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六友堂記/实踐人文

雙磎石門(쌍계석문) 관련 유람록과 기행시

도솔산인 2018. 9. 10. 17:54

雙磎石門(쌍계석문) 관련 유람록과 기행시

 

1. 14638월 청파 이륙 선생의 유지리산록

 

쌍계사(雙磎寺)는 신라의 문사 고운(孤雲) 최치원이 글을 읽던 곳이다. 뜰에 백 아름 정도 되는 늙은 회화나무가 있는데 그 뿌리가 북쪽으로 작은 시내에 뻗어 넘어간지라 다리처럼 반석에다 묶어 놓고 절의 승려들이 다리로 삼아 왕래한다. 세속에서 전하기를, “고운이 손수 심은 것이다.”라고 한다. 골짜기 입구에 바위 두 개가 문처럼 서 있는데 쌍계석문(雙磎石門)네 글자를 크게 써놓았고 절 앞에도 오래된 비가 있는데 모두 최치원이 쓴 것이고 비문도 그가 직접 지은 것이다. 이 절은 섬진강과 가까워 이곳 승려들은 절 서쪽에 있는 최공(崔公)의 서루(書樓)에서 섬진강물을 속속들이 바라볼 수 있고 아직 그 집터가 남아 있다고 한다. 계곡물이 너무 맑고 깨끗해서 세속에서 밥 지어 먹는 사람들이 사는 곳이 아닌 듯하다.

 

雙磎寺. 新羅文士崔致遠孤雲. 嘗讀書于此. 庭有老槐幾百圍. 其根北度小澗. 盤結如橋. 寺僧因以爲橋以往來. 諺傳. 孤雲手植. 洞口二石. 如門而立. 有大書雙磎石門四字. 寺前有古碑. 孤雲所書. 碑又其所撰. 寺近蟾津. 居僧以爲寺西舊有崔公書樓. 通望津水. 遺址尙存. 其溪澗洞壑. 極爲蕭洒. 殆非煙火食者所居.

 

 

2. 1487 년 추강 남효온 선생의 지리산일과

 

109. 서쪽에서 동쪽으로 시내를 건너니 양쪽에 문같이 생긴 바위가 있었는데, 쌍계석문(雙溪石門)이라는 네 글자가 큰 글씨로 새겨져 있었다. 이 글씨는 문창후 (文昌侯) 최치원(崔致遠)이 손수 쓴 것이다. 석문 안쪽으로 1, 2리쯤에 쌍계사가 있었다. 내가 승려에게 묻기를, “청학동이 어디에 있습니까? [누가 이곳을 청학동이라고 하는가?]”라고 하니, 의문이 말하기를, “석문 밖 3, 4리 못 미쳐 동쪽에 큰 동네가 있는데 그 동네 안에 청학암(靑鶴庵)이 있으니 아마도 그곳이 옛날의 청학동인 듯합니다.”라고 하였다. 내 생각으로, 이인로(李仁老)의 시에 지팡이를 짚고서 청학동 찾고자 하니, 숲 속에선 부질없는 원숭이 울음소리뿐이구나. 누대에 삼신산(三神山)이 아득하게 있고, 이끼 낀 바위엔 네 글자만 희미하구나.”라고 하였으니, 그는 성문 안 쌍계사 앞쪽을 청학동이라고 여긴 것은 아닌가. 쌍계사 위 불일암 아래에도 청학연(靑鶴淵)이란 곳이 있으니, 이곳이 청학동인 것은 의심할 나위가 없다.

 

自西涉東. 有兩地石如門. 有刻 雙溪石門四大字. 崔文昌侯手題者. 石門內一二里許. 有雙溪寺. 余問僧曰. 誰是靑鶴洞. 義文曰. 未及石門三四里. 有東邊大洞. 洞內有靑鶴庵. 疑是古之靑鶴洞也. 余惟李仁老詩杖策欲尋靑鶴洞. 隔林惟聽白猿啼. 樓臺縹緲三山遠. 苔蘚依稀四字題. 則石門內雙溪寺前. 無乃是耶. 雙溪寺上佛日庵下. 亦有靑鶴淵. 此爲靑鶴洞無疑矣.

 

 

3. 1489년 탁영 김일손 선생의 두류산기행록

 

26, 갑인일. 5리를 가서 시내를 건너는데 수석(水石)이 늘어서 있었고 동쪽으로 1리를 가니 두 시내가 합류하였다. 두 바위가 마주 대하여 서 있는데 쌍계석문(雙磎石門)이라는 네 글자가 새겨져 있어서 광제암문이란 글자와 비교해보니, 크기는 더 커서 말만 하지만, 글씨체는 유사하지 않아서 아동이 습자(習字)를 한 것 과 같았다. 석문을 지나 1 리를 가니 귀부(龜趺)와 이수龍頭]가 달린 옛 비석이 있었다. 그 비석의 전액(篆額)에는 쌍계사고진감선사비(雙磎寺故眞鑑禪師碑)’라는 아홉 글자가 새겨져 있었고 끝부분에 전서국도순관(前西國都巡官) 승무랑(承務郞) 시어사내공봉(侍御史內供奉) 사자금어대(賜紫金魚袋) () 최치원이 교서를 받들어 찬하다.’라고 씌어 있었으니 , 바로 광계(光啓) 3년에 세운 것이다. 광계는 당나라 희종(僖宗)의 연호로 지금까지 600여 년이나 지났으니, 오래되기도 하였다. 인물은 보존되기도 하고 망하기도 하며, 운수는 흥하기도 하고 폐하기도 하여 서로 끝이 없이 이어지는데 이 비석은 완연히 유독 썩지 않고 그대로 서 있으니, 탄식할 만한 일이다.

