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六友堂記/实踐人文

香積臺(향적대) 관련 유람록과 기행시(180915)

도솔산인 2018. 9. 16. 20:26

 

 

香積臺(향적대) 관련 유람록과 기행시(180915)

 

 

1. 1472년 김종직 선생의 유두류록과 기행시

 

16, 경진일.

비바람이 아직 거세므로, 먼저 향적사(香積寺)에 종자들을 보내어 밥을 준비해 놓고 지름길을 헤치고 와서 맞이하도록 하였다. 정오가 지나서는 비가 약간 그쳤는데 돌다리가 몹시 미끄러우므로, 사람을 시켜 붙들게 하여 내려왔다. 몇 리쯤 가니 철쇄로(鐵鎖路)가 있었는데 매우 위험하므로, 석혈(石穴)을 뚫고 나와 힘껏 걸어 향적사에 이르렀다. 향적사에는 승려가 남아 있지 않은 기간이 벌써 2년이나 되었지만 계곡 물은 아직도 쪼개진 나무에 의지하여 졸졸 흘러서 물통으로 떨어졌다. 창문의 자물쇠와 향반(香槃)의 기름이 이전처럼 남아 있었으므로, 깨끗이 청소하도록 하고 분향(焚香)하게 한 다음 들어가 거처하였다.

 

날이 저물 무렵 자욱한 구름이 천왕봉으로부터 거꾸로 불려 내려오는데, 그 빠르기가 일순간도 채 안 되었다. 그리하여 먼 하늘에는 석양이 반사된 데도 있어, 나는 손을 들어 매우 기뻐하면서, 문 앞의 너른 바위로 나아가 바라보니, 육천(䔖川)이 길게 이어져 있고, 여러 산과 해도(海島)는 완전히 혹은 반쯤만 드러나고 혹은 꼭대기만 드러나, 장막 안에 있는 사람의 상투를 보는 것과 같았고, 꼭대기를 쳐다보니 겹겹의 봉우리가 둘러싸여 어제 어느 길로 내려왔는지 알 수가 없었다. 사당 옆에 있는 흰 깃발은 남쪽으로 펄럭였는데, 회화승(繪畫僧)이 나에게 그 곳을 알 수 있도록 알려준 것이다. 여기에서 남북의 두 바위를 내키는 대로 구경하면서 달이 뜨기를 기다렸는데, 이 때는 동방(東方)이 완전히 맑지 않았다. 다시 추위를 견디기 힘들어 등걸불을 태워서 집을 훈훈하게 한 다음에야 잠자리에 드니, 한밤중에는 별빛과 달빛이 모두 환하였다.

 

[원문]

庚辰. 風雨猶怒. 先遣從者於香積寺. 具食. 令披徑路來迎. 過午. 雨少止. 石矼滑甚. 使人扶携推轉而下. 數里許有鐵鎖路. 甚危. 便穿石穴而出. 極力步投香積. 無僧已二載. 澗水猶依剖木. 潺湲而落于槽. 窓牖關鎖及香槃佛油. 宛然俱在. 命淨掃焚香. 入處之. 薄暮. 雲靄自天王峯倒吹. 其疾不容一瞥. 遙空或有返照. 余擧手喜甚. 出門前盤石. 川蜿蜒. 而諸山及海島. 或全露. 或半露. 或頂露. 如人在帳中而見其䯻也. 仰視絶頂. 重巒疊嶂. 不知昨日路何自也. 祠旁白旆. 南指而颺. 蓋繪畫僧報我知其處也. 縱觀南北兩巖. 又待月出. 于時. 東方未盡澄澈. 復寒凜不可支. 令燒榾柮. 以熏屋戶. 然後就寢. 夜半. 星月皎然.

 

 

香積庵無僧已二載

 

 

携手扣雲關(휴수구운관) : 손을 잡고 운무로 뒤덮인 문을 두드리니

塵蹤汚蕙蘭(진종오혜란) : 속인의 발자국이 혜란초를 더럽히네.

澗泉猶在筧(간천유재견) : 아직 실개천 샘터에는 홈통이 남아있고

香燼尙堆盤(향신상퇴반) : 타다 남은 향불도 (아직) 쟁반에 쌓여있어라.

