두류록(遊頭流錄)]

암자(불일암)는 폐허가 되어 무성한 잡초만 가득하고 단지 도토리 껍질로 뒤덮인 산제각(山祭閣)만 있었다.

바. 1902년 송병순의 [유방장록]

불일암은 무너졌고, 산신당(山神堂)만 남아 있었다.

사. 1926년 이현욱의 [지리산 유람기록]

국사암에서 5를 오르면 환학대가 있으며 다시 5를 가면 띠 풀로 지붕을 덮은 암자가 하나 있는데 그것이 불일암이라고 하였다.[菴之上五里. 有喚鶴臺. 又五里有覆茅一庵. 卽佛日也.]

아. 1928 오정표의 [유불일폭기]

홀연히 절 하나가 정상에 있는데 꽃과 나무로 둘리어져 있고 흰 띠로 지붕이 덮여있는데, 이름이 불일암(佛日菴)이었다.[忽見有一刹. 出頂上. 環以花木白茅覆之. 是名佛日菴.]

 

 

 

 

 

따라서 지리산의 첩첩산중에 있는 암자의 지붕이 기와라고 단순하게 생각하는 것은 커다란 오판이다. 만약 지붕이 기와라면 산신각 정도이고, 산신각도 너와집이나 띠(茅), 산죽으로 지붕을 덮은 형태였다. 卍茅(만모)가 암자 지붕의 대체적인 형태라고 보아야한다. 청파(靑坡) 이륙(李陸)의 지리산록(遊智異山錄)에 당시 영신사에 대한 설명이 나와 있다. '절은 모두 목판(木板)으로 지붕을 덮었는데, 살고 있는 중이 없었다 . 오직 영신사만 기와로 지붕을 덮었다.'라는 기록을 보더라도 瓦片(와편)이 있어야 암자터라는 전제는 커다란 착각이다.

 

 

 

3. 두류암에 대한 나의 생각

 

 

점필재 김종직 선생의 유두류록을 읽고  첫 답사를 한 것이 '지리 동북부 함양독바위 산행(080926~27)'을 한 후, 이어서 2주 뒤에 2박 3일간 [점필재 500년 전 옛길을 가다(081010~12) http://blog.daum.net/lyg4533/16487467] 산행을 하였으니, 선인들의 유람 길 답사 산행이 어느덧 12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지금도 같은 생각이지만 나는 늘 선답한 분들에 대한 존경심과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 처음에 온라인의 생리를 잘 모르고 내 개인적인 의견을 이야기 한 것이 커다란 실수였던 것 같다. 영신대와 청학연못, 영랑재, 소년대, 마암과 행랑굴 그리고 청이당터, 지장암지과 두류암지, 향로봉과 미타봉, 최근 상류암과 초령 등에 이르기까지 나는 나에게 수많은 질문을 던졌고 그것은 답사 산행으로 이어졌다. 이륙 선생의 말씀대로 '산은 하나인데 사람마다 보는 것이 같지 않음은 어째서인가?(山一也. 而人所見不同. 何也.)'라는 의문 또한 풀리지 않았다. 점필재 김종직 선생의 유람길에 대한 해석이 가객님과 많이 다른데, 분명히 다르다는 점을 밝혔는데, '兜率이 가객누님이 다 한 것을 copy해서 자기가 했다.'라고 하고, 심지어 '병충해에 이어 혹세무민'이라는 비난을 감수해야했다. 나는 이런 유치한 作態(작태)를 조용히 지켜보았다.

 

가. 지리구구 강퇴(17.07.04) 이후 운영진과 당여들의 옥설과 비난 사례 : http://blog.daum.net/lyg4533/16487874

 

아직도 미완이지만 지난해 두 번의 점필재길 전 구간을 답사한 후에, 10월에는 감수재 길을 답사하고 상류암을 풀지 못하는 와중에도, 작년 여름부터 유몽인이 하룻밤 쉬어간 두류암지에 대한 문헌의 기록을 찾다가, 유몽인의 두류암 시를 읽게 되었고, 부도가 있는 무명암자터가 두류암터가 아닐 것이라는 추정을 하게 되었다. 부도가 있는 곳이 두류암터라면, 두류암을 다녀간 선인들의 유산기에 부도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을 터, 그러나 어떤 유산기와 문헌에도 부도에 관한 기록이 없다. 