 

行五里. 亂澗水. 水石齒齒. 東行一里. 雙溪合流. 兩石對立. 雙磎石門四字. 視廣濟嵒門字. 加大如斗. 而字體不相類. 兒童習字者之爲. 由石門一里. 有龜龍古碑. 篆其額曰. 雙磎寺故眞鑑禪師碑九字. 傍書前西國都巡官. 承務郞. 侍御史內供奉. 賜紫金魚袋臣崔致遠奉敎撰. 乃光啓三年建. 光啓. 唐僖宗年也. 甲子至今六百餘年. 亦古矣. 人物存亡. 大運興廢. 相尋於無窮. 而此頑然者. 獨立不朽. 可發一歎.

 

 

4. 1558 년 남명 조식 선생의 유두류록

 

416일 홍지와 강이가 먼저 石門 에 도착하니 그 곳이 바로 雙磎寺 洞門(동문)이었다. 푸른 벼랑이 양족으로 한 길 남짓 트여있는데, 그 옛날 학사 崔致遠(최치원)이 오른쪽에는 雙磎(쌍계)왼쪽에는 石門(석문)이라는 네 글자를 손수 써 놓았으니 자획의 크기가 사슴 정강이만하고 바위 속 깊이 새겨져있어 지근에 이르기까지 이미 천년의 세월이 흘렸지만 앞으로도 몇 천 년이나 더 이어져 내려갈지 알 수 없을 정도이다. 서쪽에서 시냇물 하나가 벼랑을 무너뜨리고 돌을 굴리면서 아득히 백리 밖에서 흘러오는 것은 곧 新興寺 (신흥사)가 있는 義神洞(의신동) 물이고, 동쪽 시냇물 하나가 구름 속에서 새어나와 산을 뚫고서 아득히 흘러 그 지나온 곳을 알 수 없는 것은 바로 佛日菴(불일암)이 있는 靑鶴洞(청학동)물인 것이다. 절이 두 시내 사이에 자리 잡았으므로 雙磎寺(쌍계사)라 일컫는 것이다 .

 

泓之剛而. 先到石門. 雙磎寺洞門. 蒼崖兩開. 可丈餘. 崔學士致遠手寫四字. 題其右曰雙磎. 左曰石門. 畵大如鹿脛. 刊入石骨. 迄今已千年. 不知此後幾千年也. 西邊一溪. 崩崖轉石. 遙從百里來者. 乃神興義神洞水也. 東邊一溪. 漏雲穿山. 邈不知所從來者. 乃佛日靑鶴洞水也寺在兩溪間. 示謂雙磎也

[출처 : 남명집 잡저 경상대학교 남명학연구소 ]

 

 

5. 1611 년 어우당 유몽인의 두류산록

 

쌍계석문 에 이르렀다 . 고운 최치원의 필적 이 바위에 새겨져 있었는데 글자의 획이 마모되지 않았다 . 그 글씨를 보니 가늘면서도 굳세어 세상의 굵고 부드러운 서체와는 사뭇 다른 참으로 기이한 필체였다 . 탁영 (濯纓 ) 김일손 (金馹孫 )은 이 글씨를 어린아이가 글자를 익히는 수준이라고 평하였다 . 탁영은 글을 잘 짓지만 글씨에 대해서는 배우지 않은 듯하다 . 이끼 낀 바위 위에 모여 앉아 맑은 물과 흰 물결을 바라보았다 . 어린 종이 말하기를 ,“해가 이미 서쪽으로 기울었습니다 .”라고 하여 쌍계사로 들어갔다 .

 

䨇溪石門 . 崔孤雲筆蹟 . 字畫不泐 . 觀其書 . 痩且硬 . 絶異世間肥軟軆 . 眞奇筆也 . 金濯纓謂兒童習字者之爲 . 濯纓雖善文 . 至於書 . 未之學也 . 凝坐苔石上 . 瞪目于淸泓白瀑 . 童子曰日已西矣 . 乃入雙溪寺 .

 

 

6. 1618년 양경우의 역진연해군현잉입두류 상쌍계신흥기행록

510일 정유 맑음. 일찍 길을 나서 쌍계(雙溪)로 향하였다. 강을 따라 북쪽으로 갔는데, 경치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그림과 같다. 화개의 골짜기에 이르렀는데, 골짜기 문은 서쪽을 향하여 있다. 골짜기는 매우 크고 깊어 큰 시내가 산중으로부터 흘러나온다. 돌을 때리며 우레 소리를 내면서 큰 강으로 흘러 들어가니 바로 화개의 하류이다. 이곳으로부터 강을 따라가는 길을 버리고 시내와 나란히 10여 리를 가서 쌍계의 골짜기 입구에 도달하였다. 물 한 줄기가 석문으로부터 나오며 다른 한 줄기는 신흥(神興) 쪽에서 나온다. 합하여 거세게 흘러가니 바로 화개의 상류에 있는 무릉계(武陵溪)이다. 시내를 건너 오른쪽으로 돌아 수백 보를 가니 두 바위가 길 양 옆에 마치 문처럼 마주보고 서 있다.
쌍계사를 출입하는 사람은 이것을 통과해야만 한다. 그 높이가 모두 5, 6길은 되는데 쌍계석문(雙溪石門)이란 커다란 네 글자가 바위 면에 새겨져 있다. 바위 하나에 각각 두 글자가 새겨져 있는데, 필획이 바르고 엄하여 칼과 창이 나란히 마주하는 것 같으니 참으로 고운(孤雲)의 글씨이다. 정신이 감동을 받아 말에서 내려 우두커니 바라보았다. 대개 당나라 조정의 여러 명의 명필이 있는데, 모두 저 태부(楮太傅), 안 태사(安太師)를 칭하지만 최 학사(崔學士)를 칭하는 것은 듣지 못하였다. 아마도 외국 사람이라 그랬던 것인가? 저공은 논하지 말고, 일찍이 안공의 마애비(磨崖碑)의 나무에 새긴 것을 보니 결코 이것에 미치지 못한다고 생각하였다.
작은 고개를 넘으니 쌍계사가 나왔다. 거처하는 승려가 나와서 맞이한다. 이끌어 학사대(學士臺)에 이르니 승려가 말하기를,
옛날에 대 위에는 보물스런 건물이 있었는데 신라 시대에 창건한 것입니다. 난리를 겪어 폐해져 중건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다만 옛날의 비가 우뚝 홀로 남아 있으니 실제로 진감태사(眞鑑太師)의 비명(碑銘)으로 고운이 짓고 쓴 것입니다. 문자의 전형이 이따금 옛것을 모방하였는데 한 글자 반 글자가 떨어져 거의 읽을 수가 없습니다.“
라고 한다. 선당에 들어가 잤다.

