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六友堂記/산행기록

지리동부 어름터&영랑대 3박 4일(180923~26)

도솔산인 2018. 9. 26. 23:21


지리동부 어름터&영랑대 3박 4일(180923~26)



▣ 일   시 : 2018년 09월 23일(일)~26(수)

▣ 코   스 : 어름터-청이당-영랑대(박)-청이당-어름터(박)-청이당-영랑대(박)-청이당-옹암(진주독바위)-새봉-향로봉-벽송사능선-어름터

▣ 인   원 : 5명(金山님, 조박사님, 최정호님, 윤선생님)

▣ 날   씨 : 맑음, 흐림(아침 영상5도)



 지난 여름 폭염 속에서 2회에 걸쳐 2박 3일간 점필재길 화첩 복원 산행을 돌아보니 참으로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 작년 5월 3박 4일로 점필재길 전구간 답사 산행을 하면서 세석에서 우연히 만난 조자룡님과 영신봉에서 바른재능선 하산 길을 함께한 인연으로 점필재길을 나누어 구간 별 답사를 시작하였다. 구간 답사를 마무리하기 위해 지난 9월 초 적조암에서 출발, 地藏庵과 三涅庵 터를 둘러보고 우천으로 향로봉(상내봉) 삼거리에서 벽송사 능선으로 하산하여, 趙博士님에게 새봉에서 향로봉이 유일한 미답 구간이었다. 나는 추석 명절 전에 지리로 내려가서 영랑대에서 1박을 한 후, 어름터에서 일행들과 합류하여 다시 영랑대로 올라가 남은 구간의 마무리를 도왔다. 이번 추석 명절은 연휴 첫날 차례와 성묘를 한 후 가족들의 이해로 4박 5일이라는 시간을 지리에서 보낼 수 있었다.



1. 두류암 가는 길


 본격적으로 선인들의 유람록을 읽고 산행을 하면서 느꼈던 점은 지명에 대한 혼란이다. 지명은 시대에 따라 변할 수 있지만, 한 개인이나 특정 단체가 임의로 붙일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사회 구성원이 충분히 납득할 만한 묵시적 동의에 의해 이루어져야한다. 따라서 어떤 역사적인 사건이나 인물, 또는 사물의 형상에서 비롯해야함은 勿論 문헌적인 고증이 있어야한다. 유람록을 잘못 해석하여 고문헌에 나오는 옛 지명을 버리고 새롭게 개명하는 것을 지켜보면서, '이것은 아니다.' 싶어 개인적인 의견을 낸 일이 있었으니, 그 논쟁 중의 하나가 두류암터다. 一言(폐일언)하면, 천령지에 '두류암 동쪽에 송대 마을이 있다.[東有松臺]'는 기록이 있다.



가. 두류암에 대한 선인들의 기록


1) 1580년 邊士貞의 유두류록

 [원문] 早食發行. 過龍遊潭. 至頭流庵. 層崖削出. 壁立萬仞. 百花爭發. 襲香一洞. 竟日坐玩. 不覺其暮遂入禪房. 共宿焉.

 ○ 4月 初七日, 아침에 일찍 밥을 먹고 출발하여 용유담(龍遊潭)을 지나 두류암(頭流庵)에 도착하였다. 층층의 벼랑이 깎아지를 듯 솟아 있고 절벽이 만 길 높이로 우뚝 서 있었다. 온갖 꽃이 다투어 피어나니 꽃향기가 계곡을 온통 뒤덮었다. 하루 종일 앉아서 완상하니 날이 저무는 것도 몰랐다. 마침내 선방(禪房)에 들어가 함께 잤다.


[원문] 晨朝促喫. 紫眞洞. 攀巖飛杖. 登天王峯. 是日也天氣淸朗. 極目無碍. 精神灑落 

○ 四月 初八日. 아침 (두류암에서) 일찍 밥을 먹고 자진동(紫眞洞)을 지나 바위를 잡고 지팡이를 날리며 천왕봉(天王峯) 에 올랐다. 이 날은 날씨가 매우 맑고 화창하여 시계가 막힘이 없었고 정신이 씻은 듯 상쾌하였다.


紫眞洞(자진동) : 어름터 주변으로 추정함.



2) 1611년 柳夢寅의 두류산록

[원문] 遂入頭流菴. 菴之北有臺. 直南而望之. 有飛瀑瀉于巖間. 如懸玉簾數十仞. 雖竟夕坐玩. 不覺其疲. 而會雨新晴. 谷風淒緊. 以爲過爽不可久淹. 遂入禪房安頓焉.

○ 4월 3일, 드디어 두류암(頭流庵)에 들어갔다. 암자 북쪽에 대(臺)가 있어 그곳에 올라 정남쪽을 바라보니, 바위 사이로 폭포수가 쏟아지고 있는데 마치 옥으로 만든 발을 수십 길 매달아놓은 것 같았다. 저녁 내내 앉아 구경하더라도 피곤하지 않을 듯하였다. 마침 비가 그치고 날이 활짝 개었다. 골짜기에서 서늘한 바람이 불어와 매우 상쾌한 느낌이 들었다. 오래 앉아 있을 수 없어 선방으로 들어가 편히 쉬었다.



頭流菴 - 柳夢寅

 

虛壁脩縑繟 : 텅 빈 절벽은 긴 비단을 드리운 듯하고

淸光碎石縫 : 맑은 햇빛은 부서진 바위를 꿰맨 듯하네

傳聲通翠筧 소리는 푸른 대숲을 통해서 들려오고

飛注作寒舂 : 떨어지는 폭포는 차갑게 절구질을 하네

雙柏西僧老 : 두 그루 잣나무 서쪽 승방 가에서 늙었고

層壇北斗封 : 층층의 법단은 북두성인듯 우뚝하구나

長風生萬籟 : 긴 바람 불어와서 온갖 소리 일으키니

深省寄前峰 : 깊이 성찰하며 앞산 봉우리에 기대 섰네.

 

 * 1구 맨 끝자 享+單은 자전에 없어 느슨할 단, 계속될 선(다른 표현: 띠 늘어질 천)으로 보았고 春(춘)이 아니고 舂 : 찧을용이 맞음,



頭流菴 贈慧日 兼示修師 - 柳夢寅

(두류암 혜일에게 주고 아울러 수선사에게 보여주다.)

 

先賢曾訪頭流境 路由義呑村之南 : 선현들이 두류산 선경을 찾아 나섰으니/ 길은 의탄촌 남쪽을 경유하였지

我今尋眞入頭流 偶然一宿頭流菴 : 내 이제 진경을 찾아 두류산에 들어와서/ 우연히 하룻밤을 두류암에 묵었네

頭流菴在義呑上 我行適與先賢同 : 두류암은 의탄 마을 위쪽에 있으니/ 내 산행이 마침 선현들의 유람 길과 같네

                                                                                       [출처 : 지리산유람 기행시 1권]


3) 1867년 김영조(金永祚)의 유두류록

[원문] 向文殊寺. 境甚幽僻. 暮抵松臺村. 村在頭流山下. 四山簇立. 林壑蔚然. 川聲滾滾. 亦一別景也. 訪朴德元. 因畱宿. 踰一嶺. 至林下石澗盤上. 各啖梨一枚. 歷大坂至頭流菴. 田家數十戶. 皆升茅構木爲居也.

8월 26일~29일, 문수사(文殊寺)를 향하니, 장소가 매우 깊숙하고 치우쳐 있었다. 저녁에 송대촌(松臺村)에 이르니, 마을이 두류산 아래 있어, 사방에 산이 빽빽하게 들어서서, 숲과 골짜기가 울창하며, 시내 소리가 세차게 들리니, 또 하나의 색다른 경치였다. 박덕원(朴德元)을 찾아가서 하룻밤 묵었다. 고개(장구목) 하나를 넘어 숲 아래 있는 돌 시내에 이르러, 각자 소반 위의 배 하나씩을 먹었다. 큰 언덕을 지나 두류암(頭流菴)에 이르니, 농가 수십 호가 모두 띠풀로 지붕을 얹고, 나무를 얽어서 살고 있었다.

