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六友堂記/산행기록

1686년 정시한의 산중일기에 나오는 암자터를 찾아서II

도솔산인 2021. 8. 15. 21:10

1686년 정시한의 산중일기에 나오는 암자터를 찾아서 II

 

 

▣ 일 시 : 2021년 08월 14일(토)~15일(일)

▣ 코 스 : 무량굴-석굴암자터A-암자터B-회암당부도-상무주암-서동고암-삼정산-기도터C-누각터D-문수암-암자터E-견성암(?)-도마마을

▣ 인 원 : 4명

▣ 날 씨 : 새벽 온도 15도

 

 

우담(愚潭) 정시한(丁時翰, 1625∼1707)의 산중일기(1686년)는 우담(愚潭)이 62세 때인 1686년(숙종 12) 3월부터 1688년(숙종 14) 9월까지 총 4차례에 걸쳐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 강원도 일대의 명산 고찰 및 서원 등을 여행하면서 기록한 유람기이다. 우담(愚潭) 정시한(丁時翰, 1625∼1707)은 1686년 3월 어머니 3년상을 마친 후, 62세부터 3년 동안 전국의 사찰을 순력(巡歷)하며 산중일기를 남겼다. 우담이 산과 산사를 탐방한 것은 이때가 처음이 아니었다. 첫 유람은 1648년 스물네 살 때였는데, 아버지 임지인 강원도 회양(淮陽)에서 금강산을 유람하였다. 회양은 금강산으로 유명한 곳이다. 선생은 금강산을 유람하면서 산수벽(山水癖)에 빠진 듯하다. 1676년에는 속리산, 1680년에는 백운산과 두타산을 유람하였다. 산중일기를 지은 이후에도 1689년에는 소백산과 학가산, 1690년에는 청량산과 치악산, 1691년에는 미륵산 등 해마다 명산대천을 유람하였다.

 

- 1차 : 1686년 3월 13일부터 1687년 1월 23일까지 10개월간 속리산, 지리산, 덕유산 일대를 유람함.

- 2차 : 1687년 3월 8일부터 3월 17일까지 8일간 치악산 일대를 유람함.

- 3차 : 1687년 8월 2일부터 10월 20일까지 2개월여 동안 금강산 일대를 유람함.

- 4차 : 1688년 4월 10일부터 9월 19일까지 5개월간 경상도 안동, 의성, 청송 등지의 서원 및 팔공산 일대를 유람함.

 

 

정시한(丁時翰)은 3년(22개월, 총 600일) 동안 전국의 명산 고찰을 두루 유람하면서 매일매일 그날의 일과 자신의 감상을 일기 형식으로 기록하였다. 여행기간 동안 총 300여 사찰에 들러 주위 환경과 감상, 만난 승려들의 이름과 성품까지 상세하게 기술하고 있다. 특히, 지리산에서 170여 일의 기록은 지리산 인문학의 보고(寶庫)이다. 산중일기는 17세기 지리산의 사찰 현황과 인물에 대한 중요한 근거 자료가 된다. 이번 산행은 정시한이 1686년 윤 4월 11일 무주암을 출발하여 무량굴-절터와 석굴(寺基及窟)-묘적암(회암당 부도)-무주암-서동고암과 하산길에 견성암터를 둘러보고자 한다. 다음은 4월 11일 정시한의 산중일기 기록이다.

 

[원문] 朝齋後 與三應首坐 往無量窟 又上妙寂菴 歷見寺基及窟 至妙寂思哲坐語 少時還無住菴 約行十餘里 石路極險 登陟頗勞

윤4월 11일 아침식사 후에 삼응(三應) 수좌와 함께 무량굴로 갔다. 또 묘적암(妙寂菴)으로 올라가면서 절터와 굴을 두루 보았다. 묘적암에 도착하여 사철(思哲)과 함께 잠시 앉아서 대화를 나누다가 무주암(無主菴)으로 돌아가니, 대략 10여리 쯤 되었다. 돌길이 매우 험하여 오르내리기가 무척 힘들었다.<김성찬, 1999>