倚杖秋光冷(의장추광랭) : 지팡이를 기대니 가을빛은 차가운데

捫巖海宇寬(문암해우관) : 바위를 붙잡고 (금강대에)오르니 온 세상이 넓구나.

殷勤報猿鶴(은근보원학) : 은근히 원숭이(산사람)와 학(은둔 선비)에게 알리노니

容我再登攀(용아재등반) : 내가 다시 오르는 것을 용납해다오.

 

: 이미. : (해년), (해추). 塵蹤 : 속인의 발자취. : 산골물간, (아직유) = (). : 깜부기불신 타다가 남은 것, 탄 나머지 : 어루만질문, 붙잡을문, 海宇 : 해내의 땅, 국내. : 넓을관  '猿鶴원숭이와 학' : 猿鶴沙蟲(원학사충)의 준말로 은거하는 선비를 이르는 말. 주목왕周穆王의 군대가 몰살되어 군자는 죽어서 원숭이나 학이되고 소인은 죽어 모래나 벌레가 된다는 고사[한한대사전(단국대동양학연구소)10257]

 

 

 宿香積夜半開霽

 

飄然笙鶴瞥雲聲 : 선학이 표연히(가볍게) 나니 별안간 구름 소리가 나고

千仞岡頭秋月明 : 천길 산꼭대기(천왕봉)엔 가을 달(보름달)이 밝구나.

應有道人轟鐵笛 : 응당 어떤 도인이 날라리(轟鐵철적)를 시끄럽게 불어대니

更邀回老訪蓬瀛 : 다시 회도인을 만나 (신선이 사는) 봉래와 영주를 찾으리라.

 

笙鶴 : 선학(仙鶴)과 같은 뜻으로 생황을 즐겨불던 王子喬(왕자교)가 흰 학을 타고 신선이 되었다는 전설에서 유래함. 飄然 : 바람에 가볍게 날리는 모양, 훌쩍 떠나는 모양,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는 모양. 세상일에 구애되지 않은 모양. : 瞥眼間(별안간) 岡頭 뫼 꼭대기. 鐵笛 : 쇠로 만든 피리. 날라리. : 응당 ~하겠다. : 어느, 어떤(불특정대명사) : 시끄러울굉. : 다시갱. : 만날요. 回老 : 회도인 당나라 여동빈의 별칭. 여동빈은 당나라 8중의 하나로 꼽히는 인물. 蓬瀛 : 봉래와 영주로 신선이 사는 곳.

 

 

2. 1487년 남효온 선생의 지리산일과

 

29일 을축일. 보암을 떠나 동상원사(東上元寺)를 멀리 바라보고 문수암(文殊庵)의 삼밭을 거쳐 나무 아래의 시냇가를 지나니 어지럽게 돌이 널려 있어 길이 없었다. 가끔 돌을 모아 탑을 만들어서 산길을 표시한 곳도 있었다. 나는 돌탑을 찾으며 가다가 갑자기 법계암(法界庵)으로 가는 길을 잃어버렸다. 게다가 산에서 비를 만나 석굴 아래에서 유숙하려 했는데, 얼마 뒤 비가 개어서 다시 길을 떠나 향적암(香積庵)에 이르렀다.

암자에는 한 승려가 있었는데, 일경(一囧)이라 하였다. 그는 매우 총명하여 선지(禪指)를 깨달았지만 글자를 배우지 않아 겨우 불법의 대의(大義)만 깨친 정도였다. 그가 나에게 육조단경(六祖檀經)을 보여주었는데 매우 청정(淸靜)하여 좋아할 만하였다. 이 날 40리를 걸었다.

 

[원문] 

乙丑. 發普庵. 望見東上院. 過文殊麻田. 行樹底川邊. 亂石無路. 往往聚石爲塔. 以表山路. 余尋石塔行. 忽失法界庵路. 又逢山雨. 將宿石窟下. 雨霽復行. 得抵香積庵. 庵有一僧. 名曰一囧. 頗聰明. 解禪指. 曾於無字. 纔破大義. 一示余六祖檀經. 頗淸靜可愛. 是日行四十里.