[생초-엄천사지-문정동-세동마을-송대리(1)-벽송사능선-어름터-두류암-말바우산막-중봉-천왕봉]



4) 1871년 배찬(裴瓚) 유두류록

[원문] 須臾四山忽黑海風. 甚冷凜乎. 其不可乆留也. 因促行還到馬巖幕. 從者先詣. 朝飯已熟矣. 飯後. 遂直下頭流菴. 小憇. 至五峯村後麓. 村人員簞食壺漿而來. 一行皆頼此免飢. 侯命給其價而謝之.

1871年 9月 初7日 (하산길),조금 있으니 사방 산이 순식간에 어두워지고 해풍이 매우 차가워서 떨려서 오래 머무를 수가 없었다. 걸음을 재촉하여 마암의 산막으로 돌아왔다. 시종이 먼저 도착해서 조반을 이미 지어놓았다. 밥을 먹은 후에 마침내 바로 두류암으로 내려와 잠시 쉬고 오봉촌 뒤의 산촌[오봉리 독가]에 이르렀는데, 마을 사람이 밥과 음료수를 지고 와서 일행은 모두 이로 인해 갈증과 배고픔을 면하였다. 수령이 값을 쳐주어 사례하게 하였다.

[화림암-오봉리-사립재-쑥밭재-청이당(천녀당)-마암산막(1)-중봉-천왕봉(2)-마암산막(조반)-두류암-사립재-폐독가(늦은중식)-화림암]



5) 1922년 권도용(權道溶) 방장산부(方丈山賦)

[원문] 惟禪應之指路 幾俗臘之古稀 得般若之道力 倏登陟而如飛 憩氷峙徐進 得盤陀之石磯 出二派而匯合 成 自然之淸潿 蒼藤古木湲依依 山禽效吟樵歌忘機 遂乃弛擔午䭜脫略交譚 太守請余而錫名 名之曰三乂巖 溪壑荵蒨於耳 郭峯巒糾紛於眼簾 過杜里之廢寺 有兩巖之交粘問奚名 則曰金剛門 亦禪師之權辭以拈眡

4월 기망(旣望 *16) [벽송사 출발], 승려 응지가 길을 인도하였는데 세속 나이로 거의 고희에 가까웠지만 빠르게 산을 오를 때는 마치 나는 듯하였다. 빙치(氷峙)에서 쉬었다. 천천히 나아가 너럭바위에 이르렀는데 여울이 두 갈래로 흘러오다가 합쳐 저절로 맑은 웅덩이가 되었다. 푸른 등나무 고목은 물가에 푸릇푸릇하고, 산새는 나무꾼의 노래를 흉내 내어 울어 세상일을 잊게 하였다. 마침내 짐을 내리고 점심을 먹으면서 간단히 얘기를 나누었다. 태수가 내게 바위의 이름을 지어 달라고 청하여, 삼예암(三乂巖 *물결이 세 갈래로 둘러싼 바위)이라 이름 붙였다. 골짜기의 물소리 또렷이 귓가에 들리고 산봉우리들 중첩되어 눈앞에 보였다. 두리(杜里)의 폐사(廢寺)를 지나니 양쪽의 바위가 서로 붙어 있는 곳이 있어 무엇이라 부르는지 물었더니 금강문(金剛門)이라 하였다. 이 또한 승려들이 보이는 대로 갖다 붙인 말이다. [출처 지리99 글쓴이 이재구 선생]


☞ 권도용(1878-1959)은 근세의 유학자이자 언론인‧독립운동가



6) 정수민이 편찬한 천령지

[원문] 頭流庵. 在君子寺東三十里. 東有松臺. 韻致幽閑.今無.(천령지130)

두류암은 군자사 동쪽 삼십리에 있다. (두류암) 동쪽으로 송대가 있는데, (두류암은) 운치가 그윽하고 한가하다. 지금은 없다.


☞ 정수민(鄭秀民)천령지(天嶺誌)편찬한 시기(1656)에는 두류암이 있었고, 천령지(天嶺誌) 家藏(가장 : 간행되지 않고 후손에 의해 집에 보관 됨)되어 있다가, 후손 정환주(鄭煥周) 간행한 시점(1888)에 今無가 추가 기입한 것으로 추정한다. 간행 시점(1888)에는 이미 두류암이 폐사된 것으로 보인다. 현재 전해지는 천령지는 정환주(鄭煥周)의 간행본이다. 1867년 김영조의 유두류록에서 '큰 언덕을 지나 두류암(頭流菴)에 이르니'의 큰 언덕과, 1922년 권도용 방장산부에 나오는 빙치(氷峙)는 앞으로 풀어야할 과제이다.















2. 청이당터 가는 길


청이당터 역시 선답자들이 위치만 대략 짐작하고 이 또한 紅心에서 벗어났다. 청이당터가 야영할 수 있는 넓고 평평한 곳이라는 사람도 있고, 계곡 옆 바위 아래 기도터를 청이당터라고 하는 이도 있어 의견이 분분했다. 나는 하봉 옛길 건너는 계곡 중간 반석에서 쉬어가는데, 김종직 선생의 유두류록에 '청이당터 앞 계석에서 쉬었다.'는 기록에 근거하여 처음부터 계석 쉼터 주변에 占堂터가 있다고 추정하였다. 작년 5월 초 '김종직 선생의 유두류록과 기행시를 좇아서(3박4일)' 산행을 하면서 우연히 청이당터 석축을 발견하였고, 그것이 끝내 선답자들의 노여움을 사는 일이 되었다. 사람들이 '행랑굴을 행랑굴이라고 부르지 못하는 이유'를 그제야 알게 되었고, 나는 산에서 '착(錯)하게 살 것인가? 바르게 살 것인가?'를 생각하다가 후자를 선택했다.



가. 청이당에 대한 선인들의 기록 


1) 1472년 김종직 선생의 유두류록

[원문] 淸伊堂以板爲屋四人各占堂前溪石上小憩

1472년 8월 15일, 청이당(淸伊堂)에 이르러 보니 지붕이 판자로 만들어졌다. 우리 네 사람은 각각 청이당 앞의 시내 바위(위에서) 차지하고  앉아서 잠깐 쉬었다.

占堂 : 청이당


2) 1611년 유몽인 선생의 두류산록

[원문] 癸酉. 侵晨而行掠甕巖. 淸夷堂. 穿森木亂石叢. 至永郎臺.

1611년 4월 4일, 계유일. 새벽에 길을 떠나 옹암(甕巖)을 지나 청이당(淸夷堂)에 들어갔다. 숲을 헤치고 돌무더기를 가로질러 영랑대(永郞臺)에 이르렀다.


3) 1871년 배찬 선생의 유두류록

[원문] 小憇于嶺上. 艾峴. 天女堂平田. 從者進午飯. 遂環坐於澗邊石上. 各執匏器. 折木爲匙. 足爲免飢. 各吟一律拈平田之田字.

1871년 95일, 산마루 위에서 잠시 쉬었다가 애현(艾峴)을 지나 천녀당평전(天女堂平田)에 이르렀다. 시종(侍從)들이 점심을 내와서 마침내 모두 계곡 옆의 바위 위에 빙 둘러 앉아서 각자 바가지 그릇을 잡고 나무를 꺾어 젓가락을 만들어 밥을 먹으니 배고픔을 면할 만하였다. 각자 평전의 ()’ 자를 끄집어내어 시 한 수씩을 읊었다.