 

원문
初十日丁酉. . 早發向雙溪. 循江北指. 步步堪畫. 及至花開峽. 峽門向西. 洞府雄深. 有大川自山中流出. 激石靁鳴. 入于大江. 卽花開下流也. 自此捨循江之路. 並川行十餘里. 到雙溪洞口. 一水自石門出. 一水自神興出. 合而奔流. 卽花開上流武陵溪者也. 渡而右轉數百步許. 兩岩石當路對豎如門. 出入雙溪寺者由焉. 其高皆可五六丈. 而刻雙溪石門四大字於岩面. 一石各書二字. 畫整體嚴. 劍戟交橫. 孤雲手迹. 森然魄動. 下馬佇眙. 蓋唐朝數名筆者皆曰楮太傅顏太師. 而獨崔學士無聞焉. 得非以外國故歟. 卽毋論楮公. 曾見顏公磨崖碑刻本. 決不及此. 行過一小嶺而得雙谿寺. 居僧出迎. 引至學士臺. 僧云. 昔時臺上有寶構. 新羅時所創. 經亂而廢. 未克重建. 但古碑巍然獨存. 實眞鑑太師碑銘. 而孤雲所撰所書. 文字典刑. 往往依舊. 而一半剝落. 殆不可讀矣. 遂入禪堂宿.

 

 

7. 1618년 조위한의 유두류산록

 

화개동 입구에서 악양(岳陽)으로 곧장 가는 길을 버리고 작은 지름길로 들어갔는데 큰 개천이 콸콸거리며 산중에서 흘러 내려오고 있었다. 개천을 따라 10리를 갔는데 계곡은 휘돌고 바위들은 모습을 바꾸어 비단 같은 바위와 옥 같은 꽃들이 굽이굽이 다 기이한 절경이었다. 말이 가는 대로 천천히 보면서 실컷 즐겼다.
무릉계(武陵溪)에 이르니 이곳에 사는 승려 십여 명이 나와 맞이하면서 말하기를,
토포사께서 이미 병사(兵使) 나리와 석문(石門)에서 모여 기다리고 계십니다.”
라고 하였다. 듣자마자 가마를 타고서 시내를 건너 몇 리를 더 가서 석문에 이르렀다. 우러러 우뚝 솟은 바위들을 바라보니 나란히 서로 대치하고 있는데 오른쪽 바위에는 석문(石門)이라고 새기고 왼쪽 바위에는 쌍계(雙溪)라고 새겨놓았다. 네 글자의 필세가 마치 용과 뱀이 올라 움켜 쥘 듯하고 칼과 창이 비껴 꽂혀 있는 듯이 삼엄하였으니 최 고운(崔孤雲) 의 필적이었다.

 

十三日. 自洞口捨岳陽直路. 徑取細路而入焉. 大川淅淅自山中出來. 循溪十里. 谷廻巖轉. 錦石琪花. 曲曲奇絶. 信馬徐行. 目勞心倦. 至武陵溪. 居僧十餘出迎曰. 討捕使已與兵使. 相會于石門而待之云. 卽乘籃輿. 亂流而渡. 行數里許至石門. 仰見矗石竝峙相對. 而右刻石門. 左刻雙溪. 四大字森然如龍蛇騰攫. 劍戟橫揷. 崔孤雲筆跡.

 

 

8. 1655  김지백의 유두류산기(遊頭流山記)

 

이날 저녁에 드디어 화개동(花開洞)에 이르렀다. 골짜기에서 약간 남쪽으로 옛터가 있으니 바로 일두(一蠹) 정여창(鄭汝昌)선생이 집을 지었던 곳이다. 서성이며 감탄하고 떠나지 못하였다. 화개동으로부터 위쪽으로 올라가서 두 갈래 물길이 서로 만나는 곳에 이르니, 바로 쌍계라는 곳이었다. 과연 석문(石門)이 있고 쌍계석문(雙溪石門)이라는 네 개의 커다란 글자가 동구(洞口) 두 개의 바위 위에 새겨져 있는데, 강한 필치가 마모되지 않아, 여전히 어제 일처럼 최치원의 진면목을 상상해 볼 수 있다.
드디어 쌍계사(雙溪寺)에 들어가 그 곳에 사는 승려를 따라 옛 자취를 둘러보았다. 진감선사(眞鑑禪師)의 오래된 비를 어루만져 보았으니, 비문을 짓고 쓴 것이 또 모두 고운 최치원의 솜씨이기 때문이다. 오래도록 흥망을 겪고 인사가 백 번 바뀌어 묵은 자취를 물어볼 수 있는 것은 오직 한 조각 돌일 뿐이나, 또한 충분히 옛 흥치를 느낄 수 있다.

 

是夕. 遂到花開洞. 洞之少南有舊墟. 乃日蠧先生之所卜築. 彷徨感歎而不能去. 由花開而上. 至兩流相合處. 乃所謂﨎溪. 果有石門. 四大字刻在洞口䨇石面. 鐵畫不泐. 依然若昨日事. 可想崔仙眞面目. 遂入寺隨居僧. 周覧舊蹟. 摩挲眞鑑. 古碑撰與筆. 又皆孤雲手也. 乆閱興亡. 人事百變. 而陳迹之可質者. 獨有一片石. 亦足以感舊興懷也.