 

이번 산행에서 유몽인의 유산기에 나오는 암자 북쪽의 높은 대에 직접 올라가 옥구슬을 꿴듯한 臥폭포를 다시 확인하였고, 直폭포 아래로 내려가서 한 시간 넘게 폭포의 용두질하는 거친 숨소리를 들었다. 나는 내 생각이 오류일 수 있고 잘못 판단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산을 알고 글을 아는 후답자가 문헌을 읽고 답사를 한 후에 판단할 일이지, 많은 오류를 대량 생산한 선답자가 시시비비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유산기를 잘못 해석하고 잘못 판단하고 잘못 발표할 수는 있다. 그러나 오류가 확인되면 바로 수긍하고 수정하는 것이 진정으로 아는 것이고 용기가 있는 사람이다. 우리는 마추어 踏査家(답사가)일 뿐, 불교사나 고고학 또는 역사를 전공한 전문가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정확한 판단은 식견을 갖춘 전문가나 후답자가 할 수 있도록 조용히 기다리는 인내가 필요하다.

 

 

 

나. 1611년 유몽인 선생의 두류암에서 옹암 가는 길(171202~03)  http://blog.daum.net/lyg4533/16487891

다. 1611년 유몽인 선생 용유담에서 두류암 가는 길(180526~27) http://blog.daum.net/lyg4533/16487975

 

라. 천령지의 두류암에 대한 기록

 

鄭秀民(정수민,15771658)이 편찬한 천령지(天嶺誌)'두류암은 군자사 동쪽 30리 지점에 있다. 동쪽에 송대가 있는데, 운치가 그윽하고 한적하다. 지금은 없다.[頭流庵在君子寺東三十里 東有松臺 韻致 幽閑(今無)]'라는 문구가 있다.

 

천령지(天嶺誌) : 1656(효종 7) 정수민(鄭秀民)이 편찬하고 1888(고종 25) 후손 정환주(鄭煥周)가 간행함.[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정수민(鄭秀民)의 천령지(天嶺誌) 기록대로라면 '두류암 동쪽에 송대마을이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부도터에서 송대 마을이 동쪽에 있는지', '부도터 북쪽에 대[암자 북쪽에 대(臺)]가 있어 그곳에 올라 정남쪽을 바라보니, 바위 사이로 폭포수가 쏟아지는지', 현장을 답사하고 지리산길 지도를 확인해 보면 된다. 부도터에서 송대 마을은 서북쪽 巽方(손방)에 위치해 있고, 지산대 아래 범종이 있는 곳에서 동북방 곤방(坤方)에 송대 마을이 있으니, 천령지의 기록과 일치한다. 그렇다면 또다시 1611년 어우당 유몽인의 두류산록과 1656년 정수민(鄭秀民)이 편찬한 천령지(天嶺誌)의 기록이 오류라고 할 것인지... 맨 마지막 今無는 정수민(鄭秀民)천령지(天嶺誌)편찬한 시기(1656)에는 두류암이 있었고, 천령지(天嶺誌) 家藏(가장 : 간행되지 않고 후손에 의해 집에 보관 됨)되어 있다가, 후손 정환주(鄭煥周) 간행한 시점(1888)에 今無가 추가 기입한 것으로 이해하고, 그 시점에는 이미 폐사되었다는 의미로 보아야한다. 현재 전해지는 천령지는 정환주(鄭煥周)의 간행본(1888)이다.