4) 1924년 강계형의 두류록
[원문] 漸漸前進置艾峴. 路於左便而取右. 路踰麓. 則天禮碭也.
1924년 8월 18일(송대 출발) 점점 앞으로 쑥밭재[艾峴애현]로 나아가는데 길은 왼쪽으로 가다 오른쪽으로 향했으며 산기슭을 넘자 천례탕(天禮碭 *하늘에 제사지내는 돌)이었다. [출처 지리99, 국역 이재구 선생]


청이당 터 석축


청이당 앞 계석[김종직 선생의 유두류록과 기행시를 좇아서I(170503~06)]


1924년 강계형의 두류록에 나오는 天禮碭(천례탕)


天禮碭에서 碭은 '무늬있는돌'이다. 무늬가 없는 돌이 없겠지만 바위 전면에 무늬가 있고 바닥에는 석축의 흔적이 있다.


의병장 석상용 장군 무덤



傳聲通翠筧/飛注作寒舂 소리는 푸른 대숲을 통해서 들려오고/ 떨어지는 폭포수는 차갑게 절구질을 하네(유몽인).




변사정 [15804月 初7]

두류암에 도착하니 층층의 벼랑이 깎아지를 듯 솟아 있고 절벽이 만 길 높이로 우뚝 서 있었다.[至頭流庵. 層崖削出. 壁立萬仞]

 

유몽인 [16114月 初3]

암자 북쪽에 대()가 있어 그곳에 올라 정남쪽을 바라보니, 바위 사이로 폭포수가 쏟아지고 있는데 마치 옥으로 만든 발을 수십 길 매달아놓은 것 같았다.[菴之北有臺. 直南而望之. 有飛瀑瀉于巖間. 如懸玉簾數十仞.]




북쪽 대에 올라가 내려다 본 폭포[1610년 박여량의 두류산일록에 나오는 兩流菴(180623~24)]

 

☞ 유몽인 [1611年 4月 初3日]

바위 사이로 폭포수가 쏟아지고 있는데 마치 옥으로 만든 발을 수십 길 매달아놓은 것 같았다. [直南而望之. 有飛瀑瀉于巖間. 如懸玉簾數十仞]




석상용 장군 묘소



3. 마암과 행랑굴, 개운암에 대하여


마암에 대한 논란이 뜨거웠던 시간이 있었지만 시대와 사람에 따라 유람록의 기록이 다르니 혼란이 있을 수밖에 없다. 1472김종직 선생1610박여량 선생중봉샘(80년대 초 김경렬 선생이 붙인 이름)마암이라고 하였고, 박여량 선생은 마암산막터를 행랑굴로 기록하고 있다. 이후 1825년경 편찬된 3대 山誌인 김선신은 두류전지에 馬岩은 중봉에서 조금 아래에 있다. 샘이 맑고 시원해 마실 만하다.(중략) 천왕봉과의 거리가 몇 리쯤 된다. '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후 46년 1871년 배찬 선생은 행랑굴을 馬巖으로 언급하였다. 1877년 강우학파의 거두 한주 이진상 선생과 만성 박치복 선생의 門人許愈(허유)俛宇(면우) 郭鍾錫(곽종석) 선생의 권유로 이곳을 開雲巖(개운암)이라고 이름을 짓는다. 1610년 박여랑은 행랑굴, 배찬은 1871년 마암, 1877허유는 개운암, 1924년 강계형은 마암당으로, 연대의 차이가 있으나 한 곳을 대략 세 가지 이름으로 부른 셈이다. 行廊(행랑)은 벽이 없고 지붕만 있는 형태를 의미한다. 이것을 궁궐이나 사찰은 回廊(회랑)이라고 한다. 따라서 비를 피할 수 있는 오버행 바위를 뜻한다. 이것을 1877俛宇(면우) 郭鍾錫(곽종석) 선생은 穹窿(궁륭)으로 설명하고 있는데, 지금의 簡易(간이) 자전거 보관소 지붕의 형태로 이해하면 된다. 마암의 석각에 대한 기록은 없으니 근세에 새긴 것으로 보인다. 아무튼 작은 조개골의 신행랑굴은 영랑재처럼 20177월 중순 경 아무런 설명도 없이 지리산길지도에서 조용히 사라졌다.


1871년 배찬 선생이 이곳을 마암산막이라고 한 것은 말봉(1618봉)과 연관이 있다고 추정하는데, 말봉이 어느날 두류봉으로 둔갑했으니, 그 지명의 根據(근거)가 아예 지도에서 없어진 것이다. 말봉을 한자로 표기하면 馬巖이다. 巖은 산봉우리의 의미가 있다. 따라서 말봉 아래 산막이 말바우 산막인 셈이다. 배찬이 중봉 산막이라고 기록한 곳은 현재 중봉샘이거나 중봉의 서쪽 사면에 진사님들의 뷰포인트 앞의 터로 추정하고 있다. 왜냐하면 삼국시대의 토기편과 고려 청자편 조선시대의 막사발, 조선후기와 근세의 와편이 산재해있기 때문이다. 1923년 당시 함양군수 閔麟鎬가 만든 咸陽 名勝古蹟保勝會(명승고적보승회)의 지역 유지들이 천왕봉을 유람하는데 필요한 마암당을 조망이 전혀 없는 행랑굴에 지었을까? 그러나 1924년 강계형은 행랑굴을 마암당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개벽 제 34호 지리산보에 나오는 '兩處皆中峯'은 '兩處(제석당과 마암당)는 다 중봉(제석봉과 중봉)이다.'라는 의미로 '제석당은 제석봉, 마암당은 중봉에 있다.'로 해석하면 된다. 왜냐하면 제석봉의 異稱(이칭) 또한 中峰이기 때문이다. 1922년 권도용은 방장산부에서 중봉샘을 마암이라고 하였고, 1923년 개벽지에 마암당은 중봉에 있다고 하였고, 1924년 강계형은 행랑굴(현마암)에 마암당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으니, 유람록의 기록이 서로 상이하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선인들이 중봉의 馬巖은 天王의 天馬로 보고, 말봉(1618봉) 아래 馬巖은 화랑의 우두머리인 永郞의 兵馬로 인식한 것은 아닐는지... 却說(각설)하고 지난 7월 20일 화첩 산행에서 臭田 閔선생님과 행랑굴(신마암) 샘터를 보수해 놓았다. 식수가 필요한 분은 이곳에서 취수할 수 있다.



♣ 마암과 행랑굴, 개운암에 대한 유람록의 기록

유람록

중봉()

()마암

비고

1

1472년 김종직의 유두류록

馬巖(마암)

 

 

2

1610년 박여량의 두류산일록

馬巖(마암)

行廊窟(행랑굴)

행랑굴(중식)

3

1825년 김선신의 두류전지

馬巖(마암)

 

 

4

1871년 배찬의 유두류록

中峯山幕

馬巖山幕

마암산막()

5

1877년 허유의 두류록

 

開雲巖(개운암)

개운암()

6

1877년 곽종석과 권규집의 차운시

 

開雲巖(개운암)

곽종석 穹窿(궁륭)

7

1877년 박치복의 동유기행

 

開雲巖(개운암)

 

8

1922년 권도용의 방장산부

馬巖(마암)

 

마암()

9

1923년 개벽 제 34호 지리산보

馬巖堂(마암당)

 

 

10

1924년 강계형의 두류록

 

馬巖堂(마암당)

마암당(중식)




1) 1472년 김종직 선생의 유듀류록

 

[814] 又並脊南登中峯山中凡隆起爲峯者皆石獨此峯戴土而端重可以布武焉稍下步馬巖有泉淸冽可飮値歲旱使人登此巖蹈躪便旋則必致雷雨余前年及今夏遣試之頗驗

[814] 또 등성이의 곁을 따라 남쪽으로 중봉을 올라보니, 산중에 모두 융기하여 봉우리가 된 것들은 전부 돌로 되었는데, 유독 이 봉우리만이 위에 흙을 이고서 단중하게 자리하고 있으므로 발걸음을 자유로이 뗄 수가 있었다. 여기에서 약간 내려와 마암에서 쉬는데 샘물이 맑고 차서 마실만하였다. 가문 때를 만났을 경우, 사람을 시켜 이 바위에 올라가서 마구 뛰며 배회하게 되면 반드시 뇌우를 얻게 되는데, 내가 지난해와 금년 여름에 사람을 보내어 시험을 해 보니, 자못 효험이 있었다.