 



 

향적사지와 금강대

 

 

3. 1489년 김일손 선생의 두류산기행록

 

한 나절 동안 운기(雲氣)가 하늘에 걸려 있는 것을 올려다보았을 뿐, 그것이 허공에 있는 물건인 줄 몰랐는데 여기 올라와보니 구름이 눈 아래 평평히 깔려 있을 따름이었다. 구름이 평평히 깔린 곳은 대낮인데도 반드시 그늘이 드리웠을 것이다. 해질녘에 남기(嵐氣) 가 사방에서 모여들어 석문(石門)을 통해 내려가 향적사에서 묵었다. 이 절의 승려가 치하하기를, “이 늙은이가 이 절에 머문 지 오래되었는데, 올해에 상봉을 보고자 하는 승려와 속인들이 많았으나, 비바람과 구름에 가려 두류산 전체를 본 사람은 아직 한 명도 없었습니다. 어제 저녁에는 날씨가 흐려 비가 올 듯 하였는데(학식있는 선비가) 상봉에 오르자 날씨가 맑게 개었으니, 이 또한 기이한 일입니다.”라고 하였다. 나도 고개를 끄덕였다.

 [원문] 

半日. 但仰見雲氣之麗于天. 不知其爲半空物也. 到此則眼底平鋪而已. 平鋪處. 必晝陰也. 日晡時. 嵐氣四合. 遂下由石門. 香積寺. 寺僧相賀云. 老物住此久. 今年多少僧俗. 欲觀上峯者. 輒爲風雨雲陰所蔽. 無一得見頭流之全體. 昨晩陰雨有徵. 措大一登. 便光霽. 是亦異也. 余頷之..

 

절 앞에는 우뚝 솟은 바위가 있는데 금강대(金剛臺)라고 하였다. 바위에 올라보니, 흰 구름이 항상 감싸고 있는 기이한 봉우리가 무수히 보였다. 법계사에서 상봉에 이르고 또 향적사에 이르기까지 모두 층층의 비탈길을 돌아서 갔다. 비탈진 바위에는 모두 석심(石蕈)이 나 있었다. 산은 모두 첩첩의 돌뿐이었고 낙엽이 돌 틈에 끼여 썩었으며 초목이 뿌리를 내려 자라고 있었다. 나뭇가지는 짧았는데 모두 동남쪽으로 쏠려 있고, 구부러지고 덥수룩하여 가지와 잎을 제대로 펴지 못하였는데 상봉 쪽이 더욱 심하였다. 두견화(杜鵑花) 한두 송이가 막 피기 시작하여 아직 피지 않은 꽃망울이 가지에 가득하니 바로 2월 초순의 기후였다. 승려가 말하기를, “산 위에는 꽃과 잎이 5월이 되어서 성대해지고, 6월이 되면 시들기 시작합니다.”라고 하였다. 내가 백욱에게 묻기를, “봉우리가 높아 하늘과 가까우니 먼저 양기를 얻을 듯한데 도리어 뒤늦게 피는 것은 어째서입니까?” 라고 하니, 백욱이 말하기를, “땅과 하늘의 거리는 8만 리이고 우리가 며칠 동안 걸어서 상봉에 이르렀지만 상봉의 높이는 지상에서 백 리도 되지 않습니다. 하늘까지 거리가 얼마인지는 모르겠지만 먼저 양기를 받는다고는 말할 수 없고 홀로 우뚝 솟아 먼저 바람만 맞을 뿐입니다.”라고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모든 생물은 높은 곳을 꺼릴 듯 하지만 높은 곳에 있으면 비바람을 면치 못하고 낮은 곳에 있어도 도끼에 찍히는 액운을 만나게 되니, 어느 쪽을 택하는 것이 좋을까요?”라고 하였다.

