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六友堂記 1191

송대 선녀굴 아래 집터 마애석각 隱屛岩

송대 선녀굴 아래 집터 마애석각 隱屛岩 은병암(隱屛岩) : 주자(朱子, 1130~1200)의 이름은 희(熹), 자는 원회(元晦), 호는 회암(晦庵). 중국 송대의 유학자. 주자학을 집대성함. 54살 되던 1183년에 무이구곡(武夷九曲) 중 다섯 번째 구비에 해당하는 은병암(隱屛岩) 밑에 무이정사(武夷精舍)를 세우고 제자를 가르쳤다. 그가 터를 잡고 신진들을 가르친 무이구곡(武夷九曲)은 예전부터 중국에서 신선이 살았던 곳으로 이름난 명승지이다. 중국 복건성 숭안현에 있다. 강시영[姜時永, 1788년(정조 12)-미상)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여량(汝亮, 汝良). 1819년(순조 19) 정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수찬을 지내고, 1829년 진하사(進賀使)의 서장관으로 정사 이광문(李..

1472년 김종직의 유두류록에 나오는 선열암 촉촉수를 찾아서

1472년 김종직의 유두류록에 나오는 선열암 촉촉수를 찾아서 ▣ 일 시 : 2021년 09월 19일(일)~20일(월) ▣ 코 스 : 화암(창촌)-적조암-지장사-환희대-선열암-독녀암(노장대)-신열암-의논대-고열암-미타봉-방장문-청이당-광점동 ▣ 인 원 : 3명(초암 백승철님, 배완식님) ▣ 날 씨 : 맑음 선열암(先涅庵)을 여러 번 답사하지 않고는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점필재 김종직 선생의 유두류기행시 첫 수 선열암... 2句 '雲根矗矗水泠泠(운근촉촉수영령)'의 詩句는 절묘하다. '바람(따듯한 공기)이 차가운 바위에 부딪혀 구름이 생기는 바위 雲根(운근)', '바위에 물방울이 맺혀 높은 곳에서 톡,톡,톡 떨어지는 矗矗水(촉촉수)', '물방울이 물에 떨어지는 소리 泠泠(영령)'은 오직 점필재 선생만이 표현할..

1489년 탁영 김일손 두류산기행록(동상원사)미답

1489년 탁영 김일손 두류산기행록(동상원사)미답 4. 묵계사를 둘러보다 ○ 4월 17일, 을사일. 이튿날 아침 절의 승려가 짚신을 선물로 주었다. 골짜기를 빠져나와 북쪽으로 가는데, 오른편은 산이고 왼편은 냇물이어서 길이 매우 위험하였다. 숲 속을 10리쯤 가니 골짜기 입구가 조금 열렸다. 기름진 들판이 있어 밭을 갈며 살 만하였다. 또 10리를 가니, 거처하는 백성이 나무를 휘거나 쇠를 달구는 것을 생업으로 삼고 있었다. 내가 말하기를, “꽃이 피면 봄인 줄 알고 잎이 지면 가을이라 느낀다더니, 여기에 이러한 것이 있구나.”라고 하였다. 따라온 승려가 말하기를, “여기는 땅이 궁벽하여 이정(里正)이 기탄없이 횡포를 부려 백성이 번잡한 조세와 무거운 역으로 고통받은지 오래되었습니다.” 라고 하였다. 詰..

벽송정 마애석각 知郡徐頀淳 郡守沈侯能定永世不忘碑외

벽송정 마애석각 知郡徐頀淳 郡守沈侯能定永世不忘碑외 徐頀淳(1799~미상) 본관 達城 자(字) 치성(穉成) 한양 출신 헌종(憲宗) 10년(1844, 甲辰) 46세에 증광시(增廣試) 생원 1등(一等) 3위(3/100) 급제. 1863년 함양군수 부임 1867년 암행어사 박선수(朴瑄壽 1821∼1899)에 의해 파직됨. 1867년(고종 4년) 경상도 암행어사 박선수(朴瑄壽 1821∼1899) 서계(書啓) 함양 군수(咸陽郡守) 서호순(徐頀淳)입니다. 간사한 이들의 말만을 들어 자질구레한 비방을 크게 불러들였습니다. 갑자년(1864년, 고종 1년) 가을 영작미(營作米 : 감영의 작미) 80석의 경우는 (애당초부터 돈으로 排捧하지 않고) 본색(本色)대로 바치도록 요구[責納]하여 매 석당 6냥으로 집전(執錢)했는데,..

신증동국여지승람 제31권 / 경상도(慶尙道)

신증동국여지승람 제31권 / 경상도(慶尙道) 신증동국여지승람 제31권 / 경상도(慶尙道) 【古跡】 古邑城。在官邊里。距今治四里。 功安部曲。在郡東南十五里。 馬川所。川,古作“淺”。在郡南三十里。 〔新增〕 金宗直詩:“鳴騶入馬川,賓從亦翛然。陰壑凍將合,陽崖楓尙鮮。雪藏神母廟,雷吼蟄龍淵。曲岸遺柴槮,叢祠罥紙錢。斲材溪有柹,燒炭谷生煙。傖父刈蕎麥,小姑收木綿。荏苒瓜期近,玆遊應眷憐!” 義呑所。在郡南三十里。所之吏,今移居郡西熊谷里。 月明塚。在愁智峯上。諺傳昔有東京商人悅沙斤驛女月明,留數日而去。月明思念不置,得疾死瘞于此。後商人來,哭其墓亦死。遂同穴焉。〔新增〕 金宗直詩:“塚上靑靑連理枝,行人爲唱華山畿。如今月黑狐貍嘯,應是春魂化蝶飛。” 【고적】 옛 읍성 관변리(官邊里)에 있는데, 지금 고을 관아와 4리 거리이다. 공안부곡(功安部曲) 군 동남쪽 15리..