 

* :나란히 병 / :값치, 때를 맞이하다./ 蹈躪: 도린(밟을 도,짓밟을 린) / 可以 : ~할 수있다. / 布武 : 발자국이 분산되어 겹치지 아니함. 곧 빨리 달림

  

2) 1610년 박여량의 두류산일록

 

[96] 李君允迪復取君子路告歸余等由甑峯而下馬巖從童孫得就水而飮遇一官醫多採當歸取三四本以來進之當歸是我素所好者戒使勿遺噫歸而不能歸只好草之當歸可謂好之得其實乎歷少年臺至行廊窟各進水飯回望天王峰已不啻風馬牛之不及矣一轉足之間已至於此所謂從惡如崩者也可不懼哉

 

[96] 이윤적(李允迪)은 다시 군자사로 되돌아가겠다 했고, 우리들은 증봉(甑峯)을 거쳐 내려와 마암(馬巖)에 이르렀다. 따라온 종 손득이 물을 마시러 갔다가 당귀(當歸)를 많이 캔 관아의 의원을 만나 그 중 서너 뿌리를 얻어 가지고 와서 나에게 올렸다. 당귀는 내가 평소 좋아하는 것이어서 종들로 하여금 잘 간수하라고 주의를 시켰다. ! 벼슬을 그만두고 돌아가야 하는데 돌아갈 수 없구나. 단지 當歸라는 약초만을 좋아할 뿐이니, ‘當歸를 좋아함이 그 이름에 걸맞다고 할 수 있겠는가? 소년대(少年臺)를 지나 행랑굴(行廊窟)에 도착했다. 각자 물을 마시고 밥을 먹었다. 천왕봉을 되돌아보니 [已不啻風馬牛之不及矣(이미 질풍처럼 달리는 마소도 미치지 못할 뿐만 아니라) ] [수정], 한번 걸음을 옮긴 사이에 이렇게 멀리 내려왔으니, 이른바 ()을 따르는 것은 산에서 내려오는 것처럼 쉽다는 말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當歸 : 당귀는 마땅히 돌아가야한다는 뜻이다.

 

3)1823년 김선신의 두류전지


馬岩은 중봉에서 조금 아래에 있다. 샘이 맑고 시원해 마실 만하다. 가뭄을 만나면 사람을 시켜 마암에 올라 발을 구르며 돌면 반드시 우레와 비를 몰아온다고 한다. 시험해보니 매우 효험이 있었다. 천왕봉과의 거리가 몇 리쯤 된다. 출처 : 전병철 교수, 두류전지(選勝編)


4) 1871년 배찬(裵瓚) 유두류록

 

[95] 小憇于嶺上. 過艾峴. 到天女堂平田. 從者進午飯. 遂環坐於澗邊石上. 各執匏器. 折木爲匙. 足爲免飢. 各吟一律拈平田之田字.

 

又攀木緣崖. 行十餘里. 到馬巖山幕. 幕是鷹者木器者之所處. 而適無人焉. 忽有指路者急告曰. 驟雨大至. 此去中峰山幕. 又十餘里. 則所謂進退維谷. 不如因宿于此. 遂設席于幕. 縱火於前. 卽炊飯煑羹. 已而林雨亦霽. 眼界甚暢. 幕在巖間. 不見西北. 而只見東南. 是晉洲界也.

 

夕飯後. 各散步于巖下. 忽見虹色環於山下. 近者如白硫璃. 遠者如紅錦繡. 相顧欣然. 莫知其所以然. 無乃海色爲月光所射. 紅暈自近而及遠. 故萬里卽階前. 而紅白交映者乎. 各吟一律拈馬巖之巖字.

 

[95] 산마루 위에서 잠시 쉬었다가 애현(艾峴)을 지나 천녀당(天女堂)평전(平田)에 이르렀다. 시종(侍從)들이 점심을 내와서 마침내 모두 계곡 옆의 바위 위에 빙 둘러 앉아서 각자 바가지 그릇을 잡고 나무를 꺾어 젓가락을 만들어 밥을 먹으니 배고픔을 면할 만하였다. 각자 평전의 ()’ 자를 끄집어내어 시 한 수씩을 읊었다.

 

다시 나무를 부여잡으며 벼랑을 따라 10여 리를 가서 마암(馬巖)의 산막(山幕)에 이르렀다. 산막은 매사냥꾼이나 목기(木器)를 만드는 사람들이 머무르는 곳인데 때마침 사람이 없었다. 갑자기 길을 안내하는 자가 급히 보고하기를, “소낙비가 심하게 올 것입니다. 여기에서 중봉(中峰)의 산막까지는 다시 10여 리를 더 가야하니, 이른바 진퇴유곡(進退維谷)하기보다는 여기서 하룻밤 묵는 것이 낫습니다.” 라고 하였다. 마침내 산막에 자리를 펴고 앞에 불을 피워 곧 밥을 짓고 국을 끓였다. 이윽고 숲에 비가 걷히자 눈앞이 시원스럽게 탁 트였다. 산막은 바위 사이에 있어서 서북쪽은 보이지 않고 다만 동남쪽이 보였는데 진주(晋州)의 경계였다.

 

저녁식사 후에 각자 바위 아래를 산보하였는데, 갑자기 무지개빛이 산 아래에 빙 둘러 있는 것이 보였다. 가까운 데는 하얀 유리 같고 먼데는 분홍 비단 같았는데, 서로들 보며 기뻐했지만 그런 풍경이 어떻게 생기게 된 것인지는 아무도 몰랐다. 이는 아마도 바다에 달빛이 비추어서 붉은 달무리가 가까이에서 먼 곳으로 퍼져나가기 때문에, 만 리가 곧 섬돌 앞처럼 되어 붉은 빛과 하얀 빛이 서로 투영된 것이 아니겠는가? 각각 馬巖()’ 자를 끄집어내어 시 한 씩을 읊었다.[배찬은 중봉 샘터를 중봉산막이라고 기술함]  

 

5) 1877년 허유의 두류록

 

[89] 애령(艾嶺)으로 올라갔는데, 고개가 몹시 험준하여 애써 서로 의지하며 조금씩 조금씩 나아갔다. 산꼭대기에서부터 거의 15(원문 확인이 필요함)를 기어 내려오니 큰 바위가 있는데 밑의 형세가 넓어서 의지하여 묵을 만하였다. 옆에는 나무로 만든 산신의 위패가 있어, 이곳이 산신령에게 기도하던 천막이 있던 곳임을 알 수 있었다. 하인에게 명하여 한편으로는 땔감을 가져다 밥을 짓게 하고, 한편으로는 나무를 베어 천막을 치게 하였으며, 무명옷을 입고 장작을 쌓아 불을 지펴 밤을 지새울 계책을 삼았다.

 

명원(곽종석)이 말하기를, “이 바위가 이처럼 궁륭(穹窿)하였는데 지금까지 이름이 없으니, 이름을 지어주었으면 합니다.”라고 하였다. 내가 감히 그럴 수 없다고 사양하였지만 여러 사람들이 강권하여, “이번 산행에서 마음속으로 말없이 비는 것이 단지 구름이 걷히는 한 가지 일이니 개운(開雲)' 이라고 이름 짓는 것이 어떻겠는가.” 라고 하였다.

 

* 穹窿 : 활 무지개처럼 높고 길게 굽은 형상 또는 그런 형태로 만들어진 천장이나 지붕.