 

 

4. 贅言(군말)

 

아무튼 400년 전의 상류암 존재를 창원에 사는 崔生員 일행이 60여 년 전 지리산 골짜기에서 태어난 6학년 8반 노인에게 물어보고 확답을 얻었다니 참으로 신기하기만 하다. 勿論 선인들의 유산기도 오류가 있을 수 있다. 선인들의 기록을 오류라고 단정하고 口傳을 앞세우니 소설이 되고 창지개명을 하는 것이다. 선답자가 완폭대를 찾지 못한 것 역시 선인들의 기록을 믿지 못하고, 추정에 너무 치우쳤기 때문이다. 선답자가 99개의 암자터를 찾았다고는 하나, 내가 확인한 것 중 맞는 것은 三涅庵(삼열암) 뿐이다. 따라서 口傳은 사실에 접근하는 한 가닥 미세한 근거를 찾는 수단일 뿐이지, 지명을 고증하는 자료는 아니다. 역사적인 사실을 고증을 하는데 있어서, 백세가 넘는 노인의 口傳일지라도 선인들이 남긴 한 줄의 기록만 못하다는 것이다. 이미 선답자로서의 역할은 끝났다고 본다. 앞으로는 陳腐(진부)하게 지리 인문학에 대하여 더 이상 論하지 말라.

 

墨子(묵자)'天下無人'이라는 말이 있다. '천하에는 남이 없다.'는 말이다. 비슷한 말로 부처님 말씀에 '自他不二'라는 말도 있다. '나와 남이 둘이 아니다.'라는 뜻이다. 儒家에서는 이것을 '大同'라고 한다. 선인들의 지리산 유람 길에 대하여 누구나 관심을 가질 수 있고, 누구나 자유롭게 의견을 개진할 수 있다. 지리산은 우리 민족의 영산이지 특정인이나 특정 단체 특히 지리99의 산이 아니기 때문이다. 큰 선심을 쓰듯 '어떤 의견(영랑재)을 자꾸 주장하여 받아들여줬더니.....'라거나, '가는 길이 달라서 더 이상 道伴(도반)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기에(완폭대)...'등등, 상대를 嫌惡(혐오)하는 글을, 당사자의 동의 없이 온라인 포털사이트에 올렸다고 생각해보자끝.

 

 

 

 

상류암터 전망대에서 바라 본 써리봉과 조개골

 

 

巖塊

 

 

 

 

 

 

 

 

맷돌(180414~15)

 

 

석축 가로(약28m)

 

 

건물 석축

 

 

건물 석축(용도 미상)

 

 

괴목

 

 

 

 

 

 

甕巖(독바위)

 

 

 

 

 

 

 

 

 

 

 

 

 

 

 

 

 

 

 

 

石門

 

 

 

 

 

 

 

 

 

 

 

주등산로

 

 

무명암자 부도

 

 

문확석(門樞石) : 문지도리석

 

 

 

 

무명암자터 확

 

 

의병장 석상용 장군 묘

 

 

조셰프의 솜씨

 

 

1922년 권도용 방장산부(方丈山賦)에 보이는 氷峙(빙치 : 어름터 넘어가는 고개)

 

 

 

 

 

 

 

 

 

 

 

 

 

 

乙亥 三月 日(아래에 鄭允洪, 三洪, 宇洪 형제의 이름이 보인다)

 

 

유몽인이 두류산록에 '옥구슬 발'로 기술한 와폭

 

 

유몽인이 두류암 시에서 절구질로 표현한 여궁폭포(?)

 

 

어우당이 올라가서 폭포를 바라보았던 臺

 

 

 

 

 

 

 

 

대 위에서 내려다 본 와폭

 

 

 

 

어우당이 올라갔던 북쪽 대

 

 

 

 

# 기타 관련 유산기의 자료

 

1. 1922년 권도용 방장산부(方丈山賦)에 보이는 氷峙(빙치) 

 

4월 기망(旣望 *16) (벽송사 출발)

 

 

惟禪應之指路 幾俗臘之古稀 得般若之道力 倏登陟而如飛 憩氷峙徐進 得盤陀之石磯 出二派而匯合 成 自然之淸潿 蒼藤古木湲依依 山禽效吟樵歌忘機 遂乃弛擔午䭜脫略交譚 太守請余而錫名 名之曰三乂巖 溪壑荵蒨於耳 郭峯巒糾紛於眼簾 過杜里之廢寺 有兩巖之交粘 問奚名 則曰金剛門 亦禪師之權辭以拈眡