윤4월 11일 아침식사 뒤에 삼응(三應) 수좌와 함께 무량굴로 갔다가 다시 묘적암(妙寂菴)으로 올라가 절터와 굴을 본 다음 묘적암에 도착했다(?). 사철(思哲)과 함께 이야기를 하다가 무주암(無主菴)으로 돌아왔다. 약 10여리를 걸었는데 돌길이 몹시 험하여 오르는데 무척 힘이 들었다.<신대현, 2005>

윤4월 11일 아침 재식 뒤에 삼응(三應) 수좌와 함께 무량굴로 갔다가, 또 묘적암으로 올라갔다. 두루 절이 있는 곳과 굴을 보았다. 묘적암에 이르러 사철과 함께 앉아서 잠시 이야기를 나누다가 무주암으로 돌아왔다. 약 10여리를 걸었다. 돌길이 매우 험하여 높은 곳에 오르기가 매우 힘들었다.<나주정씨 문중 국역본 우담집 권1, 권2>

 

이 부분을 다시 정리하면...

「朝齋後 與三應首坐 往無量窟 又上妙寂菴 歷見寺基及窟 至妙寂思哲坐語 少時還無住菴 約行十餘里 石路極險 登陟頗勞

윤 4월 11일, 아침 재식(齋食 : 正午 이전에 먹는 佛家에서의 食事)을 한 뒤에 삼응(三應) 수좌와 함께 무량굴에 갔다가 다시 묘적암으로 올라왔다. 암자터와 굴을 두루 보고 묘적암에 이르러 사철과 함께 이야기하다가 잠시 후에 무주암으로 돌아왔다. 약 10여 리를 걸었다. 돌길이 매우 험하여 오르기가 무척 힘들었다.」

 

 

무량굴은 상무주암 등로 초입에서 약 200m 위에 있다. 무량굴 석축은 마치 중장비로 쌓은 듯 정교하다. 무량굴의 우측은 바위를 깨뜨려 굴을 확장한 흔적이 있다. 무량굴에서 절골 두타암 방향으로 옛길이 이어진다. 무량굴과 두타암은 900m 정도의 비슷한 고도이다. 회암당 승탑 아래 석굴이 있는 암자터A로 진입하는 길은 세 군데이다. 계곡을 따라 위로 진행하는 길과 상무주암으로 오르다가 등산로 샘터에서 트래버스 하는 길이 있고, 회암당 승탑에서 내려갈 수도 있다.

 

석굴&암자터A에는 국립공원에서 묘적암이라고 팻말을 붙여놓았다. 석굴이 있는 암자터A를 묘적암터로 보는 것은 유람록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같은 고도에서 동쪽으로 조금 진행하면 거대한 암벽 아래 샘이 있고 그릇과 살림살이가 어지럽게 흩어져 있다. 석굴&암자터A에서 문확석까지는 약간의 거리가 있다. 오른쪽 위로 조금 진행하면 석축이 있는 암자터B가 나타난다. 정시한은 '무량굴에 갔다가 다시 묘적암으로 올라왔다. 암자터와 석굴을 두루 보고 묘적암에 이르러 사철과 함께 이야기하다가 잠시 후에 무주암으로 돌아왔다. 약 10여리를 걸었다. 돌길이 매우 험하여 오르기가 무척 힘들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곳에서 위로 약 70m를 진행하면  회암당 승탑이 나온다.

 

정시한은 무량굴에 갔다가 묘적암으로 올라가는데, 석굴이 있는 암자터를 지나 회암당 부도터로 오른 것으로 추정한다. 정시한의 산중일기에 묘적암(妙寂菴)이 자주 등장한다. 「4월 20일 아침 식사 뒤 묘적암(妙寂菴)으로 향하려고 하였는데 (묘적암 수좌) 사철(思哲) 스님이 와서 손을 잡고 같이 갔다. 암자는 비록 무주암(無住庵)에 미치지 못하고 또한 매우 밝고 환하나, 초막이라 거처하기(지내기)에는 부족하다. 서동고암과 묘적암은 무주암의 지근거리에 있다. 묘적암의 수좌 사철(思哲) 스님은 수시로 무주암에 드나들었고, 정시한 또한 묘적암에 왕래했다. 정시한의 동선을 볼 때 회암당 승탑을 묘적암(妙寂菴) 터로 추정한다. 회암당 승탑에서 서동고암으로 길이 연결된다. 참고로 정시한이 유람한 해는 1686년이고, 회암당晦庵堂 승탑의 주인 정혜대사(1685~1741)는 1685년에 출생하여 1741년에 입적하였다.