 

이에 은거(하용제)가 붓을 적셔 크게 썼는데, 쓰기를 마치자 검은 구름이 흩어졌으며, 서쪽 하늘의 해는 이미 지려하고 있었다. 명원(곽종석)이 말하기를, “그대의 정성이 비록 형산(衡山)의 구름은 걷히게 하였지만, 다만 내일 화산(華山) 꼭대기에서 미쳐 날뛸까 두렵습니다.”라고 하였는데, 대개 한퇴지(韓退之:중국 당나라의 문장가 한유(韓愈)를 말한다.)의 일을 끌어다 나를 놀린 것이다.

 

[812] 마침내 (남사마을에서)은거(하용제)를 따라가서 그 집에서 저녁을 먹고 물러나와 찬여(瓚汝)의 집에서 묵었다. 하우석공(은거 하용제의 )은 강계(江界)에서의 생활을 마치고 돌아와 집에서 밥을 먹은 지 여러 해가 되었는데도 언제나 격앙되고 강개한 것이 나라의 큰 선비로서의 풍모가 있었다.

 

[813] 길을 나서니 여러 현인들이 멀리 숲 밖까지 함께 왔다. 내가 은거에게, 개운암(開雲巖)에서의 일에 힘쓰라.”고 말하니, 은거가 알겠습니다.”라고 말하였다. 원지점(院旨店)에 이르러 치수를 기다렸는데 오지 않았다. 먼저 지나간 것이 아닌가 싶어서 길을 나아가 진태점(進台店)에 이르렀는데, 치수가 뒤쫓아 와서 말하기를, “어른이 뒷사람을 이처럼 버리면, 뒷사람은 누구에게 기대야 합니까?”라고 하여, 내가 나는 그대가 먼저 올라갔나보다 했는데, 뒤에 있었는가?”라고 말하였다. 술을 따라 서로 위로한 뒤, 권성거(權聖擧)형을 섬계(剡溪)로 찾아가 만났다. 저녁나절에 법물(法勿)로 들어가 치수의 서당에서 묵었으며, ()과 지()가 서로 다른 점에 대하여 논하였다.

 

[825] 한주(寒洲 : 이진상(李震相)) 선생이 도남정사(道南精舍)로 나를 찾아왔다. 남사(南沙)를 향해 가고 있는 중인데, 또한 뜻이 천왕봉 꼭대기에 올라가는 데 있으며, 은거가 따라 가서 내 성명을 일월대에 새기겠다.고 하였다.



6) 1877년 곽종석과 권규집의 開雲巖 次韻詩 


1877년 南黎(남려) 許愈(허유, 1833∼1904)와 俛宇(면우) 郭鍾錫(곽종석, 1846~1919) 일행은 8월 5일에서 15일까지 10일간 천왕봉을 유람하는데, 비를 만나 행랑굴(현 마암)에서 하룻밤 묵어간다. 이곳에서 노숙을 한 것이다. 郭鍾錫(곽종석)과 일행들이 이름 짓기를 청하여, 許愈(허유) '開雲巖'이라고 이름을 짓자 하용제(河龍濟, 1854~1919)가 개운암이라는 묵서를 남기는데, 그로부터 20일 뒤에 이곳을 찾은 晩成(만성) 朴致馥(박치복, 1824~1894) 일행開雲巖 묵서를 보게 된다.(박치복의 동유기행)  약헌(約軒) 하용제(河龍濟)가 이 때 동행한 것은 開雲巖 刻字를 새기기 위함이었으나, 대원사에서 말을 타고 철모삼거리까지 올라와 개운암에 들렀다가 당일 천왕봉까지 올라가 각자를 새기지 못한다. 개운암은 '韓愈(한유, 退之, 768~824)가 衡山(형산)에 들었을 때 비를 만나서 기도를 하자 비가 갰다는 고사'를 인용하여 開雲巖이라고 이름한 것이다. 許愈는 韓愈와 이름이 같고 字(退之, 退而)와 號(昌黎, 南黎)도 한 글자씩 같은데, 俛宇(면우) 郭鍾錫(곽종석)은 이것을 弄한 것이다. 아무튼 裵瓚(배찬,1825-1898)보다 6년 뒤에 이곳을 다녀갔지만 당시 馬巖이라는 刻字에 대한 언급은 없다.  



謹次南黎開雲巖命名韻 : 남려(허유)가 개운암이라고 불인 이름에 차운하다.


  巖在方丈中峯之下 : 개운암은 방장산 중봉의 아래에 있다.


                              俛宇 郭鍾錫(1846~1919)


昌黎奇氣本巖巖 : 한창려의 기이한 기상은 높은 산에 근본 했는데 

苦不能人大嶺南 : 괴로워 못오르는 사람은 고개 남쪽을 크다 하네.

登高一撫頭流石 : 높은 곳에 올라 두류산 바위를 한번 어루만지고 

鼓發天風掃碧嵐 : 하늘 바람 불러 일으켜 푸른 남기를 쓸어버리네.




宿開雲巖 : 개운암에서 묵다.


有數椽 依巖結幕 : 몇 개의 석가래를 가지고 바위에 의지해 장막을 쳤다.


                              俛宇 郭鍾錫(1846~1919)




夜宿頭流巖穴中 : 밤이되어 두류산 바위밑에서 하룻밤을 묵었는데

營居猶藉往人功 : 잠자리는 오히려 옛 사람이 잤던 데에 마련 했네.

飛雨連山淘浩劫 : 쏟아지는 비가 온 산에 퍼부어 억 겁을 씻어내고

靈風吹火燭寒空 : 신령한 바람 불을 붙이듯, 차가운 허공을 밝히네. 

下界焉知吾輩在 : 저 아래에 우리들이 있는 곳을 어떻게 알겠는가

後來無忘此時同 : 먼훗날 지금 우리 함께한 것을 잊지는 말아야지.

聯肱試做遊仙夢 : 팔뚝을 나란히 하고 선계에 노니는 꿈울 꾸게나

一切蓬瀛東復東 : 모두 봉래와 영주를 찾아 동쪽으로 또 동쪽으로...


* 蓬瀛 ‘蓬莱’. [같이 전설에서 신선 산다는 발해(渤海) 있는 ] [비유] 선경(仙境).




謹次南黎許丈愈開雲巖命名韻 : 남려 허유 어른이 개운암이라고 불인 이름에 차운하다.


                              兼山 權奎集(1850~1916)


今黎杖屨抵奇巖 : 지금 남려 어른이 기이한 바위에 이르르니

衡岳餘愁有巉南 : 형악에서의 남은 근심 지리산에도 있었네.

認是精誠天所感 : 이 간절한 정성 하늘이 감읍한 줄 알았으니

長風頃刻簸蒼嵐 : 긴 바람이 삽시간에 푸릉 남기 걷어내누나.



7) 1877朴致馥東遊記行

 

[829]命僕夫卸擔. 炊飯. 飯訖緣溪拚壁而上至艾田嶺嶺以外湖南界也小憩納涼見群山之自雄於區域者皆斂容屛氣隱然有嚮化拱極之意已覺吾身之占地差高又行十里許踰峻嶺緣崖而西可想山之事已半矣俯見萬脊南流齊烟渺茫霜葉正酣磎壑通明斷雨殘雲起滅於山腰差覺臆間爽然大石陡斷千尺下有煤痕榾頭蓋障儲胥猶存崖面書開雲巖三字許南黎姓名在焉可想前行留宿處撞著歡喜如對眞面

[829] 말몰이꾼에게 명령하여 매단 것을 풀어놓고 점심을 준비하도록 하여, 밥을 먹고 시내를 따라 절벽을 붙잡고 올라가 애전령(艾田嶺)에 도달하였다. 고개의 밖은 호남의 지역이다. 잠시 쉬면서 서늘한 바람을 맞았다. 여러 산들이 각각의 구역에서 웅장하게 솟아 있는데, 모두 용모를 단정히 하고 기운을 엄숙히 하여 이곳을 향하여 공손함을 드러내고 있으니, 내가 위치하고 있는 곳이 상당히 높은 것임을 비로소 깨달았다. 10리 정도를 가서 험준한 고개를 넘었다. 절벽을 따라 서쪽으로 가니, 이제 반절은 된 듯싶었다. 아래를 굽어보니, 많은 산줄기가 남쪽으로 뻗어 있는데 안개가 높이 끼어 아득했다. 서리 맞은 잎은 참으로 붉고, 시냇가 골짜기는 활짝 열려 밝다. 산허리에는 구름이 약간 피어올라 비가 내렸다 그쳤다 한다. (이런 경치를 바라보노라니) 마음이 상쾌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큰 돌이 우뚝 솟아 뚝 끊어졌는데 그 천 길 아래에 나무 등걸을 그을린 흔적이 있고, 가로막은 울타리가 아직도 남아 있다. 절벽의 면에는 개운암(開雲巖)’ 세 글자가 쓰여 있는데, 허남려(허유)의 이름이 옆에 있다. 앞에 행차하여 머물러 유숙한 곳으로 생각된다. 다가가 만져보니 매우 기뻐 그의 얼굴을 대하는 것 같았다.