 

[국역] 승려 응지가 길을 인도하였는데 세속 나이로 거의 고희에 가까웠지만 빠르게 산을 오를 때는 마치 나는 듯하였다. 빙치(氷峙)에서 쉬었다. 천천히 나아가 너럭바위에 이르렀는데 여울이 두 갈래로 흘러오다가 합쳐 저절로 맑은 웅덩이가 되었다. 푸른 등나무 고목은 물가에 푸릇푸릇하고, 산새는 나무꾼의 노래를 흉내 내어 울어 세상일을 잊게 하였다. 마침내 짐을 내리고 점심을 먹으면서 간단히 얘기를 나누었다. 태수가 내게 바위의 이름을 지어 달라고 청하여, 삼예암(三乂巖 *물결이 세 갈래로 둘러싼 바위)이라 이름 붙였다. 골짜기의 물소리 또렷이 귓가에 들리고 산봉우리들 중첩되어 눈앞에 보였다. 두리(杜里)의 폐사(廢寺)를 지나니 양쪽의 바위가 서로 붙어 있는 곳이 있어 무엇이라 부르는지 물었더니 금강문(金剛門)이라 하였다. 이 또한 승려들이 보이는 대로 갖다 붙인 말이다. [출처 : 지리99 이재구 선생]

 

☞ 권도용(1878-1959) : 근세의 유학자이자 언론인‧독립운동가.

 

 

 

 

2. 1924년 강계형의 <두류록(頭流錄)>

○ 1924년 8월 18일(송대 출발)
後先到塲巖 訪申友致九泰卿 仲兄景伯氏時在此處 而聞奇與致九 及其隣老金禹瑞亦尾 而行致範與其子負鼎鐺 而從又有一年少 使一童子負衣袱 而西來者 近視則基洞鄭生泰正 方學究於長在洞者也 遂序立前進 纔到缶項 而喉渴無涎矣 迤到扉峴 訪友致祚 則兒言少選當返 而恐其失伴 努力登途 過上下石門 門之兩傍皆石 而中通一逕 巖形上合 而中虛可容十餘人 以白書通天門三字於石面 漸漸前進置艾峴 路於左便而取右 路踰麓 則天禮碭

선후로 장암(塲巖 *마당바위)에 도착하여 벗 신치구(태경)를 방문하였는데 때마침 그의 중형 경백씨가 그 자리에 있다가 얘기를 듣고는 치구와 함께하였고 그 이웃노인 김우서도 행렬의 끝에 붙었다. 치범은 그의 아들과 함께 솥을 지고 따랐고, 또 한 젊은이가 동자 하나에게 옷 보따리를 지게 하여 서쪽에서 오는데 가까이서 보니 기동의 정선비 태정이었고 막 장재동의 글방 선생이 된 사람이었다. 드디어 차례로 서서 나아가 겨우 장구목[缶項부항]에 도착하니 갈증이 나고 침이 말랐다. 곧이어 사립재[扉峴비현]에 당도하여 벗 치조를 방문했더니 아이가 말하기를 조금 있으면 돌아올 거라 했지만 일행에게 뒤쳐질까봐 힘써 길을 올랐다. 아래 위의 석문을 지났다. 문의 양쪽은 모두 바위이고 가운데로 한 줄기 좁은 길이 통하였다. 바위의 모양은 위가 붙어있고 가운데가 비어 십 여인을 수용할 수 있으며 흰 글씨로 통천문(通天門) 세 글자가 석면에 쓰여 있었다. 점점 앞으로 쑥밭재[艾峴애현]로 나아가는데 길은 왼쪽으로 가다 오른쪽으로 향했으며 산기슭을 넘자 천례탕(天禮碭 *하늘에 제사지내는 돌)이었다. [출처 : 지리99 이재구 선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