 

 

9. 1727년 김도수의 남유기

 

15일 무진일에, 일찍 일어나 골짜기 입구를 나와 20리를 가서 석주천(石柱遷)을 지났다. 산봉우리가 빙빙 돌아나가고 층층의 돌들은 우뚝 솟아 있는데, 가을 꽃이 간간이 피어 그림자가 맑은 강에 비춘다. 단풍 숲은 조락해 가는데 색은 오히려 찬란하다. 10리를 가서 연곡을 지나고 다시 10여 리를 가서 화개동(花開洞)에 들어갔다. 골짜기의 형세는 매우 웅장하였고 큰 시내가 거세게 흘러내려가 돌에 부딪히면 큰 소리를 내었다. 물을 따라 5리를 가 남여를 만났다. 또 몇 리를 가서 무릉교(武陵橋)를 건넜다. 2리 쯤 가니 큰 바위가 마주 보고 있는데, 왼쪽에는 쌍계(雙溪)’라 새겨져 있고 오른쪽에는 석문(石門)’이라고 새겨져 있다. 네 개의 큰 글씨는 자획이 빼어나고 옛스러워 마치 칼을 빗긴듯 하고 창을 세운 듯 하니, 바로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의 글씨이다. 푸른 등나무와 고목 때문에 햇빛을 볼 수가 없고, 물은 콸콸 두 골짜기 사이에서 솟구쳐 나온다. 절은 두 골짜기 사이에 있는데 그다지 크거나 아름답지 않았다. 금당(金堂)에는 진감(眞鑑), 혜능(惠能) 그리고 남악(南嶽) 선사의 화상을 걸어두고 있다. 당의 왼쪽에는 영주각(瀛州閣)이 있고 오른쪽에는 방장실(方丈室)이 있으며 앞에는 청학루(靑鶴樓)가 있다. 누대에서 조금 동쪽으로 수십 보 거리에 새로 대웅전을 짓고 있다. 대웅전의 앞에는 큰 돌로 만든 귀부(龜趺)가 세워져 있으니 바로 진감국사의 비이다. 당나라 광계(光啓) 3(887)에 세워졌는데, 고운 최치원의 글이다. 대웅전의 오른쪽에 있는 향로전(香爐殿)에는 고운의 영정을 걸어두고 있다.

 

원문
十五日戊辰早起. 出洞口二十里. 過石柱遷. 崗巒糾紆. 曾石㟒嶙. 秋花間發. 影倒澄江. 楓林向凋. 而色猶爛然. 十里過燕谷. 又十餘里入花開洞. 硤勢轉雄. 大川决來. 潎洌漂疾. 激石相吼焉. 沿行五里遇籃輿. 又數里渡武陵橋. 行二里餘. 穹巖雙峙. 左刻雙溪. 右刻石門四大字. 字畫奇古. 如橫劒植戟. 乃崔孤雲筆. 蒼藤古木. 不見日色. 水淈淈自兩壑噴來. 寺在兩處而不甚敞麗. 有金堂. 掛眞鑑惠能及南嶽禪師之像. 堂之左有瀛洲閣. 右有方丈室. 前有靑鶴樓. 自樓稍東數十步. 有新建大雄殿. 殿前樹龜趺巨石. 卽眞鑑國師之碑. 大唐光啓三年立. 亦孤雲之二妙也. 殿之右有香爐殿. 掛孤雲影幀.

 

 

10. 1743년 정식의 청학동록

 

[계해년(1743, 영조 19) 423] 다음날 악양(岳陽)에 들어가 일두 정 선생 이 은거하던 옛 집터를 지나니 사람에게 그리워하는 마음을 일게 하고, 덥수룩한 머리로 사이에 낀 바위 위에서 쉬는데 위에 있는 도암(道巖)에 나아가니 녹사 한유한의 유적이었다. 화개(花開)에서 점심을 먹고, 골짜기에 있는 김광서(金光瑞)의 운보산거(雲甫山居)에서 묵었는데, 푸른 소나무와 비취빛 회나무의 사이에 새로 정사(精舍)를 꾸몄으니, 대단히 맑고 시원했다. 내가 운보에게, “내가 상기와 함께 청학동 불일암으로 가려고 하는데 자네가 아니면 어찌 다녀올 수 있겠는가?”라고 했더니, 운보가 허락하면서, “마땅히 내가 앞장서서 인도하겠네.”라고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신선이 사는 곳인데 퉁소를 부는 손이 없어서야 되겠는가? 어찌 구할 수 있겠는가?” 라고 했더니, 운보가, “나를 따르는 유자(遊者)에 김윤해(金潤海)라는 자가 있는데 퉁소를 아주 잘 분다네. 또 골짜기에 현덕승(玄德升)이란 자도 있는데 역시 퉁소를 잘 분다네.” 라고 하였다. 내가 즉시 기뻐하며 맞아들이기를 청했는데, 모두 연소하고 단아한 선비였다. 그들과 함께 쌍계사에 들어가 석문 아래 앉았는데, 쌍계석문(雙溪石門)이라는 네 글자를 보고 기뻐하였으니 정신과 필력이 마치 고운(孤雲) 의 얼굴을 마주 보고 있는 듯하였다. 학사전(學士殿)에 묵었으니, 고운이 거처했던 곳이다.

 

翌日入岳陽. 過一蠹鄭先生幽居舊址. 令人感慕. 竪髮憩于揷巖上. 上有就道巖. 卽錄事韓惟漢遺跡. 午炊于花開洞. 宿金光瑞雲甫山居. 蒼松翠檜之間. 新構精舍. 殊極蕭灑. 余謂雲甫曰. 余與相琦. 方投靑鶴洞佛日而去. 非君不可盍往. 從之雲甫諾曰. 當爲先導. 余曰仙區不可無洞簫客. 何以得之. 雲甫曰. 從吾遊者有金潤海者. 乃善簫也. 又洞有玄德升者. 亦善簫也. 余卽喜而請邀. 皆年少雅士也. 與之入雙溪寺. 坐石門下. 雙溪石門. 四字精神筆力. 如見孤雲面目. 宿學士殿. 孤雲所居云.

