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六友堂記/实踐人文

마암과 행랑굴, 개운암 관련 유람록과 기행시(181006)

도솔산인 2018. 10. 6. 08:39

 

마암과 행랑굴, 개운암 관련 유람록과 기행시(181006)

 

 

1. 1472년 김종직 선생의 유듀류록

 

[814] 又並脊南登中峯山中凡隆起爲峯者皆石獨此峯戴土而端重可以布武焉稍下步馬巖有泉淸冽可飮値歲旱使人登此巖蹈躪便旋則必致雷雨余前年及今夏遣試之頗驗

[814] 또 등성이의 곁을 따라 남쪽으로 중봉을 올라보니, 산중에 모두 융기하여 봉우리가 된 것들은 전부 돌로 되었는데, 유독 이 봉우리만이 위에 흙을 이고서 단중하게 자리하고 있으므로 발걸음을 자유로이 뗄 수가 있었다. 여기에서 약간 내려와 마암에서 쉬는데 샘물이 맑고 차서 마실만하였다. 가문 때를 만났을 경우, 사람을 시켜 이 바위에 올라가서 마구 뛰며 배회하게 되면 반드시 뇌우를 얻게 되는데, 내가 지난해와 금년 여름에 사람을 보내어 시험을 해 보니, 자못 효험이 있었다.

 

* :나란히 병 / :값치, 때를 맞이하다./ 蹈躪: 도린(밟을 도,짓밟을 린) / 可以 : ~할 수있다. / 布武 : 발자국이 분산되어 겹치지 아니함. 곧 빨리 달림

 

2. 1610년 박여량의 두류산일록 <馬巖 부분>

 

[96] 李君允迪復取君子路告歸余等由甑峯而下馬巖從童孫得就水而飮遇一官醫多採當歸取三四本以來進之當歸是我素所好者戒使勿遺噫歸而不能歸只好草之當歸可謂好之得其實乎歷少年臺至行廊窟各進水飯回望天王峰已不啻風馬牛之不及矣一轉足之間已至於此所謂從惡如崩者也可不懼哉

 

[96] 이윤적(李允迪)은 다시 군자사로 되돌아가겠다 했고, 우리들은 증봉(甑峯)을 거쳐 내려와 마암(馬巖)에 이르렀다. 따라온 종 손득이 물을 마시러 갔다가 당귀(當歸)를 많이 캔 관아의 의원을 만나 그 중 서너 뿌리를 얻어 가지고 와서 나에게 올렸다. 당귀는 내가 평소 좋아하는 것이어서 종들로 하여금 잘 간수하라고 주의를 시켰다. ! 벼슬을 그만두고 돌아가야 하는데 돌아갈 수 없구나. 단지 當歸라는 약초만을 좋아할 뿐이니, ‘當歸를 좋아함이 그 이름에 걸맞다고 할 수 있겠는가? 소년대(少年臺)를 지나 행랑굴(行廊窟)에 도착했다. 각자 물을 마시고 밥을 먹었다. 천왕봉을 되돌아보니 이미 바람 난 마소도 미치지 못할 뿐만 아니라(已不啻風馬牛之不及矣), 한번 걸음을 옮긴 사이에 이렇게 멀리 내려왔으니, 이른바 ()을 따르는 것은 산에서 내려오는 것처럼 쉽다는 말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當歸 : 당귀는 마땅히 돌아가야한다는 뜻이다.

 

3)1823년 김선신의 두류전지

 

馬岩은 중봉에서 조금 아래에 있다. 샘이 맑고 시원해 마실 만하다. 가뭄을 만나면 사람을 시켜 마암에 올라 발을 구르며 돌면 반드시 우레와 비를 몰아온다고 한다. 시험해보니 매우 효험이 있었다. 천왕봉과의 거리가 몇 리쯤 된다. 출처 : 전병철 교수, 두류전지(頭流全志 選勝編)

 

 

4. 1871년 배찬(裵瓚) 유두류록

 

[95] 小憇于嶺上. 過艾峴. 到天女堂平田. 從者進午飯. 遂環坐於澗邊石上. 各執匏器. 折木爲匙. 足爲免飢. 各吟一律拈平田之田字.

 

又攀木緣崖. 行十餘里. 到馬巖山幕. 幕是鷹者木器者之所處. 而適無人焉. 忽有指路者急告曰. 驟雨大至. 此去中峰山幕. 又十餘里. 則所謂進退維谷. 不如因宿于此. 遂設席于幕. 縱火於前. 卽炊飯煑羹. 已而林雨亦霽. 眼界甚暢. 幕在巖間. 不見西北. 而只見東南. 是晉洲界也.