기담(妓潭)의 동초(東樵) 김석곤(金晳坤) 석각

기담(妓潭)의 동초(東樵) 김석곤(金晳坤) 석각  기담(妓潭)의 지명은 1611년 유몽인(柳夢寅)의 유두류산록과 1651년 오두인의 두류산기에 등장한다. 유몽인의 유듀류산록에는 기담(妓潭)과 사정(獅頂), 오두인의 두류산기에는 기담(妓潭)과 사자곡(獅子谷)으로 기록하고 있다. 지명에서 사자목(獅子項)은 사람이 겨우 비켜갈 수 있는 바위 벼랑의 좁고 험한 길이다. 사정(獅頂)은 사자곡(獅子谷) 벼랑길에서 고개이다. 의신 마을 주민들은 사정(獅頂)를 '사지 고개', '사징이 고개', '사지넘이 고개'라고 부른다. 서산대사길은 신흥교에서 의신마을까지 이어지는 옛길 구간 4.2km를 말한다. 사자곡(獅子谷)은 서산대사길 초입 벼랑 구간을, 사정(獅頂)은 자연석 의자가 있는 낮은 고개를 가리키는 듯하다. 사정(獅..

1686년 정시한의 산중일기에 나오는 암자터를 찾아서II

1686년 정시한의 산중일기에 나오는 암자터를 찾아서 II ▣ 일 시 : 2021년 08월 14일(토)~15일(일) ▣ 코 스 : 무량굴-석굴암자터A-암자터B-회암당부도-상무주암-서동고암-삼정산-기도터C-누각터D-문수암-암자터E-견성암(?)-도마마을 ▣ 인 원 : 4명 ▣ 날 씨 : 새벽 온도 15도 우담(愚潭) 정시한(丁時翰, 1625∼1707)의 산중일기(1686년)는 우담(愚潭)이 62세 때인 1686년(숙종 12) 3월부터 1688년(숙종 14) 9월까지 총 4차례에 걸쳐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 강원도 일대의 명산 고찰 및 서원 등을 여행하면서 기록한 유람기이다. 우담(愚潭) 정시한(丁時翰, 1625∼1707)은 1686년 3월 어머니 3년상을 마친 후, 62세부터 3년 동안 전국의 사찰을 순..

1611년 유몽인의 유두류산록에 나오는 혈암

1611년 유몽인의 유두류산록에 나오는 혈암 1. 1611년 유몽인의 유두류산록 지난 고려 말 왜장 아기발도(阿只拔都)가 많은 병사를 거느리고 영남 지방을 침략하였는데, 그가 향하는 곳은 모두 견디지 못하고 무너졌다. 그 나라의 참위서(讖緯書:비결서)에 “황산에 이르면 패하여 죽는다.”라고 하였는데, 산음(山陰) 땅에 ‘황산(黃山)’ 이란 곳이 있어 그 길을 피해 사잇길로 운봉 땅에 들이닥친 것이다. 그때 우리 태조(太祖) 강헌대왕(康獻大王)께서 황산(荒山)의 길목에서 기다리다 크게 무찌르셨다. 지금까지 그 고을 노인들이 돌구멍을 가리키며, ‘옛날 깃발을 꽂았던 흔적’이라고 한다. 적은 군사로 감당하기 어려운 적과 싸워 끝없는 터전을 우리에게 열어주셨으니, 어찌 단지 하늘의 명과 인간의 지모 이 둘만을 ..

1611년 유몽인의 유두류산록에 나오는 기담(妓潭)과 사정(獅頂)

1611년 유몽인의 유두류산록에 나오는 기담(妓潭)과 사정(獅頂) ▣ 일 시 : 2021년 08월 01일(일) ▣ 코 스 : 세이암-신흥교-사자곡-사정-기담(석각)-독가-평지교-대성교 ▣ 인 원 : 2명(조봉근님) ▣ 날 씨 : 흐림 1611년 유몽인(柳夢寅)의 유두류산록과 1651년 오두인의 두류산기에 기담(妓潭)이 등장한다. 유몽인 길 전구간을 부분 답사하면서 마지막 남은 지명이 기담(妓潭)과 사정(獅頂)이다. 기담과 사정은 의신사(義神寺)가 있는 의신마을과 신흥사(神興寺)가 있는 신흥마을 사이에 있다. 1651년 오두인(吳斗寅)의 두류산기를 읽어보면 포위망이 좁혀진다. (세이암을 지나) '왼쪽으로 길을 틀어 뒷 산등성이 오르니 길이 더욱 험하고 산세가 더욱 기이하다. 사자곡(獅子谷)에서 10리 정도..

1611년 유몽인의 유두류산록에 나오는 呂公臺(여공대)

1611년 유몽인의 유두류산록에 나오는 呂公臺(여공대) ▣ 일 시 : 2021년 07월 29일(목) ▣ 코 스 : 여공대-만월암-기담-와룡정-남창 ▣ 인 원 : 3명 ▣ 날 씨 : 맑음 1472년 김종직의 아홉 모롱이길, 1610년 박여량의 초령길에 이어서 1611년 유몽인의 환희령과 와룡정 등 매 고비마다 단톡방에서 의사소통과 토론이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유몽인이 1611년 4월 5일 의신사에서 자고 4월 6일 홍류동으로 내려오면서 사정(獅頂)과 기담(妓潭), 만월암(滿月巖)과 여공대(呂公臺)를 지난다. 2주 전 일요일 칠불암을 다녀오면서 계곡을 내려다보았지만 숲이 우거져 어디가 어디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차를 돌려 황산비전과 혈암(피바위)을 보고 백장사에서 매동마을로 내려가는 옛길을 확인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