 

서동고암(西洞古菴)은 무주암 '서쪽 골(구렁)에 있는 옛 암자터'로 이해한다. 서동고암에 대한 정시한의 기록은 비교적 자세하다. 현장을 답사해보면 설명을 덧붙일 필요가 없다. 「윤 4월 9월 아침식사 뒤 삼응(三應) 스님과 함께 묘적암(妙寂菴)에 갔다. 잠시 앉아 있다가 사철(思哲)·삼응(三應) 스님과 함께 서동고암(西洞古菴, 서쪽 골짜기에 있는 오래된 암자터)을 찾아가니 암자터는 석대 위에 있다. 좌우의 입석(立石)이 기괴하고 동쪽 가에는 석천(石泉)이 있다. 산세가 둘러싸여 있어 바람도 잔잔하여 몇 칸 집을 지을 수 있다. 자못(頗) 맑은 기운이 서려있으니 정말로 이곳은 도인이 수련하는 곳이다. 무주암(無住菴)에서 신순(信淳) 수좌를 불러 집의 칸수(間數)와 두 개 샘을 고쳐서 쓰는 것(修濟)을 헤아려보게 했다. 흠(결점)은 샘물이 부족할 것 같다는 것이다. 한동안 앉아 있다가 돌아왔다.」

 

다음날 어제 답사했던 석굴 암자터A로 다시 내려갔다. 회암당 서쪽 암봉 아래에 있는 기도터C를 찾았는데, 회암당 승탑과 같은 고도로 길이 연결된다. 이곳에서 아래로 내려가니 석굴 암자터A가 나왔다. 석굴 암자터에서 암자터B 아래 동쪽으로 길의 흔적이 있는데, 같은 고도로 조금 진행하면 전망이 좋은 석대 위에 정자터D의 석축이 있다. 이곳에서 사면을 따라 오르면 상무주암 채소밭이 울타리가 나오고, 고도를 낮추어 돌탑 전망대를 아래로 우회하여 진행하면 상무주암으로 오르는 등로의 샘터로 연결된다. 상무주암과 상당한 거리가 있는데 이 지점에 와편들이 즐비하다.

 

오전의 일정을 마치고 서동고암(西洞古菴)을 출발하여 문수암(옛 千人庵) 수행자에게 견성암(見性庵) 터의 위치를 물어보고 견성골로 내려섰다. 군데군데 아직도 인공으로 축조한 길의 흔적이 남아있다. 돌을 깔고 그 위에 흙을 덮어 우마가 다닐 수 있는 길이다. 수백 년 세월이 흘렀어도 무주암까지 말이 올라왔다는 기록이 있으니 옛길도 역사라는 생각이 들었다. 문수암에서 직선거리 약 370m 왼쪽 기슭에 암자터E가 있다. 샘터도 있고 와편과 백자편이 수두룩하다. 조금 아래에 해우소 터도 있다. 다시 이곳에서 150m 정도 내려서면 넓은 전답터가 나타난다. 이곳에도 와편이 흩어져 있다. 이곳을 '견성암(見性庵) 터'라고 하는데 선듯 수긍이 가지 않는다. 내 눈에는 암자터E(구글지도 28)'견성암(見性庵) 터'로 보인다. 1686년 4월 24일 무주암과 정시한이 묵었던 윤판옥(귀틀집)이 불에 탄다. 4월 25일 실상사로 내려가 하룻밤을 묵고 다음날(26일) 견성암에서 유숙한다. 정시한은 이후 10일간 천인암에 머물며 다리에 힘을 기르기 위해 견성암을 오르내렸다고 한다.