 

夕飯後. 各散步于巖下. 忽見虹色環於山下. 近者如白硫璃. 遠者如紅錦繡. 相顧欣然. 莫知其所以然. 無乃海色爲月光所射. 紅暈自近而及遠. 故萬里卽階前. 而紅白交映者乎. 各吟一律拈馬巖之巖字.

 

[95] 산마루 위에서 잠시 쉬었다가 애현(艾峴)을 지나 천녀당(天女堂)평전(平田)에 이르렀다. 시종(侍從)들이 점심을 내와서 마침내 모두 계곡 옆의 바위 위에 빙 둘러 앉아서 각자 바가지 그릇을 잡고 나무를 꺾어 젓가락을 만들어 밥을 먹으니 배고픔을 면할 만하였다. 각자 평전의 ()’ 자를 끄집어내어 시 한 수씩을 읊었다.

 

다시 나무를 부여잡으며 벼랑을 따라 10여 리를 가서 마암(馬巖)의 산막(山幕)에 이르렀다. 산막은 매사냥꾼이나 목기(木器)를 만드는 사람들이 머무르는 곳인데 때마침 사람이 없었다. 갑자기 길을 안내하는 자가 급히 보고하기를, “소낙비가 심하게 올 것입니다. 여기에서 중봉(中峰)의 산막까지는 다시 10여 리를 더 가야하니, 이른바 진퇴유곡(進退維谷)하기보다는 여기서 하룻밤 묵는 것이 낫습니다.” 라고 하였다. 마침내 산막에 자리를 펴고 앞에 불을 피워 곧 밥을 짓고 국을 끓였다. 이윽고 숲에 비가 걷히자 눈앞이 시원스럽게 탁 트였다. 산막은 바위 사이에 있어서 서북쪽은 보이지 않고 다만 동남쪽이 보였는데 진주(晋州)의 경계였다.

 

저녁식사 후에 각자 바위 아래를 산보하였는데, 갑자기 무지개빛이 산 아래에 빙 둘러 있는 것이 보였다. 가까운 데는 하얀 유리 같고 먼데는 분홍 비단 같았는데, 서로들 보며 기뻐했지만 그런 풍경이 어떻게 생기게 된 것인지는 아무도 몰랐다. 이는 아마도 바다에 달빛이 비추어서 붉은 달무리가 가까이에서 먼 곳으로 퍼져나가기 때문에, 만 리가 곧 섬돌 앞처럼 되어 붉은 빛과 하얀 빛이 서로 투영된 것이 아니겠는가? 각각 馬巖()’ 자를 끄집어내어 시 한 씩을 읊었다.[배찬은 중봉 샘터를 중봉산막이라고 기술함]  

 

5. 1877년 허유의 두류록

 

[89] 애령(艾嶺)으로 올라갔는데, 고개가 몹시 험준하여 애써 서로 의지하며 조금씩 조금씩 나아갔다. 산꼭대기에서부터 거의 15(원문 확인이 필요함)를 기어 내려오니 큰 바위가 있는데 밑의 형세가 넓어서 의지하여 묵을 만하였다. 옆에는 나무로 만든 산신의 위패가 있어, 이곳이 산신령에게 기도하던 천막이 있던 곳임을 알 수 있었다. 하인에게 명하여 한편으로는 땔감을 가져다 밥을 짓게 하고, 한편으로는 나무를 베어 천막을 치게 하였으며, 무명옷을 입고 장작을 쌓아 불을 지펴 밤을 지새울 계책을 삼았다.

 

명원(곽종석)이 말하기를, “이 바위가 이처럼 궁륭(穹窿)하였는데 지금까지 이름이 없으니, 이름을 지어주었으면 합니다.”라고 하였다. 내가 감히 그럴 수 없다고 사양하였지만 여러 사람들이 강권하여, “이번 산행에서 마음속으로 말없이 비는 것이 단지 구름이 걷히는 한 가지 일이니 개운(開雲)' 이라고 이름 짓는 것이 어떻겠는가.” 라고 하였다.

 

* 穹窿 : 활 무지개처럼 높고 길게 굽은 형상 또는 그런 형태로 만들어진 천장이나 지붕.