 [원문]

寺前有巖斗絶. 金剛臺. 登眺則眼前奇峯無數. 白雲常繞之. 自法界至上峯至香積. 皆轉繞層崖而行. 崖面皆石蕈. 山皆疊石. 落葉眯於石眼. 而草木之根. 因着而生. 枝條短折. 皆東南靡拳曲蒙茸. 不能舒展枝葉. 上峯尤甚. 杜鵑花始開一花兩花. 而未拆之蕊滿枝. 正是二月初也. 僧云. 山上花葉. 五月始盛. 六月始彫. 余問伯勖. 峯高近天. 宜先得陽氣而反後. 何也. 伯勖曰. 大地距天八萬里. 而吾行數日而到上峯. 峯之高距地不滿百里. 則其距天不知其幾也. 不可言先陽. 特孤高先受風耳. 余曰. 凡物之生. 其忌高哉. 然高不免風雨之萃. 卑且遭斧斤之厄. 將何擇而可乎.

 

향적사 곁에 큰 목재 수백 개가 쌓여 있어서 승려에게 무엇에 쓸 것인지를 묻자 승려가 말하기를, “이 늙은이가 호남 여러 고을을 다니면서 구걸하여 섬진강까지 배로 실어온 뒤 하나하나 옮겨다놓은 것입니다. 이 절을 새로 지으려고 한 지 6년이나 되었습니다.”라고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우리 유자(儒者)들의 학궁(學宮)에 대한 정성은 아직 미치지 못하는구나. 석가의 가르침이 서역에서 기인하였으나, 어리석은 사람들이 그를 떠받들어 문선왕(文宣王) 을 능가하게 되었으니, 백성들이 사교(邪敎)에 탐닉하는 것이 우리들이 정도(正道)를 독실히 믿는 것과 다르구나.”라고 하였다. 이 절에서는 바다를 볼 수 가 있었다. 내가 승려에게 말하기를, “하늘과 땅 사이에 바다는 넓고 육지는 적은데, 우리 청구(靑邱)는 산이 평지보다 많고 국가의 인구는 날로 번성하여 수용할 곳이 없으니, 그대는 자비심이 많으니 어찌 중생을 위하는 마음이 없겠습니까. 두류산이 뻗어 내린 뿌리를 거슬러 올라 장백산(長白山)에서부터 평평하게 깎아내려 남해를 메워서 만 리의 평원을 만들어 백성들이 살 곳을 마련해주는 것으로 복전(福田)을 삼으면 정위(精衛)보다 오히려 낫지 않겠습니까?”라고 하니, 승려가 말하기를, “감당할 수 없는 일입니다.”라고 하였다. 내가 다시 말하기를, “높은 언덕이 골짜기가 되고, 푸른 바다가 뽕나무 밭이 되도록 구름이 덮인 산 속 석실(石室)에서 금단(金丹) 을 수련하여 그네들 열반(涅槃)의 도를 버리고 저 장생(長生)의 도술을 배워서 두류산이 골짜기가 되고 남해가 뽕나무 밭이 되기를 기다리시오. 그런 뒤에 함께 장수를 누리는 것이 어떻겠소?” 라고 하였다. 승려가 말하기를, “인연이 맺어지길 원합니다.”라고 하고, 손뼉을 치며 껄껄 웃었다.

 

 [원문]

香積. 有大木數百章積焉. 問僧何爲. 僧曰. 老子行乞於湖南諸州. 漕致蟾津. 寸寸而輸. 欲新此寺. 已六年矣. 余曰. 吾儒之於學宮. 其未矣. 釋氏之敎. 覃自西域. 愚夫愚婦. 奉之軼於文宣王. 民之耽邪. 不如信正之篤矣. 寺可以望海. 余謂僧曰. 天壤之間. 水多而土小. 吾靑邱. 山多於地. 而國家生齒日繁. 無所容. 汝善慈悲. 盍爲衆生. 根尋頭流之所從來. 自長白山. 平鋤以塡南海. 作原隰萬里. 以奠民居爲福田. 不猶愈於精衛乎. 僧曰. 不敢當. 余又曰. 高岸爲谷. 滄海爲桑田. 雲山石室. 修鍊金丹. 舍爾涅槃之道. 學彼長生之術. 待頭流爲谷. 南海爲桑田. 然後共保耆壽. 何如. 僧曰. 願結因緣. 遂拍手大噱.