 

며칠 전에 남해에 사시는 송장섭 선생님과 통화를 하게 되었다. 함양 출신으로 일행 분들과 함께 선인들의 유람록을 정독(精讀)하고 조용히 답사를 하시는 분이다. 박여량의 초령에 대한 의견을 주셨는데 정시한 길을 걸으며 생각은 온통 초령에 꽂혀있었다. 논어 학이편에 '잘못이 있으면 고치는 것을 꺼리지 말라.(過則勿憚改)'라는 문구가 있다. 잘못을 인정하고 바로 고치면, 다른 사람의 신뢰를 살 수 있다. 논어 자장 편에도 '소인은 잘못을 저지르면 반드시 꾸며서 얼버무리려고 한다.(小人之過也, 必文.)'라고 하였다. 사람은 살면서 누구나 잘못할 수 있다. 오류를 바로 인정하면 오히려 자기 발전의 기회가 된다. 고치는 것도 때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 끝.

 

 

구글 지도(칠성님)
구글 지도(칠성님)
무량굴 석축
무량굴
석굴 암자터(寺基及窟)
문확석(?)
암자터B 석축
회암당 승탑

회암당晦庵堂 승탑의 주인 정혜대사(1685~1741)는 조선 후기 김천 청암사에서 주석하셨던 큰 스님이다. 승탑 연구가 임병기 선생은 정혜대사의 사리를 분 사리 하여 청암사에 회암 승탑과 지리산에 회암당 승탑을 모셨다고 추정하고 있다. 생몰년을 보면 1685년에 출생하여 1741년에 입적하셨다.

 

 

각운선사 필단사리탑

상무주암(上無住庵)은 고려 중기에 보조국사(普照國師) 지눌(知訥)이 약간의 수행승들과 함께 창건함. 지눌 스님이 800여 년 전 길 없는 산길을 걷고 또 걸어 토굴을 만들어 수도 정진 한 곳이 이곳 상무주다. '더 이상 머무를 곳이 없다.'라는 상무주암... 지눌 스님의 제자 혜심(慧諶)이 ‘선문염송(禪門拈頌)’을 쓰고 혜심의 제자 각운이 스승이 쓴 책에 주석을 붙여 ‘선문염송설화(禪門拈頌說話)’라는 책을 썼는데, 다 집필하고 나니 기이하게도 붓통 속에서 사리가 떨어져 봉안한 탑이 필단사리탑(筆端舍利塔)이라는 것이다.

 

☞ 각운(覺雲) : 생몰년 미상 임제종 보우의 법통을 이어 남원 만행산 승련사에 있으면서, 〈전등록 傳燈錄〉(과거 7불로부터 5家 52世에 이르기까지 전등한 법계의 차례를 기록한 책)을 깊이 연구했다. 본관은 남원. 속성은 유(柳)씨이며, 호는 구곡(龜谷)이다. 아버지는 의관이다. 학덕이 높고 필법이 뛰어나 공민왕이 그의 도행을 존경하여 〈달마절로도강도 達磨折蘆渡江圖〉·〈보현육아백상도 普賢六牙白象圖〉 등 직접 그린 그림과 '구곡각운'이라는 친필을 주었으며, 대조계종사 선교도총섭 숭신진승 근수지도 도대선사(大曹溪宗師 禪敎都摠攝 崇信眞乘 勤修至道 都大禪師)라는 법호를 내렸다.<출처 : 다음 백과>

 

 

무주암축대시주
서동고암((西洞古菴)
서동고암 서쪽 좌대
동쪽 좌대에서 바라본 반야봉
동쪽 좌대에서 바라본 천왕봉
삼정산 정상석

▼ 서동고암 동쪽 좌대에서의 일몰

 

▼ 회암당 승탑 우측 암봉

기도터C
정자터D(?)
문수암(千人菴)
암자터E
암자터E
견성암터(?)
돌확(?)