 

이에 은거(하용제)가 붓을 적셔 크게 썼는데, 쓰기를 마치자 검은 구름이 흩어졌으며, 서쪽 하늘의 해는 이미 지려하고 있었다. 명원(곽종석)이 말하기를, “그대의 정성이 비록 형산(衡山)의 구름은 걷히게 하였지만, 다만 내일 화산(華山) 꼭대기에서 미쳐 날뛸까 두렵습니다.”라고 하였는데, 대개 한퇴지(韓退之:중국 당나라의 문장가 한유(韓愈)를 말한다.)의 일을 끌어다 나를 놀린 것이다.

 

[812] 마침내 (남사마을에서)은거(하용제)를 따라가서 그 집에서 저녁을 먹고 물러나와 찬여(瓚汝)의 집에서 묵었다. 하우석공(은거 하용제의 )은 강계(江界)에서의 생활을 마치고 돌아와 집에서 밥을 먹은 지 여러 해가 되었는데도 언제나 격앙되고 강개한 것이 나라의 큰 선비로서의 풍모가 있었다.

 

[813] 길을 나서니 여러 현인들이 멀리 숲 밖까지 함께 왔다. 내가 은거에게, 개운암(開雲巖)에서의 일에 힘쓰라.”고 말하니, 은거가 알겠습니다.”라고 말하였다. 원지점(院旨店)에 이르러 치수를 기다렸는데 오지 않았다. 먼저 지나간 것이 아닌가 싶어서 길을 나아가 진태점(進台店)에 이르렀는데, 치수가 뒤쫓아 와서 말하기를, “어른이 뒷사람을 이처럼 버리면, 뒷사람은 누구에게 기대야 합니까?”라고 하여, 내가 나는 그대가 먼저 올라갔나보다 했는데, 뒤에 있었는가?”라고 말하였다. 술을 따라 서로 위로한 뒤, 권성거(權聖擧)형을 섬계(剡溪)로 찾아가 만났다. 저녁나절에 법물(法勿)로 들어가 치수의 서당에서 묵었으며, ()과 지()가 서로 다른 점에 대하여 논하였다.

 

[825] 한주(寒洲 : 이진상(李震相)) 선생이 도남정사(道南精舍)로 나를 찾아왔다. 남사(南沙)를 향해 가고 있는 중인데, 또한 뜻이 천왕봉 꼭대기에 올라가는 데 있으며, 은거가 따라 가서 내 성명을 일월대에 새기겠다.고 하였다.

 

6. 1877년 곽종석과 권규집의 開雲巖 次韻詩 

 

謹次南黎開雲巖命名韻 : 남려(허유)가 개운암이라고 불인 이름에 차운하다.

 

  巖在方丈中峯之下 : 개운암은 방장산 중봉의 아래에 있다.

 

                              俛宇 郭鍾錫(1846~1919)

 

昌黎奇氣本巖巖 : 한창려의 기이한 기상은 높은 산에 근본 했는데 

苦不能人大嶺南 : 괴로워 못오르는 사람은 고개 남쪽을 크다 하네.

登高一撫頭流石 : 높은 곳에 올라 두류산 바위를 한번 어루만지고 

鼓發天風掃碧嵐 : 하늘 바람 불러 일으켜 푸른 남기를 쓸어버리네.

 

 

宿開雲巖 : 개운암에서 묵다.

 

有數椽 依巖結幕 : 몇 개의 석가래를 가지고 바위에 의지해 장막을 쳤다.

 

                              俛宇 郭鍾錫(1846~1919)

 

夜宿頭流巖穴中 밤이되어 두류산 바위밑에서 하룻밤을 묵었는데

營居猶藉往人功 : 잠자리는 오히려 옛 사람이 잤던 데에 마련 했네.

飛雨連山淘浩劫 : 쏟아지는 비가 온 산에 퍼부어 억 겁을 씻어내고

靈風吹火燭寒空 신령한 바람 불을 붙이듯, 차가운 허공을 밝히네

下界焉知吾輩在 : 저 아래에 우리들이 있는 곳을 어떻게 알겠는가

後來無忘此時同 : 먼훗날 지금 우리 함께한 것을 잊지는 말아야지.

聯肱試做遊仙夢 : 팔뚝을 나란히 하고 선계에 노니는 꿈울 꾸게나

一切蓬瀛東復東 : 모두 봉래와 영주를 찾아 동쪽으로 또 동쪽으로...