 

 

11. 1744황도익의 두류산유행록

 

천천히 걸어 쌍계의 석문에 당도하였다. 바위에 쌍계석문(雙溪石門)’이란 커다란 네 글자가 새겨져 있다. 바로 최치원의 글씨. 일주문을 지나 정문(正門)에 도달하니 맑고 기이하지 않은 것이 없어 눈을 놀라게 하니 참으로 아름다운 경치이다. 그러나 방실(房室)은 많이 훼손되어 사찰의 형태를 갖추지 못하였으니 어찌 흉년이 들어 부역이 번거로워 산승도 또한 감당하지 못하고 그렇게 된 것이 아닌가? 산승이 이와 같다면 촌의 백성은 가히 알 수 있다. 곤궁한 촌은 곳곳에 사람이 살지 않고 집은 비어 있으니 또한 다시 무엇을 따지겠는가? 산 늙은이의 탄식을 참으로 먼저 알아듣겠다.

 

徐步至雙溪石門. 嵒石刻雙溪石門四大字. 崔孤雲筆. 過一柱門. 至正門. 無非淸奇駭自. 眞佳境也. 然房室多毁廢. 無寺刹模㨾. 豈非歲歉役煩. 山僧亦不堪支而致然耶. 山僧如此. 村氓可知. 窮村處處. 無人虛屋. 亦復幾何哉. 岡老之歎. 眞先獲也. 宿明月寮. 有老禪可與言. 問雙溪之由. . 靑鶴洞萬疊淸流. 三神洞百里長波. 兩處相注. 合於石門前. 故名雙溪云. 山中半夜. 忽聞鍾聲. 甚淸絕. 令人自發深省.

 

 

12. 1756년 이언근의 유방장록

 

다음날 아침 골짜기 입구를 나서니 한 쌍의 바위가 좌우에 있었고, 나누어서 쌍계동문 네 글자가 크게 쓰여 있었다. 이것은 고운이 쇠지팡이로 쓴 것이라 하는데 몹시 힘차고 굳세어 아낄 만하다. 마침내 화개로 가는 길을 따라 돌아오는데 산세는 갈수록 열리고 계류는 점점 넓어졌다. 지나가는 곳에 일두선생의 유허가 있다고 들었는데 무성한 풀과 황량한 들만 펼쳐져 있어 찾을 수가 없었다. 십여리 길을 가서 보니 큰 강이 동으로 흐르고 계류가 합치고 백운산의 한쪽 기슭이 그 앞을 빙 둘러 싸고 있었다. 다시 대수천으로 가서 보전으로 갔다가 몇일을 지내고 돌아왔다. 집으로 돌아온 후 그 시말을 기록하여 후인들이 구경 다니는 것에 도움이 되고자 할 따름이다. [출처 지리99 이재구]

 

朝出洞門. 則雙岩在左右. 而分書雙溪洞門四大字. 云是孤雲鐵杖所畫. 遒健甚可愛也. 遂從花開,取路以歸.而山勢稍開. 溪流漸大. 所過處聞. 有一蠹遺墟. 而豊草荒郊漫. 不可 尋矣. 行至十許里. 則大江東注與溪流合. 而白雲一麓. 環繞其前. 復向大藪川. 還甫田. 數日乃歸還家. 後記其始末. 以資後人遊賞之助爾[출처 지리99 이재구]

 

 

13. 1807년 하익범의 유두류록

 

(42) 여정 이틀째. 늦게 일어나 ()’자형 아궁이를 보고 있노라니 방주인 보대(寶臺) 노승이 말하기를, 신라 금부대왕(金夫大王)에게 여덟 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한 명이 왕위를 이어받자 나머지 일곱 아들이 이곳에 와서 불자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아내들이 찾아 와서 불자들 보기를 청하기를직접 보면 속세의 인연을 벗기 어려울 테니 문밖에 연못을 파서 일곱 불자가 문 앞에 서 있으면 그림자가 못에 비출 것이니 한 번 볼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라고 하여 절 이름이 칠불(七佛)이 된 것은 이 때문이지요.”
라고 하였다. 드디어 고을 아래로 10여 리를 가니 주점이 있었다. 갑자기 계곡물 소리와 숲 사이로 한 바탕의 가야금 소리가 들려오니 바로 하동 사람들이 산에 오르는 행렬이었다. 마침 또 어부가 물고기를 가지고 도착했다. 술과 횟감을 사고 가야금을 연주하며 노래를 부르다가 흥이 다하자 자리를 접었다.
천천히 숲 속 길을 걸어가는데 길 왼쪽에 삼신동(三神洞)이라는 세 글자를 새긴 돌이 서 있었다. 바로 최 고운(崔孤雲)의 필체라고 한다. 다리를 지나 신응사에 들어가니 조사(祖師)가 문밖에서 맞이하는데 자못 고승의 풍모가 있었다. 이름은 석인(釋印)이요, 호는 화담(花潭)으로 시를 잘 짓는다고 했다. 차를 다 마시자 석인이 앞장서서 제승문(諸勝門) 밖 큰 시냇물에 있는 반석에서 항아리모양의 구멍이 난 것 세 개를 찾았는데 이른바 돌항아리石甕라는 것이었다. 지팡이로 구멍의 깊이를 재보니 셋 다 한 길 남짓이었다. 겨울이 되면 김장을 담아놓은데 맛이 제일이라고 한다.
절벽 위에는 정명암(鄭明庵)이 반석에 이름을 짓고 세이암(洗耳巖)’이라는 세 글자를 새긴 것이 있는데 또한 고운의 필체였다. 물은 물고기들을 헤아릴 정도로 매우 맑았다. 두류산의 크고 작은 절들 중에서 신응사 계곡의 수석이 가장 좋다고 말해지는 것은 남명 선생이 이미 품평하신 바이다. 나는 여러 벗들과 운()을 띄워 가며 흥취를 풀었다.