 

▶ 1686년 정시한의 산중일기에 나오는 두타암과 무량굴, 묘적암과 서동고암

 

○ 4월 19일 맑고 추웠다.(함양 상무주암)

 

○ 十九日晴寒曉盛器水氷凝

朝齋後肩輿發 自安國寺 僧統一謙隨來 至川邊 君子寺僧法眼善寶等 率輿軍來待 越川騎驢行十餘里 始上輿又行五里餘 至頭陀 老僧圓惠其上佐靈印出接 坐良久 送藍輿步無量窟 義哲首座 年乙丑生出接 夕齋後 上上無住 懸崖石壁 極力攀躋 行五里許 十步一休 堇堇得達 坐憇東臺石上 平看智異諸峯羅列 望中主山石峯 奇怪不可名狀 西邊石井甘冽 寺基處在萬仞高山 而平穩向陽 眞明堂之地 定欲過夏此菴 老僧湖俊及諸首座七八 新造居住矣 一謙法眼善寶辭去 妙寂菴首座思哲 委來相訪 年庚辰生

 

○ 19일 맑음, 날이 추워 새벽에 그릇에 담긴 물이 얼었다.

(안국사에서) 아침 식사(朝齋) 후에 견여(肩輿, 어깨에 메는 가마)를 타고 출발하였다. 안국사(安國寺)에서 승통(僧統) 일겸(一謙)이 스님이 따라왔다. 냇가(瀶川, 임천)에 이르니 군자사의 법안(法眼), 선보(善寶) 스님 등이 가마꾼을 데리고 기다리고 있었다. 내(임천)를 건너서 나귀를 타고 10여 리 남짓 간 다음 비로소 견여(肩輿)를 타고 다시 5리쯤 갔다. 두타암(頭陀庵)에 이르니, 노승(老僧) 원혜(圓慧) 그의 상좌 영인(靈印) 스님이 나와서 영접하였다. 오랫동안 앉아있다가 남여(藍輿)를 돌려보내고 무량굴(無量窟)까지 걸었다. 의철(義哲) 수좌는 나이가 을축생(1625년)으로 나와서 맞이했다. 저녁 식사 뒤 상무주암(上無住庵)으로 올라갔다. 벼랑에 걸려 있는 석벽을 온 힘을 다해 더위잡고 올라가 5리쯤 갔다.

 

注 승통(僧統) : 사찰의 책임자에 해당하는 주지의 다른 이름.

 

열 걸음에 한 번씩 쉬면서 간신히(堇堇, 겨우) 도착하여 동대(東臺) 바위 위에서 앉아 쉬었다. 가만히 바라보니 지리산의 여러 봉우리들이 펼쳐저 있고, 눈앞(望中)에 주산(主山)의 석봉은 기괴하여 형상을 이름할 수가 없었다. 서쪽 가장자리의 석정(石井)은 달고도 차가웠다. 절터는 만길 높은 곳에 있으나, 평온하고 남향이라서 정말로 명당의 자리였다. 반드시(꼭) 이 암자에서 여름을 보내고 싶다. 노승(老僧) 호준(湖俊)과 수좌 칠팔 명이 새로 거주처를 지었다. 일겸(一謙), 법안(法眼), 선보(善寶) 스님이 인사를 하고 갔다. 묘적암(妙寂庵)의 수좌 사철(思哲) 스님이 일부러 찾아와서(委來) 만났다. 나이는 경진생(1640년)이다.

 

○ 4월 20일 맑음 바람이 불어 추웠다(함양 묘적암)

 

二十日晴風寒

朝齋後欲向妙寂 思哲又來 携與同往 菴基雖不及無住 亦甚明朗 而草幕不足居

 

아침 식사 뒤 묘적암(妙寂菴)으로 향하려고 하였는데 (묘적암 수좌) 사철(思哲) 스님이 와서 손을 잡고 같이 갔다. 암자는 비록 무주암(無住庵)에 미치지 못하고 또한 매우 밝고 환하나, 초막이라 거처하기(지내기)에는 부족하다.