 

* 蓬瀛 蓬莱瀛州’. [다같이 전설에서 신선이 산다는 발해(渤海)에 있는 산] [비유] 선경(仙境).

 

 

謹次南黎許丈愈開雲巖命名韻 : 남려 허유 어른이 개운암이라고 불인 이름에 차운하다.

 

                              兼山 權奎集(1850~1916)

 

今黎杖屨抵奇巖 : 지금 남려 어른이 기이한 바위에 이르르니

衡岳餘愁有巉南 : 형악에서의 남은 근심 지리산에도 있었네.

認是精誠天所感 : 이 간절한 정성 하늘이 감읍한 줄 알았으니

長風頃刻簸蒼嵐 : 긴 바람이 삽시간에 푸릉 남기 걷어내누나.

 

7. 1877朴致馥東遊記行

 

[829]命僕夫卸擔. 炊飯. 飯訖緣溪拚壁而上至艾田嶺嶺以外湖南界也小憩納涼見群山之自雄於區域者皆斂容屛氣隱然有嚮化拱極之意已覺吾身之占地差高又行十里許踰峻嶺緣崖而西可想山之事已半矣俯見萬脊南流齊烟渺茫霜葉正酣磎壑通明斷雨殘雲起滅於山腰差覺臆間爽然大石陡斷千尺下有煤痕榾頭蓋障儲胥猶存崖面書開雲巖三字許南黎姓名在焉可想前行留宿處撞著歡喜如對眞面

[829] 말몰이꾼에게 명령하여 매단 것을 풀어놓고 점심을 준비하도록 하여, 밥을 먹고 시내를 따라 절벽을 붙잡고 올라가 애전령(艾田嶺)에 도달하였다. 고개의 밖은 호남의 지역이다. 잠시 쉬면서 서늘한 바람을 맞았다. 여러 산들이 각각의 구역에서 웅장하게 솟아 있는데, 모두 용모를 단정히 하고 기운을 엄숙히 하여 이곳을 향하여 공손함을 드러내고 있으니, 내가 위치하고 있는 곳이 상당히 높은 것임을 비로소 깨달았다. 10리 정도를 가서 험준한 고개를 넘었다. 절벽을 따라 서쪽으로 가니, 이제 반절은 된 듯싶었다. 아래를 굽어보니, 많은 산줄기가 남쪽으로 뻗어 있는데 안개가 높이 끼어 아득했다. 서리 맞은 잎은 참으로 붉고, 시냇가 골짜기는 활짝 열려 밝다. 산허리에는 구름이 약간 피어올라 비가 내렸다 그쳤다 한다. (이런 경치를 바라보노라니) 마음이 상쾌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큰 돌이 우뚝 솟아 뚝 끊어졌는데 그 천 길 아래에 나무 등걸을 그을린 흔적이 있고, 가로막은 울타리가 아직도 남아 있다. 절벽의 면에는 개운암(開雲巖)’ 세 글자가 쓰여 있는데, 허남려(허유)의 이름이 옆에 있다. 앞에 행차하여 머물러 유숙한 곳으로 생각된다. 다가가 만져보니 매우 기뻐 그의 얼굴을 대하는 것 같았다.

 

* 이진상(李震相) [18181886] 본관은 성산(星山). 자는 여뢰(汝雷), 호는 한주(寒洲).조선 말기의 대유학자.

* 허 유(許 愈) [1833~1904] 자 퇴이(退而), 호 후산(后山) 남려(南黎), 한주(寒洲) 이진상(李震相)의 문인.

* 곽종석(郭鍾錫) [1846~1919] 조선말의 주자학자·독립투사. 본관은 현풍. 자는 명원(鳴遠), 호는 면우(俛宇), 유석(幼石) 단성(丹城) 출신. 이진상(李震相)의 문인.

* 하용제(河龍濟) [1854~1919] 자는 은거(殷巨) 호는 약헌(約軒). 곽종석(郭鍾錫)의 문인. 남사마을 출신. 원정구려의 주인

 

8. 1922년 권도용의 방장산부

 

馬巖之幽絶允合升高而歇脚照以畢翁之所記眞境相符而不錯緬前賢之留芬想杖屨而如昨隨太守之指揮敏僧侶之趨作斬松檜而爲蓋藉芳草而爲席比巢皇而已侈一屋構於頃刻運連抱之樟木大(+)火而達昔酌鞄中之和酒夜寒暖其莫覺方星月之明槪而山河之寂寞誦孤雲之玉枕吾亦欲玆焉永託於是