(43) 여정 사흘째. 일찍 출발해서 국사암(國師庵)을 지나 불일암(佛日庵)을 향해 갈 적에 열 걸음에 아홉 번을 쉬면서 천천히 올라가고 있노라니 길가에 환학암(喚鶴巖)이라고 새긴 바위가 보였다. 암자 뒤편에 이르러 돌아 내려가서 문으로 들어서니 노승이 주는 밥으로 허기를 채웠다. 이 암자는 만 길 낭떠러지 위에 있고 문 앞에 두 개의 봉우리가 우뚝 서 있는데 높이가 각각 천 길이고 서로 한 치도 양보하지 않는 형세였다. 동쪽 봉우리를 향로(香爐)라고 하고 서쪽 봉우리를 비로(毗盧)라고 한다. 또 동쪽을 청학(靑鶴), 서쪽을 백학(白鶴)이라고도 하니 이것은 아마도 세속에서 청학동이라고 일컫는 것이 아닐지 모르겠다. 좌우의 암석들이 우뚝 솟아 허공에 매달려 굽어볼 수 없었고 동쪽에는 백여 자나 되는 폭포가 곧장 쏟아져 내려 학연(鶴淵)과 용추(龍湫)가 되는데 수심이 매우 깊었고 밤낮으로 칠흑같이 어두워 하늘과 땅이 숨겨 놓고 큰 정령과 교룡들이 지켜서 사람들을 접근하지 못하게 하는 듯했다. 내능과 사흥이 나무를 붙들고 내려다보기에 나도 뒤따라 아래를 보니 아찔하고 소름이 끼쳐 오래 있을 수 없었다. 바위 한쪽에 조명사(趙明師, 조복(趙濮))가 이름을 지어 새겼다.
빠르게 잔도(棧道)를 따라 내려가서 쌍계로 향할 때에 길이 매우 가파랐는데 처음 오를 적에는 한 걸음 떼어 놓는 것조차 어렵더니 내리막길에 이르러서는 다만 발을 움직이기만 하면 몸이 저절로 따라 내려가서 순식간에 쌍계에 닿았다. 나는 여러 벗들에게 말하기를,
선과 악을 따르는 비유가 어찌 이 때문이 아니겠는가? 스스로를 경계할 만하지 않은가?”
라고 했다. 정문에 들어가 최 고운의 영정을 보고 진감 국사(眞鑑國師)의 비문을 읽으니 또한 고운이 직접 지은 글이었다. 정 신채(鄭愼采)가 약속대로 와서 우리 형님의 서찰과 그의 맏형의 편지를 전했다. 처음에는 동행했는데 중간에 나뉘어져서 상봉에 가지 못했으니 금악(金嶽)의 명승을 못 보는 것이 매우 아쉬웠지만 지금까지 지나온 여정을 생각해 보면 오히려 다행이라고 할 만했다.

 

(44) 여정 나흘째. 절 문을 나서니 좌우에 나란히 마주 보고 있는 바위가 있었다. 쌍계석문(雙谿石門)이라는 네 글자를 새겼는데 필획의 크기가 사슴 정강이만 했으며 역시 고운의 필체였다. 눈을 돌려 청학봉을 바라보니 마치 하늘에 매달려 있는 듯했다. 쌍계교를 건너 10리를 가서 화개동에 이르니 고깃배와 장삿배의 북적거림이 호남과 영남의 도회지와 한가지였다.

 

원문
二日. 晏起. 觀亞字房. 玉寶臺老宿云. 新羅金夫大王有八子. 一傳位. 餘七子來此爲佛. 其妻尋到請見佛曰. 見倒世緣難脫. 鑿池於門外. 七佛立正門上. 照影於池. 使之一見. 寺名七佛. 以此也. 遂懸下十餘里有酒店. 忽於川聲嶽色之間. 風送一陣琴聲. 來遇於綠陰中. 乃河東人上山行也. 適又漁人. 荷竿貫柳而至. 沽酒膾魚. 鼓琴而歌. 盡歡而罷. 緩步行芳草綠陰之中. 道左立石. 刻三神洞三字. 乃孤雲筆云. 過橋入神凝寺. 祖室僧迎於門外. 頗有古僧風. 名釋印. 號花潭. 有詩聲云. 茶罷. 印僧前導行. 尋諸勝門外大川中盤石. 有孔如甕者三. 所謂石甕者也. 以杖探深. 皆丈餘. 冬則沉葅. 味最佳云. 壁上有鄭明庵名盤石. 刻洗耳巖三字. 亦孤雲筆也. 水淸甚游魚可數. 頭流大小伽藍. 獨神凝水石爲最云者. 南冥已題品矣. 余與諸友. 呼韻遣興.

三日. 早發過國師庵. 向佛日庵. 十步九休. 寸寸前登. 路上有喚鶴巖三刻字. 至庵後轉下入門. 有老釋進水飯救飢. 庵在絕頂萬仞之上. 門前二峰特立. 高各千仞. 畧不相讓者. 東曰香爐. 西曰毗盧. 又名東靑鶴. 西白鶴. 此無乃世所稱靑鶴洞者耶. 左右巖巒. 斗絕懸空. 不能俯視. 東邊有瀑布百餘尺. 直下爲鶴淵. 爲龍湫. 其深無底. 晦冥黝暗. 不晝不夜. 天慳地秘. 爲巨靈蛟龍之所呵護. 而使人不得近也. 乃能士興. 攀木俯視. 余亦隨後視之. 目眩髮竪. 凜凜不可乆住. 石面有趙明師題名. 亟由棧道以下. 向雙谿. 路極懸下. 初登時. 一步更難一步. 及至趨下. 徒自舉趾而身自流下. 轉眄之頃. 已到雙谿. 余謂諸友曰. 從善從惡之喩. 豈非以此歟. 可以自儆哉. 仍入正門. 瞻崔孤雲影. 讀眞鑑國師碑. 亦孤雲所撰. 鄭愼采士俊. 如約而至. 傳我家兄書. 及其白眉書. 初以同行. 中路分張. 未能聯勝於上峰. 如錦嶽之爲. 殊可爲欠. 而計余經歷之勞. 則亦云幸矣.

 

四日. 出寺門外. 左右有石雙立相齊者. 雙谿石門四字. 畫大如鹿脛. 孤雲筆. 回望靑鶴峯. 懸絕如天上.

