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六友堂記/마애석각

벽송정 마애석각 知郡徐頀淳 郡守沈侯能定永世不忘碑외

도솔산인 2021. 9. 6. 18:28

벽송정 마애석각 知郡徐頀淳 郡守沈侯能定永世不忘碑외

 

 

화장산과 화암마을
知郡徐頀淳 1863~1867 함양군수

徐頀淳(1799~미상) 본관 達城 () 치성(穉成) 한양 출신 헌종(憲宗) 10(1844, 甲辰) 46세에 증광시(增廣試) 생원 1(一等) 3(3/100) 급제. 1863년 함양군수 부임 1867년 암행어사 박선수(朴瑄壽 1821∼1899)에 의해 파직됨.

 

 

1867년(고종 4년) 경상도 암행어사 박선수(朴瑄壽 1821∼1899) 서계(書啓)

 

함양 군수(咸陽郡守) 서호순(徐頀淳)입니다. 간사한 이들의 말만을 들어 자질구레한 비방을 크게 불러들였습니다. 갑자년(1864년, 고종 1년) 가을 영작미(營作米 : 감영의 작미) 80석의 경우는 (애당초부터 돈으로 排捧하지 않고) 본색(本色)대로 바치도록 요구[責納]하여 매 석당 6냥으로 집전(執錢)했는데, 합하면 모두 480냥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중 240냥에 대해서는 상정가(詳定價)로 감영에 수송했습니다. 나머지 240냥은 사용(私用)으로 취했습니다. 병인년(1866년, 고종 3년) 봄, 기민을 구급[飢民救急]할 때는 부민조(富民租) 70석을 강제로 사서 작은 되[小斗]로 정략을 가지고 휘[斛]를 나누어 부연하여[以小斗精?分斛?衍] 148석으로 그 양을 부풀리어 감영에 보고했습니다.


을축년(1865년, 고종 2년) 봄 환곡을 분급(分給)할 때는 가구를 기준으로 환곡을 나누어주는 호환규정[戶還之規]을 혁파하고 전결을 기준으로 환곡을 나누어주는 방법인 결환[結還]을 처음으로 창출하여 미세한 파속도 모두 섞어서 배정했으며, 되와 말의 곡식도 분급하지 않은 것이 없었습니다[把束之微 混入排定 升斗之穀 無所分給]. 가을이 되어 환곡을 거둘 때는 백성들이 먹어보지도 못한 환곡을 백징(白徵)으로 징수했습니다. 매임전(賣任錢 : 임무를 팔아서 번 돈)ㆍ매향전(賣鄕錢 : 향임자리를 팔아서 번 돈)은 수천여 냥이나 되었습니다. 그의 죄상을 따져본다면 그의 경우는 중감(重勘)을 합시(合施)해야 합니다. <출처 : 일성록>

 

 

☞ 박선수(朴瑄壽 1821∼1899) 조선 말기의 문신. 본관은 반남. 자는 온경(溫卿). 실학자 지원(趾源)의 손자로, 종채(宗采)의 아들이며, 우의정 규수(珪壽)의 아우이다. 1864년(고종 1)증광별시문과에 장원급제한 이후 관직에 올랐다. 1865년에 사간원대사간을 거쳐 1867년에는 암행어사로 임명되어 경상도 지방관들의 탐학을 규찰하기도 하였다. 1873년 참찬관을 거쳐 대사간직에 재임명되었다. 이듬해에는 이조참의에 올랐으며, 1878년에는 예방승지를 지냈다. 1883년에는 성균관대사성이 되었으며, 이듬해 갑신정변 직후에는 행호군(行護軍)직에서 공조판서로 특별히 발탁되었으며, 동학농민전쟁이 일어난 뒤인 1894년 4월에는 형조판서를 지냈다.

 

 

우선 보이는 것만... 郡守金侯履綱永世不忘碑,  郡守沈侯能定永世不忘碑(1819년 부임)/郡守金侯箕弼永世不忘碑(1815년 부임)
馬川面長金炳皓淸德碑(마천면장김병호청덕비)

 

▶智異山探勝案內 咸陽名勝古蹟保存會長 閔麟鎬

 

如斯한 名山에 對하야 數千年名勝古蹟을 開拓發見하기로 計劃한 同時에 一般森林獎勵上에 極히 重要한 關係가 有함으로 此의 實行에 際하여는 最히 周密한 考慮와 努力을 拂하야 的確한 施設方針을 企劃하야 進行上 遣質이 無케 하기로 期하얏슴으로 本會長이 大正十一年五月十二日 金曜의 晴天을 機會하야 智異山開拓에 關한 準備를 團束하고 古蹟調査員權道溶 土木技手補大谷定造와 共히 傭人二名을 帶同하고 登山의 路에 就하얏는데 中路에서 碧松寺僧金禪應李宗仁과 馬川面長金炳皓及雇軍二人이 合同하얏는데 一行이 凡十人이러라.

 

이와 같은 명산에 대하여 수천년의 명승고적을 개척 발견하기로 계획함과 동시에 일반삼림을 장려하는 데에도 극히 중요한 관계가 있다. 그러므로 이의 실행에 즈음하여 가장 주밀한 고려와 노력으로 확실한 시설방침을 꾀하고 진행상 본질을 잃는 일이 없기를 바랐으므로 본 회장이 大正 11년 5월 12일(*양력 ) 금요일, 맑게 갠 하늘을 기회로 지리산 개척에 관한 준비를 단속하고 고적조사원 권도용, 토목기수보 大谷定造와 함께 고용인 2명을 대동하고 등산길에 나섰다. 중로에서 벽송사 승려 김선응·이종인과 마천 면장 김병호 및 삯꾼 2인이 같이하여 일행이 모두 10인이 되었다.(譯 이재구)

 

 

함양 군수 민인호(閔麟鎬 1884~1950)는 산청 출신으로 동경제국대학을 나와 일제 강점기에 탁지부 주부를 거처 함양군수(1919.10~1923.3)를 지냈으며, 1921년 함양명승고적보존회를 조직하여 지리산을 알리는 데 힘썼다. 그 일환으로 1922416~20()까지 고적조사원 권도용(1877~1959), 토목 기수보 大谷定浩(오오타니 사다히로?), 고용인 2, 벽송사 승려 김선응, 이종인, 마천 면장 김병호 및 삯꾼 2인을 포함 모두 10명이 벽송사를 출발하여 아홉모랭이길을 거쳐 천왕봉을 유람하였다.

 

유람의 목적은 함양 명승고적보존회에서 유산객들의 편의를 위해 마암에 마암당(이진우와 벽송사승 일동), 제석봉에 제석당(박노익과 영원사 승 일동), 천왕봉에 망해정(강위수)을 건축하고, 등산로를 정비하기 위한 사전 조사로 보인다. 답사 후에 민인호는 선인들의 지리산 유산기와 시를 수집하여 19227지리산지(智異山誌)를 편찬하였으며, 자신의 글 지리산탐승안내를 그 부록에 실었다. 함께 답사에 참여한 추범(秋帆) 권도용(權道溶, 1877~1959)은 방장산부를 남겼다. 마암당을 건축한 이진우는 사전 답사에 참석하지 않았고 벽송사 승려 김선응과 이종인이 동행하였다. 추범 권도용 선생은 면우 곽종석의 제자로, 경남일보 2대 주필을 지냈고, 함양을 대표하는 당시 유림의 실력자이다.

 

 

殉職葉友慰靈碑(순직엽우위령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