 

○ 윤 4월 9일 흐린 뒤에 맑음(함양 상무주암)

 

○ 初九日陰或晴

朝齋後與三應徃妙寂菴 㘴少時 與思哲三應等 徃尋西洞古菴 基在於石臺上 左右立石奇怪 東邊有石泉 山勢回抱殘風 可造數間屋 而有淸氣 眞是道人修鍊之所 招信淳首㘴於無主菴 量度間架 兩泉 所欠泉似不足 㘴移時還來 庚宿買海松子於君子寺來 寺僧送水芹二束來 夕齋後 與信淳又徃止慈東臺 與□哲首㘴同來宿

注 殘風 조금씩 부는 고요하고 잔잔한 바람

 

아침식사 뒤 삼응(三應) 스님과 함께 묘적암(妙寂菴)에 갔다. 잠시 앉아 있다가 사철(思哲)·삼응(三應) 스님과 함께 서동고암(西洞古菴, 서쪽 골짜기에 있는 오래된 암자터)을  찾아가니 암자터는 석대 위에 있다. 좌우의 입석(立石)이 기괴하고 동쪽 가에는 석천(石泉)이 있다. 산세가 둘러싸여 있어 바람도 잔잔하여 몇 칸 집을 지을 수 있다. 자못() 맑은 기운이 서려있으니 정말로 도인이 수련하는 곳이다. 무주암(無住菴)에서 신순(信淳) 수좌를 불러 집의 칸수(間數)와 두 개 샘을 수리하여(고쳐서) 쓰는 것(修濟)을 헤아려보게 했다. 흠(결점)은 샘물이 부족할 것 같다는 것이다. 한동안 앉아 있다가 돌아왔다. 경숙(庚宿)이 군자사에서 잣(海松子)을 사 가지고 왔다. 군자사 스님이 미나리(芹) 두 단(二束)을 보냈다. 저녁식사 후에 신순(信淳) 수좌와 다시 지자암(止慈巖)동대(東臺)에 갔다가 사철(思哲) 수좌와 함께 와서 잤다.

 

注 修濟 : 수리하여 사용하다(고쳐서 쓰다)

 

○ 윤 4월 10일 흐린 뒤 맑음, 바람이 불었다.(함양 상무주암)

 

○ 初十日或陰晴風

朝齋後 與信淳徃止慈巖 又率思哲徃西臺基 掘井坐玩 良久還無主菴 夕齋後 與雪淸徃返止慈 思哲來同宿


아침식사 뒤에 신순(信淳) 스님과 함께 지자암(止慈巖)에 갔다가, 다시 사철(思哲) 수좌를 데리고 서대(西臺)터에 갔다. 우물 파는 것을 앉아서 구경하다가 한참 후에 무주암(無住菴)으로 돌아왔다. 저녁식사 뒤 설청(雪淸) 스님과 지자암(止慈巖)에 다녀왔다 사철(思哲) 수좌가 와서 같이 잤다.

 

○ 윤 4월 11일 새벽 천둥과 벼락 비가 그침(함양 상무주암)

 

閏 十一日朝齋後 與三應首坐 往無量窟 又上妙寂菴 歷見寺基及窟 至妙寂思哲坐語 少時還無住菴 約行十餘里 石路極險 登陟頗勞

 

윤 4월 11일, 아침 재식(齋食, 佛家에서의 食事)을 한 뒤에 삼응(三應) 수좌와 함께 무량굴(無量窟)에 갔다가 다시 묘적암(妙寂菴)으로 올라왔다. 절터와 굴(寺基及窟)을 두루(모두) 보고(구경하고) 묘적암(妙寂菴)에 이르러 사철(思哲) 수좌와 함께 이야기하다가 잠시 후에 무주암(無住菴)으로 돌아왔다. 약 10여 리를 걸었다. 돌길이 매우 험하여 오르기가 무척 힘들었다.

 

○ 윤 4월 12일 맑은 뒤 흐려짐 밤에 큰 비바람이 불다.(상무주암)

 

○ 十二日或晴陰夜大風雨

朴進士辭去 偕徃妙寂菴相別 與思哲㘴語 良久還無主菴

 

박진사가 인사하고 가는데 함께 묘적암(妙寂菴)까지 가서 작별했다. 사철(思哲) 수좌와 앉아서 이야기하다가 한참 후에 무주암으로 돌아왔다. 