 

 

14. 1808<유문용 >[유쌍계기 ]

 

다음날 악양 (岳陽)에 도착하니 그 서쪽 언덕을 소상(瀟湘)이라 하는데, 긴 대나무가 몇 리나 이어져 있고 간간이 무늬가 있는 것이 있어서 기이하였다. 이곳이 상군(湘君)의 땅은 아니지만 또한 상군 의 흔적을 끼고 있으니 , 어찌 지명이 실질과 부합하기에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상암점(商巖店)에 도착하니 동와(東窩) 이우와 삼동(三洞)의 김()씨 어른이 뒤좇아 와 있었다. 다시 일두 선생 (一蠹先生)의 남겨진 옛 터를 지나 화개점(花開店)에 이르니, 승려들이 가마 두 개를 준비하고는 나와서 맞이하였다. 마침내 가마를 타고서 계곡을 따라 10리를 들어가니 큰 바위가 문을 이루고 있는데, 왼편이 쌍계(雙磎)이고, 오른편이 석문(石門)이었다. 또 진감국사비(眞鑑國師碑)가 있는데 전서(篆書)로 된 글씨는 모두 한림학사를 지낸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의 친필 이라고 하였다 .

 

翌日抵岳陽. 其西岸曰瀟湘. 脩竹亘數里間有班者異哉. 此非湘君之地. 而亦帶湘君之痕. 豈以地名相符而然耶. 商巖店東窩與三洞金丈踵而至. 又過一蠹先生遺墟. 花開店. 僧徒二輿迎候. 遂肩之緣溪入十里有大石作門. 左曰雙磎. 右曰石門. 又有眞鑑國師碑. 撰書篆皆崔學士孤雲手迹 .

 

 

15. 1845<양진영>[유쌍계사기]

 

을사년 4, 나는 두류산(頭流山)에서 하동(河東)의 섬진강(蟾津江)까지 여행하기로 하였다. 배를 타고 유람하면서 화개(花開)를 지나 악양정(岳陽亭)을 방문하고 일두(一蠹) 정여창(鄭汝昌) 선생의 신도비를 뵙고 쌍계사로 들어갔다. 절 앞에는 석문(石門)이 있는데, 오른쪽에는 쌍계(雙溪)라고 조각하였고 왼쪽에는 석문(石門)이라 조각하였다. 모두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 선생의 글씨이다. 큰 획은 주먹만하고 작은 획은 손가락만 한데, 여기에 와서 감동을 일으키지 않을 자 누구이겠는가?

 

乙巳孟夏. 余將行頭流山至河東之蟾津江. 泛舟而遊. 花開洞. 岳陽亭. 瞻拜鄭一蠧先生神牌. 入雙溪寺. 寺前有石門右刻雙溪左刻石門. 皆崔孤雲先庄筆也. 大畫如拳. 小畫如指. 到此而不曠感者何人.

 

 

16. 1883 <전기주 >[유쌍계칠불암기 ]

 

* 4. 여기서부터 돌길이 험하여 한 발짝을 떼기도 매우 힘들었다. 20리를 가서 나무다리를 건너 들어가니, 이곳이 바로 쌍계사의 동구(洞口)였다 . 석문이 있었는데, 오른쪽에는 석문(石門)두 글자가 새겨져 있고 왼쪽에는쌍계(雙溪)두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모두 고운의 글씨였다. 10 여 발짝을 걸어가 다시 다리 하나를 건너니, 깨끗한 시냇물이 흐르고 흰 돌이 가지런히 깔려 있어 기이하다고 할만 했다. 동편으로 돌아보며 들어가기도 하고 서편으로 돌아보며 들어가기도 했는데, 양편의 수목이 빽빽이 우거져 하늘을 볼 수 없었다.[원문 없음 ]

 

 

17. 1902년 김회석의 지리산유상록

 

숙명과 함께 시내를 따라 20리를 내려와, 저녁에 쌍계사(雙溪寺)에 들어갔다. 절 입구의 바위에 쌍계석문(雙溪石門)이란 네 개의 큰 글자가 새겨져 있다. 이것은 최치원이 쓴 것이라고 한다. 다음날 두루 절내를 구경하였다. 여러 전각(殿閣)의 배치가 매우 웅장하다. 문창후 최치원의 영실(影室)과 최치원이 쓴 진감비(眞鑑碑)가 있다. 조금 북쪽에는 작은 암자가 있다. 암자 안에는 층층의 돌탑이 서 있는데, 육조(六祖)의 머리를 묻은 탑이라고 한다. 방향을 바꿔 언덕에 오르니 국사암(國師菴)이 있는데, 매우 정결하여 구경할 만하다. 용강(龍岡)의 문오(文五) 강임수(姜琳秀)가 술을 가지고 와 각각 한 잔씩 마셨다. 동쪽 산기슭에 올라 시내를 따라 10리를 가서 불일암(佛日菴)의 터에 도착하였다. 그곳은 명옹(冥翁)이 유산기에서 말한 청학동(靑鶴洞)이다. 암자는 무너지고 다만 산신각이 대 위에 있다. 두 봉우리가 우뚝 서 있는데, 서쪽은 백학봉(白鶴峰)이며 동쪽은 청학봉(靑鶴峰)이다. 그 아래는 만 길의 절벽이며 그 위에는 천 척의 폭포가 누워있다. 우러러 보고 굽어 살펴보니 마음이 떨려 오래 머물 수가 없었다. 국사암으로 돌아와 점심을 먹고 계곡물을 따라 세이암(洗耳巖)을 찾아갔다. 바위 면에 새긴 것은 최치원의 글씨라고 한다. 또 시내를 거슬러 수십 보를 가니 바위의 면에 삼신동(三神洞)이라고 새겨져 있는데, 이 또한 최치원의 글씨라고 한다.