 

4.  1545황준량 선생 香積寺

 

香積寺 - 황준량

 

古寺空山靜 : 적막한 산 속 옛 절은 고요한데

無僧雲半扃 : 승려는 없고 구름이 반쯤 가렸네

斜光䟽雨照 : 성근 비에 석양빛이 언뜻 비추고

秋氣晩凉生 : 해질녘에 가을 기온 싸늘해졌네

荒殿留殘裓 : 황폐한 절간에 쇠잔한 중만 남아

寒泉到破甁 : 찬 샘물을 깨진 단지에 길어오네

幽尋如慰我 : 외진 곳을 찾는 나를 위로하는듯

孤塔語風鈴 : 외로운 탑 풍경소리로 말을 거네

 

裓 : 옷자락극(중들이 쓰는 천 조각)

 

 

5. 1610년 박여량 선생의 두류산일록

 

5(병오). 맑음. 일찍 일어나 조반을 재촉해 먹고 출발하려는데, 제석당의 주인인 노파가 고하기를 본 고을의 유향소에서 잡으러 온다는 전갈을 마천리(馬川里)의 색장(色掌)[조선시대 성균관 소속의 임원]이 전해왔습니다. 참으로 근심스럽고 괴롭습니다라고 하였다. 우리들이 함께 그 명령을 늦추어 달라고 유향소에 서신을 보냈다. 제석당 뒤에는 바위 구멍에서 흘러 나오는 샘이 있었다. 돌을 쌓아 물을 막아놓았는데 물맛이 매우 시원했다. 남쪽으로 뻗은 능선을 따라 1리쯤 가서 남쪽 묏부리 위에 올라서니 그 밑에 서천당(西天堂)과 향적사(香積寺)가 있었는데 매우 볼 만한 경관이었다. 서천당은 새로 지었고 향적사는 옛날 그대로였다. 박여승과 여러 사람들은 곧바로 서천당과 향적사로 내려가 둘러보았다. 하지만 나는 정덕옹과 함께 예전에 가본 적이 있다고 사양하고서 곧장 중봉(中峰)[제석봉]에 이르렀다. 여기는 높이가 엇비슷하여 별반 차이가 없었다. 멀리서 보는 것이 가까이서 자세히 보는 것만 못함을 알겠으니, 직접 밟아보지 않고 높낮이를 함부로 논할 수 없는 일이다.

 

[원문]

五日丙午晴早起趣食將發堂主老媼告曰有本官留鄕所推捉文字馬川里色掌所傳也誠可悶迫云余等共致書于鄕所使緩其令堂後有泉出自巖穴築石而貯之極淸洌迤南而行一理許出南岡之上其下有西天堂香積寺極可觀也堂則新設而寺則舊制也汝昇諸君卽下遊于西天香積余與德顒辭以曾所遊歷直至中峰同其高峻無有差別

 

 

 

6. 1611년 유몽인 선생의 두류산록과 기행시

 

사당 밑에 작은 움막이 있었는데, 잣나무 잎을 엮어 비바람을 가리게 해놓았다. 승려가 말하기를, “이 곳은 매를 잡는 사람들이 사는 움막입니다.”라고 하였다. 매년 8, 9월이 되면 매를 잡는 자들이 봉우리 꼭대기에 그물을 쳐놓고 매가 걸려들기를 기다린다고 한다. 대체로 매 가운데 잘 나는 놈은 천왕봉까지 능히 오르기 때문에 이 봉우리에서 잡는 매는 재주가 빼어난 것들이다. 원근의 관청에서 쓰는 매가 대부분 이 봉우리에서 잡힌 것들로, 그들은 눈보라를 무릅쓰고 추위와 굶주림을 참으며 이곳에서 생을 마치니, 어찌 단지 관청의 위엄이 두려워서 그러는 것일 뿐이겠는가. 또한 대부분 이익을 꾀하여 삶을 가볍게 여기기 때문이리라. ! 소반 위의 진귀한 음식이 한입도 안 되지만 백성의 온갖 고통이 이와 같은 줄 누가 알겠는가? 해가 기울어 향적암(香積菴)으로 내려갔다. 향적암은 천왕봉 아래 몇 리쯤 되는 곳에 있었다. 불을 피우고 술을 마셨다. 남쪽 언덕에 서서 바라보니 바위들이 우뚝우뚝하였다. 향적암은 작은 암자이지만 단청칠을 해놓았다. 북쪽으로는 천왕봉을 우러르고 동남쪽으로는 큰 바다를 바라보고 있으며, 산세가 거하고 빼어나서 주변의 산과는 다른 자태를 지니고 있었다.