 

* 이진상(李震相) [18181886] 본관은 성산(星山). 자는 여뢰(汝雷), 호는 한주(寒洲).조선 말기의 대유학자.

* 허 유(許 愈) [1833~1904] 자 퇴이(退而), 호 후산(后山) 남려(南黎), 한주(寒洲) 이진상(李震相)의 문인.

* 곽종석(郭鍾錫) [1846~1919] 조선말의 주자학자·독립투사. 본관은 현풍. 자는 명원(鳴遠), 호는 면우(俛宇), 유석(幼石) 단성(丹城) 출신. 이진상(李震相)의 문인.

* 하용제(河龍濟) [1854~1919] 자는 은거(殷巨) 호는 약헌(約軒). 곽종석(郭鍾錫)의 문인. 남사마을 출신. 원정구려의 주인

 

8) 1922년 권도용의 방장산부

 

馬巖之幽絶允合升高而歇脚照以畢翁之所記眞境相符而不錯緬前賢之留芬想杖屨而如昨隨太守之指揮敏僧侶之趨作斬松檜而爲蓋藉芳草而爲席比巢皇而已侈一屋構於頃刻運連抱之樟木大(+)火而達昔酌鞄中之和酒夜寒暖其莫覺方星月之明槪而山河之寂寞誦孤雲之玉枕吾亦欲玆焉永託於是

마암(馬巖)에 도착하니 그윽하고 빼어났으며 높이 오르기에 적합하여 올라가 다리를 쉬었다. 필옹(畢翁 *점필재)이 기록한 진경(眞境)에 꼭 들어맞는 곳으로 먼 선현이 남긴 행적과 어긋나지 않아 거닐던 자취를 생각하니 마치 어제인 듯하였다. 태수의 지휘에 따라 민첩한 승려들은 재빨리 소나무 전나무를 베어내고 방초를 깔아 자리를 만들었다. 비유하자면 나무 위에 얽은 새 둥지와 같을 뿐이지만 잠깐 사이에 사치스런 집 한 채를 지은 셈이다. 아름드리 녹나무를 연이어 운반해와 모닥불을 크게 피우고 저녁이 되어 뱃가죽 속으로 술을 부으니 추위와 따뜻함을 느끼지 못하였다. 이윽고 별과 달이 밝게 뜨고 산하가 적막한 가운데 고운의 옥침(玉枕) 1)를 읊조리자 나 또한 이곳에 영원히 몸을 맡기고 싶었다.

 

一蹴而上至顚觀日出立峭巖嚮東溟屢回瞻元氣未判水雲相涵下界群山影祕形潛混淪之中渺不可諳己而紅輪碾上滄海沸盈珥暈煬熿雉膺爛熒色色萬彙各呈其形天下壯觀莫之與京信哉登山而不觀日出譬猶卸錦衣而晝行也覩古蹟而尋問有威肅之舊祠世或稱爲佛母爰詳文愍之辨辭

이윽고 한걸음에 꼭대기에 올라 일출을 구경하였다. 날카로운 바위에 서서 동쪽 바다를 향하여 몇 번이나 쳐다보았다. 아직 원기(元氣 *천지우주의 원래 기운)는 구분되지 않았고 물과 구름이 서로 섞여 있었다. 하계의 뭇 산들은 그림자는 형체에 숨어 있고 형체는 그림자에 잠겨 있었다. 혼돈의 가운데에서 아득하여 내 몸을 알아볼 수 없었다. 붉은 바퀴가 맷돌처럼 떠올라 온 바다가 들끓고 햇무리는 불타는 듯 환하고 꿩의 가슴처럼 찬란하게 번쩍이고, 색색이 만 가지로 빛나 각기 그 형태를 드러내니 천하의 장관으로, 견줄 만한 것이 없으리라. 참으로 산에 올라 일출을 보지 않는다면 비유하자면 비단옷을 벗어 놓고 낮 길을 가는 거와 같다. 고적(古蹟)을 보고 물었더니 위숙왕후의 옛 사당이 있었던 곳이라고 하였다. 세상에서는 혹 불모(佛母)라고도 칭하는데 자세한 것은 문민(文愍 *김일손)공이 변별하여 말하였다.[국역 이재구 선생]

 

9) 1923년 개벽 제 34호 지리산보(1923.04.01)

咸陽郡守 閔麟鎬씨는 空殼名勝古蹟이나마 보존하랴고 保勝會를 조직하고 智異山을 세계에 소개하기 위하야 智異山誌葺輯 중이오, 同郡有志 姜渭秀씨는 遊山하는 의 편리를 키 위하야 山上望海亭을 건축하고 朴魯翊 及 靈源寺僧 一同帝釋堂을 건축하얏스며 李璡雨 及 碧松寺僧 一同馬岩堂을 건축하야(兩處皆 中峯) 本年 陽春佳節開山式하랴 한다.

 

10) 1924년 강계형의 두류록

 

漸漸前進置艾峴路於左便而取右路踰麓則天禮碭也谷深路險加以巨材參天無暇顧眄而所少者霜候未及只是綠陰中而已若到晩霜則紅黃爛漫宛似人在錦繡步障中形影相照而欠此一壯觀也余素昧草木禽獸譜而所識者於木櫲檞檀檜丁公藤靑藜枝之屬於草則芍藥當歸吉更薇蕨之屬而已前路崎嶇或上而騰於半空或下而若墜乎淵谷絶無平坦處從者言前之上山者脫冠巾而抱木挾巖艱辛而進今則賴有保存社之力使山下人伐薪輯險此前則可謂平地矣又慮遊山者之露宿設板屋馬巖上峯帝釋堂等處蔽風雨可謂惠及遊人矣余與乃明俱是困於寒者見路傍草樹之離披曰若梳一谷之薪輸之於家則過冬不難矣聞此從者之言自愧用心之不及社人遠矣盡力到馬巖堂乃下峯初到處也蓋巨巖穹隆壁立者十餘仞而下稍平坦傍有源泉新築數間屋子溫突凉軒略僃而足以歇行者之脚一行方午飯之際文生與細洞數人來到遂匝坐點心

 

점 앞으로 쑥밭재[艾峴애현]로 나아가는데 길은 왼쪽으로 가다 오른쪽으로 향했으며 산기슭을 넘자 천례탕(天禮碭 *하늘에 제사지내는 돌)이었다. 골짜기는 깊고 길은 험한데 거기다 거대한 나무들이 하늘을 찔러 눈길을 돌릴 겨를이 없었다. 부족한 것은 서리 내릴 계절이 아직 멀어 단지 녹음만 짙은 것뿐이었다. 만약 늦은 서리가 내려 붉고 누런색이 화려하게 펼쳐지면 완연히 사람이 비단휘장 속에 있는 듯 형체와 그림자가 서로 비추겠지만, 그것 없이도 하나의 장관이었다.