 

與叔明緣流下二十里. 暮入䨇磎寺. 寺口石面. 䨇磎石門四大字. 崔文昌筆. 翌日周觀寺內. 諸閣排置甚宏. 而有文昌影室. 及所寫眞鑑碑. 小北有小菴. 菴中立層石塔. 六朝師埋頭塔云. 轉入上一岡. 又有國師菴. 甚凈潔可翫. 龍岡姜文五琳秀佣酒而來. 各巡一盃. 登東麓. 逐澗而行十里. 到佛日菴墟. 則㝠翁遊賞記所云. 靑鶴洞也. 菴毁. 只有山神閣於臺上. 兩峰屹立. 西曰白鶴. 東曰靑鶴. 其下萬丈斷壑. 其上千尺卧瀑也. 仰觀俯眺. 心神悚懼. 不可乆畱. 還下國師菴. 午饒. 從澗流而尋洗耳巖. 巖面所刻. 卽文昌筆云. 又泝流而行數十步. 巖面刻三神洞. 此亦文昌筆云.

 

 

18. 1902년 송병순의 유방장록

 

3/5. 정숙명과 더불어 시내를 따라 10 리를 가서 쌍계사(雙溪寺)에 들어갔다. 이 사찰은 두류산 서남쪽 지류의 봉우리 아래에 있었다. 두 시내가 합류하여 쌍계사라고 이름을 하였다. 산에는 대나무가 많았고, 시내에는 모두 바위들이 널려 있었다. 세찬 물이 쏟아져 흘러 옷을 걷고 건너기가 어려웠다. 동구에 마주보고 있는 두 바위가 있었는데, 쌍계석문(雙溪石門)’네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이 글씨는 최고운의 필적이라고 한다. [원문 없음]

 

 

19. 1904년 김택술의 두류산유록

 

3, 시내를 따라 내려와 세이암(洗耳巖)에 이르렀다. 이곳은 고운(孤雲)이 놀던 곳으로 수석(水石)이 매우 기이하며 이름을 써놓은 것이 많았다. 시를 지었으니 그 시는 다음과 같다.

高人洗得耳根餘(고인세득이근여) 고인은 귀를 씻었는데,
俗子名心洗未除(속자명심세미제) 세속 사람 명리를 추구하는 마음 씻어도 없어지지 않네.
云是孤雲遊賞地(운시고운유상지) 고운이 노닐던 곳이라 하는 곳,
刻題石面紛紛如(각제석면분분여) 돌에 새긴 이름들 어지럽기만 하구나.

여기에서 20리를 가서 쌍계사(雙溪寺)에 들어갔다. 쌍계사는 두 계곡물이 모이는 곳의 안에 있으므로 이러한 이름을 얻은 것 같다. 동구(洞口)의 좌우에는 석벽이 나뉘어 있는데 쌍계석벽(雙溪石壁)네 글자를 새겨 놓았다. 전하는 말로는 고운이 철장(鐵杖)으로 돌에 써놓은 것이라고 하는데 과연 맞는 말일까 싶다.


절은 겨우 중간 규모의 사찰인데 전각은 매우 화려하며 문루에는 청학루(靑鶴樓) 세 글자를 걸어놓았다. 전하는 말로는 고운이 이곳에서 거문고와 생황을 연주하니 청학이 날아왔으므로 후인들이 이 때문에 누각의 이름을 삼은 것이라고 한다. 마침내 판상(板上)의 시에 차운하여 시를 지었으니 그 시는 다음과 같다.

 

 

20. 1909년 정종엽 (鄭鍾燁)유지리산록

 

130. 골짜기 냇물을 따라 동쪽으로 나아가 골짜기로 10리쯤 들어가니 도솔동(兜率洞)으로, 하늘이 맑고 깨끗한 법계를 열어 놓았다. 쌍계석문(雙磎石門)이라는 네 개의 큰 글자는 고운(孤雲)최치원이 쓴 것 으로 글자의 획이 가늘고 단단하며 험준하고 고졸한[瘦硬峻古] 것이 보면 볼수록 더욱 기이하였다. 문으로 들어가 나아가니 절이 금빛과 푸른빛으로 눈부시게 빛나 눈길을 빼앗았다. 청학루(靑鶴樓)에서 휘파람을 불다 그쳤다.[원문 없음]

 

선인들의 유람록에 나타난 쌍계석문의 기록

연도 문헌 저자 석문명칭 비 고
1 1463 유지리산록 청파 이륙 雙磎石門 최치원 필적
2 1487 지리산일과 추강 남효온 雙溪石門 崔文昌侯手題者
3 1489 두류산기행록 탁영 김일손 雙溪石門 아동습작 수준
4 1588 유두류록 남명 조식 雙溪石門 崔學士致遠手寫
5 1611 두류산록 어우당 유몽인 雙溪石門 崔孤雲筆蹟
6 1618 역진연해군 상쌍계신흥기행록 양경우 雙溪石門 孤雲手迹
7 1618 유두류산록 조위한 雙溪石門 최치원 필적
8 1655 유두류산기 김지백 雙溪石門 최치원 진면목
9 1727 남유기 김도수 雙溪石門 崔致遠 글씨
10 1743 청학동록 정식 雙溪石門 孤雲의 얼굴
11 1744 두류산유행록 황도익 雙溪石門 최치원 필적
12 1756 유방장록  이언근  雙溪洞門 孤雲鐵杖所畫
13 1807 유두류록   하익범  雙谿石門 최치원 필적
14 1808 유쌍계기 유문용 雙溪石門 최치원의 친필
15 1845 유쌍계사기 양진영 雙溪石門 최치원 필적
16 1883 유쌍계칠불암기 전기주 雙溪石門 고운의 글씨
17 1902 지리산유상록 김회석 雙溪石門 최치원 필적
18 1902 유방장록 송병순 雙溪石門 최치원 필적
19 1904 두류산유록 김택술 雙溪石壁 고운 鐵杖으로
20 1909 유지리산록 정종엽(鄭鍾燁) 雙溪石門 최치원 필적

 

 

 

쌍계석문 관련 유람록의 기록.hwp

 

쌍계석문(향토문화전자대전).hw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