마암(馬巖)에 도착하니 그윽하고 빼어났으며 높이 오르기에 적합하여 올라가 다리를 쉬었다. 필옹(畢翁 *점필재)이 기록한 진경(眞境)에 꼭 들어맞는 곳으로 먼 선현이 남긴 행적과 어긋나지 않아 거닐던 자취를 생각하니 마치 어제인 듯하였다. 태수의 지휘에 따라 민첩한 승려들은 재빨리 소나무 전나무를 베어내고 방초를 깔아 자리를 만들었다. 비유하자면 나무 위에 얽은 새 둥지와 같을 뿐이지만 잠깐 사이에 사치스런 집 한 채를 지은 셈이다. 아름드리 녹나무를 연이어 운반해와 모닥불을 크게 피우고 저녁이 되어 뱃가죽 속으로 술을 부으니 추위와 따뜻함을 느끼지 못하였다. 이윽고 별과 달이 밝게 뜨고 산하가 적막한 가운데 고운의 옥침(玉枕) 1)를 읊조리자 나 또한 이곳에 영원히 몸을 맡기고 싶었다.

 

一蹴而上至顚觀日出立峭巖嚮東溟屢回瞻元氣未判水雲相涵下界群山影祕形潛混淪之中渺不可諳己而紅輪碾上滄海沸盈珥暈煬熿雉膺爛熒色色萬彙各呈其形天下壯觀莫之與京信哉登山而不觀日出譬猶卸錦衣而晝行也覩古蹟而尋問有威肅之舊祠世或稱爲佛母爰詳文愍之辨辭

이윽고 한걸음에 꼭대기에 올라 일출을 구경하였다. 날카로운 바위에 서서 동쪽 바다를 향하여 몇 번이나 쳐다보았다. 아직 원기(元氣 *천지우주의 원래 기운)는 구분되지 않았고 물과 구름이 서로 섞여 있었다. 하계의 뭇 산들은 그림자는 형체에 숨어 있고 형체는 그림자에 잠겨 있었다. 혼돈의 가운데에서 아득하여 내 몸을 알아볼 수 없었다. 붉은 바퀴가 맷돌처럼 떠올라 온 바다가 들끓고 햇무리는 불타는 듯 환하고 꿩의 가슴처럼 찬란하게 번쩍이고, 색색이 만 가지로 빛나 각기 그 형태를 드러내니 천하의 장관으로, 견줄 만한 것이 없으리라. 참으로 산에 올라 일출을 보지 않는다면 비유하자면 비단옷을 벗어 놓고 낮 길을 가는 거와 같다. 고적(古蹟)을 보고 물었더니 위숙왕후의 옛 사당이 있었던 곳이라고 하였다. 세상에서는 혹 불모(佛母)라고도 칭하는데 자세한 것은 문민(文愍 *김일손)공이 변별하여 말하였다.[국역 이재구 선생]

 

9. 1923년 개벽 제 34호 지리산보(1923.04.01)

咸陽郡守 閔麟鎬씨는 空殼名勝古蹟이나마 보존하랴고 保勝會를 조직하고 智異山을 세계에 소개하기 위하야 智異山誌葺輯 중이오, 同郡有志 姜渭秀씨는 遊山하는 의 편리를 키 위하야 山上望海亭을 건축하고 朴魯翊 及 靈源寺僧 一同帝釋堂을 건축하얏스며 李璡雨 及 碧松寺僧 一同馬岩堂을 건축하야(兩處皆 中峯) 本年 陽春佳節開山式하랴 한다.

 

10. 1924년 강계형의 두류록 

점 앞으로 쑥밭재[艾峴애현]로 나아가는데 길은 왼쪽으로 가다 오른쪽으로 향했으며 산기슭을 넘자 천례탕(天禮碭 *하늘에 제사지내는 돌)이었다. 골짜기는 깊고 길은 험한데 거기다 거대한 나무들이 하늘을 찔러 눈길을 돌릴 겨를이 없었다. 부족한 것은 서리 내릴 계절이 아직 멀어 단지 녹음만 짙은 것뿐이었다. 만약 늦은 서리가 내려 붉고 누런색이 화려하게 펼쳐지면 완연히 사람이 비단휘장 속에 있는 듯 형체와 그림자가 서로 비추겠지만, 그것 없이도 하나의 장관이었다.