 

나는 본디 초목·금수의 계보에 어두워 아는 것이라곤 나무는 녹나무 떡갈나무 박달나무 전나무 마가목 청려목 등이고, 풀은 작약 당귀 도라지 고사리 등속일 뿐이다. 앞길은 극히 험하여 올라갈 때에는 허공으로 오르는 것 같고, 내려갈 때에는 깊은 연못으로 떨어지는 듯하여 결코 평탄한 곳이 없다. 종자들이 말하기를, “전에 산에 오른 자들은 관을 벗고 나무를 끌어안고 바위를 끼고 간신히 나아갔는데 지금은 보존사(保存社 *함양명승고적보존회)의 힘으로 산 아래 사람을 시켜 벌목을 하고 험한 곳을 고르게 한 덕분에 이 앞까지는 평지라 할 수 있습니다.” 하였다.

 

또 유산자들의 노숙을 생각하여 마암상봉 제석당 등지에 판옥(板屋)을 세우고 풍우를 가리게 하였으니 혜택이 유산인에게 미쳤다고 할 수 있다. 나와 내명은 모두 추위에 곤란을 겪는 자들이므로 길가의 초목이 무성한 것을 보고 말하기를 한 골짜기의 땔나무를 긁어 집으로 보내면 겨울을 나는 데에 어렵지 않겠다.”고 하자, 종자가 듣고 말하기를 “(저의) 마음 씀이 마을사람들에게 멀리 미치지 못하니 스스로 부끄럽습니다.” 하였다.

 

힘을 다하여 마암당(馬巖堂)에 이르렀는데 이는 하봉에서 처음 도착하는 곳이다. 거대한 바위가 둥그렇게 솟아 있는 것이 십여 길이었고 아래 부분은 평탄한데 곁에는 근원이 되는 샘이 있었다. 몇 칸의 집을 새로 지었는데 온돌과 벽 없는 마루가 간략히 갖추어져 있어 길 가는 사람이 다리를 쉴 만하였다. 막 점심을 먹으려 할 때에 문선비와 세동 사람 몇이 도착하여 둘러앉아 점심을 먹었다. [국역 이재구 선생]



☞ 지리동부 행랑굴과 마암의 묵서 개운암 이야기(170703) : http://blog.daum.net/lyg4533/16487748

[지리산 지명 바로잡기] 지리산 동부자락의 마암에 대하여 :  https://blog.naver.com/ylee6517/221287135545



행랑굴 샘터









전설의 지리탐방 전차군단



4. 소년대에 대한 나의 생각


소년대 역시 현 지리산길지도는 아직도 정곡을 찌르지 못하고 있다. 나는 지명에 대한 해석의 오류가 소통의 부재에 원인이 있다고 생각한다. 책과의 소통은 多讀일 것이고, 산과의 소통은 踏査 산행일 것이고, 사람과의 소통은 對話일 것이다. 하봉 옆의 바위를 소년대라고 지도에 표기한 근거가 무엇인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장로과 중년과 소년의 개념으로 접근하면 하봉이 소년대라고 이해가 되는데 말이다. 남효온의 지리산일과에도 소년대가 등장하는데, 하봉의 異稱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남효온은 제석봉을 중봉으로 보고 연하봉(?)을 소년대라고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천왕봉은 장로와 중봉은 중년 그리고 하봉은 소년의 개념인 것이다. 이렇듯 지명에 대해 수년간 지리산길지도에 검증이 되지 않은 지명을 표기하여 배포한 결과, 온라인의 파급성으로 인해 지리의 지명은 앞으로도 수십 년 혼란을 겪을 겪을 것이다. 세석의 청학연봇과 세석산장 앞 영신사지 등이 그 대표적인 사례이다. 下峰이라는 명칭1910년 裵聖鎬(1851~1929)의 유두류록에 보이는데, 누가 언제부터 下峰이라고 하였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少年臺(소년대) 관련 유람록과 기행시



문헌

하봉

비고

1

   1472년 김종직 선생의 유두류록

소년대(少年臺)


2

   1611년 유몽인 선생의 유두류산록

소년대(少年臺)


3

  1611년 유몽인의 登少年臺 기행시외 1

소년대(少年臺)


4

   1823년경 김선신의 두류전지

소년대(少年臺)

김종직의 유두류록을 인용함.

5

   1849년 민재남의 산중기행(관련유람록 : 유두류록)

소년대(少年臺)


6

   1910년 배성호의 유두류록

하봉(下峰)


7

   1487년 남효온의 지리산일과

-

소년대(少年臺) : 연하봉(?)




1) 1472년 김종직 선생의 유두류록

 

[원문]自此至永郞岾道極懸危正如封禪儀記所謂後人見前人履底前人見後人頂攀挽樹根始能下上日已過午始登自咸陽望此峯最爲峻絶到此則更仰視天王峯也永郞者新羅花郞之魁領三千徒遨遊山水甞登此峯故以名焉少年臺在峯側蒼壁萬尋所謂少年豈永郞之徒歟余抱石角下窺若將墜也戒從者勿近傍側 

815이로부터 영랑재(永郞岾)에 이르기까지는 길이 심하게 가팔라서, ‘봉선의기(封禪儀記)’에서 말한, “뒷사람은 앞사람의 발밑을 보고, 앞사람은 뒷사람의 정수리를 보게 된다.”는 것처럼, 나무뿌리를 부여잡아야만 비로소 오르내릴 수가 있었다. 그래서 이미 한낮이 지난 뒤에서야 비로소 영랑재로 올라갔다. 함양(咸陽)에서 바라보면 이 봉우리가 가장 높아 보이는데, 여기에 와서 보니, 다시 천왕봉(天王峯)을 올려다보게 되었다. 신라(新羅) 때 화랑(花郞)의 우두머리였던 영랑이 3천 명의 무리를 거느리고 산과 물을 찾아 노닐다가 일찍이 이 봉우리에 올랐었기 때문에 이렇게 이름 한 것이다.

 

소년대(少年臺)는 봉우리가 곁에 있어 푸른 절벽이 만 길이나 되었는데, 이른바 소년이란 혹 영랑의 무리가 아니었는가 싶다. 내가 돌의 모서리를 안고 아래를 내려다보니, 곧 떨어질 것만 같았다. 그래서 종자(從者)들에게 절벽 난간에 가까이 가지 말도록 주의를 주었다.



2) 1611년 유몽인 선생의 유두류산록

 

[원문]癸酉. 侵晨而行掠甕巖. 入淸夷堂. 穿森木亂石叢. 至永郎臺. 俯臨陰壑. 然昏黒. 魄遁眼眩. 攀木却倚. 愕眙而不能稽. 永郎者. 花朗之魁也. 新羅時人也. 率徒三千人. 遨遊山海. 我國名山水. 無不寓名焉. 循山脊. 指天王峯而東. 山多烈風. 樹木皆擁腫. 枝柯向山而靡. 苔髮骨樹. 鬖鬖如人被髮而立. 松皮柏葉之木. 中無腸而榦四披. 枝頭下搶干地. 山益高而樹益短. 山之下. 濃陰交翠. 而至此花梢未吐葉. 尖如鼠耳. 巖罅有積雪盈尺. 掬而啗之. 可以沃渇喉. 有草纔抽芽. 靑莖者曰靑玉. 紫莖者曰紫玉. 僧云此草味甘滑可食. 擷之盈掬而來. 余曰. 僧稱靑紫玉. 乃仙家所餌瑤草也. 乃植杖手摘之. 殆滿囊焉. 前登少年臺. 仰瞻天王峯. 高出雲漢. 無雜草木. 只蒼柏聯緣而生. 被氷霜風雨所侵暴. 枯死骨立者十居二三. 望之如頒白老人頭. 殆不可盡鑷者也. 少年云者. 或稱永郞之流也. 余意天王峯. 長老也. 此峯. 奉承之如少年. 故名之歟. 下視群山萬壑. 

