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인들의 유람록에 나오는 지장사와 지장암(180817)
1472년 점필재 김종직 선생의 유두류록에 노장동의 지장사와 1558년 남명 조식 선생의 유두류록에 불일평전의 지장암이 나오는데, 이름은 같지만 각각 다른 곳에 위치해 있는 암자이다. 암자터를 찾는데 덮어놓고 '와편이 반드시 나와야 암자터다.'라는 전제는 옳지 않다고 본다. 1463년 <이륙>선생의 유지리산록에 '산꼭대기에 있는 향적사 등 몇 개의 절은 모두 목판으로 지붕을 덮었는데, 오직 영신사만 기와로 지붕을 덮었다.'라는 기록으로 미루어 와편과 폐암자를 연결시키는 것은 당시 승려의 사회적인 지위나 신분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생각이다. 불일암에 대한 선인들의 유람록을 보더라도 기와지붕이 아닌 너와집(판자나 굴참나무 껍질)이거나 갈대(茅)나 산죽으로 지붕을 덮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卍茅가 산중 암자 지붕의 대체적인 형태라고 보아야한다.
♣ 卍茅 : 띠나 갈대, 산죽 등으로 지붕을 덮은 암자.
1. 지리동북부 노장대 마을의 자장사
가. 1472년 김종직선생의 유두류록
○ 8월 14일 무인일 덕봉사(德峯寺)의 승려 해공(解空)이 와서 그에게 길을 안내하게 하였고, 또 한백원(韓百源)이 따라가기를 요청하였다. 마침내 그들과 함께 출발하여 엄천(嚴川)을 지나 화암(花巖)에서 쉬고 있는데, 승려 법종(法宗)이 뒤따라왔다. 그에게 지나온 곳을 물어보니 험준함과 꼬불꼬불한 형세를 매우 자세하게 알고 있었다. [亦令導行。至地藏寺路岐。: 또한 길을 인도하게 하여 지장사 갈림길에 이르러] 말에서 내려 짚신을 신고 지팡이를 짚고 오르는데, 숲과 구렁이 깊고 그윽하여 벌써 경치가 뛰어남을 깨닫게 되었다.
十四日戊寅. 德峯寺僧解空來. 使爲鄕導. 韓百源請從. 遂歷嚴川. 憩于花巖. 僧法宗尾至. 問其所歷. 阻折頗詳. 亦令導行至地藏寺路岐. 舍馬著芒鞋. 策杖而登. 林壑幽窅. 已覺勝絶.
나. 지장사터 추정지 사진자료
1742년 8월 14일 점필재 김종직 선생이 '지장사에 들렀느냐 들르지 않았느냐?'를 놓고 구두점의 시비가 있었지만, 선답자가 자기의 주장을 관철하기 위해 심지어는 선인들의 유람록이 오류라고 주장하는 것을 보았다. 나는 선답자가 발표한 지장사 터는 2008년 첫 답사할 때부터 의문을 던졌고, 의문은 답사로 이어져 옥계(玉溪) 노진(盧禛)의 '샘물 소리가 이른 새벽 단잠을 깨우네.'라는 시구에 주목하였다. 지난 7월 20일 지장사터와 샘터를 확인하였고 8월17일 지리산국립공원 역사문화조사단에서 2차 답사를 하고 사진을 보내왔다. 지장사에 관한 문헌의 자료가 희소한 싱태에서 단정짓기는 어려우나 점필재와 옥계의 기록을 근거로 이곳이 지장사 터가 아닌가 추정한다. 이곳은 돌배나무에서 직선거리로 178m에 위치해 있으며 분명한 것은 1472년 8월 14일 점필재는 지장사에 들르지 않았다.
다. 옥계 노진의 야숙지장암(夜宿地藏庵)
夜宿地藏庵
노진(盧禛)[1518~1578]
山中無俗物 : 산중이라 세속의 잡된 일 없어
煮茗聊自飮 : 차 끓여 심심찮게 따라 마시며
坐愛佛燈明 : 앉아서 환한 불등 고이 보다가
深宵始成寢 : 깊은 밤 가까스로 잠이 들었지
還有石泉響 : 헌데 또 바위틈의 샘물 소리가
冷然驚曉枕 : 돌연 새벽 단꿈을 놀래 깨우네
<玉溪集>
노진(盧禛)[1518~1578] 조선 중기 남원에서 활동한 문신. 옥계(玉溪) 노진(盧禛)[1518~1578]은 조선 중기 명종과 선조 연간에 주로 활약한 문신으로, 30여 년 동안 청현(淸顯)의 관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지례현감과 전주부윤 등 외직에 나가서는 백성에게 선정을 베풀어 청백리로 뽑히기도 하였다. 성리학과 예악에 밝았다. 노진은 1518년(중종 13) 함양군 북덕곡 개평촌에서 태어났으나 처가가 있는 남원에 와서 살았다. 효심이 뛰어나 노모를 봉양하느라 지병이 악화되어 1578년 향년 61세를 일기로 생을 마쳤다.
2. 화개동천 불일평전의 지장암
가. 1558년 남명 조식선생의 유두류록
동쪽으로 있는 폭포는 나는 듯 백 길 낭떠러지로 쏟아져 학담(鶴潭)을 이루고 있었다. 내가 우옹을 돌아보고 말하기를, “물이란 만 길의 골짜기를 만나면 아래로만 곧장 내려가려고 하여, 다시는 의심하거나 돌아보지 않고 앞으로만 내려가니, 이곳이 바로 그곳이네.”라고 하였더니, 우옹이 말하기를, “그렇네.”하였다. 정신과 기운이 상쾌하였지만 오래 머무를 수는 없었다. 잠시 후 뒤쪽 능선으로 올라가 두루 지장암(地藏菴)을 탐방하니 모란이 활짝 피어있었다. 한 송이가 한 말 정도가 되는 붉은 꽃이었다.
東面瀑下. 飛出百仞. 注爲鶴潭. 顧謂愚翁曰. 如水臨萬仞之壑. 要下卽下. 更無疑顧之在前. 此其是也. 翁曰. 諾. 神氣颯爽. 不可久留. 旋登後崗. 歷探地藏菴. 牧丹盛開. 一朶如一斗猩紅.
나. 내원수행처 자봉스님의 증언 자필 채록
지난 6월 18일 지리산 청학동 학술심포지엄에 참석하기 위해 행사 전날 내원암에서 1박을 하였는데, 자봉 스님께서 뜻밖에 불일평전의 지장암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셨다. 1962년 14세에 쌍계사로 출가를 하셨는데, 당시 지장암(봉명 산방터)에 비구니 노스님이 계셨다고 기억하셨다. 노스님이 돌아가신 후 절은 무너졌고, 그 후에 농사짓는 사람이 들어와 농가를 짓고 살다가 그가 떠난 후 1974년경 서재덕씨가 들어와 약 3년간 음료수를 팔았다고한다. 이어서 1977년경 상불암터에서 공부하시던 변규화 선생께서 이곳에 들어왔는데 변선생과는 호형호제하며 자별하게 지냈으며 변선생의 개인사에 대해 자세히 알고 계셨다. 8월 13일 스님께서 내게 전화를 하셔서 그날 스님의 말씀을 상기하니 직접 자필로 적어서 카톡으로 보내오셨다. 스님은 1949년생, 현재 70세로 내원수행처에서 살고 계신다. ♣ 자봉스님 HP : 010-4859-1389
* 남명선생의 유두류록과 자봉 스님의 말씀에 차이가 있어 불일 평전 지장사 터에 대한 판단은 유보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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