 

나는 본디 초목·금수의 계보에 어두워 아는 것이라곤 나무는 녹나무 떡갈나무 박달나무 전나무 마가목 청려목 등이고, 풀은 작약 당귀 도라지 고사리 등속일 뿐이다. 앞길은 극히 험하여 올라갈 때에는 허공으로 오르는 것 같고, 내려갈 때에는 깊은 연못으로 떨어지는 듯하여 결코 평탄한 곳이 없다. 종자들이 말하기를, “전에 산에 오른 자들은 관을 벗고 나무를 끌어안고 바위를 끼고 간신히 나아갔는데 지금은 보존사(保存社 *함양명승고적보존회)의 힘으로 산 아래 사람을 시켜 벌목을 하고 험한 곳을 고르게 한 덕분에 이 앞까지는 평지라 할 수 있습니다.” 하였다.

 

또 유산자들의 노숙을 생각하여 마암상봉 제석당 등지에 판옥(板屋)을 세우고 풍우를 가리게 하였으니 혜택이 유산인에게 미쳤다고 할 수 있다. 나와 내명은 모두 추위에 곤란을 겪는 자들이므로 길가의 초목이 무성한 것을 보고 말하기를 한 골짜기의 땔나무를 긁어 집으로 보내면 겨울을 나는 데에 어렵지 않겠다.”고 하자, 종자가 듣고 말하기를 “(저의) 마음 씀이 마을사람들에게 멀리 미치지 못하니 스스로 부끄럽습니다.” 하였다.

 

힘을 다하여 마암당(馬巖堂)에 이르렀는데 이는 하봉에서 처음 도착하는 곳이다. 거대한 바위가 둥그렇게 솟아 있는 것이 십여 길이었고 아래 부분은 평탄한데 곁에는 근원이 되는 샘이 있었다. 몇 칸의 집을 새로 지었는데 온돌과 벽 없는 마루가 간략히 갖추어져 있어 길 가는 사람이 다리를 쉴 만하였다. 막 점심을 먹으려 할 때에 문선비와 세동 사람 몇이 도착하여 둘러앉아 점심을 먹었다. [국역 이재구 선생]

 

漸漸前進置艾峴路於左便而取右路踰麓則天禮碭也谷深路險加以巨材參天無暇顧眄而所少者霜候未及只是綠陰中而已若到晩霜則紅黃爛漫宛似人在錦繡步障中形影相照而欠此一壯觀也余素昧草木禽獸譜而所識者於木櫲檞檀檜丁公藤靑藜枝之屬於草則芍藥當歸吉更薇蕨之屬而已前路崎嶇或上而騰於半空或下而若墜乎淵谷絶無平坦處從者言前之上山者脫冠巾而抱木挾巖艱辛而進今則賴有保存社之力使山下人伐薪輯險此前則可謂平地矣又慮遊山者之露宿設板屋馬巖上峯帝釋堂等處蔽風雨可謂惠及遊人矣余與乃明俱是困於寒者見路傍草樹之離披曰若梳一谷之薪輸之於家則過冬不難矣聞此從者之言自愧用心之不及社人遠矣盡力到馬巖堂乃下峯初到處也蓋巨巖穹隆壁立者十餘仞而下稍平坦傍有源泉新築數間屋子溫突凉軒略僃而足以歇行者之脚一行方午飯之際文生與細洞數人來到遂匝坐點心

 

♣ 마암과 행랑굴, 개운암에 대한 유람록의 기록

유람록 중봉() ()마암 비고
1 1472년 김종직의 유두류록 馬巖(마암)    
2 1610년 박여량의 두류산일록 馬巖(마암) 行廊窟(행랑굴) 행랑굴(중식)
3 1825년 김선신의 두류전지 馬巖(마암)    
4 1871년 배찬의 유두류록 中峯山幕 馬巖山幕 마암의 산막()
5 1877년 허유의 두류록   開雲巖(개운암) 개운암()
6 1877년 곽종석과 권규집의 차운시   開雲巖(개운암) 곽종석 穹窿(궁륭)
7 1877년 박치복의 동유기행   開雲巖(개운암)  
8 1922년 권도용의 방장산부 馬巖(마암)     마암()
9 1923년 개벽 제 34호 지리산보   馬巖堂(마암당)   중봉 
10 1924년 강계형의 두류록   馬巖堂(마암당) 마암당(중식)

출처 : 선인들의 지리산 유람록/선인들의 지리산 기행시(최석기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