 

[원문]

祠下有小幕. 編柏葉而障風雨. 僧曰此鷹幕也. 每年於八九月. 捕鷹者設罾罻於峯頂伺焉. 蓋鷹之善飛者. 能度天王峯. 故得之此峯者. 其才絶群. 遠邇官鷹. 多出諸此峯. 冒風雪耐凍餓. 了死生於此者. 豈徒官威是惕. 抑多射利而輕生者. . 孰知盤中之珍不滿一嚼. 而生民之萬苦千艱. 有如是哉. 日晡. 積菴. 菴在峯下數里所. 煮瑤草酌香醪. 臨眺于南臺. 亂石岞崿. 擁小菴而丹碧之. 北仰天王蜂. 東南望大海. 山勢豪首. 頗與外山異態

 

 

 

香積菴 - 유몽인

 

魁傑王峰土 : 우뚝하게 드높은 두류산 상봉 꼭대기에

靈祠蠔甲黏 :  신령스런 사당이 굴 껍질처럼 붙어있네

毛人欹羽蓋 : 털 난 신선이 깃털 일산을 씌워놓은 듯

瑤草擷筠籃 : 요초를 캐서 대바구니에 담아 놓은 듯

柏老心俱空 : 오래된 잣나무는 속이 모두 텅텅 비었고

巖奇髮盡참 : 기이한 바위는 대머리처럼 반잘반질하네

有時龍出洞 : 언젠가 용이 그 골짜기를 벗어 나오면

雲雨滿江南 : 운우의은택이 강남에 가득 미치게 되리

 

毝 = 參+毛, 欹 기울기(한 쪽으로 높게 세움)

 

 

 

7. 河鳳運(1790∼1830) 선생香積臺

 

香積臺 - 河鳳運

 

聯枕香臺亦一奇 : 향적대에서 함께자는 것도 기이한 일인데

邃如房舍甚便宜 : 내 집처럼 깊숙하여 매우 편하고 따뜻했네

三杯濁酒生豪氣 : 탁주 세 잔에 호걸스러운 기상이 생기나니

須趁山頭日出時 : 산꼭대기에 나아가 해 뜨기를 기다리리라

 

산에 향적대가 있어 나무를 엮어 사방을 막았으며 온돌방이 있어 매우 따듯하여 이날밤 기숙하였다.(山有香積臺. 結架四遮. 有突甚溫. 是夜寄宿.)


 

河鳳運(1790∼1830) 본관은 진주. 송정(松亭) 하수일(河受一)9세손으로, 아버지는 예암(預庵) 하우현(河友賢)이며 어머니는 분성이씨(盆城李氏) 이익의 딸이다. 부인은 은율임씨 임박(林璞)의 딸이다. 1790(정조 14)에 출생하여 10세 때 부친을 여의고 종조부인 함청헌(涵淸軒) 하이태(河以泰)에게 공부를 배웠다. 15세 때 어머니마저 별세하자 상례를 정성으로 치러 마을의 칭찬이 자자했다. 이후 혼자서 집안을 이끌어가며 바른 행실로 지역의 선비들로부터 명망을 얻었으며, 진주 연계재(蓮桂齋) 중창, 진주향안(晋州鄕案) 교감, 겸재 하홍도(河弘度) 문집 간행, 각재 하항(河沆) 비석 건립, 낙수암(落水庵) 중수 등의 일을 주도적으로 진행하였다. 뿐만 아니라 남명 조식을 모신 덕천서원 원장의 직책도 맡았다. 1830(순조 30) 안동을 방문하여 학봉 김성일과 퇴계 이황, 서애 유성룡의 학덕을 기리기도 했다. 1843(헌종 9) 별세하였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