 계유일 44, 새벽에 길을 떠나 옹암(甕巖)을 지나 청이당(淸夷堂)에 들어갔다. 숲을 헤치고 돌무더기를 가로질러 영랑대(永郞臺)에 이르렀다. 그늘진 골짜기를 내려다보니 어두컴컴하였다. 머리가 멍하고 현기증이 나서 나무를 잡고 기대섰다. 놀란 마음에 눈이 휘둥그레져 굽어볼 수가 없었다. 영랑은 화랑의 우두머리로 신라시대 사람이다. 3천 명의 무리를 거느리고 산과 바닷가를 마음껏 유람하였다. 우리나라의 명산마다 이름을 남기고 있다. 산등성이를 따라 천왕봉을 가리키며 동쪽으로 나아갔다. 세찬 바람에 나무들이 모두 구부정하였다. 나뭇가지는 산 쪽으로 휘어 있고 이끼가 나무에 덮여 있어, 더부룩한 모양이 마치 사람이 머리를 풀어헤치고 서 있는 것 같았다. 껍질과 잎만 있는 소나무잣나무는 속이 텅 빈 채 가지가 사방으로 뻗어 있고, 가지 끝은 아래로 휘어져 땅을 찌르고 있었다. 산이 높을수록 나무는 더욱 작달막하였다. 산 아래에는 짙은 그늘이 푸른빛과 어우러져 있었다. 이곳에 오니 꽃나무 가지에 아직 잎이 나지 않고, 끝에만 쥐의 귀처럼 싹을 살짝 내밀고 있었다. 바위틈에 쌓인 눈이 한 자나 되어 한 움큼 집어먹었더니 갈증 난 목을 적실 수 있었다. 겨우 싹이 난 풀이 있었는데 푸른 줄기는 청옥’(靑玉)이라 하고 붉은 줄기는 자옥’(紫玉)이라 하였다. 한 승려가,“이 풀은 맛이 달고 부드러워 먹을 수 있습니다.”라고 하고서 한 움큼 뜯어 가지고 왔다. 내가 말하기를,“그대가 청옥, 자옥이라고 한 것이 바로 선가(仙家)에서 먹는 요초(瑤草)일세.” 라고 하고서, 지팡이를 꽂아놓고 손수 한 아름이나 뜯었다. 앞으로 나아가 소년대(少年臺)에 올라 천왕봉을 우러러보니 구름 속에 높이 솟아 있었다. 이곳에는 잡초나 잡목이 없고 푸른 잣나무만 연이어 서 있는데, 눈보라와 비바람에 시달려 앙상한 줄기만 남은 고사목이 열 그루 중에 두세 그루는 되었다. 멀리서 바라보면 머리카락이 희끗희끗한 노인의 머리 같아 다 솎아낼 수 없을 듯하다. 소년이라고 이름이 붙은 것을 보면, 혹 영랑의 무리를 일컬은 듯도 하지만 내 생각으로는, 천왕봉은 장로(長老)이고 이 봉우리는 장로를 받들고 있는 소년처럼 생겼기 때문에 소년대라 한 것 같다. 아래로 내려다보니 수많은 봉우리와 골짜기가 주름처럼 펼쳐져 있었다.



3) 1611년 유몽인의 登少年臺 기행시

 

少年臺 : 소년대에 올라

 

                       柳夢寅(1559~1623)

 

萬古昻藏樹 : 만고토록 숨어서 자란 높다란 나무들

縣梢罥老藤 : 가지에 매달려 얽혀있는 늙은 등나무.

三春慳嫩葉 : 늦봄에야 겨우 돋아나는 연한 나뭇잎

六月逗堅氷 : 유월에도 여전히 남아있는 견고한 얼음.

陘絶魂頻斷 : 가파른 벼랑에선 정신이 자주 아찔했고

臺危地欲騰 : 위태로운 대에선 땅이 솟구치는 듯했네.

曾颸來萬里 : 일찍이 서늘바람 만 리에서 불어왔으니

從此傲陽陵 : 이제부터 볼록한 봉우리 만만히 보리라.

 

柳夢寅'登少年臺'에서 8를 보더라도 下峰,  陽陵(볼록한 봉우리)中峰을 가리킨다

  


4) 1849년 민재남의 산중기행(관련유람록 : 유두류록)


少年臺 : 소년대


                                    閔在南(1802~1873)


林中失路喚前行 : 숲속에서 길을 잃어 앞서 간 일행을 부르고

行出峰頭草坐平 : 일행은 봉우리 위로 나와서 풀밭에 앉았네

奇勝每多新面目 : 기이한 명승은 곳곳에서 새로운 모습인데

須君指示認臺名 : 그대 손으로 가리키며 대이름을 알려주네



5) 1910년 배성호의 유두류록

 

[원문] 至法華菴. 古木參天. 叢竹護垣. 方丈下峰如對食床. 可謂上方仙境也.

316, 법화암에 이르렀다. 고목이 하늘로 솟아있고 대나무 숲이 담장을 두르고 있으며, 방장산 下峰(하봉) 밥상을 대하는 것과 같으니, 上方仙境(선경)이라고 할만하다.



6) 1487년 남효온의 지리산일과에 나오는 소년대

[원문] 十月丁卯朔. 留米一斗別一囧. 發香積. 少年臺. 穿綿竹度鷄足. 山行三十里. 抵貧鉢庵.

101, 정묘일, 쌀 한 말을 남겨두고 일경과 작별하였다. 향적암을 출발하여 소년대(少年臺)에 올랐다. 솜대綿竹를 뚫고 계족봉(雜足峰)을 지나 산길로 30리를 걸어 빈발암(貧鉢庵)에 이르렀다.


남효온의 소년대는 제석봉을 중봉으로 보았을 때의 개념으로 연하봉을 소년대라고 지칭한 것으로 추정된다.

 


☞ 소년대는 하봉이다 : http://blog.daum.net/lyg4533/16486789




진주독바위or옹암


향로봉(?) 


氷峙 추정 지점


☞ 유몽인의 두류암 詩 1, 2句 虛壁脩縑繟 /淸光碎石縫 : 텅 빈 절벽은 긴 비단을 드리운 듯하고/맑은 햇빛은 부서진 바위를 꿰맨 듯하네....



5. 贅言


 이번 산행의 본래 목적은 氷峙(빙치)어름터, 紫眞洞(자진동)芝山臺(지산대)의 연관 관계를 확인하는 것이었다. 芝山臺(지산대)의 刻字(각자)에 나오는 鄭씨 3형제의 이름은 洪의 항렬로 보아 慶州鄭氏로 추정된다, 그외의 鄭씨는 河東鄭氏(奎, 鉉 항렬)일 가능성이 크다. 자연과 사물을 이해하지 못하면서 선인들이 남긴 고문헌 속의 지명을 이해기는 더욱 어렵다. 유람록을 읽고 氷峙(빙치)를 세 번이나 올라가 보았는데, 장구목에서 어름터로 내려오다가 오른쪽 능선이나 골로 내려서면 S자로 된 임도와 연결된다. 그리고 어름터 독가 주변 집터의 흔적으로 미루어 어름터 독가 주변이 紫眞洞(자진동)이 아닌가 추정한다. 이번 산행에서 조박사님은 점필재길 구간별 답사를 완성하였고, 나는 그 덕분에 어름터와 영랑대에서 사흘 밤을 보냈다. 추석 명절에 시간을 함께한 般若님과 尹선생님, 趙박사님께 감사드리고, 처음 이틀 동안 함께한 김정기님과 초면에 숙식을 제공한 살래 한선생께도 감사를 전한다. 끝으로 지탐전차군단과 순천님들! 만나서 반가웠습니다. 끝.


함양군 마천면 추성리 소재 芝山䑓(지산대) : (180624)http://blog.daum.net/lyg4533/16488000



* 자료 출처 : 지리산유람록, 선인들의 지리산 기행시(최석기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