 

○ 9월 2일 맑음 아침에 얼음이 얼었다.(무주암)

 

무주암-묘적암-서암터-묘적암-앞에 있는 臺(前臺)-무주암

 

○ 九月初二日晴朝氷 

惠哲首座備饋朝食 朝食後 與恒子及惠哲首座 往見妙寂菴 過僧戒學迎見 仍與往見西菴基 君子僧自信來現 又還妙寂菴 登前臺入坐房中 朴光善稱名人來現 年乙丑生 自言家在咸陽邑內書院村云 良久歸來路 見張網結㥊捕鷹者 羅列峯頭矣 還無住 則自信僧 呈進燒酒及數器果子及山果 與菴僧分食 自信辭去 太男還來傳咸倅書 使恒子書給行禪祝願 付菴壁

 

○ 9월 초이틀 맑음 아침에 얼음이 얼었다. 혜철(惠哲) 수좌가 아침을 준비했다. 식사 뒤에 아들 도항(道恒)이와 혜철(惠哲) 수좌와 함께 묘적암(妙寂菴)에 가보았다. 도중에 계학(戒學) 스님을 만나 함께 서암(西庵)를 가보았다. 군자사에서 자신(自信) 스님도 와서 만났다. 다시 묘적암(妙寂菴)으로 돌아와 앞에 있는 대(前臺)에 올라갔다가 방에 들어갔다. 안에는 박광선(朴光善)이라는 사람이 와있었는데 나이는 을축생이다. 집은 함양 읍내 서원(書院)촌이라고 한다.

 

오랫동안 있다가 돌아오는 길에 그물을 치고 움막을 짓고 매를 잡는 사람들을 만났는데 봉우리 꼭대기에 그물을 설치하였다. 무주암(無住菴)에 돌아오니 자신(自信) 스님이 소주를 권하여 과자와 산 과일을 몇 접시를 차려서 암자의 스님들과 나누어 먹었다. 자신(自信) 스님은 인사하고 돌아갔다. 태남(太男)이가 돌아와서 함양 수령의 글을 전했다. 아들 도항(道恒)이에게 행선 축원문을 써서 암자의 벽에 붙여놓게 했다.

 

 

注 산중일기<김승찬, 1999> 국역본 4월 19일 [감렬사 부분] 西邊石井甘冽 寺基處在萬仞高山 而平穩向陽 眞明堂之地  서쪽에 석정과 감렬사의 터(×)가 만길이나 높은 곳에 있는데 평온하고 양지바른 곳이어서 참으로 좋은 명당 자리였다. → 서쪽 가장자리(현재 상무주암 부엌)에 석정(石井)이 달고 차가웠다. 절터는 만길 높은 곳에 있으나, 평온하고 남향이라서 정말로 명당 자리이다.

 

가. 윤4/9 西洞古菴(서동고암) = 윤4/10 西臺基(서대기) = 9/2 西菴(서암)

나. 9월 2일 일정/회암당 부도터 앞 전대 확인(무주암-묘적암-서암터-묘적암-앞에 있는 前臺-무주암)

다. 4월 19일 일정/두타암에서 무량굴 허리길 확인(안국사-말을 타고10리-남여를 타고 5리-두타암-무량굴-무주암)

 ① 두타암에서 무량굴로 직접 가는 허리길

 ② 두타암에서 산판길로 상무주암 초입을 잇는 길

 ③ 두타암에서 능선을 넘어 상무주암으로 가는 길

라. 문수암에서 직선거리 370m 좌측 견성암터로 추정됨.(지도에 표기된 견성암터는 와편은 있으나 전답터로 보임)

마. 윤 4월 9일은 무주암에서 신순(信淳) 수좌를 불러 샘을 고칠 것을 상의하고, 윤 4월 10일은 우물 파는 것을 구경함. 

바. 1636년 정수민의 천령지에 ‘천인암(天仁庵)이 무주암 남쪽 5리에 있다. 지금은 없다.(天仁庵 在無住庵南五里 今無)’, 천령지에 무량굴에 대한 기록은 없음. 1686년 정시한의 산중일기에 무주암에서 무량굴이 5리라는 기록으로 미루어, 1636년 이전에 폐사된 천인암(天仁庵)이 1686년 정시한의 무량굴일 수도 있음. 

 

 

※ 注意 제 주관적인 생각으로 오류가 있을 수 있습니다.